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긴장했던 모습이 무색하게 두 사람은 너무 정답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단쌤은 뭐고 그 때 그 남자는 또 뭐란 말인지. 나와 동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어머. 놀라셨죠. 아주버님. 호호호. 정말 우리 시연이 그렇게 애타게 했던 분이 누군지 만나면 꼭 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아주버님인줄은 몰랐네요.”
제수씨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했다.
“하하하. 뭐가 뭔지. 그렇게만 설명해주시면 제가 어떻게 이해할 길이 없네요.”
“어쩌죠. 계속 궁금하게라도 만들어서 시연이 마음 고생시킨 벌을 드리고 싶은데. 시연아 선생님이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시연이가 정말 반갑긴 반가웠나보다 내게 저런 농담을 다하고. 일단은 둘 사이가 괜찮은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시연이는 제수씨의 질문에 귀에다 대고 뭐라고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걱정 마. 얘. 선생님도 할 말 안 할 말 가릴 줄은 알아. 설마 내가 우리 시연이의 고등학생 시절 귀여운 강아지 같던 모습을 이야기 할 리가 있겠어?”
“단쌤!”
“어머. 깜짝이야. 애를 얼마 전에 낳아서 그렇지 아니었으면 애 떨어질 뻔 했다 얘. 호호호. 알았어. 안 그럴게. 어쨌든, 두 남자 분께서 무척 궁금해 하시니 이야기를 해야겠죠?”
제수씨의 말은 그냥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상천외한 이야기였다. 제수씨가 임용시험에 낙방을 해서 기간제로 들어갔던 학교에 시연이가 다니고 있었고,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해줬지만 그 둘은 몇 가지 사건을 통해 정말 교사와 제자 사이를 뛰어넘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인연이라는 말인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6개월만 있다가 다시 공부를 했고, 임용에 붙어서 정식 교사가 됐죠. 아이들을 차별하면 안 되지만, 그래도 제 마음에 가장 남아있는 제자가 시연이에요.”
“저두요. 저두 지금까지 만났던 선생님 중에 단쌤이 제일 좋아요. 더 좋은 사람이 한 명 있긴 했지만, 이제 동수씨가 되었으니 단쌤이 최고예요.”
“그런데 시연아.”
“네? 쌤?”
“넌 정말 언제 이렇게 컸어? 헤어질 때보다 거의 10cm는 더 큰 것 같은데? 통통하던 젖살도 빠져서 웬만한 연예인은 명함도 못내 밀만큼 예쁘다, 얘.”
“엄마 닮았나 봐요. 우리 엄마도 고등학교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키가 컸다고 했거든요. 동수씨가 키가 너무 커서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우리 두 형제의 궁금증을 잠시 풀어 준 두 사람은 또다시 둘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우리가 듣지 못하게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봐서는 비밀이야기도 있는 것 같아서 자리를 피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우린 나가있겠습니다. 둘이서 재미난 이야기 나누세요.”
“아. 잠깐만요. 동수씨.”
역시 시연이는 정신없이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나를 찾았다. 기특한 우리 시연이.
“응? 왜 시연아?”
나는 시연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
“제가 사온 선물은 놓고 가셔야죠.”
“그... 그래. 이거? 제수씨 이거 시연이가 사온 유아용 카시트입니다.”
시연이는 브라이택스라는 곳에서 나온 진한 갈색과 흰색이 예쁘게 조합된 카시트를 선물로 사왔다. 혹시나 싶어 가격을 물어봤더니, 백만 원이라고 했다. 그 말에 순간 놀랐지만, 생각해보니 우리 조카의 안전을 책임질 소중한 제품이었다. 그래서 시연이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했다. 그랬더니 나중에 자기가 아기를 낳으면 물려받을 것이라서 일부러 좋은 것으로 골랐다고 했다. 갈수록 뻔뻔해지는 시연이었지만, 나는 갈수록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고마워 시연아. 이거 정말 예쁘고 튼튼해 보인다. 우리는 퇴원할 때쯤 사려고 미뤄뒀는데, 안사길 잘했네. 잘 쓸게.”
“쌤. 나중에 제가 아기 낳으면 물려주셔야 해요. 알았죠. 히히히.”
정말 고등학생 때 만난 선생님이라서 그런지 내 앞에 있을 때보다 더 애교를 부렸다. 맏며느리 노릇 제대로 하겠다는 아까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제수씨 앞에서 응석을 부리는 고등학교 1학년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곤란해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상수야.”
“응. 형. 말해.”
제수씨와 시연이는 대화를 나누라며 내버려 두고, 우리 두 형제는 밖으로 나와 조카를 구경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 말 들었을 때 안 놀랐어?”
