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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84화 (84/424)

00084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나는 옆에서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는 시연이와 함께 차로 갔다. 오늘 여러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책은 전해줘야 한다. 이미 책이 시중에 팔리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깜짝 선물은 더 이상 깜짝 선물이 될 수 없다.

“아까 보니까 정말 잘하던데 몇 단이야? 거기도 단 같은 것은 있지?”

“네. 전 중학생부터 배워서 4단이에요.”

오. 4단. 차를 타면서 혹시나 싶어 물어봤더니 무려 4단. 역시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도 무술은 4단이다. 어릴 때 딴 태권도가 2단, 해병대에서 배운 무적도가 1단, 동생 때문에 잠깐 배운 유도가 1단. 그래서 합이 4단이다. 다행히 매 맞는 남편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응. 그래서 잘하는구나. 멋있더라. 그런데 무술 배웠다고 함부로 남자에게 덤비면 큰일 나. 알았지? 전에도 약속했지만 그런 일이 있더라도 절대 나서면 안 돼!”

“그... 그래도요. 같이 태백무를 배우는 사람들하고 대련할 때는 괜찮은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나는 제대로 시범을 보이기 위해 조수석에 앉아 있는 시연이를 재빨리 덮쳤다. 상체로 몸을 누르고 꼼짝도 못하게 할 속셈이었다.

“자. 여기서 한 번 움직여봐.”

“네? 지... 지금요?”

“응. 남자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느껴보라는 거야.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빠져나와봐.”

나는 이미 시연이의 팔까지 끌어안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 시연이는 꼬집을 수도 없는 입장이다.

“저... 정말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요?”

“그럼. 빠져나오면 네가 말하는 소원 하나 들어준다.”

“정말이죠?”

“그래.”

이럴 때 확실하게 시연이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팔에 힘을 꽉 주고 시연이를 꼭 껴안았다.

“음...... 아.”

뭔가 확실하게 보여줘야겠다는 정신으로 그녀를 꼭 껴안고 있었는데, 시연이가 갑자기 내 입술에 길게 뽀뽀를 해버렸다. 순간 느껴지는 허무함에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이 빠져버렸다. 아, 나는 가끔 너무 진지해진다. 뭘 또 가르치겠다고 이런 진상을 떨었는지 모르겠다. 매번 시연이는 ‘내 연인이다.’라며 다짐을 하는데, 닭대가리처럼 자꾸 잊는다. 시연이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것 같았다.

“히히히. 풀었어요. 이제 소원 들어주는 거예요?”

시연이는 힘이 풀린 내 팔을 풀어내고 내 목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 가슴이 뭉클했다. 나를 향한 시연이의 무한한 사랑을 너무도 확연하게 느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의 향긋한 살 내음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하하하. 소원을 말할 수 있으면 들어줄게.”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시연이에게 키스를 했다.

“헙. 바...반..칙이..”

내게 뭔가 말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이미 열정적으로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5분 동안 아무 말 없이 키스만 하다가 조용히 떨어졌다. 장소가 스포츠센터 주차장이다 보니 더 이상의 행동으로 옮기기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오늘의 키스는 키스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녀도 같은 느낌이었는지 나를 보며 빙긋이 웃었다.

“피이. 너무해요. 이건 반칙이에요.”

“그래. 반칙 맞아. 소원은 들어줄게. 원하는 것 있어?”

“아뇨. 아직은 없어요. 생각해보고 나중에 이야기 해줄게요.”

“그래. 언제든지 이야기해. 당장 결혼하자고 하는 것만 아니면 내가 다 들어준다.”

“치. 결혼은 3년 안에 하기로 했잖아요. 저도 그 정도는 안다고요.”

나는 시연이의 투정을 들으며 뒷좌석에 놔둔 책을 꺼내 시연이에게 건넸다. 시연이가 과연 이 책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 궁금했다.

“이... 이게 뭐에요?”

“깜짝 선물. 시연이 네가 여행가서 쓴 일지를 책으로 만들었어. 어때 예쁘지? 네가 만들어준 다이어리를 읽고 있으니 너무 좋더라고. 그래서 책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지. 마음에 들어?”

깜짝 선물이라는 것이 막상 하고 보니 이상하게 민망했다. 그래서 일부러 열심히 수다를 떨며 설명을 했다. 시연이는 내 말에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물끄러미 책을 바라봤다. 그리고 오른 손으로 천천히 책 표지를 쓰다듬었다.

