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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49화 (49/424)

00049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아이구구. 허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며칠 동안 신 나게 범퍼 카를 탔더니 허리 근육이 뭉쳤다. 신을 내도 너무 냈나 보다. 완충 작용을 하는 보호대가 있다고 해도 결국은 교통사고와 비슷하다. 그것도 모르고 신 나게 여기저기를 박아댔으니 몸이 멀쩡한 게 더 이상할지 모른다. 이곳의 생활은 정말 평온함이라는 말이 잘 어울릴 만큼 좋았다. 낮에는 활기찼고, 밤에는 고요했다. 공기도 맑았고, 밤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쉬고 싶은 때가 온다면 이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직원들은 모두 활기찼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 예상하기를 사람들이 패배주의에 빠져 의욕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했었다. 노력하는 흔적은 보이는데 그 노력이라는 것이 적자를 겨우 모면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으니 힘이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직접 이곳에 와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나이가 있는 팀장급 직원들은 형이나 누나처럼 포근했고, 이곳에서 먹고 자는 젊은 친구들은 의욕이 넘쳤다. 신이 나서 일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열정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가족 같은 직장관계라는 것은 흔히 보기 어려운데, 여기는 정말 가족과 같은 따뜻함이 흘렀다.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였다. 동심이 가득한 곳에서 일해서 그런지, 아니면 도시와는 조금 떨어져 전원생활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에 있어서 순수하고 희망에 넘쳤다. 어떻게 보면 몽상가들 같았다. 언제 회사에서 폐점을 결정할지 모르는데, 그런 위험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산다는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으니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이렇게 소박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재벌 2세인 고 이사가 모나지 않게 잘 지낸다는 사실도 신기했다. 직원들은 진심으로 고 이사를 존경하고 따랐다. 확실히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내가 알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곳에 대한 애정만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니 사람들도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며칠도 되지 않았는데 그들의 소박한 진심이 내게도 향했다. 그냥 놀다가 떠날 생각이었던 내게 그것은 너무 큰 짐이었다. 성격이 좋은지 얼굴이 두꺼운지 알 수 없는 몇몇 젊은 녀석들은 벌써 나를 보고 ‘동수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게 내게도 기꺼운 것이 문제였다. 각박한 회사생활을 하다가 따뜻하게 나를 대해주는 그들의 마음을 외면하고 있자니 가슴 어딘가에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주말이 되고 시연이가 찾아왔다. 짧은 베이지색 반바지에 얇고 헐렁한 하얀색 남방을 입고 머리에는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를 쓰고 나타난 시연이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 밀짚모자라니! 저게 저렇게 예쁜 액세서리가 될지는 정말 몰랐다. 이상한 조합 같은데 시연이가 입으니까 희한하게 잘 어울렸다. 너무 나들이 나온 소녀 같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나는 조금 있으면 떠날 사람이니까 하면서 생각 없이 불렀는데, 젊은 친구들과 뜻밖에도 빨리 친해져 오늘 밤에 제대로 놀림을 받을 것 같았다.

“선생님!”

나를 발견한 시연이는 반갑게 달려와 내 품에 와락 안겼다. 입구에서 주말 나들이 손님을 받고 있던 직원들의 모습이 휘둥그레졌다. 엄청난 미소녀(?)가 나타나 갑자기 내 품에 안겼으니 놀랄 만도 했다.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든 말든 오른편에 있는 직원 출입문을 열고 시연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이럴 때는 줄행랑이 최고였다.

표를 끊을까도 했다. 그런데 왠지 ‘오늘은 이곳에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라며 우쭐대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대단한 관계자가 된 것처럼 뻔뻔하게 직원 출입문을 열고 시연이를 데리고 들어갔다.

“우와. 선생님 너무 멋있어요. 저 어릴 때 놀이공원에 아는 사람 있다고 자랑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너무 부러웠거든요. 제가 딱 그 기분이에요. 히히”

의도가 맞게 들어가긴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어릴 때’라니 그 말을 듣자 내가 지금 시연이와 소꿉장난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10살이나 어린 녀석과 만나려면 이런 설명하기 뭔가 애매한 기분이 종종 들 것이라 생각한다. 익숙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도 이로울 것 같았다.

