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9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브이걸의 인지도는 갈수록 높아졌다. 쇼프로그램에 나오는 횟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더 몸값이 오르기 전에 나는 브이걸과 전속계약을 맺어야 하는 이유를 조사해서 보고를 올렸다. 지금 시점에서 브이걸이 등장하는 공익광고라도 하나 찍으면 정말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회사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그 계약과 광고 촬영 건은 다른 팀이 맡기로 했다. 조금 아쉬웠다. 나였다면 조금 더 어르고 달래서 싼 값에 계약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회사사람들의 능력이 워낙 출중하다보니 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성과를 거둘 것이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내가 했으면 온전히 나의 성과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 와중에 고아원 봉사 활동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윤석이가 있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7명의 레지던트와 두 명의 펠로우가 참석해줬다. 펠로우 한명은 정말 봉사활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명은 기자들과 국회의원까지 참석하다는 이야기에 참여했지만 그래도 내겐 두 사람 모두 고마운 분들이었다. 3개 신문사의 선배들이 촬영을 왔고, 학교 선배가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 국회의원도 참석했다. 다들 가정의 달을 앞두고 바빠서 겨우 섭외할 수 있었다. 보좌관이었던 선배가 정말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성공할 수 있었다. 만약 실패했으면 의료봉사활동 자체가 미끄덩할 수도 있었다. 확실히 나는 아직 일을 하는 것이 부족했다. 선후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조금 무식하게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이다. 계획을 세웠으면 그 계획에 가장 중심이 되는 일을 해결해야 소소한 몇 가지 일들이 미끄러지더라도 문제가 생가지 않는데 소소한 일들을 다 해놓고 중심되는 일이 해결되기를 기다리니 혹시라도 실패했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동네 노인들과 아이들 그리고 우리 고아원의 원생들까지 모두 무사히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받으셨던 그런 비싼 검사는 아니지만 이렇게 의사들이 직접 촉진을 해서 어느 정도의 병은 알 수 있으니 좋은 기회였다. 참석한 국회의원은 역시나 사진 몇 개를 찍고 바쁘다며 떠났다. 어려운 사람도 떠났으니 재미있게 놀 일만 남았다. 우리가 준비해간 많은 음식과 동네에서도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그것으로 충분히 푸짐한 식사를 즐겼다.
시험이 끝난 다음날이라 학교 후배들도 많이 참석했다. 시연이도 물론 참석했다. 시험 준비를 하느라 그런지 안본사이에 많이 홀쭉해졌다. 그래도 열심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을 도왔다. 아이들과 어울려 해맑게 웃고 있는 시연이의 모습에 눈을 땔 수가 없었다. 그냥 자석처럼 눈이 따라갔다. 일을 하다가 살짝 미끄러져 휘청거리면 내 마음이 다 움찔했다. 남자 동기들과 웃으면서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면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10살이나 어린애를 상대로 무슨 질투를 하는 건지 나도 그동안 나이를 헛먹었었던 것 같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우리는 무사히 돌아왔다. 학교로 돌아와 근처에 세워뒀던 차를 타고 정문 쪽을 바라보니 시연이가 내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보며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런 충동적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에 나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조용히 앉아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버스 정류장에 한참을 서 있다가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하자 차에 올라타고 사라져갔다. 그렇게 시연이의 모습이 사라졌는데도 한참을 그곳을 바라봤다. 꼭 계속 시연이가 서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 내려 담배를 한 대 피우자 마음이 겨우 진정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괜찮아 질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담배 때문인지 입맛이 씁쓸했다.
우리 회사와 계약을 해서 그런지 브이걸도 적극적으로 사전 리허설에 참여해줬다. 우리가 브이걸과 계약을 한 것에 대해 국민은행 관계자들은 상당히 아쉬워했다. 우리가 공익광고를 내보내기 시작하자 아차 싶었을 것이다. 버스 지나가고 손 흔들어봐야 이미 늦었다.
바쁜 와중에 정동양장점에 들러 가봉을 완료했고 얼마 전 완성된 양복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 놀랐다. 내가 정말, 내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이 모습을 당장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와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사장님도 옷을 입은 내 모습을 보며 매우 흐뭇해 하셨다. 그러더니 나를 데리고 근처에 있는 스튜디오로 데려가서 다짜고짜 사진을 찍게 하셨다.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간단한 메이크업을 하고 네 벌의 옷을 갈아입고, 거의 1시간 넘게 사진을 찍었다.
“아니 사장님 갑자기 무슨 사진입니까?”
“조용히 가만히 있어. 내가 왜 달랑 400만원만 받았겠나? 이렇게 사진이라도 찍어야지. 나도 이제 나이든 사람들 옷 만드는 것 지쳤고 자네를 이용해 젊은 층을 한번 공략해보려고.”
“젊은이에게는 너무 비싼데요?”
