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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61화 (61/424)

00061  방귀  뀐 놈이 성낸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놀이공원에 오니 좋았다. 모두들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기분이 이렇게 좋을지는 몰랐다. 본사에서 일할 때 휴가를 다녀왔으면, 이 대리는 내가 없는 동안 늘어난 업무량 때문에 짜증부터 부렸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시간이 하루, 이틀정도 남은 일들은 여지없이 나에게 떠넘겼을 것이 분명하다. 그 자식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고 이사에게는 우리나라에는 잘 팔지 않는 캐나다산 아이스와인 한 병을 선물로 줬다. 남자들에게는 술을 선물하는 것이 제일 쉬운데, 면세 기준은 겨우 1병이다. 그런데 아버지, 윤 사장님, 고 이사, 부장님, 과장님까지 다섯 분에게는 선물을 해야 해서 결국 과세통관을 거쳐 세금까지 내고 반입을 했다. 캐나다산 와인을 제외하고는 그냥 우리나라 주류백화점에서 사는 것이 더 싸게 먹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야. 마탱이. 나는?”

“응? 자! 받아. 먹고 떨어져라.”

“아이씨, 누군 와인이고, 누군 열쇠고리야?”

“왜? 캐나다 국기가 들어간 예쁜 열쇠고리야. 잘 봐라. 밤톨아. 네가 미국에서만 살아서 잘 모르는가본데 캐나다 국기가 세계 국기 중에는 제일 예뻐. 캬! 붉은 색 단풍잎이 들어간 이 심플하면서도 예쁜 국기가 들어간 열쇠고리. 쉽게 구할 수 없는 거야.”

와인을 고 이사에게 선물하자, 장희가 자기는 열쇠고리밖에 주지 않느냐고 투덜거렸다. 쉽게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도 캐나다 국기가 예쁜 것은 사실이다. 내가 생각했을 때 세계에서 제일 예쁜 국기가 캐나다 국기고, 세계에서 제일 못난 국기가 일본 국기다. 민족주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일본 드라마와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 덕분에 쉽게 일본어도 배울 수 있었다. 세상 천지에 그런 성의 없는 국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얀 바탕에 뻘건 점 하나만 있는 국기라니. 그렇게 뻘건 점만 보고 있으니 맹목적인 정신병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웃기시네. 내가 너보다 해외여행은 더 다녔다. 그러지 말고 나도 다른 선물 하나 더 주라. 응. 동기 좋은 게 이런 거 아니냐?”

“싫으면 관두던가. 열쇠고리 내놔.”

“아냐. 아냐. 됐어. 치사한 놈아. 무슨 열쇠고리 하나로 유세는.”

내가 열쇠고리를 뺐으려고 하자 절대 줄 수 없다는 듯 등 뒤로 숨기더니 그때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사람을 귀찮게 했다. 젠장, 이놈의 본사에서는 사람을 언제 불러들이려는지 모르겠다.

“정말 사람 귀찮게 하네. 뭐? 뭘 사주면 조용히 있을래?”

“호호호. 마탱이. 이 누나에게 자꾸 기어오르면 앞으로도 계속 귀찮게 할 거야. 나도 오빠처럼 와인 한 병 내놔.”

누나라니? 꿈에서라도 나올까 무섭다. 저런 유아기 소녀 같은 녀석에게 누나라고 부르느니 접싯물에 코를 박고 죽는 게 낫다.

“와인 없어.”

있다. 과장님에게 줄 와인 한 병은 남아있다. 엄청 비싼 와인은 아니라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보기 힘든 캐나다산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부러 사온 것이다. 절대 빼앗길 순 없다.

“그럼 한 병 사줘.”

“독하다. 독해. 벼룩의 간을 내어 먹어라. 날강도 같은 밤톨아. 너무 비싼 건 안 돼.”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이 대리면 못들은 척, 못 알아들은 척 외면이라도 하면 된다. 그런데 이 작고 끈질긴 장희에게 그랬다가는 숙소까지 따라올지도 모른다. 대학 2년 동안 신물이 나도록 겪어봤다.

