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방귀 뀐 놈이 성낸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나는 과장님과의 통화를 마치고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그래서 그 의문을 풀기위해 고 이사의 방을 찾았다. 나도 과장님처럼 음모설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고 이사의 의도가 숨어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접니다. 이사님. 잠깐 시간 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거기 앉아.”
“네”
고 이사는 나를 자리에 앉게 하고 원두커피 두 잔을 컵에 따라 테이블로 가져왔다.
“자. 마셔.”
“네. 잘 마시겠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야?”
“혹시 셋째대군으로 불린다는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괜히 빙빙 돌리기 싫었던 나는 고 이사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셋째대군? 처음 들어보는 이야긴데.”
“그래요? 지금 회사에서는 회장님 아드님들을 대군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그래? 대군이라 재미있는 표현이네.”
“그냥 재미로 듣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해서 말이죠.”
나는 능청을 떠는 건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고 이사를 보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
“의미심장?”
“네. 회장님 아드님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 많은 단어 중에서 왜 하필 대군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 조금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의미심장하다라. 자네 생각은 어때? 왜 하필 대군이라고 부르는 것 같아?”
“처음에는 그냥 사극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장난삼아 부르기 시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생각을 곰곰이 해보니 이것은 혹시 이사님 측에서 일부러 그렇게 지어 부르도록 하지 않았나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내가? 내가 왜? 회사에다가 쓸데없는 소문이나 내고 다닐 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나? 난 그럴 이유가 없어.”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대군이 누군지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수양대군.”
나는 ‘수양대군’이라고 대답하던 순간 의뭉스럽기만 하던 고 이사의 눈빛이 장난기로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고 이사도 슬슬 기지개를 켤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 물론 수양대군도 유명하죠. 세종의 첫째 문종, 둘째 수양대군, 셋째 안평대군. 결국 문종의 아들 단종과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니 그 역사를 담았다면 꽤 위험한 의미를 담고 있겠군요. 앞으로 조심하셔야겠습니다.”
“하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그럼 앞으로는 정말 조심해야겠는걸. 둘째 형님이 그런 의미를 담고 일부러 소문을 냈을 수도 있잖은가?”
“에이. 저는 그런 식으로 회장님 둘째 아드님에게 화살을 돌리려는 이사님의 꼼수로 보이는데요?”
“꼼수?”
내 말에 장난기 있던 고 이사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네. 꼼수요. 나이가 드셨다고는 해도 회장님은 여전히 건재하십니다. 요즘 의료기술이라면 아마도 오래오래 사실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드시면 경영일선에서는 물러나더라도 배후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시겠죠. 그리고 이사님의 큰 형님도 매우 건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약했던 문종과는 큰 형님이 맞지 않는다?”
“네. 저는 꼭 회장님이 이방원 그러니까 태종 같습니다. 그리고 차례대로 양녕대군, 효령대군, 충녕대군. 저는 지금 회사에서 돌고 있는 대군이라는 의미가 세종대왕의 고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은어 따위를 소문내서 뭐하려고? 소문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고 이사의 말이 맞다. 소문이 소문으로만 그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서동은 서동요를 지어 소문을 퍼트리는 방법으로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소문은 의외로 큰 힘이 되기도 한다. 나는 이것이 꼭 고 이사의 의지가 담긴 출사표 같았다. 다르게 말한다면 조용한 선전포고라고도 할 수 있다.
“이사님의 출사표라고 할 수 있겠죠. 그것도 수양대군 고사를 이용해 교묘하게 큰 형님이 작은 형님을 견제하게 만들면서 속내는 감추는 것이죠. 제가 생각할 때 진짜 속내에는 ‘형님들은 내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처럼 독선적으로 살지 않겠다.’라는 이사님의 호연지기를 담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마 대리. 정말 상상력이 뛰어나군. 억측이야. 억측. 그런 쓸데없는 소문을 낼 시간이 있었다면 세력을 키우는데 더 힘을 쏟았을 거야.”
“글쎄요. 정말 아닙니까?”
나는 진지하게 고 이사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궁금해?”
“네”
“그럼. 지금부터 나와 일하던가? 그럼 알려주지. 원래 5년 뒤에 선택하기로 했잖아. 그러니 그때까지는 우군인지 적인지 알 수가 없는데 내가 뭘 믿고 이야기를 해.”
맞다. 고 이사의 말이 맞다. 괜한 호기심 때문에 쓸데없는 곳에 신경을 썼다. 다른 사람은 예상도 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절묘한 꼼수를 발견했을 때 정말 그것을 의도했는지 여부가 궁금해 미칠 때가 있다. 나처럼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너무 앞서갔다. 아직은 서로 교감만 나눴을 뿐이다. 그리고 정말 의도했다면 나만큼 고 이사도 답답할 것이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는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정확하게 자기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꼼수를 만들어냈는지 자랑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할 것이다.