“하하하. 잠깐 귀 좀 가까이 대봐.”

내가 그렇게 말하자 시연이는 눈이 동그랗게 변해 궁금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머리가 내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자 시연이만의 향취가 은은하게 풍겼다. 특별한 샴푸를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 익숙한 향이긴 한데, 그게 체취와 섞여서 시연이만의 독특한 향기를 만들어 냈다. 싱그럽고 매혹적인 향기였다.

“있잖아. 내가 여기 사장님과 엄청나게 친해졌어. 그러니까 오늘은 시연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해도 돼.”

내가 그렇게 속삭이자 시연이 입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정말 초등학생 아이처럼 신이 난 모습이었다.

“정말요? 우와. 저 정말 좋아요. 선생님.”

그냥 자유이용권을 끊어도 마음껏 타는 것은 마찬가지다. 역시 내 몸 어딘가에는 사기꾼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저렇게 즐거워하니 보는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시연이는 정말 정신없이 놀이공원을 돌아다녔다. 다른 놀이공원에 비해 대단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곳이었지만 정말 행복해했다. 처음에는 놀이기구를 몇 번 같이 타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사람이 탈 것이 못됐다. 나도 어릴 때는 놀이기구를 많이 좋아했었는데 왜 나이가 드니 울렁증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귓속에 있는 기관들은 다른 곳보다 노화가 빨리 와서 그런가 하는 엉뚱한 상상도 했다. 결국, 나는 시연이의 사진을 찍겠다는 핑계로 놀이기구 타는 것을 포기했다. 사진 속에 담긴 시연이의 모습은 현실과는 또 달랐다. 화면발이 정말 잘 받았다. 아나운서가 꿈이라고 했는데 너무 예뻐서 뉴스 앵커로는 부적합할 것 같았다. 물론 나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여자 친구가 정말 어리군요. 저는 마 대리님이 저와 비슷한 연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세대 차이를 느끼는군요. 정말 통탄스럽습니다.”

시연이를 찍은 사진을 카메라 LCD를 통해 확인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고 이사가 우는 시늉을 하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네?”

“저분이 정말 예쁘긴 한데, 제가 보기에는 그냥 조카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마 대리 눈에 여인으로 보인다니 그 젊음이 부럽습니다. 하하하”

내가 알기로 고 이사의 올해 나이가 36살로 알고 있다. 시연이와 무려 16살 차이니 조카가 아니라 딸 같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고 이사를 보면서 그나마 10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 현실이 갑자기 고맙게 느껴졌다.

“그러게요. 저도 가끔은 제가 범죄자가 된 것 같아서 양심이 콕콕 찔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저와 저 녀석의 나이 차이가 10.살. 이.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부러워요. 정말 부러워요. 제 여자 친구는 여기서 고생하는 저를 내버려 두고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중인데, 그래서 그런지 더욱 부럽습니다.”

“아. 여자 친구분이 프랑스에 계십니까? 많이 보고 싶으시겠군요.”

“보고 싶다마다요. 자자. 이것 좀 보십시오. 예쁘지 않습니까?”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고 이사는 갑자기 자신의 휴대폰에 담겨있는 자신의 애인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시작했다. 시연이만큼 예쁘지는 않지만 그만하면 미인 소리는 들을만 했다.

“하하하. 예. 예쁘네요.”

“그렇죠? 마 대리 여자 친구만큼 예쁘지 않습니까?”

그건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고 이사고 뭐고 간에 진실을 곡해할 순 없다. 나는 사나이 마동수다. 여기서는 계급장이고 뭐고 필요 없다.

“흠. 이사님. 맞습니다. 이사님 말씀이. 하하하. 정말 미인이시네요.”

“역시 마 대리는 보는 눈이 남달라요. 아차. 저기 여자 친구분이 오시네요. 저는 그럼 일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고 이사가 사라지고 나자 시연이가 신이 난 표정으로 내게 왔다.

“선생님. 누구였어요? 무척 친해 보이던데요?”

