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6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대리에게 시원하게 말을 퍼붓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내가 처음으로 대들어서 지금은 저렇게 멍하니 있어도, 정신을 차리고 나면 약이 올라서 무슨 짓을 하려고 들지 알 수 없다. 최대한 빨리 윤 스포츠센터와의 협상을 마무리 짓고 과장님이 팀장 대우를 달아야 완전히 갈라설 수 있을 것 같다. 이 대리와 같이 괴상한 놈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도 잊지는 않을 것이다.
나중에 내가 힘이 생기고 뭔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면 방법을 찾아서 복수를 할 생각이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말이 있다. 지금 내가 이성을 잃고 이 대리와 멱살잡이를 해봐야 내게 아무런 득이 될 것이 없다. 천천히 그리고 교묘하게 옭아매서 꼼짝 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말려 죽여야 속에 있는 분이 풀릴 것 같다.
Rrrr
윤 스포츠센터와의 일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내선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네. 마케팅 1부 3팀 마동수 대리입니다.”
“날세.”
직장 생활을 잘하려면 사람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내가 대대 인사과에 있으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통신보안 XXX대대 인사과 마동수 이병입니다.’라고 전화를 받으면, 간부라는 작자들은 자신들의 관등성명을 거의 말해주지 않는다. 이등병인 내가 처음부터 간부 목소리를 기억할 수는 없다. 그래서 처음 전입 가서는 갈굼도 많이 받았다. 유능한(?) 행정병이 되기 위해 겪는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아무리 친절한 고참이 있다고 해도 전화목소리를 가르쳐줄 능력은 없다. 최대한 긴장한 자세로 열심히 목소리를 기억해야 갈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여기 1층이야’라고 말하면 대대장이다. 그럴 때는 사무실이 떠나갈 것 같은 목소리로 ‘필승’이라는 경례를 해야 한다. 대대장 전화를 그렇게 받는다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밖에도 인사과장님보다 높으신 분이 전화를 하면 목소리를 좀 높이고, 그 아래로는 적당히 경례를 하면 된다. 문제는 인사과다보니 타대대 간부들에게도 전화가 종종 오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까지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고생을 하다 보니 우리 회사 간부들의 전화 목소리는 한 번 들으면 웬만해서는 기억한다. 군대도 가끔 인생에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아. 부장님. 안녕하셨습니까? 안 그래도 복귀인사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됐어. 여기 올 것 없고, 이따 점심이나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나 좀 해.”
“아. 그러면 부장님이 좋아하시는 금산복국에 예약이라도 해둘까요?”
“그럴까? 그래 그럼.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복국정식으로 예약해두게.”
“네. 알겠습니다. 좀 이따 뵙겠습니다.”
아! 이 얼마나 정상적인 직장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란 말인가. 보통 사람들은 이렇다. 자기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빠릿빠릿함,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해주는 기특함만으로도 3만원이 넘는 밥을 사준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부장님이 식사를 같이 하자고 했으니 밥값을 내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3만원이 넘는 밥을 얻어먹는 것은 결국 자기 능력이다. 우리 사무실 직원들은 대체 왜 그렇게 이상한 인간들만 모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신입 두 명은 지극히 정상적인 녀석들만 들어와서 다행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주차장에 있는 차에 가서 부장님께 드릴 양주를 챙겼다. 겨우 3만원이 넘는 밥을 먹고 이런 비싼 술을 선물하면 손해가 될 수 있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양 팀장과 틀어진 부장님은 내게 괜찮은 방패막이가 될 수 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잘 보여야 회사생활이 편하다.
“제가 좀 늦었나 봅니다.”
점심시간이 5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부장님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냐. 내가 볼일 좀 보고 바로 이리로 와서 그래. 일단 앉지.”
“네. 아. 그리고 이건 이번에 휴가 다녀오면서 부장님 생각이 나서 샀습니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오. 시바스리갈이네. 그것도 25년산이네. 제법 비쌀 텐데.”
