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9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갑자기 예전에 목욕탕에서 만났던 남자와 벌였던 묘한 신경전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사실 남성의 성기 크기가 사랑을 나누는데 중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남자들끼리는 그런 묘한 우월감이 있다. 빈약한 가슴을 가진 여자가 풍만한 여자를 부러워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사이즈가 큰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우월함(?)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지만, 여자들은 의외로 큰 가슴이 콤플렉스인 경우도 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동기 여자 아이 중에 유달리 가슴발육이 좋은 친구가 있었다. 그 나이 때의 남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발정 난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치마만 두르면 달려들지도 모른다고 표현할 수 있는 시기였으니 가슴 발육이 좋은 동기는 환상을 꿈꾸기에 정말 좋은 대상이었다. 남자들은 그녀를 ‘비도’라고 불렀다. ‘젖을 보여줘.’라는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 줄여서 하는 은어였다. 여자들이 들었으면 천박하다고 기겁을 하며 화를 낼 수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도 아이들 같은 치기 어린 면이 있는 것이 우리 남자들이고 그러다보니 종종 그런 음담패설을 즐긴다. 그런데 장난기가 과한 녀석들이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비도’라고 크게 외치는 바람에 사달이 났다. 시간이 좀 지나서 숨겨진 의미를 알게 된 그녀는 한참을 학교도 나오지 않았고, 장난을 쳤던 친구들은 선생님께 불려가 정말 작살나게 두들겨 맞았었다. 고교시절을 남자들이 발정 난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한다면 여자들은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을 흘린다고 할 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시기다. 그 시기에 그런 상처를 받으면 평생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이렇다. 남자들의 사이즈는 보다 은밀한 곳에 숨어있기 때문에 그들만의 이야기로 끝나고 말지만, 여자들이 경우는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이성에게 성적 농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철이 들자 그녀가 참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지금도 콤플렉스가 되어 꽁꽁 숨기고 살지, 아니면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감의 원동력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동창회를 하며 우연히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래도 최소한 상처는 잘 아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시연이와의 아찔한 상황이 생각나자 아까는 왜 그렇게 후다닥 도망치듯 왔는지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아직도 약간의 미안함 비슷한 것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눈 덮인 새하얀 마당을 보니 발자국을 내고 싶어서 신나게 발자국을 만들었는데, 뒤를 돌아보니 아까 봤던 예쁜 풍경은 사라지고 내가 만든 발자국 때문에 엉망이 된 마당을 본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눈이 내리면 신이 나서 달리는 사람도 있고, 손가락으로 예쁘고 귀여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다. 마구 헤집어 놓은 눈길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눈 위에 그려진 예쁜 그림은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좋게 만들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 예쁘게 시연이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시연이를 사랑하는 남자이면서도, 인생을 더 많이 산 인생 선배다 보니 자꾸 뭔가 좋은 것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좋은 아침. 어, 이게 무슨 냄새야. 좋은데.”
“어서 오세요. 마 대리님. 여기 커피 좀 드세요. 오늘은 첫날이라 제가 직접 서비스 해드립니다. 내일부터는 알아서 드세요.”
“아. 고마워요. 정 주임. 그런데 웬 커피?”
“과장님께 허락 받고, 어제 받은 금일봉에서 돈을 일부 빼서 드립커피 세트랑 원두커피를 좀 샀어요. 괜찮죠. 마 대리님?”
아침에 출근하니 정 주임이 내려 놓은 커피향이 사무실에 은은하게 퍼졌다. 역시 센스 있는 여자다. 시집가면 정말 사랑받을 것 같았다. 자기가 선뜻 나서서 회계를 맡겠다고 하더니 이런 기특한 짓을 한다. 맛을 보니 꽤 좋은 원두를 사온 것 같았다. 예전 팀에서 같이 지내던 강소현처럼 헤이즐넛 커피를 선택하지 않은 것도 다행인데, 이렇게 좋은 커피를 매일 마실 수 있다니 정말 행복했다. 뱃살의 주적 인스턴트 커피야. 이젠 ‘안녕’이다.
“네. 잘했어요. 어차피 팀을 위해서 쓰라고 내놓은 돈인데요. 맛도 좋네요. 좋은 원두 사왔나 봐요? 뭔지는 몰라도 뒷맛이 아주 깔끔하네요.”
