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6 꿩 대신 닭.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시연이를 데리고 고 이사를 만났다. 모델 계약을 위해서다. 모델료로 100만원을 즉석에서 지급했다. 하루 일하고 받는 돈치고는 과한 금액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방송 CF도 아니고 놀이공원 안내책자와 입간판 그리고 지면광고에 실릴 정도인데 일반인 모델에게 그 정도 액수면 많이 생각해주는 금액일 것이다. 고 이사가 내 주변사람에게도 호감을 사려는 것 같았다. 시연이는 기대했던 것보다 큰돈에 잔뜩 미소를 지었다. 부잣집 딸이라 풍족하게 살았다고 해도 처음 번 돈이니 좋을만했다.
“선생님. 제가 맛있는 것 많이 사드릴게요. 히히”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그 돈은 나중에 여행갈 때 보태든지 해. 선생님은 돈 잘 버니까 걱정 말고.”
시연이에게 진 빚(?)이 무려 10억이다. 이자만으로 데이트 비용을 대도 남을 만큼 엄청나게 큰돈이다. 나는 평소 같은 직장인 남녀가 데이트를 하면 여자 쪽에서도 돈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연이는 학생인데다, 10억을 언제쯤 이야기하고 줘야할지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뭘 받기가 너무 부담스럽다. 복권 자체도 시연이가 아니었으면 당첨될 일도 없었으니 가지고 있는 돈의 반을 줘도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사진촬영을 시작하자 시연이는 정말 아름답게 꾸미고 나왔다. 일반인이라서 사진작가 측에서 분장사와 코디를 준비해왔는데, 프로의 손길이 닿자 판타지 속 요정을 닮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뿜어냈다. 나뿐만 아니라 촬영에 임하는 관계자들도 모두 시연이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이 나갔다. 사진작가는 신이 나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자. 좀 더 밝게 웃어 봐요.”
“시연씨, 이 여기서는 연인과 놀이공원에 왔다고 상상을 하면서 표정을 지어 봐요. 그렇죠. 아이고, 예쁘다.”
“좀 더 귀여운 표정으로. 좋아요. 그렇죠. 잘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시연이었다. 그런데 역시 프로 사진작가라서 그런지 때론 농담을 하고, 때론 진지하게 상황을 설명하면서 노련하게 리드를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작가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따르기 시작했다.
“와. 지금 표정 좋네요. 정말 반할만큼 부드럽고 싱그러운 미소네요. 저기 저 남자가 대체 누구인데 저런 미소를 지을까? 오라. 남자 친구? 이야, 남자 친구가 듬직한 게 멋지네. 남자 친구랑 뽀뽀도 해봤죠. 그 때를 상상하면서 표정 한 번 지어 봐요.”
촬영도중 나와 눈이 마주친 시연이가 활짝 웃자 그 찰나를 놓치지 않은 작가가 갑자기 뽀뽀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시연이의 볼이 사과처럼 발갛게 변했다.
“좋아요. 그렇게 발갛게 얼굴이 익어서 부끄러워하는 표정. 예뻐요. 하하하.”
촬영은 몇 시간에 걸쳐 계속 되었다. 여러 종류의 원피스와 드레스를 갈아입으면서 촬영을 계속 하자 시연이도 점점 지쳐보였다. 사진작가에게 잠깐 휴식을 취하자고 말을 하고 시연이를 그늘진 곳으로 데려갔다.
“힘들지. 여기 시원한 음료수 대령했습니다.”
“고마워요. 선생님. 그런데 재미있어요. 그런 예쁜 공주 옷들은 처음 입어 봐요. 그리고 아까 사진작가님이 뽀뽀이야기를 하는데 아침에 일이 생각나서 부끄러워 혼났어요.”
내가 어깨도 주물러주고 신발을 벗겨 종아리와 발도 주물러주자 쑥스러워하면서도 신이 나서 조잘조잘 촬영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름이라 더워서 그런지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 미소를 바라보자 나도 힘이 났다.
시연이가 휴식을 취하고 나자 촬영은 계속됐다. 겨우 안내책자와 지면광고로 활용할 텐데 뭔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사진작가가 신이 나서 오버필을 받은 것 같아 걱정도 됐다. 잠깐의 휴식이 큰 힘이 되었는지 시연이는 얼굴하나 찡그리지 않고 열심히 포즈를 취했다. 사진 촬영이 무사히 끝나고 주변 정리를 할 즈음 사진작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어서 오세요. 일단 여기 좀 앉으세요.”
“네”
“일단 이것 좀 보세요. 마음에 드십니까?”