“글쎄,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네. 그냥 형 여자 친구가 생겼구나. 그러고 말았지.”
“나이가 많이 어린데 신경도 안 쓰였어?”
“예전에 우리가 먼저 결혼할 때는 우리 여보야가 약간 신경을 쓰긴 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결혼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아무래도 우리 형은 나이 어린 여자와 결혼할 것 같다며 포기하고 지냈지. 역시 우리 여보야의 선견지명은 대단하다니까.”
“제수씨가 그랬어?”
“응. 그리고 이번에 엄마한테 나이를 듣고 나더니, 차라리 잘 됐다고 하던데. 어설프게 한두 살 어리면 서로 신경 쓰여서 힘들 수 있지만, 아주 어려 버리면 오히려 편하다고 하더라.”
동생 내외는 내가 어떻게 어린 여자와 사귈 거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했다. 내가 생긴 게 그런 도둑놈 형으로 생겼나 싶었다.
“그랬냐? 나는 괜히 신경 쓰였는데.”
“우리 여보야가 그러더라. 형이 데리고 올 여자는 무조건 괜찮은 사람일거라고.”
이 자식은 어릴 때는 만날 우리 형이, 우리 형이 그러더니 이제는 우리 여보야가, 우리 여보야가 그러고 있다. 어유, 이 줏대 없는 녀석. 그래도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나에 대한 제수씨의 신뢰가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였다. 제자와 선생님이 형님과 동서로 만난다라. 정말 내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배를 잡고 웃을 일이었다. 아는 사람이 그랬다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해서 매주 불러내서 상황을 물어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 일이다 보니 참 난감했다.
둘은 제수씨가 아이에게 모유를 수유한다든지 하는 다른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헤어질 때까지 계속 꼭 붙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없더라도 수업 끝나면 자주 놀러오겠다는 약속도 했다. 어떻게 친해지게 할까 걱정이었는데, 너무 친해져서 나는 안중에 없을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시연이와 제수씨의 대화가 끝나지 않아, 동생과 나는 둘이서만 근처 ‘김밥천국’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기로 했다. 김밥과 라면을 시켜놓고 TV를 보는데, 뉴스에서 학교 교사가 여 제자를 성희롱 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하여간, 요즘은 선생들이 더 문제라니까. 어떻게 제자한테 저럴 수가 있어. 짐승도 아니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시던 아저씨 한 분이 그 뉴스를 보고 한마디 하셨다.
“아, 또 저런 이야기가 나오네. 저런 인간들 때문에 나나 우리 여보야처럼 선량한 교사들도 집단으로 매도당한다니까. 아이들을 위해 밤낮으로 고생하는 교사도 있다는 사실을 좀 알아주면 좀 좋아. 요즘은 교사가 동네북이야. 선생도 못할 짓이라니까.”
“저런 이야기가 나오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라.”
“뭐? 내가 왜? 형은 나나 우리 여보야가 저런 인간이랑 비슷하다는 소리야?”
동생은 내 말에 울컥했다. 특정직업의 사람이 사고를 쳐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으면 꼭 하는 말이 ‘그들은 소수일 뿐이다. 대부분은 성실하게 산다.’는 말이다. 처음에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매번 그런 스토리가 반복되다보니 짜증이 났다.
“교직사회가 범죄 집단이냐? 소수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당연한거지. 단체로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은 범죄 집단밖에 없어. 그런 당연한 상황을 가지고 억울해하지 말란 말이다. 이 녀석아.”
“그래도 자꾸 사람들이 욕하잖아.”
“너희만 그래? 경찰도 욕먹고, 소방관도 욕먹고, 군인도 욕먹고, 검찰도 욕먹고, 변호사도 욕먹고, 의사도 욕먹고, 간호사도 욕먹고, 약사도 욕먹고, 공무원도 욕먹고, 성직자도 욕먹고. 더 이야기 해줘?”
“아... 아니.”
“그러면서 다들 이야기하지. 그런 사람들은 소수일 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그러니 한두 사람의 잘못으로 전체를 매도하지 말아 달라. 그렇게 언론 플레이를 하면서 사건을 쉬쉬하면서 무마만 하려고 들지. 그러니 자꾸 일이 생기는 거야. 내부에서 목소리를 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지.”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동생은 금방 말을 얼버무렸다. 대한민국에서 나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일을 아주 몰지각한 일부만 저지르는 일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사건, 사고는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성실하게 잘 사는 사람들은 그런 대중의 지탄에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같은 동료가 저지른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화를 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강력한 처벌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가끔 보면 우리나라의 제 식구 감싸기의 행태가 도를 넘은 경우가 있다. 사회적 지탄을 받는 행동을 해놓고 몇 년 지나서 다시 돌아와서 일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화가 난다. 제 3자가 아무리 떠들어도 소용이 없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자성의 목소리를 높이고,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다시는 그곳에 발을 들이밀 수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우리 같은 평교사 무슨 힘이 있나? 그냥 위에서 하자는 대로 하는 거지.”