“원단을 중가로 하면 괜찮아. 그 정도만 해도 눈이 예리한 사람 아니면 잘 구분 못해.”
“예? 아니 그럼 저는 왜? 그 비싼걸로 옷을 만들라고 하셨는데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드는가? 그렇다면 환불하게.”
“하하하. 아닙니다. 정말 마음에 듭니다. 돈이 있었으면 두어 벌 더 했을 것 같습니다.”
예의상 한 말이었다. 단벌로도 출퇴근 하는 사람이 있는 세상에 네 벌이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호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안 그래도 진한 갈색 양복과 모직 재질로 만들어 전혀 은갈치같지 않은 회색 양복도 있어야 제대로 된 신사라고 할 수 있지.”
“사장님. 제가 요즘 일이 많아서요. 자세한 것은 다음에 이야기 하시지요. 그럼 잘 입겠습니다.”
또다시 사장님의 장사수완에 넘어갈 까 두려웠던 나는 네 벌의 양복을 챙겨 스튜디오를 도망치듯 나왔다.
최종적으로 확인을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귀빈들이 참석하기로 했다. 이게 다 미국 대사 부부의 위력인가 싶었다. 솔직히 이렇게 까지 성황을 맞을 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그렇게 봉사활동에 와달라고 부탁을 해도 와주지 않던 국회의원들이 이곳에는 여야할 것 없이 많이도 모였다.
처음 행사장에 와서 VIP실을 안준다고 땍땍 거리는 바람에 정말 고생을 했다. 국회의원들의 막무가내는 세계에서도 알아줄지 모른다. 겨우겨우 진정 시키고 미국을 비롯한 여러 대사 부부들이 코트 바로 뒤에 앉아 관람을 하기로 했다며, 여러분들도 ‘미국’식으로 농구를 관람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원래 농구가 미국에서 시작한 스포츠이니 이번에 한 번 느껴보라는 진실과 미국 대사 부부가 ‘특별히’ 이런 방식의 관람을 요청했다는 거짓을 섞어 교묘하게 설득을 한 끝에 어쨌든 그들도 관람석에 앉았다. VIP들이 있는 자리 주변에는 여러 국가를 대표하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도 배치했다.
브이걸의 오프닝도 끝나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나의 힐링 테라피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의욕은 넘쳤다. 덕분에 경기는 확실히 박진감이 있었다. 지금쯤이면 전무님의 손녀는 브이걸을 만나 사인을 받고 같이 경기를 관람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그 동안 한 상당수의 노고가 전부 전무님의 손녀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사는 사고 없이 시작했으니 복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
경기는 시소게임 양상으로 흘렀다. 양쪽 응원단들의 응원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두 팀의 경기는 점점 격해져갔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날지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그녀들의 투지 넘치는 파이팅 덕분에 별 생각 없이 왔던 관중들도 흥미로운 시선으로 경기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그 때 리바운드 볼을 다투던 두 선수가 부딪히면서 우리 회사 소속 선수가 튕겨 나갔다. 그 선수는 튕겨 나가는 반동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날다시피 아이들이 있는 관중석으로 처박혔다.
“맙소사”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가 그래서 아로마 테라피 전문가까지 불러서 노력을 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사고를 치고 말았다.
“웅성웅성”
큰 사고라도 났을까봐 사방이 소란해졌다. 때마침 날아갔던 선수가 일어났고 선수와 부딪쳤던 사람도 일어났다. 어린 아이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어른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미국 대사의 부인이었다. 아이들을 워낙 좋아하는 부인이라 남편을 잠깐 두고 아이들과 함께 앉아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가 아이를 향해 날아오는 선수를 몸으로 막았던 것 같다.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의료진이 다가가 상태를 보려고 했지만 대사 부인은 괜찮다는 제스처를 하며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이가 다쳤어도 큰일이었고, 대사 부인이 다쳤어도 큰일이었다. 부인의 돌발행동이, 어쩌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던 일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 사고가 나자 선수들의 행동은 진중해졌다. 이렇게 경기가 흐르면 내용은 별로 재미없어도 무사히 행사가 끝날 것 같았다. 선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경기보다 여러 가지 공연에 관심이 있어 온 사람들도 많았다. 경기가 재미없어도 안전하게 끝나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중요했다.
“휴 십년감수했네. 야 이건 대사부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거냐?”
놀랐던 과장님도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을 걸어왔다.
“우리가 행사 책임자라고 해도 그러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그렇지? 내가 너보고 테라피인가 뭔가를 할 때 오바라고 했던 말은 취소다.”
“하하하. 그렇죠? 제가 선견지명이 있다니까요.”
