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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44화 (44/424)

00044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음음음하하하하  으으으하하하하”

빌어먹을 알람소리다. 한참 시연이와 즐거운 데이트를 하고 있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친구 녀석이 선물해준 요란한 알람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다행히도 더 이상 야한 꿈은 꾸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던 욕구불만은 어쩌면 다른 형태의 욕구불만이 아니었는지 싶다.

창가로 내리비치는 햇살이 유난히도 따뜻했다. 오늘 하늘은 평소보다 훨씬 파랗게 보였다. 집에서 내려다보는 공덕오거리가 아기자기하게 보였다. 수납장에 방치해뒀던 커피메이커를 꺼내 오랜만에 커피를 내렸다. 방안은 내가 만든 커피의 향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퉤퉤. 아 이거 맛이 왜이래.”

커피의 향은 괜찮았는데 맛이 아주 개떡 같았다. 예전에 사놨던 원두가루가 너무 오래 되어서 맛이 변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라디오를 켜자 즐거운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흥얼거리며 출근준비를 시작했다. 로또가 당첨되었을 때 봤던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런 삭막한 풍경이 아니라 모든 것이 즐거운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출근할 때 막히는 도로가 짜증스럽지 않았다. 항상 막히는 길에다가 대고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좋은 아침”

회사에 출근하니 인턴인 형석이와 준호가 이미 나와 있었다. 불합리할 수 있지만 당연한 이야기다. 인터 나부랭이들은 일찍 출근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저 녀석들도 이제 방학을 앞두고 있고 7월이면 정식으로 사원발령이 날 것 같다. 앞으로 2달간은 연수원에서 힘들게 굴러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강소현도 일찍 출근했다. 설마 정신을 차려가는 건가?

“얘들아. 우리도 아침에는 원두커피로 먹을까?

“네?”

내가 실실거리면서 이야기를 하자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다.

“어머. 마 대리님. 그거 너무 좋은 생각이에요. 매일 인스턴트커피 먹는 것도 고역이었는데 우리 앞으로 그렇게 해요. 헤이즐넛 커피가 좋을 것 같아요.”

옆에서 내 이야기를 들은 강소현이 호들갑을 떨면서 내 말에 동의를 했다. 저년은 대체 뭘 알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애들이 조만간 연수원에 들어가면 커피 담당이 자기 몫이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나보다. 게다가 헤이즐넛 커피라니. 커피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에다가 인공 커피 향을 착향해서 만든, 보리차보다도 맹숭맹숭하기 짝이 없는 싸구려 커피를 원두커피로 착각하다니 한숨이 다 나온다.

아무래도 강소현에 대한 나의 판단을 바꿔야겠다. 저 모양으로는 부잣집에 절대 시집가지 못한다.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야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마실지 모르겠지만 부잣집에 가서 저런 무식한 짓을 했다가는 언제 소박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 외로 괴상한 캐릭터가 분명하다. 이제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어떻게 명문대를 들어갔을까 의심스럽기도 하고, 자기를 꾸미는 시간에 어느 정도의 상식은 키웠으면 좋겠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 구박을 하는데도 다음날이면 살랑거리는 것을 보면 성격하나는 정말 좋을지도 모른다.

“다음 달이면 애들 연수원 들어갈 텐데. 괜찮겠어?”

“에에? 그래요? 그. 그럼 연수원 다녀와서부터 시작하면 좋겠네요. 호호호.”

저 뻔뻔함이 어쩌면 강소현의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밉기만 하던 강소현도 이제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게 된다. 그나저나 나도 당분간은 또 일이 많아 질 것 같다. 인턴 애들이야 같이 입사한 동기들과 달리 한 달만 수료하고 배치를 받지만 그래도 한 달 동안은 또 강소현과 아웅다웅할지도 모르겠다. 일을 많이 해놔야 친구들과 계획한 해외여행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 텐데 걱정이다.

- 일어났지? 난 지금 출근했어. 공부 열심히 하고 시험 잘 봐.

내가 그렇게 차갑게 돌아섰음에도 불구하고 시연이는 열심히 내 주위를 맴돌았다. 가끔은 놀라울 정도로 나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아 의아하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 중 누군가가 도와줬을 것 같기도 하다. 저번에 현우 놈이 펑펑 울면서 했던 소리를 생각해보면 그 녀석이 제일 의심스럽지만 그냥 모른 척 할 생각이다. 무슨 작당모의를 한 것도 아니고 내가 아는척해봐야 내 꼴만 더 이상해진다. 오히려 그렇게라도 노력해서 나를 잡아준 시연이가 고마울 뿐이다. 아니라고 계속 내 감정을 억눌렀지만 나는 일일주점에서 다시 만났을 때 이미 그녀에게 반했을지도 모른다.