우리 부장님은 박통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시바스리갈을 좋아하신다. 우리 아버지는 정도가 심하신 편인데 그래서 대학 초년생일 때의 나는 아버지와 많이도 싸웠었다. 나는 ‘결국은 독재자입니다.’라고 대들고, 아버지는 ‘포스코라는 회사가 박통의 노력에 의해 세워질 수 있었으며, 그 덕에 우리 가족이 편하게 살 수 있었다.’며 반박을 하셨다. 처음으로 아버지께 바득바득 대들었던 사건이었다. 나중에는 결국 가치관의 차이라며 그냥 나 스스로가 덮어버렸다.
먹고 살기 막막한 시절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포스코에 취직을 하셨고, 평생직장이라고 믿고 살아오신 분이다. 그러니 당신께는 당신만의 가치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덕분에 대학진학도 못하고 평생을 자식들 뒷바라지만 해 오신 아버지께 자식인 내가 감히 틀렸다고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식인 내가 아버지의 가치관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결국 지금까지 살아온 아버지의 삶도 틀렸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는 더 이상의 정치이야기가 사라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세상 살기가 편해졌다. 정치색이 다르다고, 종교가 다르다고 누군가를 배척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덕분에 부장님이 좋아하는 술도 아무렇지 않게 선물할 수 있게 됐다.
“면세점에서 사서 저렴하게 구입했습니다. 너무 부담가지지 마세요.”
면세 혜택은 술 한 병이 끝이다. 그래도 ‘네. 제값 주고 샀습니다.’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 음식도 나왔으니 일단 한잔하지.”
종업원이 따끈한 복국과 맛깔스러운 다른 복요리를 가지고 오자, 입이 동하셨는지 그 자리에서 술을 개봉해서 한잔 따라주셨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의정부 가서 고생이 많았지?”
“고생은 뭘요. 공기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다 왔습니다. 부장님께서 신경 써주셔서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잇, 못난 사람들. 내가 그동안 양 팀장에게 섭섭하게 대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지 누가 알았겠나? 앞으로 자네가 고생 좀 해야 할 거네.”
양 팀장과 이 대리가 깽판 친 일을 나보고 잘 수습하라는 이야기였다. 나 또한 반가운 소리다. 빨리 일을 처리하고 양 팀장과 이 대리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가볍게 반주로 두 잔씩만 나눠 마시고, 식사를 마쳤다. 이번에 양 팀장이 뒤통수를 친 일에 대해서 서운한 점이 많았는지 한동안 그 이야기만 계속하셨다. 혹시나 양 팀장과 선이 닿았다는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 은근히 떠봤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셨다. 부장님의 원한이 양 팀장에게만 향하는 것으로 보아 정말 과장님이 말씀하신 ‘대군’들 중 한 명은 분명한 것 같았다.
부장님을 모셔다 드리고 나는 윤 스포츠센터로 왔다. 부장님의 허락도 있었으니 일을 빨리 처리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윤 사장님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 양반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무슨 장난을 치면서 나를 골탕 먹일지 걱정이 앞섰다.
“그래. 어서 오게. 오랜만이네. 시연이를 통해 보내 준 술은 잘 마셨네.”
원래는 직접 전해드려야 하는데, 한 번 윤 사장님의 마음을 떠보고 싶은 생각에 시연이를 통해 선물을 전했다. ‘나는 시연이에게 이런 선물을 전해줄 수 있는 사이입니다.’라고 관계를 우회적으로 알리려는 의도였다.
“좋은 술을 워낙 많이 가지고 계실 텐데, 눈에 차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저렴한 술이라고 해도 선물하는 사람의 형편도 생각해야지 않겠나?”
저렴한 술이라면서 은근히 장난을 치셨다. 윤 사장님의 이런 능구렁이 같은 반응을 오랜만에 접하고 보니 반갑다.
“그래도 저는 이미 큰 선물 하다 드렸지 않습니까?”
“무슨 큰 선물?”
“두 달간의 시범 운영 반응이 좋아 탁아소 회원모집 결과가 무척 만족스러우셨다면서요? 들리는 말로는 탈락한 회원들의 성화가 대단해서 20명을 추가로 받으셨다던데요. 그래서 직원도 더 뽑고 바쁘셨다고 들었습니다.”
