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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4화 (14/424)

00014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동수야!”

“드르렁 드르렁”

“동수야! 이 녀석아. 그만 자고 일어나봐.”

“음. 졸려. 잠 좀 자자.”

“옛끼 이놈아. 그만 자고 일어나지 못할까!"

나는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갑작스런 불호령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눈 앞에는 낯선 노인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부리부리하고 새하얀 수염을 가슴까지 기른 특이한 모습의 노인었다.

“누. 누구세요? 누구신데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셨어요?”

“이런 고얀 놈. 내가 누군지 몰라?”

그 말에 나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노인을 다시 쳐다봤다.

“서.. 설마. 할아버지? 말.. 말도 안돼.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데.”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빚보증에 대한 충격을 받으시고 시름시름 앓으시다 돌아가셨다. 7살 때의 일이어서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은 기억에 없다. 그래도 명절이면 매년 보는 영정 사진 덕분에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진과 이미지가 약간 달라 못 알아봤지만 자세히 보니 분명 영정사진에서 봤던 우리 할아버지였다. 으엑. 이게 무슨 일이지? 우리 할아버지 분명 돌아가셨는데. 아무래도 이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자, 오랜만에 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반갑게 느껴졌다.

“껄껄껄. 그래도 우리 장손이 할아비 얼굴은 안 잊었구나! 그 동안 잘 지냈느냐?”

“그럼요. 할아버지.”

꿈이 분명하겠지만 깨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내 할아버지 아닌가? 천천히 할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니 어릴 적 무척이나 나를 귀여워하셨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내가 꼭 그때 그 시절의 꼬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 보게. 할아비를 보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네.”

“놀랄게 뭐있어요? 꿈이든 영혼이든 우리 할아버지신데 설마 제게 해코지 하겠어요?”

“그렇지? 역시 우리 장손이네. 듬직한 게 이 할아비 젊을 때와 똑같아. 허허허.”

“그럼요. 누구 손잔데요?”

갑자기 할아버지가 그리워졌다. 살아계셨으면 나와 정말 잘 지냈을 것 같다. 그래서 괜히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나이가 서른이라도 내게는 할아버지였다.

“그나저나 동수야!”

“네 할아버지.”

“내가 아범과 어멈에게는 정말 미안한 게 많아. 그 망할 놈의 친구 때문에 생때같은 내 새끼들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하늘에 있어도 맘이 편치 않더구나.”

“에이. 괜찮아요. 할아버지. 고생은 좀 했지만 동생과 저는 오히려 돈에 소중함도 알게 됐고, 보시는 것처럼 이렇게 번듯하게 잘 자랐잖아요. 부모님도 노후 걱정 전혀 할 필요 없을 만큼 잘 준비하셨어요. 전화위복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할아버지도 그만 마음 편하게 생각하세요.”

“허허. 우리 장손이 할아비 위로를 다 할 줄 아는구나. 아범, 어멈 그리고 너희 형제들이 착하게 잘 커줬고 꼬박꼬박 제사상을 차려준 덕분에 내가 하늘에서 목에 힘을 주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단다.”

“그게 정말이세요? 어머니가 항상 할아버지를 그리워 하면서 꼬박꼬박 명절과 제사를 챙겼는데, 할아버지께 도움이 다행이네요.”

나이가 30살이 되었는데 할아버지께 애교를 부리는 내 모습이 웃겼다. 그런데 저절로 그렇게 된다. 내가 아무리 나이 들어도 나는 그냥 귀여운 손자 아니겠는가?

“그래 다행이지. 다행이고말고. 그래서 말이다. 이리 가까이 와봐라.”

할아버지는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시더니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흠흠. 잘 들어라. 딱 한 번만 말하마. 4, 14, 24, 34, 4X, 44. 잘 들었지? 나는 이만 간다. 앞으로는 오기 힘들 것이야.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명절에는 꼬박꼬박 내려가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할아버지는 내 귀에 대고 갑자기 몇 가지 숫자를 말씀하시더니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를 찾다가 벌떡 일어났다.

“휴. 꿈이었구나. 아쉽네. 할아버지 모습을 더 보고 싶었는데. 그나저나 알려주신 숫자는 뭐지? 4자가 저렇게 많이 들어간 것을 보니 좋은 뜻은 아닐 것 같고. 가족 중에 누가 아프기라도 하는 걸까? 아, 괜히 이상한 꿈을 꿔가지고 기분만 이상해졌네.”