“호호호. 저도 잘 몰라요. 그냥 근처에 있는 ‘illy’라는 매장에 가니 아라비카원두를 갈아서 파는 게 있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사왔죠.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매일 마실 수 있는 거네요?”
“그럼요. 제가 아침에 와서 매일 커피를 내려 놓을게요. 알아서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일은 그냥 준호 시키시죠. 우리가 3팀에서 갈라져 나오다 보니, 귀찮은 일은 막내가 하는 게 전통이거든요. 안 그러냐. 준호야?”
“하하하. 그렇죠. 정 주임님. 알려주시면 앞으로는 제가 할게요.”
“됐어요. 어차피 저는 커피만 만들 생각이에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준호씨는 원래 하던 대로 그냥 청소나 하세요. 그리고 집에서 와이셔츠 목도 좀 깨끗하게 빡빡 밀고요. 호호호”
이야기가 갑자기 준호의 와이셔츠로 넘어갔다. 저 녀석은 정말 자취하는 사람 티가 너무 난다. 나도 한때 와이셔츠 때를 솔로 밀다가 화딱지가 나서 때려치워버렸었다.
“준호야. 설마 와이셔츠 직접 빠냐?”
“네.”
“그러지 말고 근처에 있는 세탁소에 맡겨. 잘 알아보고 찾아보면 1,000원에서 1,500원 정도 주면 와이셔츠 한 장 깨끗하게 빨아주거든. 게다가 구김 없이 다림질까지 해서 나오니 더 좋아. 괜히 힘들여가며 고생하느니 차라리 맡겨라. 그게 이득이다.”
세상이 정말 많이 좋아졌다. 내가 처음 직장 생활을 할 때만 해도 주변에 그런 곳이 잘 없었다. 가격도 3,000원에서 5,000원까지 하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1,000원이면 그런 노고가 사라진다. 1,500원이라고 해도 한 달에 20번 정도 와이셔츠를 입으니 30,000원이면 충분하다. 앞으로는 힘들게 남편 와이셔츠를 다림질하는 부인의 모습은 점점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 그럴까요? 그 정도 가격밖에 안 해요?”
“너는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왔냐? 정 없으면 1주일에 한번 대형 마트에라도 들러. 거기가면 요즘은 900원에 해주더라. 괜히 추레하게 입고 다녀서 정 주임에게 잔소리 듣지 말고 그렇게 해라.”
“네. 다행이네요. 저도 빠는 게 너무 귀찮아서 이틀에 한 번 갈아입거든요.”
이게 다 자취생의 비애다. 서울 사람들은 잘 모른다. 결혼하기 전까지 어머니께서 다 알아서 해주시니 자신들이 얼마나 편하게 사는지 알지 못한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감기에 걸려 고생할 때, 죽 하나 끓여주는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서러웠었는지. 그래서 그런지 예전부터 혼자 사는 친구나 친한 후배가 아프다고 하면 근처 죽집에 가서 죽을 사들고 가 병문안을 한다.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고 혼자 자취하는 사람의 서러움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조인식 준비는 별 탈 없이 준비가 되고 있었다. 주말이 되자 나는 동생과 약속했던 대로 시연이와 함께 산후조리원에 방문하기로 했다. 부모님과 만나는 날과 다르게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그래도 내 눈에는 예뻐 보이기는 했지만, 오늘 그녀가 입은 원피스는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소박한 디자인이었다.
“오늘은 부모님을 뵐 때처럼 신경을 쓰지는 않았네?”
“네. 일부러 이렇게 입고 왔어요. 저 안 예뻐요?”
“아냐. 예뻐. 당연히 예쁘지. 그냥 평소와도 옷차림이 달라보여서 그래.”
“미래의 도련님에게 예뻐 보이고 싶기도 한데, 엄마가 산모를 만나러 갈 때는 수수한 옷을 입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그런 것도 있어? 나는 처음 들어 보는 이야긴데?”
“역시 남자들은 눈치가 없다니까요. 산모는 임신기간 때문에 살이 많이 쪘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살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어요.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몰랐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너무 살이 찐 모습에 불안한거죠. 그런데 제가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가 봐요? 저 같으면 속상할 것 같아요.”
