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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40화 (40/424)

00040  뛰어야 부처님 손바닥, 뛰어봤자 벼룩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진희와는 완전히 끝났다. 그녀에게 상처가 있음을 알고 있는 내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날은 내가 좀 조바심이 많았다. 그런데 그녀가 말한 다른 이유는 조금 의외였다. 전에 보자고 했을 때 내가 일이 있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마음이 한동안 좋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이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내게 집착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싫었단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를 끝내는 것에 대해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날 내 행동 때문에 결심하기가 쉬웠다고 했다. 울고 싶은 사람에게 가서 뺨을 때린 격이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직장동기로 돌아갔다. 우연히 지나갈 때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동기들끼리 만나서 함께 점심을 먹을 때는 신나게 같이 수다를 떨었다. 확실히 우린 쿨한 사이였다.

BMW X5를 받았다. 내가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며칠 미뤄 그 주 토요일에야 만날 수 있었다. 많이 그리웠다. 눈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나의 참담한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나를 보며 씩 웃는 것 같았다.

“반갑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원래 남자들은 이러고 논다. 나는 핸들을 툭 치며 새로운 내 차에게 인사를 했다. 스마트키를 고정 시키고 시동 버튼을 눌렀다.

“부르릉”

디젤 특유의 묵직한 8기통 엔진음이 들리면서 시동이 켜졌다. 당분간은 주말에만 이용해야한다. 게다가 놀러도 못 간다. 토요일인 오늘도 나는 윤 스포츠센터에 출근 한다. 윤 사장님이 주신 숙제 때문에 골치가 다 지끈지끈하다. 말이 좋아 탁아소지. 쉽지 않은 문제다. 원래 회사 일이라는 것이 뛰어난 아이디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원동력 또한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듯이, 탁아소를 만들 수 있는 기본적인 지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결혼도 안한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 강변북로위의 매캐한 매연 냄새가 창문너머로 들어왔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이놈의 매연 냄새 때문에 머리가 다 아팠는데, 이제는 차에서 나는 새 차 냄새보다 맡을만해졌다. 서울 사람이 다 됐다. 토요일이라 나들이객으로 분비는 차도 위에서는 외제차도 필요 없다. 시속 100km를 8.3초에 도달하면 뭐하나? 달릴 곳이 없는데. 처음 운전하느라 아직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엑셀이나 브레이크 밟는 감각이 달라 확 갔다가 확 서는 초보 운전자 같은 실수도 했다. 이런 붐비는 도로에서 첫 시승을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났다.

“에잇, 그냥 녹사평 쪽으로 가서 반포대교 탈걸. 괜히 뻥 뚫린 길을 달려 보겠다고 나와서 이게 뭔 고생이람.”

거북이걸음을 하며 겨우 강남으로 넘어왔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시연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색 운동화와 하얀색 바지에 넉넉한 품의 하늘색 난방을 입고 있는 시연이는 오늘도 예뻤다. 요즘은 너무 자주 보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뭐고 뭘 입어도 예쁜 것 같았다.

“어. 벌써 왔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그냥 일찍 나왔어요. 커피 드릴까요?”

“커피?”

난 예전에 김 대리가 날 구박하던 일이 생각나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왠지 어떻게 타오는지 보고 싶었다.

“그래. 그럼 부탁해.”

행정실에 있는 탕비실에 들어간 시연이가 과연 어떻게 하고 나올지 너무 궁금했다. 김 대리처럼 구박을 해 볼까, 아니면 선생님다운 포스를 가지고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가르쳐 줄까, 그냥 모른 척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연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 여기 있어요.”

시연이가 쟁반에 받쳐가지고 와서 내려놓은 것은 까만색의 향긋한 향이 나는 드립커피였다. 여기는 인스턴트커피가 아니라 드립커피를 먹었다. 역시 건강을 생각하는 스포츠센터다웠다. 아닌가? 부유한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그런가? 아무튼 나의 짧은 망상은 망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선생님. 설탕도 드릴까요?”

“아. 아니. 괜찮아.”

향이 깊고 은은한 게 질 좋은 원두를 사용한 것 같았다. 이런 커피에는 설탕을 타서 먹을 수는 없다. 나는 원두커피를 마실 때는 은은한 향과 깔끔한 뒷맛으로 먹는다. 설탕이나 시럽을 타면 커피 고유의 향이 희석되고 뒷맛이 텁텁해진다. 회사 다니느라 인스턴트커피를 입에 달고 살지만, 한 때는 샷을 추가한 벤티 사이즈를 애용할 만큼 즐긴 적도 있었다. 시연이가 준 드립커피를 마시자 막힌 길을 뚫고 오느라 짜증이 났던 머릿속이 한결 개운해졌다.