“모스카토 한 병이면 돼.”

“정말? 재벌 집 딸이 웬일로 그런 저렴한 와인을 마신데?”

“재벌들은 어떤 와인을 마시는데? 나는 비싼 와인은 시금털털해서 싫더라.”

“하긴. 입는 것도 애처럼 입으니, 입맛도 달달한 와인이 더 좋겠구나?”

“어쩌겠냐? 와인 맛을 알 시기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니. 좋은 와인은 구하기도 귀찮고 그냥 동네 마트만 가도 구할 수 있는 게 모스카토다 보니 입맛이 저렴해져서 다른 와인은 못 마시겠더라.”

애 같다고 놀렸더니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저 소리를 들으니 조금 불쌍해지긴 했다. 고 이사에게 선물한 와인도 꽤 달달해서 먹기 좋을 테고, 그게 아니라도 스파클링 와인이나 화이트 와인 중에도 고급스러우면서 달달한 제품은 얼마든지 있다. 찌질한 재벌 딸이라니. 안 된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예전에 저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 마음이 약해져서 교직원 식당에 데려가 밥을 사주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재벌 딸이다. 교직원 식당의 밥값은 학생식당의 밥값의 무려 두 배가 넘는다. 내가 기억하기로 학생 식당 밥값은 1,500원이고, 교직원 식당 밥값은 4,000원이었다. 천하의 사기꾼 같으니라고. 마음 같아서는 목을 졸라 예전에 교직원 식당에서 먹은 밥들을 토해내게 만들고 싶었다. 그냥 모스카토라고 했으니까, 30,000원이 넘는 모스카도 엠이나 모스카토 로제가 아니라 13,000원 짜리 모스카토 다스티를 사줘야겠다. 그래야 마음의 분이 좀 풀릴 것 같다.

“알았어. 불쌍한 표정 그만 지어. 이따 시내 나갈 일 있으니까 그때 한 병 사다 줄게. 너 그렇게 공짜 좋아하다 나중에 대머리된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장희를 뒤로 하고 얼른 사무실에서 나왔다. 저 밤톨 같은 녀석과 같이 지내다 보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할 것 같지 않아, 소식이라도 알아보기 위해 과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Rrrr

“어. 이게 누구야. 해외로 여행 갔다던 마 대리 아니신가?”

“하하하.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여행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그래? 별일은 없었고?”

“별일이 있을 리가 없죠. 제가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캐나다산 아이스와인 한 병 구해왔으니 본사로 갈 때 드릴게요. 그런데 제가 본사로 들어갈 일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양 팀장과 이 대리 때문에 고생하고 있을 과장님께 내가 뭔가 아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와인을 핑계로 은근히 돌려서 이야기를 했다.

“안 그래도 부장님이 네 이야기 하시더라. 거기서도 성과가 좋았다며?”

다행히 고 이사가 본사에 좋게 이야기해준 것 같았다. 눈에 확 띄는 성과는 없어도 꾸준히 방문자가 늘고 있다. 이제 가을이라 야외결혼식도 예약이 몇 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텔 웨딩사업팀과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끝에 폐백실을 포함한 대관료 전액과 식사, 꽃장식, 무대연출, 2부 연출, 사진촬영에 따른 수익의 10%를 받기로 했다. 그 외에 와인을 포함한 주류와 음료수는 우리가 직접 제공하기로 했다. 우리는 야외식장이 있는 정원을 관리하고 결혼식 당일 테이블과 의자만 설치하면 나머지는 호텔 측에서 알아서 하기로 했으니 손 갈 일도 별로 없다. 거기다 프러포즈 이벤트도 예약이 종종 들어오니 부수입도 제법 쏠쏠해졌다.

