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Rrrr
“응 나야 엄마”
나이 30살 먹고 아직도 엄마라고 부르냐며 뭐라고 타박하는 소리가 저기 멀리서 들린다. 어디서 들리느냐고? 어디긴? 이글을 읽고 있는 바로 너! 하하하. 내가 갑자기 ‘어머니’라고 부르면 우리 어머니 놀라서 서울로 올라오실지 모른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어머니는 ‘엄마’다. 무뚝뚝하신 우리 아버지와 헛소리나 날리는 내 동생사이에서 고생하시는 우리 어머니를 위해 나라도 가끔 애교를 떨어야 한다. 그렇다고 마마보이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종종 전화해서 어머니와 수다를 떨지만 연애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가끔 보면 여자 친구와 싸웠다고 부모님께 미주알고주알 다 이야기하는 멍청한 놈들이 있는데, 정말 멍청한 짓이다.
부모는 어쨌든 자식편이다. 자기 자식이 애인과 싸웠다고 와서 징징거리면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은 굉장히 나빠진다. 그렇게 나쁜 말은 나쁜 말대로 해놓고 나중에 결혼 반대한다고 죽네 사네 하는 모습을 보면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절대 사랑하는 사람의 뒷담화는 부모님께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만 지키면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한다고 해서 마마보이가 될 일은 없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어머니에 대한 진심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는 어머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친근한 존재는 엄마다.
“그래. 우리 아들. 밥은 잘 먹고 다니고 있어?”
“그럼. 요즘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나올 정도야.”
“어이구. 그러면 안 되지. 그래도 배는 안 나오게 조심해.”
“응 안 그래도 상수(내 동생 이름이다. 마상수)랑 매주 등산 다녀.”
어머니와 전화하면 귀찮아하며 짧게 대답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안타깝다. 귀찮더라도 조금만 조근조근 대화를 나누면 어머니는 정말 행복해 하신다. 회사생활하다 바쁘면 밥을 거를 때도 있지만 그냥 조금 과장되게 ‘나 배 나올 만큼 많이 먹어’라고 안심시켜드리면 나도 편하고 어머니도 편하다. 사실 내 말에 자신은 없다. 결국은 거짓말을 하는 셈이니.
“그래 잘하고 있네. 기특하네. 참 아버지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건강검진 예약했다며?”
어머니는 부모님께 전할 말이 있으면 항상 아버지에게 전화하도록 하셨다. 내가 아무리 화술이 좋아도 우리 아버지는 감당이 안 된다. 무뚝뚝함의 극치를 보여주신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의 대화가 점점 줄어들었다. 옆에서 보기에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부모님께 보고할 일이 있으면 아버지께 전화를 하도록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께 이야기를 들으신다.
“응. 조금 있으면 할아버지, 할머니 되시는데. 오래 오래 손주 보시고 싶으면 미리부터 건강 챙겨야죠.”
“그래도 그렇지 무슨 돈이 있어 사돈네까지 예약을 했어?”
“아 그거? 걱정 마. 얼마 전에 성과급 탔어.”
“그럴 돈 있으면 장가갈 준비나 제대로 하지.”
“장가는 무슨. 여자 친구도 없는데.”
윽 내가 실수를 했다. 내 무덤을 내가 팠다.
“그럼 아들. 선 한 번 볼래? 안 그래도 누가 서울에 사는 참한 간호사 아가씨 한 명 안다고 소개시켜 준다고 그랬는데.”
역시나 이렇게 나오신다. 이럴 땐 방법이 없다. 잠깐 불효자가 되더라도 36계 줄행랑이다.
“무슨 선은 선이야. 엄마 나 일해야 해. 나중에 다시 통화해요. 끊어요.”
“원 녀석도. 선 이야기만 나오면 저렇게 바쁜 척을 해. 알았어. 끊는다.”
Rrrr
“엄마! 나 선 안 봐요. 자꾸 그러면 나 화내요?”
“선생님! 저 시연인데요.”
이 녀석은 전화할 때마다 타이밍이 예술이다. 나이가 서른이 되니 집에서도 조금씩 결혼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통은 바쁘다고 하면 포기하시는데 오늘은 웬일로 한 번 더 조르시는구나 생각하며 보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더니 시연이었다.
“그래. 시연이구나. 선생님이 잠시 착각을 했다. 미안해.”