“그럼 억울해 하지 말던가. 노력도 안 해보고 그냥 포기할거면 그냥 평생 욕먹고 살아.”
서른도 안 된 동생이 저렇게 패기 없이 이야기하자 조금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왜 나한테 화를 내?”
“우리나라 교통사고율이 줄어들고 있는 것 알아? 따지고 보면 교통사고도 소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야. 그런데 그냥 소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치부해버렸으면 교통사고가 줄어들었을 것 같아?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곳에는 주의 표지판을 세우고, 속도위반이나 신호위반 단속을 위한 카메라를 설치하고, 벌금 같은 것을 통해 처벌을 강화하고, 사람이 먼저라는 인식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과속 방지턱을 설치하고, 어린이 보호구역을 만들어 아이들을 보호하고. 그렇게 꾸준히 노력을 하니까 줄어드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그냥 내 일이 아니니까 하면서 손 놓고 있지 말란 말이다. 알아들어?”
“또 나왔네. 그 놈의 공자 왈, 맹자 왈. 알았으니까 어서 밥이나 먹자. 배고프다.”
이게 나의 가장 큰 단점 중 하나다. 입 바른 소리 하기. 내 삶도 그렇게 모범적이지 않으면서 쓸데없이 생각은 많아서 가끔가다 무슨 대단한 철학자가 된 것처럼 도덕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다른 사람에게 잔소리로 늘어놓는다. 주변에서 내 잔소리를 가장 많이 듣는 사람이 동생이다 보니 이제 내 동생은 나의 까칠한 모습에도 그러려니 하면서 달관한 자세를 보인다. 나도 이놈의 입바른 소리 하는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고치기가 쉽지 않다.
“흠흠. 그래 나도 이야기를 많이 했더니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동생이 저렇게 말해도 속으로는 생각이 많을 것이다. 나의 이 입바른 소리하는 버릇은 어릴 때부터 시작됐다. 고작 한 살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형이랍시고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고치거나 고치려고 노력할 때가 많다. 그렇게 자꾸 동생이 나를 받아주다 보니 나도 이놈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겨우 한 살 어린 동생도 이렇게 아이같이 대하는데 10살이나 어린 시연이에게는 내 행동이 오죽했을까 싶어 스스로 반성이 되었다. 동생도 이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고, 시연이는 이제 나의 연인이 되었다. 나도 너무 어른인척 행동하는 모습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같은 시간 OO산후조리원 VIP실
유라와 시연이는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첫 키스를 홍대의 공연장이 있는 작은 지하 카페에서 하게 된 거죠. 헤헤헤”
“어머. 우리 아주버님 점잖으신 분 인줄 알았는데, 너무 낭만적이시다. 혹시라도 재미없는 남자라서 연애를 못하시나 걱정했는데 과감해야 때는 과감하게 행동하시는구나. 우리 상수씨보다는 쪼금 매력이 떨어지지만, 그래도 매력 있으시네. 우리 시연이 마음고생 안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르겠다. 호호호”
“흥. 단쌤. 그건 아니죠. 우리 동수씨가 멋있기는 더 멋있죠.”
“뭐? 요 녀석이. 지금 선생님 말씀에 토 다는 거야?”
“쌤이야 말로, 지금 미래의 형님에게 토 다는 거예요?”
“아이고, 그래.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우리 미래의 형님.”
“히히히. 농담이에요.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죠. 어른들 앞에서만 조심하면 되지 않겠어요? 전 선생님이 제 가족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좋아요.”
“나도 그래. 항상 생각나고 그리웠는데 계속 볼 수 있게 돼서 너무 좋아.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 내가 우리 시연이의 강력한 우군이 되어주마.”
“고마워요. 쌤.”
유라와 시연이는 서로를 꼭 껴안으며 동서지간(?)의 우애를 다졌다.
============================ 작품 후기 ============================
소제목을 정했습니다. 주인공이 과연 누구에게 발등을 찍힐지 기대해주세요.^^
오늘은 약속대로 1편 더 올라갑니다. 추천이 많으면 1시간 안에 올라갈수도?ㅎㅎ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