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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1화 (11/424)

00011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택시를 타고 잠원동으로 가달라고 했다. 시연이는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머리에서 향긋한 향기가 풍겼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땀 냄새와 튀김 냄새 범벅일 텐데 뭐가 향기로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래도 내가 미친 것 같다.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다. 밤이라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무의식중에 내 품에 더 안겨왔다. 이젠 내 허벅지를 꼬집어야 할 때다. 정신차려라. 마동수.

시연이를 안고 집에 도착하자 시연이 어머님이 무척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시연이 방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예전에는 아기자기한 귀여운 방이었는데 이제는 제법 여자 방 같았다.

“시연이 무겁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술 취한 애를 그렇게 안아들어 오실 수가 있어요? 엄청 힘드셨을 텐데. 호호. 내 정신 봐. 차라도 한 잔 드릴까요?”

시연이 어머님이 예전에도 조금 수다스러운 면이 있으셨지만 오늘따라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12시가 넘은 밤이라 거절하고 나와야 하는데 뭔가 내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듯한 눈빛을 보고 있으니 차마 거절 할 수 없었다.

“네. 그럼 주스라도 한 잔. 밤늦게 죄송합니다.”

“호호호. 괜찮아요. 선생님.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시연이의 집은 여전했다. 처음 시연이집에 과외를 하러왔을 때 으리으리한 내부에 깜짝 놀랐었다. 재형이나 형진이 집도 가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시연이 아버님이 강남과 서초구에 스포츠 센터를 몇 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 선물로 받은 단기 회원권은 동생에게 줬다. 내가 강남까지 와서 운동할 일은 없었고, 동생 꿈이 그런 스포츠 센터를 운영하는 거라 별 고민 없이 줬더니 아주 좋아했었다. 동생 말로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스포츠클럽이라고 했다. 수영장이 어떻고 골프 연습장이 어떻고 직원이 어떻고 설명을 해줬지만 동네 헬스장에서 역기 좀 들다가 두세 명만 들어가도 꽉 차는 손바닥만 한 사우나에서 땀을 빼는 게 전부인 내겐 다른 나라 이야기였다.

그 정도 부잣집이다 보니 왜 나를 과외선생으로 불렀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나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서울대생이나, 명문 학원의 선생님과 비교하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고등학생이 된 시연이와 과외를 하다가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고 그만뒀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려면 확고한 실력의 우위가 있어야 하는데 시연이 정도 수준의 학생에게 고등학교 수학의 원리를 설명하기에는 내가 너무 모자랐었다.

“밤이 늦어 이것밖에 없네요. 좀 드세요.”

오렌지 주스와 귤이라. 참 절묘한 조합이었다. 순간 뭘 먼저 먹을까 고민했다. 원래 이런 분이 아니신데. 내가 2년 동안 지켜본 바로는 음식솜씨(우리 어머니는 경상도 분이시라 음식이 좀 짜고 매운 경향이 있다)도 엄청 좋으시고 살림도 똑 부러지게 잘하시는 분이었다. 간식으로 내오는 음식들만 봐도 시각과 미각에 대한 센스가 뛰어나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오렌지 주스와 귤이다. 그렇다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혹은 정신이 다른데 팔리셨다는 이야기다.

“저. 아버님은 아직 퇴근전이신가 봐요?”

“아 우리 그이 지방 출장 갔다가 내일 올라와요.”

“아 네.”

아니 뭐 내 얼굴만 멀뚱멀뚱 보고 계신데 딱히 할 말도 없고 어색한 시간만 흘렀다.

“선생님. 우리가 몇 년 만에 보는 거죠?”

“글쎄요. 햇수로 4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취직은 하셨어요?”

“네. 입사 3년차 됐습니다.”

“그래요? 명함은 있으세요?”

“명함요? 아 잠시만. 여기 있습니다.”

“(주)동진 마케팅부라. 음. 제가 알기로는 여기 입사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이게 뭐하는 분위기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동생 분과 같이 산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도 같이 살아요?”

“아뇨. 작년에 결혼해서 신도림에 신방을 꾸몄습니다.”

“어머 그래요? 어떻게 만났길래 벌써 결혼을 했어요?”

“동생이 임용에 합격해서 교사가 됐는데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결혼했습니다.”

“잘됐다. 부부 교사네요. 동생이 먼저 장가가서 집에서 뭐라고 안 해요?”

“하하하. 저는 당장 결혼 생각이 없어서 먼저 결혼하라고 했습니다.”

“여자 친구는 있으세요?”

“아뇨. 지금은 없습니다.”

이게 점점 더 뭐하는 분위기인지 모르겠다. 나도 한 눈치 하는 편인데 도저히 어떤 뉘앙스인지 알 수가 없다.