“아. 저분이 여기 사장님이야. 젊지?”

“정말 사장님하고 친한 것 맞네요. 그런데 굉장히 젊네요. 저는 놀이공원 사장님 하면 KFC같은 호호할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생긴 것은 젊어도 애늙은이야. 신경 쓰지 마.”

“네. 그런데 선생님. 저 놀이기구는 그만 탈래요. 그냥 저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고 놀아요. 네?”

반가운 소리였다. 놀이기구를 더 탔다가는 일주일 전에 먹었던 음식이 올라올지도 몰랐다. 그때부터는 열심히 놀이공원을 돌아다녔다. 귀신의 집 분장실같이 평소라면 절대로 가보지 못했을 장소에도 들러 귀신분장까지 하며 정신없이 놀았더니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나는 시연이를 데리고 광릉 불고기 집에 가서 숯불 향이 가득한 불고기를 실컷 나눠 먹었다. 다른 곳도 들렀으면 좋았겠지만, 시간이 늦어 시연이를 태우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가는 동안 내가 찍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무척 좋아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 기종에 대해서 물으며 자신도 사진을 배우고 싶다고 졸라서 한참 동안 카메라에 대해서 설명을 해줘야 했다. 처음에는 가격이 저렴한 것으로 시작해서 정말 사진이 취미에 맞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다고 해도, 은근히 나와 같은 카메라를 사고 싶어 했다.

내 카메라가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자가 들고 다니기에는 너무 무겁다. 렌즈도, 표준렌즈이긴 해도 L렌즈라서, 웬만한 카메라보다 무겁다. 전에 설렁탕집에 가서 특을 시키는 모습을 봐서 어느 정도 깨달았지만 뭔가 나와 같은 것을 공유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냉큼 내 것과 똑같은 것을 살 것 같아, 내가 가지고 다니던 서브용 카메라를 주면서 숙제를 내줬다. 1. 내가 주는 카메라 책을 반드시 읽을 것. 2. 방학기간 두 달 동안 사진을 찍어 내게 보여줄 것. 3. 라이트 룸과 포토샵을 공부할 것. 4. 일주일 단위로 그동안 찍은 사진에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왜 그렇게 찍었는지 감상문을 제출할 것.

귀찮은 과정이다. 나는 시연이가 괜히 나 때문에 따라서 배우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내가 숙제처럼 내준 과정을 하나하나 하다 보면 정말로 자신이 사진 찍은 것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된다. 어느 단계에서든 그만둔다면 지금 내가 준 카메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한 대 사주면 그만이다. 아직 나는 시연이에게 줄 돈이 10억이나 남은 빚쟁이 신세다. 그 돈도 빨리 줘야 하는데, 시기를 잡기가 참 어려웠다.

시연이를 집에 바래다 주고 다시 동지랜드에 돌아오니 시간이 많이 늦었다. 방에서 내가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옮겨서 큰 화면으로 확인했더니 내가 생각해도 잘 찍었다. 솔직히 내가 잘 찍었다기보다는 모델이 워낙 좋았다. 놀이공원 곳곳을 배경으로 찍은 시연이의 사진은 그 어떤 뛰어난 모델이 주인공인 화보보다 마음에 들었다.

“똑똑”

“네 나갑니다.”

나는 노크하는 소리에 모니터화면에 뜬 시연이의 사진을 닫고 문을 열었다. 고 이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네. 말씀하세요.”

“술이나 한잔하시죠?”

“술이요? 뭐 그렇게 하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지갑 가지고 나올 테니.”

“아닙니다. 제가 살 테니 같이 나갑시다.”

고 이사와 나는 고 이사의 차를 타고 의정부 시내로 나갔다. 소탈한 모습이긴 해도 나처럼 차에 대한 욕심은 있는지 좋은 자동차를 몰고 다녔다.

“차 좋네요.”