귀족탁아소라는 노이즈마케팅이 생각보다 효과가 컸다. 들리는 말로는 임신한 부부도 나중을 위해 일부러 비싼 돈을 주고 스포츠센터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태어나자마자 호텔에 돌잔치 예약부터 하는 곳이 강남이라고 하더니 정말 놀라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흠흠. 뭐 좀 인기가 있기는 했지. 그래서 말이야. 이것부터 받게.”
“이게 뭡니까? 아니 왜 이런 큰돈을 제게 주십니까?”
나는 윤 사장님이 주는 서류봉투를 열어봤다. 그곳에는 로열티관련 계약서와 내 명의로 된 통장이 들어있었다. 통장을 열어보니 그곳에는 무려 3억이라는 돈이 입금되어 있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남의 돈을 빼앗은 적이 없네.”
“그래서요?”
“어디까지나 자네 아이디어 아닌가? 이 윤승태가 한 달에 50만원을 주고 ‘먹고 떨어져라.’며 그 코 묻은 돈을 가로챌 성 싶었나?”
“아니 그래도 이렇게 큰돈을 제가 어떻게 받습니까?”
“자네에게는 큰돈일지 몰라도 내게는 전혀 부담이 없는 돈이네. 일단 그 돈은 계약금이고, 계산하기 복잡하니 탁아소 한 곳당 1년에 1억씩 지급할걸세. 기한은 20년이고 20년 뒤에는 자네 아이디어가 완전히 우리 윤 스포츠센터의 소유가 된다는 계약서네. 사인하게.”
갑작스러운 돈벼락에 뭐가 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계약금도 계약금이지만, 스포츠센터 7곳의 탁아소가 모두 잘되면 일 년에 7억이라는 돈이 생긴다. 20년이면 140억이다. 이 돈을 도대체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건 도저히 받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봐. 마 대리.”
“네. 사장님”
“이번에 회원모집하면서 탁아소 수입만 얼마인지 아나?”
“글쎄요.”
“회원 전원이 1년 계약을 해서, 2,800만원씩 70명이네. 거의 20억이지. 그리고 저녁타임과 주말에도 3개월씩 신청받기로 했네. 큰돈은 아니겠지만 그것도 제법 쏠쏠하고. 거기다 유아매장 수입도 생각보다 많아. 생후 1년이 겨우 넘은 아이에게 100만원이 넘는 옷을 사 입히는 작자들이 정말 있긴 하더군. 게다가 회원 수도 조금이지만 증가했고. 알아보니 로열티를 지급하는 곳들 중에는 매출의 10%를 주는 곳도 있더군. 그런데 직원들 성과급도 두둑이 주려다보니, 그냥 딱 잘라 1억으로 결정했네.”
논리적인 이야기긴 했다. 정말 받아도 괜찮을까 고민이 들었다. 그런데 잔머리를 조금 돌린 결과로는 너무 과했다. 나는 우리 회사와의 연계를 위해서 일했을 뿐이다. 회사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고 해서 이런 큰돈을 주는 곳은 없다. 확실히 부담스럽다. 시연이와의 관계 때문일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래도 금액이.”
“됐다고 했네. 나는 일한만큼 돈을 주는 사람이야.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 웬만한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들보다 수입이 많아. 부자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그만큼 서비스의 질이 좋아야 하거든. 누차 이야기하지만 내게는 그 돈도 코 묻은 돈에 불과해. 설마 내가 그런 돈을 탐내는 사람으로 만들 참인가? 오늘 자네가 온 이유가 뭔가. 어서 사인하고 일이나 하지?”
이제는 노골적으로 협박까지 하신다. 사인하지 않으면 협의도 없다는 말씀이다.
“예.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결국 사인을 했다. 우리 회사는 반기별로 성과급을 주는데, 회계기준일이 3월인 덕분에 며칠 전에 성과급을 받았다. 놀이공원의 일까지 포함되어서 그런지 무려 1,500만원이 들어와 돈벼락 맞았다고 좋아했는데, 그건 벼락이 아니라 그냥 정전기에 불과했다. 윤 스포츠센터와의 협상이 잘 끝난다는 가정 하에, 후반기 성과급을 포함해서 올해는 연봉이 7,000만원 가까이 된다며 기뻐했던 내가 우스워졌다.