갑자기 사라지신 할아버지를 찾아보려고 열심히 불러봤지만 역시나 꿈이었다. 하필이면 불러주신 숫자에 ‘4’자가 왜 그렇게 많이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나는 4라는 숫자에 대해 트라우마 비슷한 것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이던 어느날 모르는 번호로 삐삐(휴대폰이 많이 보급되었던 시기였지만 이용비나 기기값 차이가 많이 나서 그냥 삐삐를 사용했었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불편한 일이 없었다.)에 호출이 왔다. 공중전화박스로 가서 메시지를 듣기 위해 전화카드를 집어넣었는데 하필 요금이 4440원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외삼촌의 목소리.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다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끝났고 반년 넘게 힘겹게 회복훈련을 하신 덕분에 완전히 회복하시고 직장으로 복귀하셨다. 하지만 수술 당시 의사들의 부정적인 소견 때문에 나는 정말 당장이라도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그때의 트라우마를 아직도 극복하지 못해서 지금도 숫자 ‘4’가 보이면 항상 조심했다.

“4, 14, 24, 34, 44 그리고 하나는 잘 못 들었는데. 사십 몇이었지? 그런데 이걸로 뭘 하라고 알려주신 걸까? 왜 불길하게 ‘4’자가 이렇게 많이 들어갔어? 혹시 누가 또 아픈 건가?”

뭔가 찝찝한 마음에 회사에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보이자 이 대리와 최 주임이 아주 쌍으로 나를 갈구기 시작했다. 저 놈들은 시도 때도 없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너희들도 참 대단하다. 지금 심정으로는 당장이라도 둘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와 푸닥거리라도 하고 싶지만 지금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플지도 몰라서 내가 참는다.’

지금이라도 사고를 치고 회사를 그만두면 속이야 후련하겠지만 정말로 누군가 아프다면 돈이 들 테고 지금 당장 내가 가장 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그냥 꾸준히 회사를 다니는 것밖에는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무기력함에 한숨이 나왔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밥이고 뭐고 필요 없이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곳을 찾았다. 그리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봤다. 지금 당장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어디 아픈 곳 없냐고 물을 수도 없지 않은가? 우선은 동생에게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Rrrr

“어 형. 무슨 일이야?”

“그냥 전화해봤어. 별일 없지?”

“별일은 무슨 어제 봐 놓고는”

“아 그렇지. 하하하. 제수씨는 병원 잘 다니고 있어?”

“그럼 잘 다니고 있지. 지난주에도 다녀왔는데 산모와 태아 모두 건강하다더라.”

“그래? 그렇구나. 참 부모님 건강검진을 언제 했었지?”

동생은 같이 등산도 다녀왔으니 별 탈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제수씨와 뱃속에 있는 조카도 건강한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역시나 부모님이 걱정이 되었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 건강검진이었다. 동생에게 전화하듯 어디 편찮으신 곳 없냐고 물어봤다가 괜히 걱정만 끼쳐드릴지 모르니 건강검진 핑계로 부모님의 건강을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 같았다.

“건강검진? 글쎄? 2년 정도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럼 이번에 건강검진 받으러 서울 한번 올라오시라고 해야겠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네. 그럼 형이 좀 알아보고 전화 줘. 내가 반 낼게.”

짠돌이 동생도 부모님 건강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기특한 동생이다.

“됐어. 이번에는 내가 알아서 할게. 넌 앞으로 세상에 나올 나의 조카나 신경 써라. 형이 이번에 보너스 받은 게 있으니깐 이번에는 내가 쏜다.”

“얼. 그래? 알았어.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 그럼 들어가.”

“오냐”

동생과의 대화를 끝내고 바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윤석이라는 고향 친구다. 요즘은 그 녀석이 바빠서 거의 얼굴을 못 보지만 20년을 알고지낸 지긋지긋한 친구였다.

Rrrr

“똥수야. 오랜만이다. 이 형님이 그리웠구나? 전화를 다하고?”

“하하하. 썩. 잘 지내고 있냐? 암울한 인턴 생활은 잘 끝냈고?”

“그럼. 형님도 이제 어엿한 레지 1년차다. 아직은 정신없지만 그래도 조만간 월차는 낼 수 있으니 언제 만나서 술이나 한잔 해야지?”

“당연하지. 너 본지 1년은 된 것 같다. 제발 얼굴 좀 보여줘라.”

“오냐오냐. 나도 이제 월급도 받으니 형님이 시원하게 쏜다.”

“그래그래. 제발 좀 얻어먹자. 그건 그렇고 나 건강검진 때문에 전화했다.”

“왜 누가 아프냐?”

“아니 그건 아니고 부모님 나이도 있고 해서, 가격 같은 것 좀 알아봐 주라.”

