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오랜만에 고향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대부분의 고향친구들이 같은 동네에서 자라 거의 같은 고등학교까지 나오는 경우가 많아 자주 연락은 못해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 연락 온 준열이도 그런 친구 중에 한명이었다. 나와 절친하게 지냈던 친구는 아니었어도 꽤 오랫동안 같은 고향에서 지내다보니 서로간의 추억은 많이 남아있었다. 대철이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지 얼굴을 못 봐서 아쉬웠다.
“이야. 마 동수. 못 본 사이에 신수가 훤해졌다.”
“그래. 준열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만나기로 한 커피숍에 나타난 준열이의 모습은 활기찬 인사와는 다르게 많이 힘들어보였다. 예전부터 남자는 한 방이라며 사업을 하겠다고 포부를 밝히던 녀석이었다. 부모님께 소식을 듣기로는 무슨 사업인가를 해서 잘나간다고 들었는데 그게 잘 안된 모양이었다.
“애들한테 소식은 들었다. 요즘 잘나간다며?”
“잘 나가긴 무슨. 그냥 직장 생활하는데.”
“에이. 들리는 말로는 그게 아니던데. 외제차도 몰고 다닌다며.”
아차, 싶었다. 대철이 아버님 장례기간이 주말도 껴있어서 생각 없이 X5 디젤을 몰고 갔는데 친구들 중에 누가 봤나보다.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왜 이 차를 몰고 왔을까 후회를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회사에서 조금 잘나가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항상 조심한다고 했는데 여전히 허술했다.
“원 녀석들도. 외제차이긴 한데 별로 좋은 것은 아니야. 스포츠카 쯤 몰아줘야 외제차를 몬다고 할 수 있지. 내 차는 그냥 그래.”
“그래? 하긴. 외제차는 역시 스포츠카지. 나도 예전에 잘 나갈 때는 떡하니 페라리 한 대 사서 몰고 다녔는데 말이야.”
“그런데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
점점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되자, 준열이의 말을 끊었다. 왕년에 페라리를 몰던, 벤트리를 몰던 그것은 내가 알바가 아니다.
“그게 말이지. 흠. 혹시 돈 좀 있냐?”
“내가 무슨 돈이 있어?”
“야. 그러지 말고 돈 있으면 좀 빌려주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내가 실수를 해서 사업에 실패를 했지만, 이번에 정말 괜찮은 아이템이 하나 있거든. 네가 한 번만 도와주면 내가 두 배 아니 세 배로 값아 줄게.”
예상은 했지만 역시 돈 이야기였다. 이런 일이 있을까봐 복권 당첨된 사실을 숨겼다. 외제차를 몰고 다닌다는 소문만 듣고도 이렇게 찾아오는 세상이다. 역시 숨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내가 지금 돈이 없다. 얼마 전에 이사하느라 다 썼어. 미안하다.”
“그러지 말고. 다시 생각해봐. 이사했다고? 그럼 은행에서 대출이라도 받을 수 있겠네. 부탁 좀 하자. 정말 좋은 아이템이라서 그래.”
“미안한데. 전세라서 그것도 곤란해. 전세로는 대출받기가 쉽지 않아. 나도 어느 정도 대출끼고 전세를 장만한거라. 힘들 것 같다. 미안하다. 준열아.”
거짓말도 한 번 시작하니 술술 잘나왔다. 준열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여기까지 와서 아이템 타령을 하는 것을 보니 안 봐도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은 뻔했다.
“야. 내가 솔직하게 이야기 할게. 나도 자존심이 상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동거하는 여자 사이에서 애가 하나 있거든. 걔가 요즘 많이 아파. 병원비가 필요해서 그래. 좀 도와주라. 응?”
“그래? 입원한거야?”
“응? 그럼.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당장 수술비가 없다. 애 목숨 살려주는 셈 치고 나 좀 도와주라. 부탁한다. 동수야.”
“일어서.”
“응?”
“일단 병원부터 가보자고. 나도 의사한테 이야기를 들어보고 수술비가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야 널 도울 것 아냐? 가자고.”
준열이의 말을 들은 나는 제발 이 지경까지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준열이를 앞세워 병원으로 가자고 재촉했다.
“야야. 일단 앉아봐. 지금 병원에 없어. 입원비도 없어서 쫓겨났다. 아이참. 쪽팔리게 넌 꼭 내가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만드냐? 그냥 딱 5천만 빌려줘. 내가 돈이 생기면 바로 갚을게.”