은행에 투자해둔 90억을 제외하고 정기예금으로 5억을 넣어둔 통장의 이자만 석 달 동안 400만 원 정도가 되었고, 원래 있던 내 돈 전부와 생각 없이 넣어둔 5억이 들어간 자유입출금통장에는 그 동안 회사에 받은 돈과 형진이 덕분에 6억이 넘는 돈이 남아있다. 외제차도 사고 여행갈 때 펑펑 썼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늘어서 기분이 이상했는데, 앞으로는 돈이 더욱 늘어나게 생겼다.
“잘 생각했네. 그럼 원래 자네가 온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지?”
윤 사장님은 내가 사인하는 모습을 보며 만족해하셨다. 그리고 바로 일 이야기를 꺼내셨다.
“혹시 그동안 저희 회사에서 제의한 협의 내용 중에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일부러 협상을 뒤로 미뤘다고 해도, 그동안 논의를 해왔으니 우리가 제의한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 내용이 마음에 든다면, 이제 나도 왔으니 빠르게 진행만 하면 된다.
“다 마음에 안 드네.”
“네?”
아. 이건 또 무슨 망발(?)이신지 모르겠다. 큰돈으로 사람 마음을 안심시켜놓으시더니 제대로 한 방 먹이신다. 그 동안 우리 회사에서 제의한 내용이 다 마음에 안 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쩐지 처음부터 너무 좋게 나오신다 했다.
“사기꾼들도 아니고 나를 숫제 바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네.”
“음. 그래도 조금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우선 지분율부터 마음에 안 드네. 6:4가 뭔가? 나보고 돈은 낼 필요가 없으니 지분율을 그렇게 하자고 하더군. 그런데 다른 제의가 무슨 소용이 있나?”
이건 좀 이상했다. 처음 부장님 말씀으로는 51:49 정도로 해도 우리 회사가 더 많은 지분만 가지고 있으면 괜찮다고 하셨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양 팀장이 공을 세우려고 무리수를 던진 것 같았다.
“제가 다른 곳으로 간 사이에 회사의 정책이 바뀐 것 같군요. 그것은 제가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그래도 저희 회사가 더 큰 지분을 가져가야 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안전장치가 있기 전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믿음이 떨어졌어.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공탁금조로 걸겠다는 담보물도 알아보니 가격이 형편없는 황무지더구먼. 평수만 넓었지 시가가 100억도 안 되는 땅이야. 단물만 다 빨아먹으면 우리를 쫓아내겠다는 속셈이 훤히 보이네. 겨우 100억으로 우리 노하우와 우리 센터 인지도를 사겠다는 소리 아닌가?”
양 팀장과 이 대리가 제대로 미쳤다. 그리고 나도 잘못했다. 나는 정말 예전 조건 그대로 진행이 되고, 그 와중에 윤 사장님은 일부러 일을 미룬다고 생각했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대뜸 찾아온 내 잘못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복귀하자마자 일을 빨리 진행하겠다는 욕심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왔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나? 양 팀장 그 여자 참 더럽게 놀더군. 자네가 해준 말이 있어서 어떻게 행동하나 궁금해서 가봤더니 아주 가관이더군.”
“예? 아니 그런 일이 있으면 거절하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거긴 또 왜 나가셨습니까?”
“흠흠. 자네가 하도 보통 여자가 아니니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가 궁금해서 나가봤지. 그냥 눈만 버리고 왔어. 그러기에 왜 그런 소리를 해서 사람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러나.”
와. 완전히 내게 뒤집어씌우신다. 나는 분명히 보통 여자가 아니니 조심하시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래도 남자라고 호기심에 나가보셨단다. 이 사실을 시연이에게 알릴까하는 유혹이 잠깐 들었다.
“결국 호기심에 나가보셨다는 이야기네요. 그런데 그냥 눈만 버리고 나오셨다고요?”
“그. 그럼. 나는 우리 노 여사 말고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번 준적이 없어.”