“오. 효자 났어. 에잇. 이 소식이 우리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나 구박받는데.”

같은 동네에 사시다보니 어머니끼리는 꽤 친분이 있다. 소식이 안 들어갈 리가 없다.

“너는 어엿한 펠로우 달고 그 때 제대로 해드려. 그때쯤이면 인터들과 레지들이 ‘선생님 선생님’ 그럴 거 아냐? 부모님이 그걸 보시면 얼마나 감격하시겠냐?”

“흐흐흐. 그렇겠지?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자세히 알아보고 알려줄게.”

30분 정도 있다가 연락이 왔다. 전 검사 다 받으려면 100만 원 정도 든다고 했다. 예약은 다다음 주 정도에 가능하고, 아직 레지던트라 가격할인은 못 받지만 그날은 반차라도 내서 직접 우리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겠다고 했다. 고마운 녀석.

우리 부모님만 하려다 보니 제수씨 생각이 났다. 어쨌든 제수씨 귀에 들어가게 될 거고 그러면 제수씨도 부모님 생각을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안 그래도 제수씨 가족들과 좀 더 친해져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점수 좀 따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인간관계라는 것이 그렇다. 사소한 일에 상처받고, 사소한 일에 감동 받는다. 내가 제수씨 부모님을 모른 척한다고 해도 아무도 나를 비난 할 수 없다. 제수씨도 내게 섭섭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시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왔고 그럼 같이 신경을 써야 하는데 옆에서 건강검진 받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부모님 생각이 난다. 그러면 내 동생에게 괜히 서운해 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평상시의 제수씨라면 섭섭해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임신 중이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다. 작은 돈은 아니지만 그거 아끼려고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건강검진 때문에 혹시라도 동생부부가 싸우면 동생은 임신한 제수씨의 눈치를 봐야 한다. 임신한 여인은 왕이다. 결국은 제수씨 부모님도 건강검진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내가 조금 무리하면 전혀 얼굴 붉힐 일 없이 모든 일이 좋게 끝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당연한 것처럼 눈앞에 상황이 그려지니 내 삶도 고달프긴 하다.

어쨌든 2주후에 네 분 모두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친구에게 부탁했다. 동생에게 다시 전화해서 제수씨 부모님까지 같이 예약했고 꼭 검사전날 밤부터는 아무것도 못 드시게 하라고 이야기 했다. 이야기를 들은 동생은 어떻게 장인어른, 장모님까지 예약할 생각을 다했냐면서 깜짝 놀랐다. 그래서 평소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싫어하는 동생에게 내가 예측한 상황을 차근차근 알려줬다.

“와 형은 역시 대단해. 어떻게 생각이 그렇게 넘어 가냐?”

“왜 내 말이 틀릴 것 같아?”

“아니 내가 생각해봐도 형 말처럼 됐을 거야. 우리 여보야가 요즘 약간 까칠해졌어.”

“넌 임마. 형 잘 둬서 가정생활 편안한 줄 알아.”

“응. 형. 고마워.”

동생에게 굳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는 동생에게도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하라는 충고와 동시에, 이런 나의 현명함을 자랑 할 사람이 동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사람이다.

“야. 그리고 제수씨한테는 그냥 내가 예약했다는 말만 해. 제수씨가 들으면 오히려 내가 계산적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어.”

“에이. 우리 여보야 그런 사람 아냐.”

“알아 나도. 그런데 이 이야기를 네 입으로 옮길거니까 걱정인거지. 형 말대로 해.”

“응. 고마워 형”

내가 이렇게 당부하지 않으면 동생은 제수씨에게 미주알고주알 전부 이야기 할 것이다. 어머니께 계모 아니냐고 뻔뻔하게 물어보던 놈이 무슨 짓을 못 할까?

============================ 작품 후기 ============================

드디어 로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아직 미숙해서 분량조절을 실패하다 보니 이야기를 끄는 느낌을 받는 분이 계신 것 같습니다. 빨리빨리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제사나 차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몇 가지 단점만 보완하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미풍양속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금만 제도를 간편화 하고 음식에 대한 인식변화(정형화된 음식보다는 정말 우리 조부모님이, 우리 부모님이 좋아하셨던 음식을 올린다면 여성분들도 크게 고달프지 않는 명절이 될 것 같습니다)만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말이죠.

결국은 가족이 함께 모여 얼굴보고 서로의 안부를 나누는 좋은 기회 아니겠습니까? 정말 조상님 혼령이 내려온다고 생각하든, 우리를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해준 조상님들의 고마움을 가족들과 함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족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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