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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6화 (16/424)

00016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건강검진을 예약한지도 벌써 2주가 지났다. 오늘은 부모님이 정기검진을 받는 날이다. 어제 서울로 올라 오셔서 우리 집에서 주무실 줄 알았는데 동생 집으로 가셨다. 나는 낡은 빌라 4층에 살고 있다. 엘리베이터? 없다. 집은 넓지만 워낙 낡은 건물이라서 조금 꼬질꼬질하게 보이긴 한다. 원래 동생과 같이 살던 집이라 쓸데없이 방이 세 개나 된다. 성격은 한 꼼꼼하지만 그렇다고 벽지 새로 하고, 예쁜 커튼 달고, 여기저기를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샤방샤방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어서 깔끔하게 정리해도 너저분해 보이는 게 이 집의 함정이다.

이 집은 처음에 동생 오천, 나 오천 이렇게 전세금 일억을 주고 들어왔었다. 숙명여대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최고(?)의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다. 사실 그런 사심은 전혀 없고 동생 학교가 근처라 여기로 들어왔다. 정말이다! 동생이 결혼하면서 전세금을 빼가는 바람에 부모님이 대신 오천을 지원해주셨다. 괜찮다고 했는데 우리들이 너무 자립심이 강해 자식들을 보듬는 재미가 없다고 하소연을 하셔서 그냥 냉큼 받았다. 동생이 나간 뒤에도 생각 없이 살긴 했는데 혼자 살기에는 쓸데없이 넓은 경향이 있다. 부모님이 오시더라도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깔끔하고 생활하기 편한 오피스텔이라도 알아봐야겠다.

부모님과 병원으로 가기위해 동생 집으로 향했다. 부모님은 내 차로, 제수씨 부모님은 동생 차로 이동해서 병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부모님은 여전히 정정하셨다. 다만 간간히 아버지의 흰머리를 보니 괜스레 가슴이 아팠다. 내가 아무리 잘한다고 잘난 척 해도 손자를 안겨드리기는커녕 결혼도 안했으니 부모님 마음이 편치는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동생이 먼저 결혼한 것에 대해, 주변에서 생각보다 말들이 많아 은근히 마음고생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 죄송했었다. 역시나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었다.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남 이야기로 상대방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내가 우리 가족의 평화를 위해 이렇게 불철주야 노력을 하는 것이다.

“아버님, 어머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어머. 이게 누구야 윤석이 아니니? 아이구야. 의사가운이 잘 어울리는 것이 이제 제법 의사선생님 티가 나는구나?”

병원에 도착하자 친구인 윤석이가 약속대로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운 녀석이다. 그래서 나도 부모님 편으로 윤석이 부모님에게 전해드릴 홍삼절편세트를 구입해뒀다. 많이 비싼 것은 아니지만 지금 받는 윤석이의 호의를 녀석에게 직접 표하는 것보다 이렇게 우회하는 방법이 은근하지만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다. 우리 부모님이 건강검진 받으러 올라오신다는 이야기에 서운해 하실 윤석이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은 달래드릴 수도 있고 일석이조다.

이렇게 작은 선물로 양가의 부모님은 서로에게 마음 편하게 생색을 낼 수 있다. 윤석이 부모님은 의사아들 둔 덕분에 우리 부모님이 편안하게 건강검진을 받았다고 자랑 할 수 있고, 우리 부모님은 친구 부모님의 건강까지 챙기는 사려 깊은 사람이 우리 아들이라며 자랑 할 수 있게 된다. 어머님들의 수다는 그렇게 집에서 동네로 퍼져나가며 주변 아주머니들의 부러움을 받게 될 것이다. 난 역시 천재다. 음하하하하.

“아이고 사돈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계셨죠?”

“어이쿠 사돈 오셨습니까. 저야 덕분에 잘 지냈죠. 그래 장사는 잘되시죠?”

“하하. 그냥 먹고 살만큼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아는 분께 구하기 힘든 아주 좋은 고기를 얻어왔습니다. 양념에 잘 재었으니 가실 때 가져가셔서 맛 좀 보세요.”

“뭘 또 그렇게까지.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사위 형님도 오셨네. 바쁘실 텐데 우리 부부까지 다 신경써주시고 고마워요.”

사돈 형님이라는 말은 없다. 사돈어른 입장에선 나를 가리키는 명칭이 애매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도 계시니 나를 사돈이라고 부르기도 이상하다. 내가 동생의 아랫사람이면 그냥 편하게 사돈총각이라고 하면 되지만 사위의 형이다 보니 그렇게 부르기도 이상하고, 내가 결혼해서 자식이 있었으면 누구 아빠라고 돌려서 표현해도 되는데 그것도 아니다. 그래서 탄생한 말이 사위 형님인데 뭐 호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마음이다.