“됐습니다. 제가 너무 오버한 것 같습니다. 이사님이 그런 꼼수를 만들어 낼 리가 없죠. 저와 친하게 지내는 과장님 때문에 제가 너무 음모론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나는 당연히 5년을 기다릴 것이다. 혹시나 정말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출사표였다면 고 이사의 입이 근질근질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사님이 그런 꼼수를 만들어 낼 리가 없죠.’라며 고 이사의 마음을 살짝 떠봤다. 대답을 들으면 좋고, 못 들어도 하는 수 없고. 내 말에 고 이사는 뭔가 고민을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속으로 ‘넘어와라.’, ‘넘어와라.’하며 주문을 외웠다.
“혹시 말이야. 어리(양녕대군이 폐출되는데 가장 큰 원인이 된 여인) 같은 여자 어디 없을까? 일반인 중에.”
빙고. 역시 ‘대군’이라는 은어는 정말로 고 이사의 장난이었다. 그의 말은 속내를 은근히 돌려 최후의 자존심은 지키면서, 노골적으로 자신의 수 하나를 공개해서 내 반응이 어떤지 지켜보겠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종종 이런 잔머리 대결을 할 수 있어서 고 이사가 좋은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정의롭지만 가끔은 필요에 따라 술수도 부릴 줄 아는 융통성 있는 사람이 고 이사였다.
어리 같은 여자라. 결국 서시, 양귀비, 초선, 왕소군 같은 경국지색의 여인을 원한다는 말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어리가 아니었다면 양녕대군은 무사히 왕위에 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어리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한글을 배우지 못했을 거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누구에게 사용할지는 모르겠다. 고사를 인용한다고 해도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융통성 없는 짓이다. 어쨌든 지금 고 이사에게는 단단한 벽이 하나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결국 괜한 소문이 나거나 경계심을 지우기 위해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인만큼 예쁜 여자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고 이사가 내 호기심을 은근히 풀어준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싶은데 마땅한 여자가 없다. 아! 있다. 압구정동 바텐더. 은근하면서도 세련된 섹시함과 서글서글한 성격을 가진 매력적인 여인.
시연이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나 또한 그 여인에게 빠졌을지도 모를 만큼 매력적인 여자가 W bar에서 일하는 조연서였다. 잠깐 고민이 됐다. 지금 내가 말을 하면, 그때부터 그녀의 삶은 풍랑 속으로 던져질지도 모른다. 다행이라면 단단한 벽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할 비밀병기를 고 이사가 함부로 대할 리는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미끼를 던지던 조연서를 유혹하는 것은 고 이사의 몫이고, 그 거래를 받아들일지의 여부는 그녀가 선택할 일이다. 그냥 그렇게 나를 정당화했다.
“압구정동에 가면 W bar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바텐더로 일하는 조연서라는 여자가 있는데, 이사님 눈에 찰지는 모르겠군요.”
“그래?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반가운 소식이군.”
내 말을 듣던 고 이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자신이 말한 내용의 무게감을 알고 있을 내가 웬만한 여자를 소개해줄 리는 없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았다.
“휴. 제가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술을 판다고해도 소믈리에와 바텐더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나도 싫다는 사람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어.”
당연히 억지로 일을 시킬 리는 없다. 그렇지만 정말 그녀가 필요하다면 보통 사람은 거절하기 힘든 대단한 미끼를 던질 것이다. 아니면 고 이사 자신이 직접 미끼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잘생긴 재벌 2세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들이 쉽게 거절하기 힘든 달콤한 유혹이 될 것이다. 나 또한 고 이사에게 그 정도 독심은 있기를 바란다. 어쨌든 그는 정상을 바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참.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분위기를 보니 다음 주면 본사로 갈 것 같습니다..”
내놓고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라 나는 말을 돌렸다.
“내가 신경 쓸게 뭐있었다고? 그냥 사실을 보고했을 뿐이야. 마 대리가 그동안 노력한 것이 얼만데? 그래도 떠난다니까 섭섭한 걸?”
“이사님도 오래 계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출사표도 던져놨고, 동지랜드의 원래 책임자가 될 사람도 돌아왔으니 별로 할 일도 없으시잖아요?”
“그래도 좀 지켜봐야지. 막내라서 그런지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옆에서 지켜보기가 조마조마해.”