“성과까지는 아니고 다행히 매출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어요. 하하하”

“하여간 재주도 좋아. 난 마 대리가 한 반년은 거기서 처박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일을 잘했나봐. 아, 그리고 지금 우리 일도 지지부진이다.”

기다리던 이야기가 나왔다. 업무성과만 좋았다고 바로 본사로 돌아가기는 힘들다. 인사관리에는 절차가 있기 때문에 보통은 업무인수인계다 뭐다 해서 빨라도 보름 후에 복귀할 수 있다. 그만큼 내가 둔했다는 이야기다. 양 팀장과 이 대리가 거의 보름 가까이 뒷공작을 펼쳤는데도 나는 까마득하게 몰랐다. 어쨌든 놀이공원의 성과와 윤 스포츠센터와의 협상이 지지부진한 결과가 합쳐지면 예상보다 빨리 복귀할 수 있게 된다.

“그래요? 일은 거의 마무리 된 것 아니었어요? 팀장님까지 껴서 일을 진행한다길래 금방 마무리 할 줄 알았는데요.”

당연히 지지부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과장님에게는 내가 뒤에서 연막작전을 펼친 사실을 말해드릴 수는 없다. 내가 과장님을 꽤 좋아하고 과장님도 나를 아끼는 편이지만, 나로 인해 2달간 헛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게 말이다. 차라리 너 밀려날 때 좀 더 강하게 항의를 해야 했어. 윤 사장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괜히 팀장 대우로 승진시켜주겠다는 말에 눈이 뒤집혀서 지켜만 봤더니 일이 이렇게 되네. 미안하게 됐다.”

“에이, 그건 아니죠. 제가 알기로는 부장님도 한 끗발 밀렸다고 하던데. 과장님이 나서봐야 미운털밖에 더 박히겠어요? 잘하셨어요.”

“이번 일로 부장님이 자존심이 좀 상하셨나봐. 벼르고 계셔. 아마 양 팀장과 이 대리가 책임을 좀 져야할 분위기야. 웃긴 게 처음에는 옷을 벗기겠다고 노발대발 하시더니 감봉정도로 조용히 처리하실 건가봐. 양 팀장이 잡고 있는 줄이 보통 줄은 아닌 것 같더라. 지금 분위기로는 마 대리 너도 일주일 안에 불러들일 모양새야. 확실히 결정되면 연락하려고 했는데, 네가 전화를 해서 미리 말해준다. 준비하고 있어.”

예스. 드디어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었다. 4차원 소녀 고장희의 얼굴도 일주일만 보면 끝이다. 갑자기 시원섭섭해졌다. 그래도 놀이공원에 정이 꽤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 거였어요? 어쩐지. 부장님도 손 못쓰게 하고 갑자기 놀이공원으로 파견가라고 할 때부터 좀 대단한 끈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조용히 마무리될 정도면 정말 보통 끈이 아니었나보네요.”

“들리는 말로는 3명의 대군 중 한 명의 최측근이라는 말이 있어. 동기에게 은근슬쩍 물어봤는데 아직 정확하게 정체가 드러나지 않던 셋째대군이 세력 확장을 위해 무리수를 던졌다고 하더라.”

과장님 말씀이 너무 재미있었다. 음모론이 등장했다. 아무튼 우리 과장님 음모론이나 은어를 너무 좋아하신다. 내가 회사에서 쓰는 스페셜 원, 넘버 투, 마패 이런 단어들도 전부 과장님에게 배웠다. 과장님은 그런 은어를 비롯한 회사 소문에 대한 정보력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유능(?)하시다. 대군은 아마 회장님 아들들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왕자라는 말도 놔두고 ‘대군’이라니? 누가 처음 작명했는지는 몰라도 사극을 무지 좋아하는 작자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셋째대군이라니 고 이사가 알면 펄쩍 뛸 일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아마도 고 이사 형님 쪽 누군가가 벌써부터 물 흐리기에 들어간 것 같았다. 벌써부터 고 이사에 대한 견제를 위한 물밑작업이 들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고 이사가 과연 이런 견제를 뚫고 어떻게 커나갈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요? 그런데 세력도 아직 제대로 못 만들었다면서요? 양 팀장님이 그런 불확실한 쪽에 선을 댔을지 모르겠네요. 꽤 영악하잖아요. 우리 팀장.”

