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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21화 (21/424)

00021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 법이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사도 끝났고 이제 자연스럽게 은행갈 일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자연스러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이미 기획안을 하나 만들어 제출했다. 한 달 정도 뒤에 열리는 어린이날 자선 이벤트가 그것이다. 우리 회사는 국민은행이 주거래 은행이다. 두 회사 모두 프로여자농구단을 가지고 있는데 운이 좋게도 5월 5일에 두 팀이 맞붙는다. 그런 이벤트가 있는 날의 경기는  관중도 몰리고, 회사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그날을 좀 더 특별한 날로 만들기 위한 기획안을 만들었다.

기획안의 내용은 ㉠ 저소득층, 소외계층,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초대해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거기에 내가 봉사활동을 다니는 펠로오 어린이집 아이들도 끼워 넣으려다가 가족들이 함께하는 시간에 와서 혹시라도 상처받을까봐 포기했다. ㉡ 식전 행사는 아이돌 그룹을 섭외해 아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 각 팀 치어리더들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정 옷이나 뽀로로 옷을 입고 동요나 만화 주제곡에 맞춰 율동을 준비한다. ㉣ 하프타임 시간에는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만든다. ㉤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가족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 행사를 경기장 밖에서 진행한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인기 농구선수들도 팬 사인회를 비롯한 행사에 참여시킬 생각이다. 다문화 가정과 관련이 있는 각국 대사관에도 초대장을 발송할 예정인데, 대사는 바빠도 영사 정도면 참여하지 않을까? 그러면 나름 국제적인 행사로 만들 수도 있다.

대충 이런 내용의 기획안을 제출했고, 위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한다. 내가 간단하게 설명해서 그렇지 세부적으로 가면 우리 회사와 국민은행이 함께 윈윈할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도 가미했기 때문에 거의 통과될 것이라 생각한다. 혹시라도 이 대리가 가로챌까봐 과장님께 바로 보고를 했다. 과장님이 아무리 나와 친하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위계질서를 무시하는 보고는 싫어한다. 그래서 과장님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몇 개나 준비해뒀다. 아이돌 그룹, 치어리더, 여자 농구선수. 그 세 가지에 과장님도 홀랑 넘어가셨다. 나중에 이 대리가 알게 된다면, 개새끼 소새끼하며 지랄 거릴 수도 있지만 일단 과장님을 방패로 만들어 뒀다. 그게 아니라도 이번 건은 내가 포기할 수가 없다. 이게 다 로또 수령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한 작전이기 때문이다.

국민은행과 함께 진행할 행사이기 때문에 담당자들과 미팅을 위해 자주 만날 것이고 그런 만남 속에 나는 자연스럽게 로또 당첨금을 수령할 생각이다.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오직 로또 수령을 위해 이런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는 똘끼 충만한 자식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돈도 얻고, 아이돌도 보고, 두 팀의 치어리더들도 구경하고, 여자 농구선수들과 미팅(업무상)도 한다. 위에서 추진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업무를 핑계로 매일같이 국민은행을 찾아가 최소한 1주일 내에 당첨금부터 수령할 생각이다. 당장 목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5억 정도만 입출금이 비교적 자유로운 통장에 넣어 놓고, 나머지 금액은 국민은행에 맡기며 한마디 남길 다. ‘절대 비밀을 지켜주세요. 아니면 돈 다 빼서 다른 은행 갈 겁니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다. 그러나 저러나 아이돌은 누굴 초대하지? 인기 있는 애들은 이미 스케줄이 찼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모르니 일단은 찔러봐야지. 소녀시절, 슈퍼걸스, 라일락, 원애니투, 브이걸 등등 으아. 상상만 해도 즐겁다.

Rrrr

아니 이 몸이 열심히 아이돌 그룹을 상상하고 있는데 누가 방해를 하는 거야. 휴대폰 액정에는 장진희라는 이름이 열심히 깜박거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잘나가는 장진희씨 아닌가?”

진희는 나보다 4살 어린 입사 동기다. 입사 동기 중에는 남녀 통틀어 가장 친하다고 할 수있다. 성격도 밝고 회사생활에도 매우 적극적인 좋은 아이다. 연수원에서 우연히 같은 조에 속하게 되었는데 밝은 성격 덕분에 우리 조는 다른 조보다 훨씬 빨리 친해졌고 연수원 조별 평가에서도 가장 좋은 성적을 받았다.