“우와.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했어? 아이구, 착해라.”
“헤헤헤. 저 기특하죠? 동수씨도 너무 걱정 마세요. 맏며느리 노릇 잘할게요.”
맏며느리 노릇이라. 조금 말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나 같은 촌놈이 생각하는 맏며느리의 모습은 휘하에 있는 동서들을 호령하면서 열심히 명절음식을 장만하는 여장부 같은 느낌이다. 촌에서 만날 보는 것이 그런 모습이다 보니 선입관이 생겼다. 설마 시연이도 나와 같은 모습을 맏며느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암. 그러면 조금 곤란하다. 나중에는 몰라도 벌써부터 그러면 정말 곤란하다. 그래서 ‘시연아. 잘 부탁해.’라고 속으로 빌었다.
입구에 들어서서 산후조리원으로 올라오니 신생아실 앞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제수씨 가족이라도 만나면 왠지 쑥스러울 것 같았다.
“저기. 보이지. 저기 제일 예쁜 아기. 못 본 사이에 머리카락도 자랐네. 여자라서 그런가? 벌써 머리카락도 자라고. 어때? 정말 예쁘지 않아?”
“네. 너무 예뻐요. 나도 빨리 동수씨와 결혼하고 싶어요. 아 정말.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3년이라니. 조기 졸업만 해도 다행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지만, 전체 수석인 시연이를 잡기 위해서 학교에서는 무료로 해외 유학을 통해 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과정까지 제안했다고 한다. 사실 우리 학교 정도 레벨의 대학에서 전체수석을 한 학생이 등록을 하지 않고 연•고대로 가버리면 그것도 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서울대를 갔어도 최상위 권으로 붙을 수 있는 시연이었으니 더욱 그럴 만 했다.
아마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프로그램대로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와서 전임강사 생활을 몇 년 하다가 보면, 대학교수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교수가 되는 길이 어렵다고는 해도 시연이 정도 되는 집안이 지원해준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나운서가 아무리 인기가 많은 직업이라고 해도 우리학교 경영대 교수만 할까? 정말 학교의 유혹에 빠져 유학을 가버리겠다고 결정을 해버리면 나는 그냥 ‘닭 쫓던 개’신세가 된다.
“어. 형 왔어? 이 분이 그 분이야? 와, 예쁘시네. 우리 형, 능력도 좋아. 안녕하세요. 저는 우리 형의 동생 마상수라고 합니다. 우리 형을 구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녀석은 나이도 9살이나 어린 시연이에게 잘도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그런데 ‘우리 형의 동생’이라니 뭔가 뉘앙스가 이상하다.
“어머. 안녕하세요. 저는 동수씨의 미래 부인 윤시연이라고 합니다.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그냥 도련님이라고 부를게요. 잘 부탁합니다.”
시연이는 한 술 더 떴다. 미래 부인은 이상하고, 도련님은 너무 빠르다.
“하하하. 그럼 저도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저보다 9살이나 어리다면서요? 아, 왠지 형수님이라고 부르기 이상하다. 그냥 꼬마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형 어쩌지?”
“알아서 불러. 꼬마 형수님만 빼고.”
“그래? 그럼 앞으로 꼬마 형수님이라고 부를게요. 하하하.”
에잇, 나도 모르겠다. 호칭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해야지 별 수 없다. 결혼도 안했는데 내가 나서는 것도 이상하다.
“제수씨는?”
“안에 있어.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어. 가자. 꼬마 형수님도 가시죠.”
“네. 도련님.”
동생의 넉살에 시연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따라 나섰다. 제수씨가 있는 방에 거의 다다르자 긴장이 되었다. 저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들의 첫인상이 결정된다.
“여보야. 형이랑 꼬마 형수님 왔어.”
“이이는. 꼬마 형수님은 또 뭐에요? 실례잖아요.”
동생 부부가 정겹게 실랑이하는 모습을 보며 나와 시연이는 방으로 들어섰다.
“여보야. 인사해 여기 여자 분이 꼬마 형수님이야.”
“안녕....하. 어머머, 시연아. 너 시연이 맞지? 너 왜 이렇게 키가 컸니? 몰라볼 뻔했다. 얘.”