솔직히 양 팀장 정도의 색기가 넘치는 여자가 대놓고 유혹을 하면 아무리 의지가 대단한 남자라도 침 한번은 꿀꺽하고 넘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 친구를 옆에 두고도 섹시한 여자가 지나가면 눈을 흘끔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 남자의 본능이다. 여자들이 드라마를 보며 멋진 ‘실장님’ 모습에 환호하는 것과 비슷하다. 결혼한 여자가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닌 것처럼, 남자 또한 여자 친구나 부인에 대한 마음이 식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쨌든, 윤 사장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세상 남자들이 다 안 그래도 윤 사장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사모님에 대한 사랑이 그렇게 깊으시다니 존경합니다.”
“하하하. 그게 또 그런 이야기가 되나? 당연한 이야기를 가지고 존경까지야.”
“그럼 오늘은 그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준비를 소홀히 하고 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은 내가 정말 잘못한 것이다. 금방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협상 조건부터 다시 결재를 받고 시작하려면 쉽게 끝날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양 팀장과 이 대리는 끝까지 사람을 귀찮게 한다.
◆ 태균 무공을 익히다.
여자 혼자 사는 선희의 집에서 묘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악~. 태균씨 좋아요. 계속 해줘요.”
“헉. 헉. 으윽. 서. 선희씨.”
선희가 재촉했지만, 태균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태균도 어느 정도 여자 경험이 있다. 그런데 선희는 뭔가 달랐다. 절정에 도달하기 직전이 되면 선희의 질 내부가 미친 듯이 수축을 시작한다. 그 엄청난 진동과도 같은 움직임이 너무나도 절묘해서 태균은 선희를 절정으로 이끌지 못하고 파정을 하곤 했다.
오늘도 역시 선희의 저 본능적인 움직임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견뎌보려고 속으로 애국가를 불러보기도 하고 다른 생각도 해봤다. 그런데도 잘 안 된다. 태균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였다.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흥분한 선희의 얼굴을 외면하며 옆으로 눈을 돌렸는데, 바로 옆 책상위에 예전에 봤던 엄청난 크기의 바퀴벌레와 비슷한 덩치의 갈색 바퀴벌레가 태균을 노려보고 있었다.
‘흠칫’
그 녀석과 눈이 마주친 태균은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그렇지만 지금 관계를 멈출 수는 없었다. 남자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오늘도 선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끝나면 자기 스스로가 한심할 것 같아서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하는 중이었다.
‘침착하자.’
바퀴벌레의 흉흉한 기세에 겁이 났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허리를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도 태균은 있는 힘을 다해 바퀴벌레를 노려봤다. 서로의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1분, 2분, 3분 시간은 계속 흘렀다. 방안은 선희가 지르는 신음소리로 넘쳐났지만, 인간과 벌레의 엄청난 기세 싸움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푸드득”
10분이 넘은 시간동안 둘의 대결은 계속되었고, 태균의 기세에 눌린 바퀴벌레는 날갯짓을 하며 냉장고 뒤편 어딘가로 사라졌다.
“태균씨. 제발. 제발 그만요. 저 이제 힘들어요.”
갑자기 들려오는 선희의 목소리에 태균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선희가 몸을 일으켜 태균의 상체를 안았다.
“아. 태균씨. 오늘 정말 너무 좋았어요. 이런 기분 처음이에요.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태균씨는 못해서 어떡해요? 제가 입으로 해줄게요. 이리와 봐요.”
선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태균의 하체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태균은 오늘의 기억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바퀴벌레에게 돈 주고도 익힐 수 없는 엄청난 기술(?)을 배웠다. 무협지속의 무당파에서 등장하는 분심법이 바로 그것이다. 마음을 둘로 나누어 다른 곳에 집중하면 세상 어느 여자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태균은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선희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행복해졌다.
* 태균 무공을 익히다. 부제 : 은혜 갚는 바퀴벌레 편. The End.
* 작가의 사족.
예전에 냉장고 위에서 등장했던 바퀴벌레는 오늘 나타난 바퀴벌레와 동일 충물(?)이었다. 그리고 태균이 죽인 바퀴벌레와 영역싸움을 벌이던 경쟁자였다.
============================ 작품 후기 ============================
제 뜰에 가시면 등장인물들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 있습니다. 혹시 헷갈리시면 한번 놀러오세요. 작품 설정에 올리려고 했는데 거기는 이상하게 가운데 정렬로 글이 구성이 돼서 복잡해지더군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