“왜요? 선생님 정도면 학벌도 웬만하고, 키도 크고, 얼굴도 남자답고, 직장도 든든하고 여자들이 줄을 설 것 같은데요.”

중매라도 서시려는 건가? 질문들이 좀 구체적이다.

“글쎄요. 저도 나이가 들다보니 이성을 만날 때 너무 신중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하하 뭐 언젠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래도 여자들이 줄 섰다는 말에 부정은 안하시네요. 호호호”

헉. 가슴 뜨끔한 돌직구가 날아왔다. 편안하게 말씀하셔서 내가 방심을 한 것 같다. 내게 왜 이러시는 걸까? 확실히 연륜이 있다 보니 대화를 주도하기가 쉽지 않다. 의도를 알아야 뭔가 방비를 할 텐데 오리무중이다.

“하하하.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죠. 저 회사에서 여직원들에게 굉장히 인기 없습니다. 인기투표하면 꼴찌 할걸요?”

“아니 왜요? 성격이 안 좋으세요?”

“쿨럭, 쿨럭”

살림만 하시는 분 인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돌직구를 던져 틈을 만들고 그 틈에 비수를 제대로 꽂으셨다. 이럴 땐 백기투항을 해야 한다. 목을 길게 빼고 죽여주십시오! 하며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기침은 나이스 타이밍이다. 그나마 내 표정을 최대한 감추었으니 순진함을 최대한 나타내야 한다.

“당황하셨구나. 제가 짓궂었죠. 죄송해요.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반가워서 그래요.”

순진한 웃음을 가득 머금고, 시연이 어머님을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서 구질구질하게 이야기를 길게 해봤자 내겐 득 될게 하나 없다. 나의 백기투항 모양새가 마음에 드셨는지 흐뭇한 웃음을 지으셨다.

“결혼준비는 좀 하셨어요?”

“네? 열심히 준비한다고 하고는 있지만 서울 집값이 워낙 비싸서요.”

“그래서 어느 정도?”

정말 중매를 설 생각이신가 보다. 나를 좋게 봐주셨다는 이야기니 기분 좋게 생각하고 이럴 땐 그냥 다 까발리는 게 낫다. 괜한 허세를 부리다가 모양만 우습게 된다.

“2억 조금 넘게 모았습니다.”

“직장 생활 2년 조금 넘었다면서 벌써 그렇게 모으셨어요?”

“꼭 그런 것은 아니고. 대학 다닐 때 과외하면서 틈틈이 좀 모으기도 했습니다.”

“예전부터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것은 알았지만 기특하네요. 부모님이 정말 잘 키우신 것 같아요. 아 나도 선생님같이 믿음직한 아들 하나 있었으면 부러울 게 없을 텐데.”

“감사합니다.”

“우리 시연이 어떻게 생각해요?”

“네 시연이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하하하. 이건 농담이구요. 좋은 제자였죠.”

다시 질문이 아슬아슬해졌다.

“에이 그런 것 말구요.”

“시연이 어머님. 오늘 제가 시연이를 데리고 와서 뭔가 오해가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때 과외 그만두고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과모임에서 정말 우연히 만났습니다. 하하하. 어머님 상상력이 너무 과하셨던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빙글빙글 돌려가며 말씀을 하신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어머님 입장에서도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다른 것 다 떠나서 10살이나 나이가 차이나니 걱정이 크셨을 것 같다. 이럴 땐 정말 표정 관리를 잘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표정이 굳어지면 집안 차이로 헤어짐을 요구받는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여유를 가지고 아까와 같은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씀드려야 서로 간에 오해가 없다.

“어머 선생님! 그러려고 물어 본 건 아닌데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나보다. 호호호.”

이건 정말 예상 못한 반응이다. 아!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그냥 멍하니 어머님의 입술만 쳐다봤다.

“전 선생님만 좋다면 우리 시연이와 결혼시키고 싶어요. 다만 우리 아이가 나이가 어려서 대학도 졸업하고 직장생활도 1~2년은 한 다음에 보내고 싶은데, 그럼 선생님 나이가 최소 35살이니...”

헉. 제대로 된 폭탄투하다. 지금까지 난 무협지에서처럼 어머님과 화술을 겨뤘다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그냥 순수하게 내가 사윗감으로 어떤지 궁금하셨거나, 내가 감히 바라 볼 수 없을 정도의 까마득한 고수던가 둘 중 하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에 가깝지만 난 후자였다고 자위하고 싶다. 직장인이 되더니 세상을 너무 계산적으로만 바라봤나보다. 누군가의 순수한 호기심을 돌직구와 날카로운 비수로 생각하다니 얼굴이 다 화끈하다.

“저기. 어머님.”