“어! 단쌤! 단유라 쌤 맞죠? 어머. 단쌤. 이게 몇 년 만이에요? 보고싶었어요.”
“세상에. 네가 그때 말한 그 남자가 우리 아주버님이었니?”
내가 긴장했던 모습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너무 정답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단쌤은 뭐고 그 때 그 남자는 또 뭐란 말인지. 나와 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 200X년 서울 서초의 모 고등학교.
유라는 임용시험에 낙방하고 재수를 결심했지만, 그전에 정말 이 일이 자신의 일이 맞을까 한 번 알아보고 싶었다. 마침 대학을 통해 서초에 있는 OO여고에서 기간제 교사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을 했는데, 다행히 뽑힐 수 있었다.
그녀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많이 힘들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상황과는 차이가 났다. 아이들은 말을 잘 듣지 않았고, 교장 선생님은 조금 강압적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기간제 교사라서 무시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자격지심까지 들었었다.
처음 시작하자마자 부담임까지 맡아 학교생활이 많이 힘들었지만, 그중에서 그래도 자신에게 공손하고 예쁘게 인사하는 윤시연이라는 아이에게는 항상 눈이 갔었다. 보통 키에 약간 통통하지만 눈이 큼지막해서 너무너무 귀여워보였던 아이였다. 그런데 시연이가 요즘 부쩍 우울해보였다. 유라는 혹시라도 자신이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녀를 상담실로 불렀다.
“요즘 뭐 힘들일 있어?”
유라의 물음에 시연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뭔데 그래? 선생님에게 말해봐. 혹시 알아? 내가 그래도 너보다는 많이 살았으니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선생님. 연애해보셨어요?”
유라는 시연이의 질문에 당황을 했다. 연애 아직 생각도 못했다. 형부의 지긋지긋한 모습에 남자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고, 3학년부터는 임용시험 준비를 하느라 그럴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그래도 시연이에게는 믿음직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 그럼. 많이는 아니라도 해보긴 했지.”
“제가요. 저를 과외 해주던 선생님을 많이 좋아하거든요. 원래는 친구 과외선생님이었는데 제가 한눈에 반해서 부모님을 졸라서 과외를 받게 되었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만두셨어요.”
“바쁜 일이 있으셨나보네.”
“아뇨. 자기는 문과 출신이라 고등학교 수학을 확실하게 개념 정리해 줄 수가 없대요. 실력있는 선생님과 과외를 하라면서 그만 두셨어요.”
듣고 보니 양심 있는 과외선생 같았다. 시연이는 얼마 전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한 아이였다. 그 수준에 맞추려면 웬만한 실력으로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동안 상담을 통해 파악한 시연이의 가정형편은 매우 부유한 편이라 과외비도 제법 많았을 텐데, 그녀를 위해서 그만두다니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좋은 과외 선생님이었나 보네. 시연이 너를 위해서 그만두신 거잖아.”
“네. 그래서 더 좋아요. 어쩌죠? 학교로 찾아갈까 고민을 했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나이차도 많아서 고민이 많아요. 그래서 요즘 공부도 안 돼요.”
“나이차가 많이 나? 몇 살인데?”
“27살요.”
유라 자신보다도 2살 많은 남자였다. 10살 차이라니 차이가 좀 심하긴 했다. 원래 시연이 나이대의 여자아이들 중에는 그 보다 더 나이 많은 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었다. 그냥 그 나이대의 아이가 겪는 성장통이라고 생각했다. 큰 문제는 아니지만, 일단은 시연이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다잡지 않으면 혹시라도 엇나갈 수 있다. 교사라는 사명감을 발휘할 때였다.
“나이가 많은 편이네.”
“네.”
“우리나라에서 그 정도 남자가 고등학생을 사귀면 오해를 받을 수 있어. 알지?”
“네. 그렇다고들 해요. 그래도 사랑에는 국경선도 없다고 하잖아요.”
17살 소녀답게 시연이는 사랑에 대해 저돌적이었다.
“그래도 참아야해. 지금 가서 괜히 고백하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거야.”
“그럼 어떡하죠? 전 너무 보고 싶은데.”
“그 사람이 좋은 게 확실하지?”
“그럼요. 무지무지 좋아요.”