비서실로 발령 받아 일하다가 특유의 싹싹함과 꼼꼼한 성격덕분에 우리 마케팅팀의 총책임자이자 파워 면에서는 우리 그룹에서 넘버 2라고 할 수 있는 전무이사님의 수행비서로 발령받았다. 수행비서라도 해도 위로 과장급 1명, 대리급 1명이 있으니 당장은 일을 배우는 입장에 가깝지만 우리 동기 중 누구보다도 빠른 소식을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 덕에 나도 혜택 좀 받았다.

사장단들이 유럽순방에 오를 때 진희도 함께 유럽으로 갔었는데 전화가 온 것을 보니 벌써 돌아왔나 보다. 유럽으로 떠난 지 한 달이 훌쩍 넘었으니 벌써는 아니다. 나도 요즘 로또 때문에 정신이 없었나보다. 우리 부서의 최고 수장이 돌아왔는데 모르고 있었다. 한동안 회의다 뭐다 바쁠 것 같다.

“넵. 잘나가는 장진희입니다. 호호호”

“언제 한국 왔어? 내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넘버 투(우리끼리의 은어다)가 복귀했는지도 몰랐어.”

“헉. 정말 너무 한 것 아니에요? 업무 복귀하신지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아마도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회의, 회의, 회의가 계속 되어 회의에 대해 회의가 들 정도로 바빠질 겁니다.”

“그러게. 벌써 긴장된다. 그런데 방금한 개그는 북유럽식 개그냐? 좀 썰렁하다?”

“하하하하하. 이렇게 나오시면 방금 들어온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해드리지 않는 수가 있어요!”

“워워. 미안해. 진희야. 뭐 먹고 싶은 것 없어? 말만 해. 내가 다 사줄게. 제발 그 따끈따끈한 소식을 전해주지 않으련?”

“음. 먹고 싶은 게 딱 하나 있지요. 그것은 저녁때 말씀드리지요. 약속 있어도 무조건 취소하세요.”

“오호. 뭔지 알 것 같다. 하하하. 나 오늘 약속 없어. 네가 없으니 놀아 줄 사람도 없더라.”

“음. 뭐 믿을 수는 없지만 일단 믿어드리기로 하지요. 자 따끈한 소식입니다. 지금 당장 여기로 튀어오세요.”

“뭐? 거길? 와우. 내가 그 정도로 보고 싶었던 거야?”

“글쎄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농담 아닙니다.”

“뭐? 뭐야? 정말? 너 지금 그런 중요한 일을 나와 농담 따먹기 하면서 뒤로 미뤘던 거야. 와 너 이따 저녁에 두고 보자.”

“네. 저도 저녁 때 기대 할게요.”

‘아 뭐지? 뭘까? 왜 갑자기 넘버 투가 나를 부르는 거지? 돌머리. 돌머리. 생각 좀 나라. 아무래도 그것밖에 없겠지? 어린이날 이벤트 기획안. 그게 넘버 투 손에까지 전해졌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전무님이 나를 부를 이유는 그것밖에 없다. 그런데 그 기획안이 그 정도 관심을 가질 내용이었나? 로또 때문에 대강 만든 건데 그렇게까지 매력이 있었나? 내가 열심히 떡밥을 깔기는 했지만 넘버 투가 낚일 줄이야. 이 대리가 알면 통곡을 할 것 같다. 기획안과 혹시 몰라 미리 만들어둔 상세 예산안, 그리고 추가적으로 준비한 세부적인 내용이 담긴 서류철까지 챙겨 후다닥 전무실로 향해 달려갔다. 그래도 그전에 과장님께 가 조용히 보고했다.

“과장님. 넘버 투가 불러서 다녀올게요. 아무래도 이번에 만든 기획안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행운을 빌어주세요.”

나의 말에 과장님은 놀란 눈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일개 주임 따위가 전무이사와의 독대라니 상상도 못할 일이다. 과장님도 못 해본 일이다. 아무래도 표정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 힘들어 그냥 돌아서 나왔다. 언젠간 정신을 차릴 것이다.

내가 도착하자 진희는 곧바로 전무실에 보고를 했다.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진희가 다가와 넥타이를 다시 조여 주었다. 업무 볼 때 답답해서 약간 풀어놨는데 센스 있는 진희가 발견해줬다. 고마운 녀석. 오늘 저녁은 진희를 위해 이 한 몸 불태워야겠다.

“똑똑똑”

“들어와”

정말 제대로 긴장이 됐다. 이건 마치 일병이 육군참모총장과 독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겠는가? 순식간에 내 모가지를 댕강 날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인간이 기다리고 있는 호랑이 굴로 기어들어가는 순간이다. 엥? 모가지 댕강 이라? 음. 뭐 아쉽긴 하지만 날아가도 크게 겁날 것은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순식간에 긴장이 풀렸다. 그래도 침착해야지.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마케팅 1부 3팀 마 동수 주임입니다.”

