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4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 법이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어린이날 행사 관련 미팅 둘째 날이다. 그래도 두 회사가 가까이 있어 업무미팅 하기는 편하다. 어제는 반응이 영 시큰둥했다. 자신들이 추진한 기획안이 아니니 적극적이기는 힘들다. 우리가 만든 방안이니 그들 입장에서는 같이 진행해봐야 잘하면 본전이다. 업무실적 평가에 큰 도움이 되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다. 내가 만든 기획안대로 일을 하면 업무는 업무대로 많고 제대로 된 평가는 받기 힘드니 그들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세부 협의를 마치고 싶다. 행사 방안들이야 몇 가지가 미끄러지거나 수정돼도 상관할 바 아니다. 그냥 행사를 진행하고, 브이걸만 오면 내게 더 이상의 위기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에 회사에서 과장님이 팀장님과 부장님께 국민은행 실무자들의 무성의함을 성토했다. 나는 국민은행 애들하고 친해져야 하는 입장이라 그냥 실무자들을 설득하려는 입장이었는데 과장님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어쨌든 그 이야기가 결국 전무님께 전달되고 다시 국민은행의 높으신 누군가에게 전해졌는지 오늘의 반응은 훨씬 적극적이었다. 애들 입장에서 해결할 수 없어 엄마한테 일렀더니 엄마가 한방에 해결해준 셈이다.
나름대로 적극성을 가지고 임하다 보니 일은 빨리 빨리 진행됐다.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반으로 나누기로 하고, 세부 행사는 나눠서 진행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있는 직원들의 참가 신청도 받았고 회사 차원에서 지원하는 소년 소녀 가장이나 소외계층아이들을 최우선으로 초대하기로 했다. 행사가 워낙 크다 보니까 인원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구청과 대학들에 공문을 보내 자원봉사자들을 받아보기로 했다.
가장 난항을 겪었던 것은 브이걸에 대한 문제였다. 예상은 했다. 우리가 마음대로 정하고 통보하는 형식이 되었으니 당연히 기분 나쁘다. 처음에는 전면 취소하고 다른 아이돌 그룹을 찾아보자고 우겼었다. 아이돌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은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니 인정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한참을 우기더니 그러면 브이걸 행사비에 대해서는 자신들은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거였나 싶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이미 확정된 연예인을 반대하기는 힘드니 비용이라도 절감해보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냥 쿨하게 그러라고 했다. 대신 국민은행 측에서는 브이걸을 이용한 어떤 홍보활동도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못 박았다.
이미 우리와 계약을 마친 상태니 그쪽은 브이걸을 빼고 홍보활동을 하라고 했다. 아마 아차 싶었을 것이다. 어린이날 자선 행사는 당일을 국한해서 하는 행사가 아니다. 앞으로 한 달동안 우리 회사가 이런 자선 활동을 합니다. 국민 여러분 많이 사랑해주세요라고 광고하는 기간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정작 국민들의 관심을 가장 받기 쉬운 초대가수를 빼고 홍보를 한다면 누가 알아봐주겠는가? 단호하게 나갔다. 그러면서 브이걸을 이용하여 우리가 진행할 행사내용을 대놓고 흘렸다. 버스광고, 케이블 TV광고, 신문광고 그리고 포스터를 만들어 전국 각지에 뿌릴 거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브이걸의 소속사 입장에서는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할 것이다. 지나가는 버스에도 브이걸 사진이 붙을 테고, 신문광고에도 얼굴을 비출 것이다. 국민은행과 협의를 완전히 이끌어 낸다면 전국 매장 방방곡곡에 포스터가 붙을 예정이다. 아마 브이걸이 누군지는 몰라도 브이걸의 얼굴은 아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있는 사진을 편집하고 방송 자료를 잘라 붙여 이용하는 것일 뿐이지만 광고효과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결국은 서로가 좋은 것이다. 그렇다고 광고에 이용하면서 대놓고 아니 우리 덕분에 전국 방방곡곡에 얼굴이 뿌려졌다. 고마워해라. 이럴 수는 없다. 그래서 브이걸 팬클럽 애들도 적당히 초대할 생각이다.
자신들도 머리가 있으니 과장님과 내가 나누는 대화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금방 깨달았을 것이다. 자기들도 돈을 내겠다고 나오자 나는 그냥 1억을 내놓으라고 우겼다. 우리가 이미 계약했으니 아이디어도 우리 거다. 돈 내놔라. 뭐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쳤다. 조금씩 표정이 일그러지는 모습이 보이자 알았다 반반하자 대신 술 한 잔 사라며 쿨하게 양보를 해줬다. 그냥 처음에 돈을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해서 얄미워서 그랬다며 오히려 내가 사과도 했다. 뭐 이렇게 사람을 살짝 들었다 놓으면서 친해지는 것이다. 어쨌든 로또 당첨금은 2~3일 이내 수령할 계획이다.