“제가 다른 것에는 욕심이 없는데 이상하게 차에 대한 욕심은 못 끊겠더라고요. 유학 생활하면서 타던 차였는데 워낙 마음에 들어서 한국에까지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자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역시 남자는 자동차, 여자, 군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지는 법이다. 고 이사가 안내한 곳은 꽤 고급스러운 술집이었다. 룸에 들어가 술과 안주를 시키고 웨이터에게는 방해하지 말고 술을 주문할 때만 들어오게 시켰다.

“자. 일단 한 잔 받으세요.”

“네.”

둘이서 주문한 위스키의 반 정도를 비울 때까지 고 이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볼일이 있는 사람은 그였기 때문에 나도 별다른 할 말이 없어 묵묵히 술을 마셨다.

“마 대리님.”

“네. 이사님”

“제가 따로 알아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유능하신 분이더군요.”

“네?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냥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고 이사가 은근한 칭찬을 해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상대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 항상 해오던 방식이었다. 살짝 버터를 발라놓고 유혹하기.

“그렇게 겸손할 것 없습니다. 마 대리님도 아는 것처럼 저도 아버지 아들이다 보니 듣는 귀는 어느 정도 있습니다. 원래 근무평가도 좋았고, 최근에 진행했던 두 가지 프로젝트도 통통 튀는 아이디어로 훌륭하게 마무리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통통 튀는 아이디어는 무슨. 그냥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아 열심히 짱구를 돌렸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거의 임기응변에 가깝게 즉석에서 생각해낸 일들이 의외의 성과를 보였을 뿐 내가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었던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운 저 좀 빌려 씁시다.”

올 것이 왔다. 내가 이곳에 머물면서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전에 이야기했지요? 동지랜드가 제겐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곳이라고요.”

“네”

“사실은 우리 어머니의 유산과 같은 곳입니다. 원래 이곳의 주인이셨던 외할아버지의 외동딸이 바로 우리 어머니셨지요. 어디의 재벌가나 똑같겠지만 사랑 없이 결혼한다는 것이 여자에게는 참 외로움을 주는 겁니다. 아버지는 일하느라 바쁘셨고, 형님들과 저도 머리가 컸다고 우리끼리만 놀다 보니 어머니는 대부분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셨습니다. 놀이공원에서 보셨던 그 정원들은 전부 어머니의 손길에 닿았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포기할 수가 없어요.”

“그럴 수밖에 없겠군요.”

“네. 유학 도중 연락을 받고 돌아왔더니 어머니는 이미 많이 아프셨어요. 제가 돌아오고 얼마 못 가 돌아가셨죠. 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부탁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유학을 완전히 마치고 돌아왔더니 동지랜드는 적자투성이로 바뀌어 있더군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아 언제 폐점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도 남자다 보니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부탁한 일을 뿌리칠 수가 없더군요.”

“그런 사연이 있으셨군요.”

“지금 막내 여동생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만 무사히 유지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 쉽지가 않습니다. 이곳의 직원들은 정말 순박하고 좋은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어머니 때부터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라 동지랜드에 대한 애정도 정말 남다르죠. 그분들은 뭔가를 가꾸고 유지하는 것에는 능력이 있는데 새로운 것을 개발하거나 발전시키는 것에는 젬병 인분들입니다.”

확실히 고 이사의 말이 맞았다. 자기 자리에 만족하는 소박함은 있어도 뭔가 대단한 것을 이뤄보겠다는 야망은 없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마 대리님의 장기가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미국에서 MBA까지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경영이라면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탄탄하게 유지해서 천천히 발전시키는 것은 적성에 맞지만, 창의적인 능력은 조금 부족한 사람입니다. 놀이공원에 MBA 학위증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더군요. 이대로 가면은 어머니와 함께 일했던 분들이 거리로 나앉을지도 모릅니다. 겪어봐서 알겠지만 좋은 분들입니다. 부탁할 테니 꼭 좀 도와주십시오.”

휴. 잠깐에 정이 들어버렸던 사람들이다. 고 이사는 그런 분들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내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었다. 나도 평소 이런 설득을 즐기는 편이다. 그런데 막상 내가 당하고 보니 정말 징글징글한 설득 방법이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원천봉쇄 해버리는 치사한 방법이다. 게다가 재벌 2세라는 사람이 내게 저렇게 정중하게 부탁을 하니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천라지망에 갇힌 신세 같았다. 참 꼼꼼한 능구렁이였다.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좀 더 열심히 생각해본다면 뭔가 방법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근본적으로 약점이 많은 곳입니다.”