“그럼 애는 어디있는데?”
“어디 있긴? 애 엄마랑 집에 있지.”
“그럼 같이 집에 가자. 아픈 애를 집에 두면 어떻게 해. 나랑 같이 가서 병원부터 가자. 일어나. 뭐해? 안 일어나고.”
“에이 씨발. 야. 마 동수. 돈을 빌려주기 싫으면 싫다고 해. 남자새끼가 쩨쩨하게 그깟 돈 5천 가지고 이렇게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 관둬. 젠장. 더러워서. 커피 값은 네가 계산해라.”
준열이는 그렇게 화를 내며 자리에서 박차고 나갔다. 커피숍 문을 박살낼 기세로 나가던 녀석은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는지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야. 현금 있으면 좀 줘봐라. 내가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잖아. 바쁜 사람 불러놓고 그냥 가게 만들 거면 밥값이라도 줘야 할 것 아냐?”
나는 친구의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지만 말없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지갑에 들어있는 5만 원권 5장과 만 원권 6장을 몽땅 준열이에게 건넸다.
“오. 5만 원짜리 신권도 있네. 그래도 경우는 있구나. 고맙다. 동수야. 잘 쓸게. 그리고 임마. 좀 베풀고 살아. 사람이 그렇게 빡빡하게 사는 거 아니다.”
돈을 받은 준열이는 희희낙락거리며 사라졌다. 냉정한 이야기지만 그냥 적선하는 셈 치기로 했다. 좋은 추억을 함께 했던 친구라 아쉬웠다. 준열이는 이제 내가 가지고 있는 친구라는 명단에서 사라졌다. 앞에 있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셨다. 입맛이 썼다. 친구라는 의미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었다. 같은 학교, 같은 반을 나왔으면 친구인가? 어릴 적 한 동네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면 친구가 되는가? 우리는 보통 학교의 동기들을 스스럼없이 친구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런 의미의 친구는 진짜 친구일까? 술 한 잔 먹고 하루 어울렸다고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정말 한국 사회에서 친구는 너무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친구. 곽경택 감독이 만든 영화 ‘친구’를 보면 어릴 적 그렇게 우정을 나눴어도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결국 친구의 등에 비수를 꽂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이 어떤 의미로 ‘친구’라는 영화 제목을 사용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곽경택이라는 사람이 ‘친구’라는 단어를 꼭 냉소적으로 비웃는 방법으로 사용한 것 같았다. 어린 마음에 ‘저게 무슨 친구야.’라며 감히 신성하기만 한 ‘친구’라는 단어를 모독했다고 성토를 했었는데, 오늘 나도 비슷한 배신감을 느끼다 보니 ‘친구’라는 단어에 회의감이 들었다. 시연이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무작정 학교 앞으로 차를 몰았다. 무작정 찾아갈까 하다가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러 아메리카노를 두 잔 산 다음 문자를 보냈다.
- 의기촌 앞으로 갈 테니 잠깐 얼굴이나 보자.
커피를 양손에 들고 툴레 툴레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입학했을 때가 생각났다. 인생에서의 좌절도 없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던 20살.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겁 없었던 나의 패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20살인 시연이는 이런 상처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순수한 지금처럼 티없고 맑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다. 나는 시연이를 온실 속에 화초처럼 대할 생각은 없다. 세상과 대신 싸워줄 생각은 없다. 싸우다 상처를 받으면 옆에서 조용히 보듬어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사랑 이야기를 할 때 많이 나오는 것이 비와 우산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비를 맞을 때 옆에서 우산을 씌워주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옆에서 같이 비를 맞아 주겠다고 한다. 나는 그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비를 맞으면 옆에서 우산을 쓰고 묵묵히 지켜볼 생각이다. 온실 속 화초처럼 우산을 씌워 보듬어 줄 용의도 없고, 같이 비속에 뛰어들 용기도 없다.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이 있듯이 무수하게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산다. 내 생각이 옳다고 강요해버리면 생기는 것은 결국 다툼이다.
조금 비겁한 사랑방식일 수도 있지만 나는 모든 선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맡길 생각이다. 비를 피해 내 안으로 들어오고 싶으면 반갑게 맞이해 줄 생각이고, 비와 싸우고 싶으면 옆에서 조용히 응원만 해줄 생각이다. 선택은 결국 상대가 하는 것이지 내가 강요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생님!”