“아니 사돈. 젊은 놈한테 무슨 존댓말을 쓰십니까? 그냥 편하게 ‘동수야’하고 부르세요. 이제 다 같은 한 가족 아닙니까.”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왔다. 무뚝뚝한 아버지께서 웬일로 다 나서셨다. 나야 그렇게 불러주면 훨씬 편하다. 이럴 땐 내가 재빨리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야 한다. 아주 간절히 바란다는 표정을 눈에 가득 담고.

“네. 저희 아버지 말씀처럼 하세요. 그냥 편하게 ‘동수야’라고 불러주시면 저야 정말 좋죠. 이참에 저도 아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제 동생의 아버님이면 당연히 제게도 아버님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나도 우연히 친구 와이프의 언니가 친구 부모님께 ‘아버님, 어머님’ 하면서 부르는 모습을 봤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정말 보기 좋았었다. 친구 부모님도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는데 제수씨 부모님이라고 해서 그렇게 못 부를 이유는 없지 않을까?

“아휴. 알았네. 알았어. 동수야 이렇게 부르면 되나? 허허허”

처음에는 주저하셨지만 나의 간절한 눈빛을 보시고는 이내 체념하시고 ‘동수야’라고 불러주셨다.

“하하하. 앞으로도 꼭 그렇게 불러주십시오. 아버님. 이보게, 친구 그렇게 멀뚱멀뚱 서서 뭐하나? 어서 길을 안내하지 않고.”

“응? 아아. 그래. 다들 이쪽으로 가시죠.”

나의 넉살을 입을 벌린 채 지켜보던 윤석이는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입을 다물고 우리를 안내했다.

“아버님, 어머님 저랑 함께 가시죠. 이봐, 동생 우리 부모님 알아서 잘 모시고와.”

나는 그렇게 동생에게 부모님은 맡기고 나서, 제수씨 부모님의 손을 잡고 친구를 따랐다. 처음에는 어색해도 이렇게 서로 체온이 닿다보면 쉽게 벽이 허물어지는 법이다. 우리 가족들도 나의 뻔뻔한(?) 모습에 황당해했다. ‘저 녀석은 누구 배에서 나왔기에 저렇게 넉살이 좋을까’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어쨌든 내 덕분에 분위기는 한층 화기애애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제수씨도 우리 부모님과 동생에게 더욱 잘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만족한다.

건강검진이 끝나자 네 분의 표정이 많이 초췌해지셨다. 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드시고 장시간을 검사를 받느라 지치실 만도 했다. 옆에서 지켜보니 괜히 없는 병도 생길 것 같아 불안했다. 그래도 윤석이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 없이 검사가 빨리 진행됐다. 역시 의사친구하나는 있는 게 좋다. 친구가 없어 찌질 거리던 녀석을 잘 챙겨서 사람답게 만들어 줬으니 윤석이가 오히려 내게 고마워해야 한다.

부모님이 많이 지치실 것 같아서 근처 식당을 예약해뒀는데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 힘들어 하는 부모님과 가족들을 광흥창에 있는 식당으로 최대한 빨리 안내했다. 여러 종류의 죽과 채소를 데쳐서 만든 요리로 위의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는 음식이 나오는 식당이다. 다행히 입맛에 맞으셨는지 모두들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동수 자네는 왜 요즘 우리 가게에는 안 오는 건가? 혹시 입맛에 맞지 않아서 그래?”

음식을 어느 정도 섭취하자 혈색이 돌아오신 사돈어른이 내게 물으셨다.

“하하하. 아닙니다. 아버님. 저 거기 음식 정말 좋아합니다. 가게에 갈 때마다 아버님이 자꾸 존대하시고, 음식 값도 받지 않으셔서 죄송해서 못 가겠더라고요.”

“에잉. 그래도 그렇지. 고기값 그거 얼마나 한다고 부담가지지 말고 자주 오게.”

“그건 아니죠. 혼자 간다면 저도 염치불구하고 감사히 먹겠지만, 보통 친구들과 함께 가는데 친구들까지 신세지게 할 수는 없죠. 다음부터 고기값은 꼭 받으시고 그냥 서비스로 음료수정도만 주신다면 자주 가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이렇게만 해주신다면 친구들과 부담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다.

“자네가 아까 그러지 않았나? 가족처럼 생각한다고. 나를 아버님처럼 생각한다면 그러면 안 되는 거지.”

“맞습니다. 그런데 친구들도 돈을 잘 버는데 공짜로 먹일 수는 없죠. 혹시 저 혼자 가거나 나중에 여자 친구가 생겨 둘이 가게 되면 꼭 감사히 얻어먹겠습니다. 그러니 친구들과 갈 때는 꼭 계산하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동수 저 녀석 말이 맞습니다. 정 찜찜하시면 나중에 동수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때 용돈이라도 챙겨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돈.”

“허허. 그럼 그럴까요?”