“괜찮습니다. 제 여동생이 이쪽 방면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돌아오고 제가 본사로 들어가 지원을 하면 그때는 근본적인 해결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동안의 시간만 벌어 줄 방법만 찾으면 됩니다.”

망했다. 놀다가 금의환향하겠다는 나의 부푼 꿈은 결국 일장춘몽이 돼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너무 얕은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네. 말씀해보세요. 제가 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저와 제 가족들은 동지랜드에서 모든 것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셔야 합니다. 미래의 제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렇게 농담 같은 진담으로 고 이사의 부탁을 승낙했다. 미래의 내 자식들도 이곳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보자는 희망찬 다짐이기도 했다. 완전히 뒤집어 놓자는 것도 아니고 회장님 막내딸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만 유지하는 것이야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 싶었다. 이렇게 고 이사에게 빚을 지워놓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회장님의 장남과 차남도 자기 어머니가 사랑했던 곳을 다시 살리겠다는 나에게 해코지를 할 것 같진 않다는 나의 계산도 포함돼 있었다.

“하하하. 그것참 반가운 소리군요. 마 대리님의 자식뿐만 아니라. 손자들도 이용했으면 좋겠습니다. 마 대리님의 직계라면 모두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조치하도록 하지요.”

우리는 그렇게 굳게 악수를 했다. 윤 사장님이 걱정되었다. 지금쯤이면 노발대발하고 계실지도 몰랐다. 먼저 찾아가서 두 달의 시간만 달라고 읍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두 달이다. 두 달 안에 무슨 방안이라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내가 해결할 방법은 없다는 이야기다. 윤 스포츠센터와 우리 회사가 제휴계약을 맺었다고 끝이 아니다. 합자회사를 설립하기 위한 줄다리기는 한동안 이어져야 한다. 그 줄다리기 기간을 잘 활용해서 시간을 벌어봐야겠다. 이놈의 오지랖은 정말 끝이 없다.

◆ 시연이네 집

시연이는 동수가 준 카메라를 들고 집안 구석구석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에이. 또 플래시가 터졌네. 설정을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이따 설명서를 다시 봐야겠다. 이것도 쉽지 않네. 그래도 선생님이 내준 숙제인데 꼭, 반드시, 기필코 해내야지. 윤 시연 파이팅이다.”

“시연아 여기서 뭐하고 있어?”

“아빠. 이리 와서 서 봐요.”

“어디로? 여기로?”

시연이는 윤 사장을 거실 여기저기에다 세워두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빠는 요즘 사진 찍을 때 누가 브이 자를 들어요. 아니 그렇다고 차렷 자세를 하면 너무 나무토막 같잖아요. 히잉.”

윤 사장은 시연이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고 있었다. 뜬금없이 갑자기 사진을 찍는다고 하는데, 거실에서 대체 무슨 자세를 취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시연아 사진은 왜 찍는 거야?”

“아. 이거? 그냥 연습해요. 오늘 선생님이랑 놀이공원에 갔었거든요. 선생님이 굉장히 멋있는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잖아요. 와. 왜 그렇게 선생님 모습이 멋있는지. 그래서 저도 사진을 배워보려고요.”

“크흠. 마 대리랑 놀이공원을 갔었어?”

“음. 선생님이 거기서 일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놀러갔어요.”

“아 그래? 마 대리는 잘 있고?”

“네. 거기 사장님과 엄청 친해졌다고 자랑하시던 걸요.”

“그럼 거기서 계속 있는데? 언제 돌아온다는 말은 없었고?”

“음. 잘 모르겠어요. 아빠. 저 지금 사진 찍는 연습하니까. 죄송한데 잠깐만 말시키지 말고 있어주세요. 네? 부탁할게요. 아빠.”

윤 사장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사랑스러운 딸이 저렇게 애교를 피우면서 부탁을 하니 멀뚱멀뚱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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