그렇게 대략적인 합의를 끝내고, 위에서 오케이 사인이 나면 내일 최종 합의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협의가 끝나자 분위기도 좋게 변했다. 다들 개인적인 이기심 때문에 논쟁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신들이 속한 회사에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주기위해 노력한 충성심의 발로였을 뿐이다. 직장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보면 그 정도는 다들 이해한다. 그래서 자리를 옮긴 술자리도 나름 화기애애했다. 직장인들이 직장에서 겪는 고충과 애환은 다들 비슷비슷하다. 그래도 부럽긴 부러웠다. 나도 저런 평범한 애환을 좀 겪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봐도,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어 봐도 내가 좀 많이 재수가 없는 것 같다.
맥주도 마시고 안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은근히 로또이야기도 물어봤다.
“하하하. 동수씨도 그런데 관심이 많은가 봐요? 국민은행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 다들 그것부터 물어봐요. 그래도 궁금해 하시니깐 제가 이야기해 드리지요. 에헴”
국민은행에서 일하다 보면 확실히 주변에서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역시 로또는 평범한 소시민의 꿈 아닌가? 그래도 술 한 잔 먹어서 그런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결국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국민은행은 돈만 지급할 뿐이지 로또사업부는 따로 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나도 로또에 숨어있는 무슨 비하인드 스토리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수령방법.
“가끔 보면 말이죠. 정말 특이한 분장으로 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마치 멀리서 봐도 나 로또 당첨된 사람이요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죠. 그런 분들은 한 번에 눈에 띄죠.”
“하하하. 그렇게 눈에 띄나요?”
“그럼요.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하고 오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은행 강도 문제도 있고 해서 금방 제지당해서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눈에 띄긴 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여가며 고생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다들 금방 소문나고 그런다고 하던데요?”
“그건 거의 100% 당첨자 분들의 잘못입니다. 은행에서 개인의 신상이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어디 친구나 동료에게 자랑을 했겠죠.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참 묘해서 말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갑자기 거액이 생기면 배가 아픈 법이죠. 그래서 더 소문을 퍼뜨리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첨금은 어떻게 받는 겁니까? TV보면 행장이 직접 나오고 그러는 것 같던데요.”
“그것도 잘못된 생각이죠. 요즘은 많으면 10명도 넘는 분들이 일주일에 당첨되는데 바쁘신 행장님이 그렇게 나오실 수는 없지요. 그냥 차장님 급에서 고객을 맞아 주의사항 등을 알려주고 돈을 지급합니다. 왜 아까 우리가 회의했던 거기 있죠? 거기 바로 옆옆방이 당첨금 지급하는 차장님이 계신 방입니다. 그곳으로 모셔서 돈을 지급하죠.”
드디어 기다리던 이야기가 나왔다. 이 이야기를 들으려고 술을 계속 따라주면서 이야기를 걸었다. 알고 보니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내일이면 당첨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매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책장 바닥에 숨겨둔 복권이 드디어 세상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기다려라 로또야!
그렇게 술자리는 계속 되었고 술이 좀 된 누군가가 노래방에 가자고 칭얼거렸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얼굴 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들과 그런 곳에 가기는 좀 민망해서 거절했다. 그들이 말하는 노래방이 그냥 평범한 곳은 아닌 게 분명한데 술을 좀 마셨다고 해도 아직 여자를 끼고 놀기에는 좀 뻘줌 할 것 같았다.
집에 와서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내용이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친구들이 네이트에 로그인 되어 있어 스타나 하자고 꼬셨다. 요즘은 그 인기가 많이 줄었지만 우리가 학생 때만 해도 어마어마한 인기가 있었다. 조만간 스타크래프트 2가 나온다고 하는데 과연 그 인기를 넘어설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스타크래프트의 파급력을 능가할 수 있는 게임이 나올지는 함부로 예상하기 힘들다. 인터넷 보급과 함께 시작된 스타크래프트는 수많은 PC방을 만들었고, 당시 학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모여서 항상 스타를 했다. 심지어 대학가에 많이 있던 당구장들이 대부분 문을 닫는 사태까지 몰고 왔었다. 대부분이 남자들이긴 했지만 남자들의 놀이문화 자체를 바꿨으니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혁명적인 일이었다. 프로 게이머가 생기고 TV에서 중계까지 하고 있으니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지금이야 예전 같은 인기는 없지만 우리 또래들에게는 여전히 즐길 수 있는 게임 중 하나다. 내 게임 아이디도 승수가 만승이 넘어가니 나도 어지간히 게임을 하긴 했다. 그런데 오늘은 게임에도 집중이 안 된다. 승률이 9할이 넘는 우리의 팀플레이가 자꾸 어긋났다. 베틀넷에서 게임을 하면 항상 커맨드 역할을 하고 있는 내가 이러고 있으니 종종 지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기는 게임에만 익숙한 우리는 금방 싫증이 났고 다음을 기약하며 게임 창에서 나왔다. 책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고 그냥 침대에 누웠다.