유라의 질문에 시연이는 고개까지 열심히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그럼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참아야지. 사소한 일로 오해를 받으면 사람들에게 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대학가서 그때 고백을 하는 거야?”
“그때 가서 여자 친구라도 생기면요?”
“무슨 상관이야. 골키퍼가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 시연이처럼 어리고 예쁜 여자가 좋다고 하는데, 누가 거절하겠어. 그러니까 힘내서 열심히 공부를 해. 그리고 당당하게 고백을 하는 거지.”
교사가 하기에는 좀 과격한 발언이었지만, 유라는 시연이를 위해 단호하게 이야기를 했다. 나중에 그 남자에게 여자 친구가 생기든, 부인이 생기든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시연이의 마음을 다잡는 것이 중요했다. 그 일을 계기로 둘은 부쩍 친해졌다. 시연이는 그 남자가 보고 싶을 때마다 항상 유라를 찾아 고민 상담을 했다. 유라는 그런 시연이를 달래면서 교사로서의 보람을 느꼈었다.
둘은 친해졌지만, 유라의 교직생활은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유라 반 학생 하나가 와서 교실에서 싸움이 났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 이야기에 놀라서 교실에 찾아갔더니 덩치 좋은 여학생 둘이 시연이에게 두들겨 맞고 있었다. 그녀는 치마 속에 체육복 바지를 입고 교실 뒤를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한 아이의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늘어지면서, 넘어진 다른 아이의 엉덩이를 발로 무참하게 차는 모습은 한번 물었다하면 놓지 않는 용맹한 싸움개 같았다.
“으아앙. 잘못했어. 시연아. 제발 좀 놓아줘.”
너무나도 황당한 상황에 잠시 넋을 읽고 바라보기만 했던 유라는, 시연이에게 맞고 있던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시연아. 그만해. 너 원래 이런 아이 아니잖아. 응. 어서 진정해.”
“선생님. 얘... 얘들이 자꾸 선생님을 뒤에서 욕하잖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으아앙.”
아이를 때린 사람은 시연이었는데, 유라를 발견하자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그녀의 품에 안겨 펑펑 울기 시작했다. 울고 있는 시연이를 달래면서, 그녀에게 맞은 아이들을 살펴보니 항상 유라의 수업시간에 심한 장난을 치던 아이들이었다.
한번은 너무 심하게 장난을 쳐 잔소리를 했더니, ‘썅’이라는 소리를 내며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었다. 그날부터 유라는 교직이 자신에게 맞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었다. 그랬던 아이들이 시연이에게 두들겨 맞아 머리가 산발이 된 모습을 보니, 교사로서 정말 그러면 안 되지만 속이 후련한 느낌을 받았다.
시연이가 그렇게 반분위기를 잡아주면서 부담임이었던 유라의 교사생활도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학교에 점점 적응하면서 아이들을 잘 지도하자 교장 선생님이 강압적인 모습도 서서히 변해갔다. 유라는 그때 깨달았다. 이곳 생활이 힘들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간제 교사라서 무시한 것이 아니라, 시험에 낙방하자 모든 것에 자신감을 잃고 행동했던 자신이 원인이었다. 처음 계약기간이었던 6개월이 시간이 끝나자, 유라는 다시 임용 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첫 번째 제자 시연이와도 아쉬운 이별을 했다.
============================ 작품 후기 ============================
요즘 너무 글쓰기에 집중하다보니 다른 일에 지장이 생겼습니다. ㅠ 평일은 하루 1편 휴일은 2편, 이렇게 해서 일주일에 9편정도 올리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독자님 한 분은 형수님도 결혼식 때 처음 봤다고 하십니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친하게 지내는 선후배나 친구의 와이프와는 서로 자주 얼굴도 보며 친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형제나 친척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죠. 저는 가끔 주변에서 주인공 같은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도 주인공을 통해 제가 생각하는 이상향을 꿈꾸는 것이죠.
절대 독자님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상당수의 한국 남자들은 형제들의 여인에 대해 서먹서먹하게 대합니다. 서먹서먹하다기보다는 점잖게 대하는 것이죠. 가족이라서 아끼는 마음은 있지만, 예의를 지키느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입니다. 유교문화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족의 모습이 절대 이상하거나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은 그 모습대로 은은한 정이 흐르는 따뜻한 가족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