아버지까지 나서서 겨우 사돈어른을 설득했다.

“그런데 동수야”

“네. 어머니”

다른 사람 앞에서는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내가 부모님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남들도 내 부모를 어렵게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여자 친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정말 아직 여자 친구는 없어?”

“어머님. 아주버님은 너무 눈이 높으신 것 같아요. 저도 신경 써서 제 주변에 있는 좋은 분들을 몇 번 소개시켜드렸는데 결국은 잘 안됐어요. 제 주변 분들은 다들 아주버님을 좋게 보셨는데 정작 아주버님 반응이 뜨뜻미지근해서 아쉬워하시더라고요.”

괜히 여자 친구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역시 우리 어머니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제수씨도 그러면 안 되는 거다. 내가 제수씨 부모님께 얼마나 잘하고 있는데, 그렇게 배신을 때리고 우리 어머니께 붙다니 갑자기 서러워진다. 그렇다고 정말로 섭섭하진 않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어머니 편을 드는데 어쩌겠는가?

“하하하. 제수씨. 그게 말이죠. 마음에 안 들었다기 보다는 제 주변에 선생님이 많다 보니 이상하게 선생님에게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다들 제겐 과분한 분들이었죠.”

“어머 정말 그런 거였어요? 아주버님. 요즘 선생님들이 인기가 많다고 해서 일부러 선생님을 소개시켜 드린 건데. 제가 생각이 짧았나 봐요. 제 주변에 참한 선배 언니들이나 동기들도 있어요. 잘 찾아보고 소개시켜드릴게요.”

옆에서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제수씨를 바라보고 계셨다. 정말 이건 아닌데. 한동안 어머니께 꽤 시달릴 것 같았다. 제수씨가 소개시켜 준 사람들 중에는 정말 괜찮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 연애 스타일이 문제다. 나는 진한 스킨십도 연애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제수씨가 소개시켜주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행동했다가는 당장 날을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동안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제수씨. 자꾸 이렇게 저를 압박하시면 확 시연이와 결혼하는 수가 있습니다. 7살 어린 시형님을 맞이하고 나면 아 내가 그때 괜한 압박을 줬구나 하며 피눈물을 흘려도 이미 늦은 겁니다.’

어쨌든 한동안 대화의 모든 화두가 내게 집중되는 바람에 난감했던 식사시간은 끝났고 부모님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가만 보자. 내가 이번에 얼마나 돈을 쓴 거야? 거의 500이네. 나도 참 통이 커졌구나.”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꿈 덕분에 예상하지도 못한 큰돈이 나갔다. 돈을 쓸 때는 생색내고 좋았는데 영수증을 모아 계산해보니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사람답게 행동하려고 해도 역시 돈이 문제였다. 어디서 돈벼락 좀 안 떨어지나?

“아 맞다. 로또. 내 정신 좀 봐.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네. 어디보자 내가 복권을 어디에 뒀더라.”

◆ 시연이네 집

시연이는 거실에 엎드려 열심히 다이어리를 읽고 있었다.

“시연아 뭘 그렇게 열심히 읽고 있어?”

“응? 그냥. 일명 마동수의 모든 것?”

“그게 뭔데?”

“응 선생님 친구들에게 선생님에 대해서 물어봤거든. 그걸 꼼꼼히 정리해서 외우고 있어. 우리 선생님. 내가 그동안 몰랐던 부분도 굉장히 많아. 그런데 그럴수록 더 멋있는 거 있지?”

시연이는 정말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이어리를 품에 꼭 안고 돌아누우며 발을 버둥거렸다.

“그래. 그래. 오죽 좋겠냐? 이 마동수 빠야.”

◆ 동수네 집

동수는 허름한 체육복 뒷부분을 긁적이며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로또야. 어디 갔니? 나 참. 내가 정말 삼십대가 된 건가? 이 주전 일이 기억이 안 나지. 어디 뒀더라? 로또야. 로또야 어디 있니?”

============================ 작품 후기 ============================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이 오셨나요. 어떻게 보면 계산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원래 사려 깊고 주변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훌륭한 청년일 뿐입니다. 단지 회사에서만 이상하게 꼬였을 뿐이었죠. 원래라면 현명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겠지만 회사를 너무 상명하복이 절대 진리인 군대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바람에 ‘참을 인’자만 새기며 참다가 더욱 꼬여버린 케이스입니다. 직장이라는 곳은 위계질서도 중요하지만 무조건 참는다고 능사인 곳도 아니죠. 군대야 2년만 참으면 끝이지만, 직장은 거의 평생 함께해야 해야 하죠. 주인공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저는 생각 없이 쓰레기처럼 살았는데 이유도 없이 갑자기 회귀해서 반성하며 잘 사는 개과천선적 스토리보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복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적 의미를 담은 스토리가 더 좋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복을 받을만하기는 한가요? 독자님들이 납득해주시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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