살갑게 닭살 돋듯 행동은 못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냥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시연이의 감정 또한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뿐이다.

“띠링”

- 네 선생님. 오늘은 있죠. 왜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운지 모르겠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엄마에게 달려가 뺨에 뽀뽀를 한거 있죠.>< 저도 열심히 공부할 테니 선생님도 파이팅 하세요. ♡

그렇겠지. 나도 그랬으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옆에 징그럽게 생긴 내 동생 상수가 있었어도 나는 번쩍 안아들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하트다. 하트.

“동수씨. 좋은 아침”

시연이의 문자를 받고 기분이 좋아져서 열심히 일하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젠장. 하늘까지 치솟았던 내 기분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수한 시연이를 보다보니 더 견디기 힘들어졌다. 차라리 그 때 꿈처럼 사고를 한 번 쳤으면 더 이상 지분거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원래도 싫었고 시연이가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럴 수 없다.

내가 이렇게 윤 스포츠센터에 들락거리며 고생하는 이유도 정확히 따지면 양 팀장 때문이다. 하루빨리 양 팀장의 마수에서 벗어나 과장님의 품(?)에 안기기 위해 내가 이렇게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부장님 말씀처럼 윤 사장님과의 계약이 무사히 끝나면 과장님은 팀장대리로 승진하게 되고 그럼 나도 완벽히 과장님 직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회사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길 바랄뿐이다. 팀 내에 두 팀을 운영하는 것은 솔직히 무리다. 새로운 팀에 대한 T/O가 없다면 임시 팀으로라도 격상시켜서 독립을 시켜줘야 서로에 대한 업무 간섭 없이 제대로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만 되면 양 팀장뿐만 아니라 이 대리도 한방에 굿바이 할 수 있게 된다.

당분간은 힘들겠지만 나도 이제 제대로 된 의미를 가진 일을 하고 싶다. 로또 당첨금 수령 때문에 번갯불에 콩 볶듯 만든 어린이날 행사도 그렇고, 양 팀장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이번 일도 그렇고 뭔가 제대로 된 마음가짐으로 일을 시작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내 기획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이 대리만 없어도 좀 더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있다. 로또 때문에 어영부영 여기까지 왔지만, 나도 회사에서 잘 나가고 싶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시연이에게도 ‘나 이런 남자야.’라며 자랑하고 싶어졌다.

간간히 시연이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저기. 마 대리.”

“네. 김 대리님.”

“오늘 같이 퇴근 할 수 있을까요?”

“네? 아 물론이죠. 이따 퇴근시간이 되면 같이 가시죠.”

김 대리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게 와서 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그동안 계속 나를 피하던 김 대리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변화다. 뭘까? 현우도 드디어 뭔가 성공을 한 건가? 그게 사실이면 이 녀석은 정말 불굴의 인간승리다.

퇴근 후에 내 차를 타는 김 대리의 표정은 항상 보던 딱딱한 표정이 아니라 조금 온화한 모습이었다. 현우가 저 표정을 봤으면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라며 설레발을 쳤을지도 모른다. 미묘한 표정 변화를 미소라고 생각하는 그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김 대리는 계속 침묵했다. 역시 뭔가 기대를 한 것이 잘 못이었다. 이 어색한 침묵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김 대리가 차에 없었으면 시연이와 통화라도 할 텐데 이제는 남의 애정사까지 방해하고 있다. 나쁜 김 대리 같으니라고.

“저.”

“네?”

어색한 침묵이 차 안의 공기를 텁텁하게 만들어 창문이라도 내려 환기를 시킬까 하는 찰라에 김 대리가 주저하면서 말을 꺼냈다.

“저.”

“네. 말씀하세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 동안 많이 미안했어요.”

“네?”

갑작스러운 김 대리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갑자기 사과라니, 뭘 잘못 먹었나?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던 딱딱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진지한 표정으로 자동차의 정면을 바라고보고 있는 김 대리의 모습이 보였다. 뭔가 고해성사라도 할 듯 한분위기였다.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김 대리나 나나 친한 사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 얼굴 보고 이야기 하는 것보다 차안에서 정면을 바라보며 이야기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현명한 선택이다.

“제가 이 팀에 오기 전, 그러니까 다른 팀에 있을 때 조금 안 좋은 일을 겪었어요.”