“좋네.”

“정말요? 제가 아까 와서 일부러 내려놨어요. 여기는 핸드드립 도구가 없어서 아쉽지만 원두는 집에 있는 걸로 가져왔는데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내 칭찬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져서 옆에서 쫑알쫑알 거리는 시연이가 싫지 않았다. 사무실 창가로 비추는 따뜻한 햇살에 포근해졌다.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정겨웠다. 나는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사무실의 평안함을 만끽했다. 이대로 시간이 쭉 흘러 집에 가는 시간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 나를 유혹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한다.

“자. 일하러 가야지.”

“네 선생님.”

“오늘 만나야 하는 사람 명단 좀 줘봐.”

“여기 있어요.”

혹시나 싶어 그 쪽 계통의 사람들도 수배해보고, 유명한 유아 교육 시설도 찾아보라고 했다. 아직 일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 꼼꼼함이나 분류과정이 많이 부족했지만 찾아온 자료만큼은 충분히 만족할 만큼 다양했다.

“음. 아동심리 전문가, 놀이방 선생님, 유치원 선생님, 유아식 전문가. 이 분들을 다 만나기로 했단 말이야?”

“네. 더 많은 분들하고 만나고 싶었지만 오늘 시간이 되시는 분들이 그 정도 밖에 안돼요.”

뭔가 좀 대중없는 느낌이지만, 나도 잘 모른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쓸 만한 것들이 있으면 그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짐보리? 여긴 뭐하는 곳이야?”

“세계적인 유아 교육 시설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가장 체계적인 교육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곳이에요.”

“여길 우리 둘이 가자고? 뭐라고 하고 갈 건데?”

“부부라고 하면 되죠! 히히”

“하하하. 너랑 나랑 누가 부부로 봐. 저번에 못 봤어? 범죄자 취급당하는 거?”

괜한 이야기를 꺼냈나 싶어 아차 하는 마음에 시연이를 쳐다봤는데 별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그르게요. 선생님이 너무 노땅이라서 곤란하잖아요.”

“이 녀석 봐라. 내가 노땅이 아니라 시연이 네가 어린거야.”

내 말을 밝게 받아주는 시연이의 모습을 보면서 안심이 되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컸을 수도 있는데, 꿋꿋한 모습으로 농담까지 하는 모습에 놀랐다. 그 때 그 주폭 4인방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가끔 변호사가 진행 상황을 보고 하는데, 경찰서장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집단폭행은 인정되지 않고 공동폭행으로만 진행한다고 했다. 형사사건이고 내가 합의를 해주지 않아, 유죄 선고의 가능성이 높지만 초범이라 집행유예로 풀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아쉽긴 했지만 전과자가 되는 셈이니 그 정도 선에서 만족해야겠다.

“그럼 괜히 이렇게 입고 왔나 봐요. 화장도 진하게 하고 조금 성숙한 옷을 입고 올걸.”

저 청순한 미모를 허접한 화장 따위로 가리다니 안 될 말이다. 그건 범죄다.

“됐어. 그냥 언니가 바빠서 같이 온 형부와 처제 사이라고 하면 돼. 그런데 왜 하필 롯데월드점이야?”

“거기가 여기서 제일 가까워요. 정말이에요. 저 정말 다른 생각으로 그곳으로 상담예약 한 게 아니에요.”

“알았어. 이놈아. 누가 뭐래? 너무 멀어서 강남 쪽에는 없나 물어본 거야.”

“어. 없어요.”

“알았어. 일단 나가서 점심 먹고 한 사람씩 만나자.”

시연이가 만든 자료를 들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네 사람이나 만나야 하니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았다. 사람과의 미팅을 해본 적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다. 그래도 이미 약속을 했고, 찾아본 성의가 있어 최대한 만나 볼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우와. 선생님 차 바꿨어요? 아직 임시 번호판이네요.”

“응? 그래. 얼마 전에 돈이 좀 생겨서 샀어.”

“예뻐요. 완전.”

시연이는 내 차를 보며 외부를 한 바퀴 빙 돌더니 좋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안녕.”

차를 탄 시연이는 운전석 대시보드를 가볍게 두드리며 내 차에게 인사를 했다. 여기 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왠지 반가웠다. 시연이 아버지 차는 내 차보다 훨씬 좋은 찬데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차를 타고도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꼭 내가 얼마 전에 태균이 주차번호판을 발견했을 때처럼 과장된 액션이 보였지만, 순수한 시연이가 설마 나 같은 의도로 행동할리는 없으니 차 주인으로서 기분이 좋았다.