사진작가는 촬영을 하는 도중 사진 파일을 바로바로 자신의 노트북으로 전송시켜 작업을 확인했는데, 그중에 괜찮은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확인을 요청했다. 역시 프로라서 그런지 정말 잘 찍었다.
“네. 마음에 드네요. 보정작업만 잘해서 넘겨주시면 저희가 잘 활용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저기.”
나는 이 일이 내 주된 업무가 아니라서 칭찬만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사진작가가 나를 불러세웠다.
“네. 말씀하세요.”
“시연씨가 진짜 모델로 데뷔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제가 간섭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연이 본인이 선택을 해야죠.”
“물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도 고개만 절래 절래 흔드네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시연이가 잘 알아서 판단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도 물론 시연이가 그런 방면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은 반대다. 작은 놀이공원이나 대학의 홍보모델로 일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일이다. 하지만, 시연이가 하고 싶어 한다면 굳이 반대할 생각도 없었다. 모든 것은 시연이가 판단할 몫이다.
“이번에 국내 의류브랜드 중 한 곳에서 새로운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본인에게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기회만 잘 잡으면 금방 스타가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면 학생이나 직장인 신분으로는 상상도 못할 돈을 벌 수 있게 되겠지요.”
나와 시연이가 평범한 직장인과 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은근히 돈을 가지고 유혹을 했다. 복권 덕분에 나도 부자가 되었지만, 시연이의 아버지인 윤 사장님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부자인데 사진작가가 꾀는 방법을 잘 못 선택했다.
“죄송합니다. 시연이가 돈이 아쉬운 집안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부탁해서 놀이공원 모델로 참여했습니다만, 돈 때문에 그쪽 일을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조금은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나왔다. ‘이런 대단한 집안의 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웃겨서 그냥 적당히 알아들을 정도로만 말했다. 혹시라도 괜히 귀찮게 굴면 서로가 피곤해진다. 시연이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이쯤에서 서로의 입장을 정리하는 것이 좋다.
밖으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시연이를 데리고 식사를 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요즘 고 이사의 카드는 거의 내가 가지고 다닌다. 나도 돈은 많지만 이상하게 이런 공돈으로 식사를 하게 되면 즐겁기 그지없어진다.
“우와, 이 차예요? 너무 귀여워요.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이네. 그런데 선생님 왜 또 차를 사셨어요. 얼마 전에도 엄청 멋진 차 사셨잖아요.”
“그 차는 외제차라서 회사에 몰고 가기가 눈치가 보여. 너도 사회 나와 보면 알겠지만, 나처럼 말단 직원이 외제차를 끌고 다니면 안 좋게 봐. 국산차라도 너무 좋은 차 몰고 다니면 그것도 눈치 보이거든.”
“그렇구나. 그래도 예쁘고 귀여워요. 잘 산 것 같아요. 히히”
그 말에 괜히 샀나 싶었던 마음은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가 버렸다. 시연이를 데리고 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바래다주고 나서 숙소로 돌아왔다. 바래다주는 동안에 자꾸 시연이의 입술이 생각나서 혼이 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갓길에 차를 세우고 탐스러운 입술을 마음껏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 충동을 억누르느라 집에 들여보낼 때는 손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고 헤어졌다. 당분간은 신체접촉을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나도 주체할 수 없는 짐승의 본능이 툭하고 튀어나올지 모른다.
다음날은 놀이공원 홍보팀 직원들과, 일요일에 논의했던 아이디어를 현실화 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시연이가 모델로 나오는 안내책자에 같이 수록해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조금 서둘렀다. 고객들이 참여하는 일은 신청게시판을 하나 열어서 이용하기로 했다. 출렁다리에 대한 스토리는 다리 입구에 안내문을 설치하고 홈페이지에 가짜유래를 만들어 알리기로 하고 시설과에 알렸다. 할인혜택이야 홈페이지에 팝업창을 띄워 홍보를 하면 되는 일이라서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었다.
고민을 했던 부분은 인디밴드의 초청이었다. 무대야 마련되어 있고, 앰프와 스피커를 비롯해 공연을 위한 시설들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실력이 괜찮은 밴드를 초청해야 고객들의 호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는 이 공연을 일회성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점점 더 실력 있는 밴드들이 참여하도록 유도해서 지역주민들까지 같이 즐길 수 있는 축제의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한동안 홍대를 뒤지고 다니면서 공연에 목말라 있는 실력 있는 밴드들을 찾아내야 한다. 공연 내용이 좋다고 소문이 나야 관객들도 많이 찾고, 나름 유명한 밴드들도 초청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일단 이 일은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나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고 이사 또한 언더그라운드 쪽은 잘 몰랐다. 여유가 생기면 작은 음악 페스티발이라도 열어서 입상한 사람들에게는 공연의 기회를 제공하는 쪽으로 방향만 잡아 놨다.