“선견지명은 무슨. 돈을 들여서 했으면 성과를 보던가? 이게 뭐야. 아유. 아직도 내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
“그거라도 했으니 이정도 아닐까요? 저도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요.”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무튼 이제는 제발 사고 없이 끝났으면 좋겠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들렸는지 그 후에는 아무런 사고도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대사 부인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정말 완벽했겠지만 어쨌든 다친 사람들이 없어 다행이었다. 참석했던 귀빈들도 모두 가고 관중들은 밖에서 진행하는 또 다른 행사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그쪽은 각 계열사에서 알아서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과장님과 나는 겨우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저기 멀리서 전무님의 품에 안겨 한 손으로는 전무님 목을 두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풍선을 들고 있는 꼬마 소녀도 보였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데 괜히 반가웠다.
다음날이다. 나의 좋은 날도 이제 끝이다. 이 대리와 최 주임은 특히나 벼르고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서서히 회사를 더 다닐지 말지 결정할 시기가 다가왔다는 이야기였다. 출근해서 과장님과 업무결과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 아직 원소속으로 배치를 받지 못했던 인턴이 달려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과장님, 주임님 큰일 났어요. 큰일.”
“무슨 일? 왜? 뭐 이상한 기사라도 떴어?”
“그게 아니라. 어제 있었던 그 대사 부인 사건 있잖아요?”
“자꾸 말 늘어지게 할래? 또박또박 말 안할래? 왜 누가 안전사고 미숙으로 시사라도 냈어? 그냥 조용히 넘어가기로 언론사와 약속했는데?”
“그게 뉴스가 세계적으로 떠서 말입니다. 일단 먼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인턴의 두서없는 말에 결국 기사를 확인하려고 인턴의 자리로 갔다. 정말 기사가 떴다. 기사라기보다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사진이 정말 절묘했다. 대사 부인은 사진의 오른쪽 아래에서 아이를 감싸고 있고 사진의 중앙에는 브이걸 팬들이 준비한 대형 브로마이드가 위치했다. 그 브로마이드 사진 조금 아래쪽에는 우리 회사 로고가 선명하게 박혀있었는데 사진에는 그것까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정말 일부러 찍기도 힘들만큼 절묘했다. 사진은 브이걸의 브로마이드 전체를 담고 있었고 대사 부인이 그 브로마이드 속에 들어가 아이를 감싸고 있는 그런 사진이었다. 거기에 우리 회사 로고는 거의 한가운데 위치해 마치 기업의 이미지 광고를 보는 것 같았다. 아웃포커싱으로 조금 희미해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그 위치에 선명하게 로고를 박으면 정말 좋은 기업이미지 광고가 될 것 같았다.
대사관에도 연락을 넣고 사진의 주인인 로이터 통신에도 연락을 했다. 대사관 쪽에는 대사님과 부인 이름으로 부인이 직접 지정하는 봉사단체에 후원금을 지원하고 이미지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로이터 통신과도 사진사용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기로 하고 권리를 사왔다. 그런데 그 사이에 사건이 너무 커졌다.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어버렸다. 어쨌든 미국 대사의 부인이 보여준 모습은 살신성인의 정신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았고 덕분에 우리 회사와 브이걸도 유명해졌다. 이제 브이걸의 사진은 포토샵으로 좀더 희미하게 만들고 우리 회사 로고는 좀 더 선명하게 만드는 이미지 작업을 거쳐 ‘우리 회사는 세계의 혼혈 어린이를 돕습니다.’라는 문구를 넣어 세계각지에 있는 리조트와 지사들의 브로셔의 표지로 활용한다면 정말 절묘할 것 같았다. 세계 유명 잡지에 광고를 넣어도 효과는 그만일 것이다.
나는 그냥 혹시라도 회사를 그만 두게 될지 몰라서 확실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진의 파급력이 대단했다. 소식이 우리 오너의 귀에도 들어갔고, 손녀의 사랑을 듬뿍 받아 기분이 좋아진 전무가 사진에 대한 광고활용 방안까지 보고하면서 은근슬쩍 나에 대한 칭찬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특별한 뭔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아니 그렇게 능력 있는데 왜 아직 주임이야?’라고 툭 던졌을 뿐인데
나는 내일 부로 대리가 된다.
============================ 작품 후기 ============================
소제목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다'는 여기서 끝입니다. 전개가 조금 늘어지는 것 같아 속도를 냈습니다. 내일 부터는 다른 소제목으로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주차번호판은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 친구인 태균이의 것입니다. 제가 지난 편에서 지나치게 생략과 여운을 많이 줘서 헷갈리신 것 같습니다. 지난편의 마지막 대화는 친구들끼리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모습입니다.
중환자실이 아니라 마취회복실이랍니다. 수정했습니다. 이런 예리한 지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역시 농구가 겨울 스포츠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하하하. 작가가 몰래 수정하려고 했는데 딱 걸렸습니다. 농구는 겨울 스포츠 맞습니다. 이벤트 경기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