내일이면 백억이 내 손에 들어오는데 뭐가 눈에 들어올까? 그냥 눈만 껌벅껌벅 이며 천장을 봤다. 천장 구석에 야광 스티커가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이전에 살던 사람이 그렇게 해놓은 것 같은데 그동안 발견하지 못한 내가 신기했다. 멍하니 야광스티커를 바라보고 있으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오갔다. 대부분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하는 고민이었다. 가장 생각이 많이 나는 것은 역시 부모님이었다. 여행도 보내드리고 싶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드리고 싶고, 몸에 좋은 건강식품들도 한가득 사드리고 싶었다. 돈이 있어도 그동안 돈을 써본 적이 없으니 소소하게 작은 금액들로 해드리는 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안마의자를 하나 사드릴까 싶기도 하고, TV나 냉장고도 바꿔 드릴까 했지만 동생과 내가 2년 전인가 이미 해드렸으니 그러기도 힘들고 뭔가 확 오는 것이 없었다.
Rrrr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니 그냥 반갑다. 아직 잘 시간도 아니고 컴퓨터도 책도 딱히 재미가 없고 아직 돈은 두렵기만 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기쁜 감정보다는 겁이 먼저 난다. 직장 생활이 좀 많이 꼬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평온한 삶이었고 혹시라도 돈 때문에 이 평온이 깨지는 것이 두렵다.
“네 여보세요.”
“선생님. 저 시연이에요.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아. 그래 시연이구나. 얼굴 본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것을 물어?”
“우와. 선생님은 저 안 보고 싶으셨어요?”
“하하하. 요즘 선생님이 좀 바빴다. 미안해.”
솔직히 생각은 났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생각난다. 진희와 섹스를 할 때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주 잠깐 생각이 났다. 그 상념을 진희가 귀신같이 느낀 것이다. 여자는 정말 무서운 동물이다.
“많이 바쁘세요? 언제 밥이라도 같이 먹어요. 오발탄 한 번 가요. 제가 쏠게요.”
“오발탄? 네가 거길 어떻게 알아? 아저씨들이나 좋아하는 곳인데?”
“저도 완전 좋아해요. 대창구이도 좋아하고, 후식처럼 먹는 양밥도 좋아하고요.”
“허. 놀랍다. 놀라워. 거긴 전혀 소녀 필이 아닌데. 오발탄이라 가본지 좀 됐구나.”
정말 놀랐다. 곱창 같은 것을 시연이가 좋아하다니. 오발탄이면 나도 참 좋아하는 곳이다. 고소한 향이 어우러져 식감을 높이는 쫄깃한 대창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흐른다. 나는 이렇게 음식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여자들이 좋다. 예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는 만나면 파스타만 먹어서 정말 싫었다. 나도 파스타 좋아한다. 토마토소스 뿐만 아니라 크림소스나 올리브소스가 들어간 파스타도 좋아할 만큼 파스타에 대한 애정도 있다. 그렇다고 자주 먹는 것은 힘들다. 역시나 한국 사람들은 밥을 자주 먹어야 힘이 난다.
“그렇죠? 그러니깐 오발탄 가요. 네?”
제대로 대창의 맛을 상상해버렸다. 잘 잠에 큰일이다. 요즘 시연이를 보면 생각 이상으로 나와 잘 맞는 것 같아 놀란다. 이성은 그러지 말라고 하지만 괜히 다음 만남이 기대된다.
“그래. 알았다. 주말에는 고향 가니깐 금요일 괜찮아? 그전에는 선생님이 좀 바쁠 것 같은데?”
“네 괜찮아요. 그럼 금요일에 봬요.”
“오냐.”
‘이젠 내가 끊자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끊네. 대학 가더니 남자보는 눈이 달라진 건가? 뭐 그건 그것대로 좋지.’
◆ 시연이 방
시연 : 약속 잡았어요. 반갑게 전화도 받아주시고, 걱정 했는데 별 말씀 없이 약속 잡으시네요.
현우 : 그 봐 아까 게임할 때 뭔가 이상했다니깐? 게다가 오발탄이잖아.
태균 : 아 나도 오발탄 ㅠ
정수 : 나도 오발탄 ㅠ
시연 : 죄송해요. ㅠ
현우 : 야 이놈들아. 애 앞에서 추태 좀 부리지마! 나도 오발탄 ㅠ
============================ 작품 후기 ============================
특정 가게를 지칭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번에 시연이와 같이 갔던 가게도 이름을 언급하려다 그냥 바꿔서 말했습니다. 주인공이 등산하고 내려와서 먹은 곰탕집은 하동관이라는 곳이 모델입니다. 저도 직장인이라 여기저기 맛집은 좀 알고 있습니다.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문제가 없다면 실명을 거론할까요? 오발탄 제가 좋아하는 곳입니다. 물론 거기서 돈 한 푼 받은 적은 없습니다.
아 맞다. 어떤 분이 welcome to hell 이 아니라 welcome to the hell 이 맞다고 하셨는데 둘다 상관없습니다. 앞에는 지옥같은 곳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고 뒤에는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정도로 해석되니깐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