바쁘게 일을 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 달인 찾아 삼만리의 촬영 날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우리 놀이공원 홈페이지에도 촬영을 알렸고, 브이걸 팬클럽에도 들어가 홍보를 했다. 그 덕분인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많은 고객들이 찾았다.
촬영이 시작되자 정원사 어르신은 느긋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가지치기를 하시더니, 사람들이 약간 지루해하기 시작하자 신기에 가까운 손놀림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쇼맨십이 있는 분이었다.
“와”
달인 찾아 삼만리의 촬영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따로 준비한 회양목 화분에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 금세 하트모양으로 만들어 브이걸에게 선물하는 장면은 이번 촬영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큼 대단했다. 그냥 잘라도 되는 나무를 엿장수처럼 가위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나뭇가지를 잘라내자 주변사람들은 엄청난 호응을 보였다. 덕분에 달인의 촬영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브이걸과 진행자가 함께 놀이기구를 타는 모습과 생일축하를 위한 몰래카메라도 개그맨의 오버연기와 매니저의 예상치 못한 눈물 덕분에 흥미진진하면서도 훈훈한 촬영이 되었다.
◆ 윤 스포츠센터 강남점
3층의 헬스장에서 재형, 현우, 형진, 정수는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었다.
“야. 저기 지나가는 비쩍 마른 놈 있지. 저 놈이 이 대리래.”
“정말? 생긴 것도 아주 신경질적이게 생겼구만. 약간 쥐상인 게 동수 말처럼 밑에 사람 엄청 괴롭히게 생겼다.”
“그러게. 근데 저놈은 나이도 젊은 자식이 왜 저렇게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다니냐? 돌아다니는 꼴을 보니 밤일은 영 그른 놈 같은데. 크크크”
“야! 이리로 온다. 조용”
동수의 친구들은 이 대리가 자신들의 앞으로 지나가자 모른 척하고 운동에 집중을 했다. 이 대리는 허리를 꾸부정하게 구부리고 연신 배를 주무르며 처량한 모습으로 그들의 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왜 저렇게 처량해 보이냐.”
“그러게. 괜히 괴롭히고 싶잖아.”
“야야야. 지금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리 저놈 좀 골려주자.”
“어떻게?”
“어떻게 하긴? 좀 전에 배 만지면서 화장실 들어가는 거 못 봤어? 똥 싸고 있겠지. 물이나 한번 끼얹어 버리자. 흐흐흐”
“그거 괜찮은데. 빨리 가자.”
동수의 친구들은 이 대리가 사라진 화장실을 향해 열심히 달려갔다. 한 명은 화장실 창고에 있는 양동이에 물을 담았고, 다른 한 명은 혹시라도 다른 사람은 없는지 화장실 안을 살폈다. 나머지 두 명은 혹시라도 누가 오는지 밖에서 망을 봤다.
“야. 물이 너무 깨끗하잖아. 대걸레라도 빨아.”
“조용히 이야기해. 다 들려.”
“야. 기다려봐. 빨고 있는 대걸레도 치워.”
망을 보던 형진이가 들어와 대걸레를 빨고 있는 현우를 비켜 세웠다.
“뭐하게?”
“오줌 싸려고. 크크크”
“크크크”
“쉿. 조용히 웃어.”
형진이가 양동이에 볼일을 보자 신이 난 재형이와 현우가 물동이를 같이 들고 이 대리가 있는 화장실 문 앞에서 섰다. 망을 보던 정수도 뒤를 따랐다. 그들은 은밀한 손동작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촤악”
“으악. 차가워. 이 씨발 어떤 새끼야.”
“야. 튀어.”
동수의 친구들은 낄낄대며 화장실 밖으로 도망을 나왔다. 잠시 후 화장실 안에서 이 대리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밖에 아무도 없어요? 휴지가 물에 젖어서 사용할 수가 없어요. 밖에 계시면 누가 좀 휴지 좀 주세요. 네? 밖에 아무도 없어요? 젠장, 이게 무슨 냄새야. 킁킁. 아우 냄새가 이거 왜이래? 저기요. 밖에 휴지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저기요.”
============================ 작품 후기 ============================
조금 지루하셨죠. 벌여놓은 일은 미리미리 점검해야 나중에 고생하는 일이 없을 것 같아 내부정리(?)를 좀 했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