근처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시연이가 약속한 사람들을 하나씩 만났다. 가장 도움이 되었던 사람은 역시 놀이방 선생님이었다. 놀이방을 운영하는 과정이나, 아이를 돌볼 때의 어려움, 아이 부모를 상대할 때의 에피소드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열심히 질문을 했고 옆에서 듣고 있던 시연이는 녹음기를 꺼내 녹음도 하고 메모지에 여러 가지를 열심히 적었다. 마치 수업 때 선생님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모범생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사소한 일에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윤 사장님의 뒤를 이어 괜찮은 경영자가 될지도 몰랐다.

아동 심리 전문가와의 대화는 조금 뜬 구름 잡기였다. 말하고자 하는 요는 결국 아이의 눈높이를 맞춰 교육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지만,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했다. 나도 아직 잘 모르는 입장이니 질문이 구체적이지 못해서 아쉬웠다. 일이 진행되면 그 때 다시 만나봐야 할지도 모른다.

유아원 선생님 이야기는 그 나이 때의 아이들이 얼마나 별난지에 대한 하소연에 가까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이유식 전문가(나는 정말 왜 지금시점에서 이 사람과 약속을 잡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아이들이 먹는 여러 가지 건강 이유식을 알려줘서 앞으로 우리가 나가야 할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어 만족했다.

전문가들의 만남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날은 어두워졌지만 짐보리 롯데월드점에는 예상보다 빨리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짐보리는 롯데월드점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롯데쇼핑 2층에 있었다. 왠지 실망하는 모습이 역력한 시연이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나는 짐보리라는 곳에 와서 가히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요즘 아이들을 전부 이렇게 키우면 나와 동생은 거의 방치되다시피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0~6개월부터 시작해서 6개월 단위로 교육하는 것도 신기했고, 교육 내용의 신선함과 합리적인 프로그램 설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저렇게 한다고 해서 다 잘 자라는 것은 아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지 사고력도 제대로 발달 안 된 어린아이를 교육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부모라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만들어 놓았다. 나는 그 부분에 감탄을 했다. 물론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우선이겠지만,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하면 효과가 있겠구나 납득하게끔 만들어서 부모의 지갑에서 돈을 꺼내게 만드는 상술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시연이가 생각없이 계획을 짰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막연하기만 하던 내 생각이 어느 정도 틀이 잡히는 좋은 시간이었다. 결국 모방으로부터의 창조겠지만 그래도 스포츠센터의 고유의 장점을 이용해 아이들의 건강을 위주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면 경쟁은 어느 정도 확보가 될 것 같고, 그밖에도 아이들이 먹는 음식을 모두 건강과 밀접하게 관련된 제품으로 사용한다면 매력적인 접근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작은 매장을 만들어 유아용 운동복과 건강식품도 팔면 그 또한 괜찮은 수익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이를 이용한 돈벌이긴 하지만 이곳 회원들은 다들 돈이 많으니 별로 양심에 찔리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걸어가는데 옆에서 시연이가 시무룩해서 따라오고 있었다.

“왜 뭐 안 좋은 일 있어?”

“그냥요. 놀이 공원에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라 서요. 여기까지 왔는데 구경도 못하고 가니까 아쉽잖아요.”

“원 녀석도. 그럼 잠깐 어디 좀 들렀다 가자.”

시무룩한 녀석을 달래주기 위해 놀이공원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나이 서른에 놀이공원은 좀 그렇다. 이럴 때는 확실히 세대 차이를 느낀다. 아무리 어른스러운 시연이라도 좋아하는 것은 분명히 나와 달랐다. 내가 시연이를 밀어낸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하려면 누군가는 희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다. 사랑은 동등한 것이다. 희생하는 사랑은 고귀할지 모르지만 남녀관계에서는 좋을 것이 없다. 처음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희생할지 모르지만, 그게 쌓이다 보면 스트레스가 된다. 그리고 상대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서로의 오해가 깊어지고, 결국 그 희생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서로의 심장을 찌르게 된다.

나는 시연이를 데리고 석촌 호수로 갔다. 근처 자판기에서 따뜻한 실론티를 뽑아서 롯데월드가 잘 보이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롯데월드 안은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자이로드롭이 떨어지고, 청룡열차가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내가 준 음료수를 따서 홀짝이며 롯데월드를 바라고보고 있는 시연이 눈빛이 반짝였다. 석촌 호수에 비치는 달빛과 닮아 있었다. 저녁이라 그런지 시원한 6월의 바람이 우리를 감싸고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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