“괜찮아요. 그런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선생님. 선보세요?”
“그러게. 선생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집에서 자꾸 재촉하시네.”
“선생님도 결혼이 급하세요?”
“글쎄.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밥 사달라고요. 저는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아무 때나 괜찮아요.”
이렇게 나오면 거절할 수 없다.
“그래 사줘야지 밥. 평일은 안 될 것 같고.”
“왜요? 제가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에서 기다리면 안 되나요?”
당연히 안 된다.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5명의 하이에나가 있는 회사 앞에서, 1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앳된 시연이와 만나는 모습을 보인다면 꼬인 회사 생활 더 꼬일지도 모른다. 괜히 회사에서 원조교제한다고 소문이라 났다간 팀이 아니라 부서에서도 따돌림을 당할지 모른다.
“요즘 선생님이 중국어 학원을 다니거든. 그래서 평일은 힘들 것 같아.”
“우와. 중국어도 하세요? 대단해요 선생님”
중국어 학원이야 화요일과 목요일만 가지만 어쨌든 회사 앞에서 만나면 절대 안 된다.
“그냥 아직은 배우는 중이야. 어려워. 그럼 토요일 괜찮을까?”
“네 저는 좋아요”
“뭐 따로 먹고 싶은 것 있어?”
“음. 아무거나 괜찮아요. 직장인들은 맛집도 많이 안다는데 맛있으면 다 좋아요.”
“그래. 그럼 선생님이 알아서 찾아볼게. 시간과 장소는 나중에 문자로 알려줄게.”
“네 선생님. 그럼 토요일에 봬요.”
토요일 저녁. 나는 시연이와 강남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강남은 올 일이 거의 없지만 만남은 보통 여성이 편한 곳으로 정하는 게 신사(?)의 매너다. 딱히 뭐 먹을지 고민하기도 귀찮아서 스시 뷔페로 요명한 ‘마이스스시’라는 곳을 예약했다. 귀찮다고 표현하기에는 내가 이곳을 너무 좋아한다. 물론 강남점이 아니라 광화문점이지만 사람들의 평가로는 강남점이 더 좋다고 해서 궁금했었다.
시티문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멀리서 걸어오는 시연이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무릎위로 살짝 올라간 팔랑이는 까만색 치마에 하얀색 블라우스 위로 브라운 톤의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상의에 맞춰 5cm정도 되어 보이는 갈색 구두를 신어, 단화를 신었던 지난번 보다 훨씬 늘씬해 보였다. 어린애 같은 원피스를 입고 올 줄 알았는데 깔끔하고 세련된 스타일이었다. 확실히 깨달았다. 시연이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선생님”
시연이도 나를 발견했는지 반갑게 웃으며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185cm의 남자와 구두를 신어 175cm가 된 여자가 만났으니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지나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연이를 데리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예약한 가게를 향했다.
부모님과 호텔뷔페는 자주 갔어도 스시뷔페는 처음이었는지 무척 신기해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접시를 들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입에는 맞아?”
“네. 선생님. 너무 맛있어요.”
그냥 예의상 물어본 말이다. 안 물어봐도 안다. 깨작깨작도 아니고 허겁지겁도 아니고 어쩜 저렇게 복스럽게 맛있게 먹는지 정말 보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러왔다. 특히 음식을 입속으로 집어넣을 때마다 휘어지는 반달 같은 눈매를 쳐다보다 무의식적으로 시연이의 뺨을 어루만질 뻔했다. 언제 이렇게 위험한 여인으로 변했는지 놀라울 뿐이다.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그러다 우연히 시연이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던 중 나도 모르게 꿈에서 할아버지를 봤다는 말이 튀어 나왔다.
“우와. 정말요?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나오셨어요?”
“응. 나도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는데, 천천히 살펴보니 할아버지시더라고.”
“완전 신기하다. 그래서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셨어요?”
“아니 이야기는 못 나누고 그냥 나를 보며 빙긋 웃으시고는 가셨어.”
할아버지와 나누었던 이야기는 우리 집안의 가족사다. 감출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옮길 필요도 없어서 그냥 나타났다 사라지신 이야기만 했다.
“그렇구나. 아쉬우셨죠? 저 같으면 우리 할아버지 찾아내라고 땡강 부렸을 것 같아요.”