“어머. 어쩜 좋아. 예전에 우리 시연이 과외할 땐 몰랐는데, 어머님 소리 너무 듣기 좋은데요. 내 심장이 다 콩닥거리네. 벌써 우리 사위처럼 느껴져요. 선생님. 아. 아니지. 마 서방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 정말 갈수록 태산이다. 정말 너무너무 순수하셔서 약간 푼수 끼가 있으신 걸 꺼다. 만약 이런 행동을 의도하셨다면 장삼봉이나 달마가 와도 대적불가다. 그나저나 마 서방이라니.

“흠흠. 저기 시연이 어머님. 정말 시연이 하고는 아무사이 아닌데요? 몇 년 만에 오늘 시연이 처음 봤는데 갑자기 결혼이라니... 농담하신거죠?”

“혹시요. 선생님. 시연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던가요?”

“무슨 말요? 처음에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고, 집에 가려고 하다가 자고 있는 시연이를 발견한 게 전부인걸요?”

“어머. 어머. 웬일이니. 이 기집애 오늘 분명 고백한다고 했는데. 어휴 못 살아. 호호호. 선생님.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자세한 이야기는 시연이에게 다시 들으세요. 그리고 오늘 저와 나눈 이야기는 비밀이에요. 비밀.”

나는 그렇게 쫓겨나듯 밖으로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시연이의 외모에 혹 한 것은 사실이다. 길게 뻗은 다리와 적당히 볼륨감 있는 바스트(나는 가슴 큰 여자는 둔해 보여서 싫고, 가슴이 절벽인 여자는 남자 같아서 싫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역시나 균형미라고 할 수 있다.), 커다란 눈망울과 시원한 입술 사이로 살짝 보이는 가지런한 백색의 치아. 하지만 이건 아니다.

나이차가 너무 심하다. 동생과 제수씨에게 환영받지 못할게 뻔하다. 사랑하면 무슨 상관이겠냐만은 난 지금 시연이와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이상형에 가까운 외모에 혹 했을 뿐이다. 외모만 따지면 시연이만큼 예쁜 여자와 잠깐 사귀어 본적도 있다. 재형이와 자주가는 압구정동의 W bar에서 일하는 바텐더도 그녀 특유의 섹시함과 서글서글한 성격까지 생각한다면 아직은 풋내기에 불과한 시연이 이상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알기로 4년 뒤면 아버지께서 회사를 퇴직하신다. 부모님도 내가 최소한 그전에 결혼하기를 원하신다. 솔직히 10년 차이에서 오는 세대 차이를 극복할 자신도 없다. 고백하건데 요즘 유행하는 최신 가요는 하나도 모른다. 들어보면 ‘아 그거’라고 할 수는 있지만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하나도 없다. 그밖에도 나이에서 오는 수많은 갭들이 존재할 것이다.

아무리 과외라고 하지만 선생님과 제자 사이로 시작했다는 사실 또한 부담이 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내 기준에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나는 과외를 하면서도 공부만 가르치지 않았다. 공부할 때 마음가짐, 세상을 바르게 보는 방식, 사람과의 관계 형성 방법 심지어 사랑에 대한 나의 지론까지 정말 선생님이라는 생각으로 아이들과 함께 했다. 내가 과외했던 학생들은 지금도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연락을 하고 지낸다. 괜한 자부심이 생기기도 했다.

학교 사람들과의 관계도 부담스럽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선배와 어린 후배가 사귀면 거의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어린 후배에게 관심을 보이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따돌리는 경향이 생겼다. 사귀다 헤어지면 상처받는 쪽은 대부분 학교생활하고 있는 후배들이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런 선배들을 따돌리는데 무척 앞장섰었는데, 이제 와서 내가 그런 입장이 되면 결국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사람이 된다. 후배들에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된다. 남자들에게는 이게 정말 큰 타격이 된다.

시작도 안했는데 이렇게 밀어내려고 자기 합리화 하는 내 모습이 왠지 불안하다.

============================ 작품 후기 ============================

죄송합니다. 로또는 아직 안 나왔습니다.

요즘 글을 쓴다고 표준어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장면, 짜장면'만 바뀐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단어가 작년말에 개정되었더군요. 관심이 없다보니 이제야 알았습니다. '짜장면'의 경우는 저도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우리가 잘몰라서 틀리게 사용하는 바람에 개정된 단어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TV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얼마전에 끝난 '차칸남자'도 사람들의 항의 덕분에 '착한남자'로 바뀌었지만, 만약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면 10년 뒤에는 '차칸'이라는 단어가 표준어로 개정되는 일이 일어날수도 있었겠죠?

지금까지 새벽이라 갑자기 센치해진 작가의 넋두리였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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