긴장은 풀렸지만 그래도 최대한 긴장한 척 해줘야 한다. 그래야 높은 사람들은 흐뭇해한다.

“그래. 어서와. 여기 와서 앉아.”

“감사합니다.”

“음 이름이 마 동수라고?”

“네. 그렇습니다.”

헉. 내 인사기록표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장진희!

“해병대를 나왔군. 나도 해병대를 나왔는데”

저 눈빛을 보라. 저 눈빛은 안 봐도 안다. 아 정말 이건 좀 쪽팔리는데. 그래도 넘버 투가 원하는 일 아닌가?

“필승! 88X 기수 마 동수가 선배님을 뵙습니다. 필승!”

“필승!”

아 이게 무슨 부끄러운 일이란 말인가? 나는 아버지 때문에 반강제로 해병대에 끌려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비하면 해병대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다. 그래서 딱히 전우회 활동도 하지 않는데 제대로 만났다. 아마 밖에서도 다 들렀을 것이다. 부끄럽다.

“내가 자네를 왜 불렀을 것 같은가?”

“저도 그것 때문에 고민을 해봤는데 다가올 어린이날 이벤트 기획안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준비도 해왔겠네?”

“네. 기획안을 제출하고 나서 긍정적인 검토를 하겠다는 말씀에 혹시 몰라 자료를 보강해뒀습니다.”

“그게 그 보충안 인가?”

전무님의 말씀에 나는 내가 준비해 놓은 서류들을 넘겼다.

“음. 예산은 처음 기획안과 비교해 조금 변화가 있군.”

“조금 급하게 준비하느라 중복 되거나 필요 없는 예산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있는 물품으로 대체하고, 인턴십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 인력에 추가되는 비용을 줄인다면 원안보다 1/3 가량의 예산을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여할 기회? 인턴들에게 미안하지만 전원 차출이다. 원래는 정직원들까지 동원하려 했으나 아직 내 직급이 낮은 관계로 내가 쉽게 부릴 수 있는 인턴들만 간택(?)했다. 요즘같이 취직하기 힘든 세상에 이런 일에 빠지겠다는 인턴은 없다. 힘없는 인턴들을 악용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래도 우리 회사의 경우 별 문제가 없다면 그대로 고용하는 추세라 예비 신입들이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부릴 생각이다.

“음. 처음 기획안도 괜찮았는데 새로 올린 예산안을 보니 이런 꼼수들이 있었구먼. 꽤 쓸 만해. 당장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군.”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이돌 그룹은 어떻게 진행할 생각인가?”

음. 손주 중에 누가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녀석이 있는 것 같다. 아이돌 그룹의 어두운 면에 관심이 있었다면 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일이 없다. 대그룹의 2인자가 나 같은 말단에게 그런 일을 진행시킬 가능성은 제로다.

“혹시 손주 분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있습니까?”

“자네. 눈치도 빠르구먼. 허허. 우리 큰 손녀가 요즘 ‘브이걸’에 빠져 산다네.”

“아 그럼 그쪽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럼 손주 분들을 데리고 참석하실 생각이신지요? 그렇게 하실 생각이시면 공연을 식전에 한번, 하프타임 때 한번 이렇게 편성해서 전반전은 손주 분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아 오지랖이다. 오지랖. 그냥 사인만 받아도 될 일을 또 내가 일을 만든다.

“가능 할까?”

“스케줄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당장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음. 혹시 스케줄 조정이 어려우면 아이돌 그룹 행사비는 두 배까지 생각하고 진행하게. 그래도 괜한 말 나오지 않게 조심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기대하고 있겠네. 그만 나가보게”

‘기대하고 있겠네.’라는 말이 묵직하게 내 가슴을 짓눌렀다. ‘브이걸’ 소속사도 모르는데 큰일이다. 그리고 나름 마당발인 나도 그쪽 계통으로는 전혀 지인이 없다. 과장님은 또 모르겠다. 그래도 노는 것을 좋아하는 양반이니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굳이 지인을 통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 차라리 다이렉트가 더 빠를지도 모른다.

나는 전무님께 90도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긴장을 풀고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등에 땀이 가득했다.

============================ 작품 후기 ============================

전 해병대 출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저렇게 인사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필승이라는 경례는 알고 있습니다. 전 땅개 출신입니다.

아이돌 그룹 이름을 수정했습니다. 실명이 들어가면 위험다고 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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