김 대리의 말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것이었다.

입사 3년차. 갓 주임을 달고 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겨 의욕이 넘칠 시기에 새로운 신입을 받았다. 그 남자는 나이로는 4살이 많고, 학번으로도 3살이 많은 남자였다. 그 때만 해도 김 대리의 성격이 무뚝뚝하긴 해도 지금처럼 칼바람 부는 것처럼 냉혹하지는 않았다. 신입이지만 나이도 많아서 말도 올려서 사용했고, 일도 많이 도와줬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약간 강소현같은 남자였다. 매일 남자선배들과 어울리면서 술 마시고 노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일은 도통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업무 시간에도 옆에 있는 남자선배에게 가서 어제 같이 놀았던 여자가 섹시했네 어쩌네 하면서 음담패설을 일삼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일은 대부분 김 대리에게 떠 넘겼다. 보다 못한 김 대리가 더 이상 일을 도와주지 못하겠으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알아서 하라고 방치를 했는데 그 남자가 매일같이 살살거리며 친해진 남자선배들에게 고자질을 했고, 오히려 김 대리 입장만 난처하게 돼버렸다.

원래도 무뚝뚝한 성격이다 보니 남자 직원들이 김 대리에게 ‘여자가 살가운 맛’이 없다며 조금은 배척하는 분위기였는데, 그동안 일은 잘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남자 신입문제를 핑계로 그녀를 무척 괴롭히기 시작했다. 신입이 해야 하는 사소한 일까지 김 대리의 몫이 되면서 팀에서 제대로 설자리가 없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다.

안되겠다 싶었던 김 대리는 그동안 회식을 해도 1차만 참석했던 예전과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회식에 임하면서 분위기를 반전하려고 노력을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시키면 팀장이나 부장에게 술도 따르고 앞에 나가 노래도 부르며 팀원과의 유대감을 키우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부장과 브루스까지 추면서 분위기를 맞추려고 애를 썼지만 김 대리의 행동을 비웃는 사람들만 늘어갔다.

직장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며 회식을 겨우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신입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힘들지? 오빠 같아서 하는 말이야. 잘 들어. 여자가 말이야. 너무 기를 쓰고 남자를 이기려고 하면 미움 받아. 적당히 일하다가 시집이나가. 그전에 내 일이나 열심히 도와. 그럼 내가 선배님들에게 잘 말해서 김 주임 회사생활 편하게 할 수 있게 해줄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수고해.”

그렇게 말을 하며 김 대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가는 모습에 너무나 화가 나서 신고 있던 구두의 굽으로 신입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 찍었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 쓰러진 신입의 몸을 발로 차기 시작했는데 옆에 있던 다른 직원들이 말려서 겨우 멈췄다.

결국 신입은 병원에 입원을 했다. 이일이 외부에 알려지면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부장은 김 대리가 치료비만 물어주는 것으로 조용히 일을 마무리했고, 김 대리는 여자 팀장이 있는 지금의 우리 팀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그동안 그녀가 했을 고생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나를 괴롭히던 직장상사 중 한명이 김 대리라고 해도, 어쨌든 나 역시 고생을 해봐서 그녀의 마음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라서 감내해야만 했던 고충이라는 것은 내가 회사생활을 하면서 겪어야 했던 일과는 또 다를 것이다.

“마 대리님을 처음 받는다고 했을 때, 혹시나 했는데 역시 저보다 나이가 많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절대 얕보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오버를 하면서 몰아붙였었죠. 미안한 마음이 자꾸 들 때마다 회식에서 술 따르던 일, 노래방에서 부장님과 춤을 췄던 일, 그리고 그 신입이 제게 했던 모욕적인 말들을 다시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죠.”

나는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김 대리도 내가 대답하기를 기다리지는 않았는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마 대리님이 팀원들에게 상처를 받는 모습을 보면 꼭 예전의 제 생각이 나서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너무 제 모습과 닮아있어서 지켜보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더 몰아쳤던 것 같아요. 그런데 묵묵히 그런 상황을 이겨내시더군요. 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사고를 쳐서 쫓겨나듯 팀에서 나왔는데, 마 대리님은 여봐란 듯 승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반성을 많이 했어요. 최근에 같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서 꼭 사과를 하고 싶었어요. 그동안 정말 죄송했어요.”

“하하하. 아닙니다. 별 말씀을요. 김 대리님의 마음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앞으로 잘 지내면 되지 않겠습니까?”