생각하는 게 참 예쁘다. 아쉬울 것 같다며 오히려 위로해주는 모습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오늘 나와 대화를 하는 동안에 시연이는 한 번도 딴 짓을 하지 않았다. 오롯이 나만 바라보며, 내 말 하나하나에 열성적으로 반응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도 뜨거워서 계속 마주보고 있으면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하하하. 나도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면서 찾았어.”
“선생님이요? 히힛. 상상해버렸어요. 너무 귀여웠을 것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 혹시 복권이라도 사셨어요?”
“엥? 왜 갑자기 복권?”
“왜 그러잖아요. 복권 당첨된 분들 보면 ‘꿈에서 조상님이 나타났어요.’ 라고 하던데. 혹시 모르잖아요. 복권이라도 사보세요. 혹시 당첨 될 지 누가 알아요?”
역시 아직 애는 애다. 여기서 갑자기 엉뚱한 복권이야기를 하다니.
‘아니지 복권? 가만 있어봐. 복권이라. 알려주신 숫자가 6개였으니 결국 로또를 뜻한다는 이야긴데. 그러고 보니 숫자 하나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는데. 별로 걱정할 일은 아니구나. 하나하나 찍어도 최대 9가지 경우의 수일 뿐이다. 정말 로또인건가?’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능성 없는 이야기지만 사놓는다고 부담되는 것도 아니고.
“어라. 선생님 진짜 복권 살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죠? 저 아니었으면 복권 살 생각도 못했으니 당첨되면 반띵! 반은 너무 심한가? 그럼 1/10은 주셔야 해요!”
“하하하. 그래 정말 당첨만 되면 반띵인들 못 하겠냐?”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 정말 당첨되면 전부 시연이 덕분 아닌가?
“에이. 저 그렇게 욕심 없어요. 당첨 되면 1/10만 주세요. 헤헤”
“그래 알았다. 내가 꼬옥 준다.”
“뭐 아까우시면 저랑 결혼하셔도 돼요. 그럼 제 돈은 선생님 돈이니깐 다 가지세요.”
“이 녀석아 돈이 아까워서 결혼을 해? 생각하는 것 하고는.”
“아뇨.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정말 결혼이라도 상상을 했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아무튼 당첨되면 1/10? 돈은 꼭 줄 테니 기대해. 하하하. 이만 일어나자 슬슬 집에 가야지.”
나는 꾸물꾸물 거리는 시연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집근처에 있는 복권가게에 들러 할아버지께서 알려주신 번호로 로또를 구입해 집으로 들어왔다.
◆ 시연이의 방
시연이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방에 들어가 컴퓨터 전원부터 켰다. 컴퓨터가 켜지자 재빨리 네이트온에 로그인했다. 그리고는 누군가를 하나씩 초대했다.
시연 : 방금 만나고 돌아왔어요.
현우 : 뭐 벌써? 뭐 먹었어?
시연 : 마이스스시라는 곳에 갔어요.
태균 : 오 꽤 좋은 곳에 갔네. 어땠어?
시연 : 좋았어요. 음식도 너무너무 맛있었어요.
정수 : 뭔들 안 좋았겠어? 님과 함께 했는데.
시연 : 히히히. 그건 그래요.
형진 : 우와 시연이 은근히 뻔뻔하구나?
시연 : 선생님 일이라면, 뻔뻔해도 괜찮아요.
재형 : 우웩. 그렇게 나오면 더 이상 안 도와준다.
시연 : 우에엥. 재형 오빠님 잘못했어요. ㅠㅜ
현우 : 넌 왜 애를 울리고 그래? 헬스장 회원권까지 받아 놓고 이제 와서 입 닦겠다고?
재형 : 헬스장이 아니라 스포츠클럽이다. 촌놈아.
현우 : 뭐라고 이 자식아? 촌놈? 헬스장이나 스포츠클럽이나 그게 그거지?
재형 : 뭐가 그게 그거야? 이 자식 아주 웃긴 놈이네. 미스 월드하고 마늘 아가씨도 그게 그거라고 우길 놈이야 넌.
태균, 정수, 형진, 시연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우 : 야 똥수 들어왔다. 말 거는데 어쩌지?
재형 : 씹어.
◆ 동수네 집
“아니 이것들이 네이트온에 들어와 있으면서 하나같이 대답을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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