이 양반도 참 얼굴이 여러 개다. 방금 전까지는 조금 야비할지도 모르는 술수에 대해 이야기 하더니 동생이야기가 나오자 어느새 자상한 오라비가 됐다. 내게는 가까이하기에 무서운 4차원 소녀인데, 고 이사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어쩌면 장희가 삼 형제의 권력투쟁 밖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 윤 스포츠센터
요즘 들어 수현은 운동에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별다른 일도 없는데 러닝머신은 지겹고, GX프로그램은 흥미가 떨어지고, 운동기구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수현씨”
그렇게 수현이 운동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두근’
자기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수현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 알 수 없는 반가움이 밀려들어왔다. 수현은 자신의 이런 낯선 감정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당황한 자신의 모습을 들킬까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잘 지냈어요? 제가 이야기했죠? 친구들과 여행 다녀온다고. 여행 내내 수현씨가 너무너무 보고 싶더라고요. 수현씨는 안 그랬어요?”
수현은 현우의 질문에 하마터면 ‘저도요.’라고 대답을 할 뻔했다. 자꾸만 현우라는 남자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이 싫어졌다. 남자라는 존재들은 항상 자기에게 상처만 주는 존재였다. 돈은 많이 벌어다주지만, 항상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가 싫어서 독립을 했다. 자신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사랑이라고 믿었던 남자는 군대를 다녀온 후 어린 후배와 바람이 났다. 자신에게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회사 일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충 일하고 시집이나 가라는 남자직원들의 조롱이었다.
두렵다. 수현은 자꾸만 마음의 빗장을 열고 들어오려는 현우가 두려웠다. 또다시 상처받을까봐 겁이 났다. 그런데도 현우를 밀어내지 못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길래 당분간은 마음이 흔들릴 일도, 귀찮은 일도 없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었다. 그런데 해맑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그동안 왜 그렇게 운동에 집중이 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반가웠다. 그래서 더더욱 숨고 싶어졌다.
“어! 이번 표정은 처음 보는 모습인데요. 뭐지? 웃는 표정도 아니고, 화난 것 같지도 않고, 당황한 것 같지도 않고. 혹시 정말 내가 그리웠던 거예요?”
다정한 현우의 목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물이 날 것처럼 반가웠다. 수현은 땀도 나지 않는 얼굴을 수건으로 일부러 닦았다.
“어라. 자꾸자꾸 표정이 바뀌네. 오. 혹시 집에서 표정연습이라도 했어요? 오늘따라 유달리 표정이 다채롭네. 예뻐요. 잘했으니까 선물을 줘야지. 여기 선물요. 받아요.”
현우는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만 한 상자를 건넸다. 망설이던 수현이 주저주저하면서 현우가 건네는 상자를 받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하얀 강아지 모양이 달린 머리끈이 들어있었다.
“수현씨 같이 흑단처럼 곱고 까만 머리에 잘 어울릴 것 같아 공항에 있는 아가타 매장에 가서 샀어요. 친구 녀석이 저 보고 짠돌이라고 놀렸지만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공항 면세점 여기저기를 열심히 돌아다녀봤는데 그게 제일 마음에 들더라고요. 하하하.”
현우는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열심히도 말했다. 평소에 알뜰하게 사는 편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까지 아끼지는 않는다. 그래도 선물을 살 때 친구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리는지 아니면 수현이 선물을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된 것인지 안절부절못했다.
현우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현은 가만히 현우가 준 선물을 바라봤다. 그녀는 현우가 준 하얀 강아지 모양이 달린 머리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부담스럽게 비싼 선물이 아니라서 좋았고, 현우가 열심히 발품을 팔아서 골랐다는 사실이 좋았다. 머리끈에 달린 하얀 강아지가 현우를 닮은 것 같아 더욱 좋았다. 그것을 머리에 묶고 있으면 주인을 지켜주는 충실한 강아지로 변해 자신에게 상처 주는 사람을 막아줄 것 같았다.
수현은 자신의 머리를 묶고 있던 수수한 검은 머리끈을 풀었다. 그리고 현우가 준 새로운 머리끈으로 정성껏 머리를 묶기 시작했다.
“어때요?”
머리를 다 묶은 수현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현우에게 물었다.
“네?”
“어떠냐고요?”
예상치도 못한 수현의 질문에 현우가 놀라서 반문하자, 그녀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자. 잘 어울려요. 정말 예뻐요.”
“고마워요.”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온 수현은, 현우의 입이 벌어지든 말든 옆에 있는 운동기구에 앉아 열심히 운동을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저도 모르는 사이에 쿠폰선물 건수가 1000건이 넘었더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성원에 보답하려면 열심히 글을 써야겠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