“원래는 시연이 네가 한 사랑 표현은 공개하려고 하지 않았거든. 그런데 출판사와 일이 좀 잘못되었어. 미안해. 이 책은 벌써 여러 서점에 풀렸어. 그런 일은 네게 먼저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혹시 기분 나쁘거나 그렇지는 않아?”

나는 말없이 책을 바라보고 있는 시연이에게 주절주절 설명을 했다. 솔직히 말해 시연이가 나와 같은 행동을 했다면 나는 좀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글을 통한 사랑고백이라는 것은 두 사람만의 은밀한 추억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에게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양해도 없이 대중에게 공개했으니 좀 서운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혹시 시연이도 그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뇨. 전혀 기분 안 나빠요. 너... 너무 기뻐요. 흑. 동수씨 미안해요. 고마워요. 흑흑...”

시연이는 갑자기 내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왜할까 싶었다. 아마 내가 자신을 정말 좋아하는지 궁금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들이니 내가 더 미안해졌다. 나는 노력한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에는 내 노력이 부족했으리라. 그래도 기쁘고, 고맙다는 말에 마음이 놓였다.

“자. 그만 울고. 제일 중요한 일이 빠졌잖아.”

“제일 중요한 일요? 그게 뭔데요?”

“그럼. 제일 중요한 일이지. 자 펜 받아.”

한참을 내 품에서 울던 시연이의 울먹임이 멈추자 나는 그녀를 다독이며 펜을 건넸다.

“이걸로 뭘 해요?”

역시 시연이는 아직 자신이 작가라는 인식이 없었다.

“이제 윤 작가님 아니야? 그런 작가님에게 내가 제일 처음 사인을 받고 싶어서 그래. 윤 작가님. 여행 에세이 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윤 작가님의 첫 번째 사인을 최초로 받는 영광을 주셔야죠.”

“헤헤헤. 윤 작가님이요? 그 말 왠지 적응이 안 되는데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기다려 보세요. 제가 아주 멋진 글귀도 함께 남겨줄게요.”

사인을 해달라는 나의 말에 시연이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내가 건네는 펜을 잡고 책의 첫 장을 편 다음 정성스럽게 글을 적기 시작했다.

[당신을 만나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녹차는 뜨거운 물에 녹차 잎을 넣고 충분히 우려나기를 기다려야 은은하고 담백한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제게 기다림은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행복함을 알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 당신의 연인 작가 윤시연 올림 - ]

시연이는 그렇게 가슴 뭉클한 글귀를 예쁜 글씨로 남기더니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윤’이라는 글자에 들어가는 동그라미보다 세배정도 큰 하트를 그리고 그곳에 스마일 마크를 그려놓은 다음 자신의 이름을 완성했다. 그게 시연이의 사인인가 보다. 귀엽다. 노련한 연예인들이 남기는 그런 멋진 사인이 아니라 더 좋았다.

“사인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거 이상해요?”

“아니. 예뻐. 풋풋해서 좋아. 윤시연 다운 사인 같아서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글귀도 너무 마음에 든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멋진 글을 쓰다니 괜히 작가님이 아닌데?”

“히히. 마음에 들었어요? 전 그냥 지금 제 마음을 표현했을 뿐이에요. 작가라면서 너무 띄우지 마세요. 이게 다 동수씨 덕분이에요.”

이 아이는 말을 해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모르겠다. 낮에 있었던 분노가 어느새 가라앉아 버렸다.

“네가 그만큼 재주가 있다는 뜻이야. 아나운서 말고 작가를 해도 될 것 같아.”

“그럴까요? 그럼 더 빨리 결혼할 수도 있으려나?”

“아나운서는 어쩌고? 그렇게 하고 싶어 해놓고?”

“농담이에요. 나중에 기회가 돼서 또 글을 쓰게 되더라도, 아나운서는 꼭 하고 싶어요. 뉴스에 나오는 김주하 아나운서를 보면서 ‘아, 나도 커서 저런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동수씨와의 결혼도 미루고 준비하는 꿈인데, 포기할 수는 없죠.”

“결혼을 미뤄?”

“그럼요! 내년에 제 생일만 지나만 부모님 동의 없어도 바로 결혼 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에헴.”