민망했다. 나는 솔직히 로또가 당첨되었기에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 아니었다면 결국 사표를 내고 회사를 그만뒀을 것이다. 구두로 상대의 뒤통수를 내리쳤다는 김 대리가 더 대단해보였다.

“제가 이렇게 마음먹고 사과는 했지만, 다른 여자들처럼 살갑게 대하지는 못할 거예요. 워낙 성격이 무뚝뚝한 편이라 오해를 많이 받는 편이거든요.”

김 대리가 살갑게 대하는 모습이라니 꿈에서라도 나오기 무섭다.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앞으로 그냥 갈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남녀사이도 아니고. 김 대리님은 제게 그냥 보통 직장선배일 뿐입니다. 괜히 잘 대해주려고 하지 말고,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보통 직장선배의 모습이라. 그 말 참 마음에 드네요.”

“그런데 김 대리님?”

“네?”

“현우와는 어떻게...”

“마 대리님.”

“네?”

“제가 아무리 제 속내를 어느 정도 털어놨다고 해도 지금 물으시는 것은 제 사생활입니다. 공과 사는 지켜주셨으면 해요. 제가 혹시 친구 분 때문에 이런 사과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저는 친구 분과 아무사이도 아니에요.”

“하하하. 그렇죠? 제가 좀 오버를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뭔가 가까워진 듯 가깝지 않은 김 대리였다. 그렇지만 그게 김 대리다웠다. 차안은 언제 대화가 오고 갔냐는 듯 다시 침묵에 휩싸였다. 전과는 다르게 조금 따뜻한 기운이 도는 침묵이었다.

◆ 윤 스포츠센터 강남점 근처 어딘가

“수현씨! 수현씨! 같이 좀 가요. 뭐가 그렇게 걸음이 빨라요.”

못 들은 척 고개도 돌리지 않고 도도하게 걸어가고 있는 수현의 걸음걸이가 점점 느려졌다.

“헥헥. 어휴 겨우 따라 잡았네. 좀 같이 가시지.”

현우의 하소연에 흘깃 쳐다만 본 수현은 다시 앞을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있잖아요. 동수가 말이에요. 아니지. 이건 이야기하면 안 되는구나. 파리가 커피에 빠져죽으면서 했던 말이 뭔지 알아요?”

“...”

“단맛, 쓴맛, 뜨거운 맛. 다보고 죽는구나.”

“...”

“그럼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절대로 앞에 가지 못하는 것은요?”

“...”

“에이. 모르는구나.”

“...”

“뒷바퀴요. 하하하. 안 웃겨요? 이상하네.”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현을 앞질러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자기가 알고 있는 재미도 없는 유머를 계속 떠벌였다.

“어느 날. 시험 기간이 끝나고 성적표가 나올 때가 됐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성적표가 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성적표에 대해서 물어봤죠. 그랬더니 대뜸 아들이 한다는 소리가 ‘소자 학교 도덕 시간에 배운 대로 행할 뿐이옵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화가 난 어머니가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똑바로 말하라고 다그쳤더니 아들이 다시 이런 말을 했어요. ‘소자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재밌죠?”

“...”

“에이. 이것도 실팬가. 아이쿠.”

한동안 뒤로 걷던 현우는 앞에 있는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다. 민망한 현우는 재빨리 일어나 수현의 얼굴을 봤다. 수현의 얼굴이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어 지금 웃은 거죠. 하하하. 웃었다. 이제 보니 수현씨 몸 개그를 좋아하는구나? 아 걱정이네. 우리 수현씨 웃기려면 내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누. 누가 우리 수현씨에요?”

수현은 자신의 미묘한 표정 변화까지 캐치하는 현우의 섬세함에 놀라 급히 표정을 바꾸며 대답을 했다.

“어라. 이번엔 당황한 표정이네. 우와. 우리 수현씨 표정이 무지하게 풍부한 사람이었구나. 예뻐요. 원래도 예쁜데 그렇게 여러 가지 표정을 보니까 더 예쁜 것 같아요.”

“...”

수현의 집앞에 도착하자 둘의 대화라기보다는 현우의 일방적인 수다도 끝이 났다.

“수현씨, 잘 들어가요.”

수현은 현우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들어왔다. 현관문을 잠그고 옆에 있는 창을 통해 돌아가는 현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 표정이 정말 보이나? 특이한 남자네.”

수현은 현관 입구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웃는 얼굴, 우는 얼굴, 찡그린 얼굴 등 여러 가지 표정들을 만들어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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