“음. 일리가 있는 말이네. 팀장이 여우같은 면이 있는데 그런 무리수를 둘리가 없지. 그럴듯해. 그럼 누구지? 이거 점점 재미있는데?”

우리 과장님. 음모론에 너무 깊이 빠지셨다. 이대로 놔두면 끝이 안날지도 모른다. 그냥 솔직하게 나와 고 이사 사이에 교감이 있었다고 말하고 은밀하게 소문진압을 요청할까 하다가 말았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고 이사도 조용히 지내는데 내가 먼저 나설 필요는 없었다. 나는 내 할 일만 하다가 고 이사가 크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래도 과장님이 고 이사의 이미지를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음모론의 허점을 살짝 집어냈다. 사람일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어도, 웬만하면 과장님도 함께 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과장님? 아무튼 저는 일주일 안에 복귀한다고 생각하고 준비하겠습니다. 다음 주에 제가 산 와인으로 코키지 해주는 바에 가서 한잔해요.”

“응? 그래. 그래. 덕분에 새로운 와인도 먹어보겠네. 다음 주에 보자. 수고.”

나도 과장님 영향 때문인지 대군들의 대결이 기대됐다. 아직은 나도 방관자일 뿐이고, 싸움은 원래 옆에서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는 법이다.

◆ 고장희의 숙소

“똑똑”

“네. 나갑니다.”

“어? 마탱이. 야밤에 숙녀의 방을 찾다니. 밤이 외로워?”

“야. 밤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거나 받아.”

동수는 장희의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뭔데?”

“뭐긴 뭐야? 아까 네가 칭얼거리면서 사달라던 모스카토다.”

“그래? 아무튼 고마워. 땡큐다. 마탱아.”

“미국에서 9년 동안 유학했다는 녀석의 발음이 그게 뭐냐? 잘 마셔라. 난 간다.”

“왜 같이 한잔하지?”

“됐거든. 나는 우리 님이랑 전화 통화나 하련다.”

“나도 예의상 한 말이야. 잘 마실게. 안녕.”

동수는 저렴한 모스카토 타스티를 냉큼 받는 장희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삼만 원이 넘는 다른 와인을 사다주지 않은 자신의 영특함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모스카토가 왜 이렇게 커? 우와. 진짜 와인병에 들어있는 거네. 뭐야 마탱이. 투덜투덜 거리더니 좋은 것 사왔네. 나는 벨라다 모스카토(시중에서 4,000원 정도에 판매)를 사올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맛있으려나? 어디보자. 오. 와인 따개도 들어있네. 어떤 맛일까?”

장희는 와인 스크류를 꺼내놓고 한참을 낑낑거리더니 한참이나 걸려 코르크마개를 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쓰던 머그잔을 꺼내 동수가 사다준 와인을 쪼르륵 따랐다.

“향은 좋네. 어디 마셔볼까. 음”

머그잔에 와인을 따른 장희는 코를 킁킁거리며 와인향을 맡더니 맥주를 마시듯 한입에 내용물을 털어 넣어버렸다.

“캬~. 오. 이건 내가 먹던 것보다 더 맛있잖아. 뭐지? 왜 이렇게 좋은걸 사준거지? 혹시 마탱이 이 녀석 내게 관심이 있는 건가? 그럼 안 되는데. 내겐 형진이 밖에 없는데.”

동수는 재벌 딸인 장희가 이 정도로 저렴한 입맛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작품 후기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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