“뭐... 뭐야? 그럼 나는 지금 미성년자와 사귀고 있다는 말이야? 이거 큰일인데?”

“히잉. 너무해요. 동수씨. 그게 왜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요! 중요한 것은 제가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저랑 만나는 걸 무르려고요? 이제 그러기도 힘들어요. 책이 나왔으니 ‘이제 마동수는 윤시연의 남자다.’라고 세상에 알려지게 됐으니까요.”

“하하하. 농담이야. 안 물러.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알만큼 책이 잘 팔릴까?”

“그... 글쎄요. 잘 팔려야 하는데. 참, 아까 출판사와 문제가 있다면서요? 무슨 일이에요?”

시연이와 즐겁게 대화를 하느라 낮에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까의 기억이 떠오르자 다시 화가 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낮에 있었던 일을 시연이에게 모두 설명했다. 그녀의 책에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연이도 전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 많이 나셨어요?”

이야기를 하면서 말 속에 담긴 내 분노를 시연이도 느꼈나보다. 그녀가 내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그녀에게 화를 낸 것이 아닌데 괜히 미안해졌다.

“응. 분명한 것은 계약위반이야. 미련하게 동기를 너무 믿었어. 내가 미련을 떨어놓고 오히려 화를 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어리숙하게 행동한 내가 1차적 책임이 있다고 해도, 신뢰를 깨뜨린 사람들을 용서할 생각은 없으니까. 깔끔하게 사과하고 거기에 맞는 보상을 했으면 나도 이렇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요. 동수씨.”

“응?”

“우리 사랑이 담긴 책을 만든 곳이잖아요. 그래서 있잖아요. 아까 그 소원요.”

“안 돼.”

시연이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깨닫는 순간, 나는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런데 나의 단호한 대답에도 시연이는 계속 살랑거리는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졸랐다.

“왜요? 당장 결혼하자는 것만 빼면 다 들어준다면서요? 네?”

휴. 그 말을 듣자 머리꼭대기까지 났던 화가 풀려버렸다. 화가 풀린 다음에 생각을 하자 아까는 내가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싶었다. 돈 맛을 알게 되더니 세상이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한걸까? 그래서 화가 나면 돈으로 압박하려 든 것일까? 이런 상념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다.

시연이의 순수한 사랑을 받고 있으면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녀를 보면서 가끔 내가 세상을 너무 계산적으로 사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때도 있다. 사랑은 사람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말이 있다. 순진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시연이의 모습을 보자 최악의 상황은 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사과는 받고 싶었다. 이미 서로가 얼굴을 붉힌 상황이고, 여기서 꽁무니를 빼면 나만 우습게 된다.

“휴. 그래. 나도 처음에는 벼랑 끝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는데, 그러지는 않을게. 그래도 계약을 어기고 적반하장으로 나온 것은 거기야.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채 사장이라는 사람은 나를 계속 우습게 볼 거야. 최소한 우리 권리를 제대로 찾는 선에서 마무리 지을게. 그 정도면 괜찮겠지?”

“네. 그런데 어쩌시려고요?”

원래는 부도가 나게 해버리거나, 아는 사람을 동원해서 사장을 쫓아내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시연이 때문에 화가 풀려서 생각해보니 그건 정말 망나니 같은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좀 있다고 꼴리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내가 그동안 얼마나 경멸했는데, 내가 그 행동을 하려고 했었다. 아마 내가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거만해졌는지도 몰랐다. 시연이 덕분에 이성을 되찾았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녀는 나를 항상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 같았다.

“음. 글쎄. 어떡할까. 아무튼 너무 극단적으로 몰고 가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자금을 동결하고 어음을 사들여서 부도를 내려했다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처음 내가 하려고 했던 비열한 생각을 이야기해서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도,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아기 사슴처럼 순수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는 시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처음 하려고 했던 행동을 반성하고 계획을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 작품 후기 ============================

법적 결혼 나이를 알아보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만 18세 이상이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데, 자가용 활공기는 만 16세 그리고 자가용 비행기는 만 17세에 딸 수 있다더군요. 자가용 비행기도 몰 수 있는 청소년이 자동차는 못 모는 신세라니.  재미있는 아이러니를 발견한 기분이 드네요. 물론 저는 너무 어린 나이에 운전면허를 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회수가 백만 건이 넘었습니다. 어제 넘은 것 같은데 이제 발견했네요. 정말 감동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성원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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