커피를 들고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시연이가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맞아줬다. 커피를 건네고 근처에 있는 벤치를 찾아 앉았다.
“기다리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의기촌에 계시는 줄 알았는데 안보여서 내려와 봤어요. 그런데 커피도 다 사주시고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좋은 일은 무슨. 개똥같은 사랑철학을 주절거리기는 했지만 나도 결국 상처받고 위안이 필요해서 여기를 온 것이다. 시연이 얼굴을 보니 답답했던 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어느새 존재만으로도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
“아니. 그냥 네 얼굴이 생각나서 와봤어.”
“정말요? 와. 그럼 제가 보고 싶어서 온 거네요.”
“그럼”
며칠 전 시연이가 꼈던 팔짱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앞으로 솔직하기로 마음먹었었다. 나의 솔직한 대답에 시연이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와.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히히”
“우리 좀 걷자.”
“네 선생님”
우리는 도서관 앞을 지나 인문관으로 걸어 내려갔다. 시험기간이라 학교는 조용했다. 시연이가 조용히 팔짱을 껴왔다. 나는 시연이 낀 팔짱을 풀고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내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내 마음까지 전해졌다. 이 모습을 아는 후배가 본다면 배신자(?)라고 나를 매도할지도 몰랐다. 내가 매도했던 선배가 이제는 내가 되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언젠가 술을 한 잔 사주면서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다’라며 두루뭉술한 이야기를 해 줄 생각이다.
빌어먹게 작은 이 놈의 학교는, 교정 전체를 돌아도 30분밖에 안 된다. 아쉽다. 그래도 공부하는 녀석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조금 더 있고 싶어 하는 시연이를 도서관으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 선희의 집
태균은 선희의 전화를 받고 급히 이곳으로 왔다. 큰일이라도 일어 난 줄 알고 급히 달려왔더니 선희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아니 선희씨 무슨 일이에요?”
“엉엉엉. 태균씨. 저기요. 저기.”
태균은 선희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TV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바퀴벌레 한 마리가 태균을 노려보고 있었다. 컸다. 성인 남자의 손가락 한 개 반을 합쳐야 될 정도로 길고 두꺼웠다.
“헉. 바. 바퀴벌레네요? 어떻게 저렇게 큰 녀석이 있을 수 있지?”
“저놈 좀 치워주세요. 엉엉엉. 너무 커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태균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무서웠다. 아무리 남자라지만 바퀴벌레는 무섭다. 그것도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을 만큼 거대한 바퀴벌레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여자 친구 앞이었다.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두려운 마음을 떨쳐내고 옆에 있는 잡지책을 말아 들었다.
‘조심 조심’
바퀴벌레로 다가가는 태균의 발걸음은 신중했다. 태균의 옆머리에서 땀 한 방울이 뚝하고 떨어졌다. 손에서도 땀이 흘렀다. 잡지를 말아 쥐고 있던 손이 미끄러워 바지에 한 번 문지르고 다시 잡았다.
목표에 거의 도달했다. 거대한 바퀴벌레는 태균의 그런 모습이 가소로운 듯 꿈쩍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인내심이 싸움이었다. 인간과 맹수의 대결. 태균은 바퀴벌레의 옆으로 돌아갔다. 적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했다.
다행히도 거대 바퀴벌레는 태균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태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 바퀴벌레의 생명은 이제 풍전등화와 같았다. 조심스럽게 팔을 들고 내리칠 준비를 마쳤다.
“이얍”
“퍽!!!”
“헉. 자. 잡았어요. 잡았어요. 선희씨.”
“어머. 정말요. 고마워요. 태균씨. 엉엉엉.”
선희는 개선장군과도 같은 태균의 늠름한(?) 품에 안겼다. 선희의 갑작스런 행동에 태균은 잡고 있던 잡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잡지에는 바퀴벌레의 사체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을 아랑곳조차 하지 않았다.
“서. 선희씨.”
“태균씨.”
선희와 태균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술을 부딪쳤다. 둘은 열정적으로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선희의 방 냉장고위에서 또 다른 바퀴벌레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겨울에 보는 납량특집 제 1탄 ‘바퀴벌레 커플의 탄생.’
To be continue. 두둥!!!!!!!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