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미친놈이 분명하다. 저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 저 인간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끊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내용은 그냥 책 판매가 잘되면 팬 서비스 차원에서 사인회에 참석하겠다는 추가조항일 뿐이었다. 또라이 같은 놈.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조항으로 술 접대를 시키겠다는 비열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Rrrr
채 사장이 말한 내용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이미 연예인들의 계약에서도 그런 내용은 독소조항이라서 불법이라는 내용을 TV에서도 분명히 본 기억이 있다. 나는 혹시 몰라 전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전태민 변호사입니다.”
“변호사님. 저 마동수입니다.”
“네. 어제 말씀하신 내용 때문에 전화하셨습니까?”
“맞긴 한데. 그전에 한 가지 문의를 드릴 일이 있어서요. 좀 전에 출판사 사장과 통화를 했는데 말입니다.”
나는 바로 전에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을 했다.
“하하하. 그 사람 정신 나간 사람 아닙니까? 계약서 가지고 계십니까?”
“네.”
“한 번 꺼내서 보세요. 저작물 출판 계약서에는 ‘출판’에 대한 조항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어야 합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그 조항 중 ‘을’은 저작물의 판형, 정가, 제책, 발행부수, 증여시기 및 선전, 판매의 방법을 결정한다. 단, 저작자의 의견을 존중하여 최대한 반영하도록 한다. 그 조항이 있습니까?”
전 변호사의 말에 따라 나는 계약서의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네. 있네요.”
“사장이라는 작자가 말한 것은 부가 조항입니다. 지금 읽으신 내용보다 하위 조항이죠. 보신 것처럼 책을 선전 할 때는, 저작자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야 합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지. 정말 그 사람 바보 아닙니까? 자기가 무슨 법관도 아니고 조항을 제멋대로 판단하다니 웃음만 나오네요. 그 조항이 없어도 부가조항을 악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객님이 왜 판매중지를 요청하려고 하나 의아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 만 한 것 같습니다.”
역시 변호사가 있으니 명확했다. 혹시나 내가 실수를 한 것은 아닐까 걱정이 했는데 다행이었다. 인세야 안 받아도 그만이다. 그렇지만 시연이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자체가 용서가 되지 않았다. 멍청하면 몸이 고생이라더니, 그런 멍청한 놈은 지독하게 고생시켜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변호사님이 그렇게 확인을 해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그럼 제가 부탁했던 판매중지 가처분신청은 지금부터 진행해주세요. 친구도 제 뜻에 따르기로 했으니 염려마시고요.”
“아,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럼 저도 그렇게 알고 진행시키도록 하겠습니다.”
Rrrr
나는 전화를 끊고, 국민은행 박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 사장이 비열하게 나왔으니, 나도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네. 국민은행 박 차장입니다.”
“저 마동수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이번 달에 만기 되는 어음이 5천만 원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10월과 11월에도 그와 비슷한 금액이 될 것 같고요. 어떻게 할까요?”
“내일 제가 인수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가능합니다. 불확실한 어음보다는 당연히 현금이 좋은 법이죠.”
“그럼 제가 내일 인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 좀 부탁하겠습니다. 이번 일 끝나면 제가 수고비도 섭섭하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소송을 걸고 OO출판사 계좌를 동결시켜버리면, 그때부터 자금줄이 막혀버린다. 고작 5천만 원이라고 해도 잘못하면 부도가 나게 된다. 채 사장이 어떻게든 자금을 구한다고 해도, 결국 임시방편일 뿐이다. 혹시 사채를 쓴다면 더욱 반갑다. 그렇게 되면 기름통을 껴안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행동과 마찬가지다. 결국 계좌 동결이 풀리지 않으면, 만기가 도래하는 어음을 막을 길이 없어진다.
“수고비라니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동안 제가 받은 도움이 얼만데요. 그리고 이런 일로 수고비를 받으면, 은행에서의 제 입장이 오히려 난처해집니다.”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제가 도움을 받다보니 어줍지 않은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좋은 곳으로 모셔서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겠죠?”
사람마다 다른 법이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될 돈이라도 냉큼 받는 사람이 있고, 그런 대가없이 정말 호의를 가지고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 박 차장은 후자인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내가 한 행동이 큰 실례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바로 사과를 하고 식사를 하자고 제안을 했다.
“하하하. 그 정도라면 괜찮습니다. 나중에 일이 잘되시면 그때 따로 연락을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어음문제는 내일 다시 연락드리죠.”
다행히 박 차장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바로 사과를 해서 그럴 수도 있다. 확실히 요즘 와서 너무 돈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생긴 것 같다. 시연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반성해놓고 또 그런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돈 보다는 정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면서 자꾸 잊는다. 평생을 주의하고 경계해야할 일인 것 같다.
돈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요망한 것이 틀림없다. 그 동안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파멸하는지 조금은 할 것 같았다. 돈이 많으면 당연히 좋다. 그렇지만 돈에 집착하는 순간 사람의 본성은 금방 추악해진다. 부자들이 쓴 책을 보면, 돈은 한 발자국 떨어져서 봐야지 오히려 잘 모인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돈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돈이 많이 생기고 나니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결국 채 사장에 대한 압박은 처음 생각했던 방법을 비슷하게 따를 것 같다. 그래도 다르다. 어제 했던 나의 생각은 정말 비열했다. 사소한 일로 침소봉대해서 다른 사람에게까지 가는 피해는 생각조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 내 마음 속에서 나 스스로 납득할 만한 명분이 생겼다. 그리고 이 일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마음속의 명분. 사소하지만, 그게 있고 없고는 정말 큰 차이다. 악의를 가지고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냐. 아니면, 상대의 악의를 막기 위한 합당한 행동이냐. 행동은 같아도 서로 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최배달은 ‘정의 없는 힘은 결국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시연이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녀의 눈이, 그녀의 말이 억지로라도 나를 돈에서 한걸음 멀어지게 만든다. 예전에는 그런 괴물 같은 직장상사들을 만나게 했다면서 하늘을 원망했었는데, 이제는 시연이같이 고마운 존재를 내 곁으로 보내줘서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퇴근을 해서 꽃과 선물을 들고 시연이 집으로 향했다. 윤 사장님은 아직 스포츠센터에 계시고, 시연이는 오늘 중국어 학원을 가느라 늦는다고 했다. 상관없었다. 오늘 뵐 분은 바로 시연이 어머님이다. 워낙 부유한 집안이라 선물보다는 꽃다발에 더 신경을 썼다. 해바라기와 리시안서스, 다알리아 등 9월 초에 어울리는 꽃들로 예쁘게 꾸민 꽃다발을 준비했다.
“어서 와요. 마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어머님. 여기 꽃부터 받으세요.”
“어머. 고마워요. 호호호. 꽃다발은 오랜만에 받아보네. 마 선생님. 혹시 여기 있는 리시안서스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꽃말? 당연히 모른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시연이 어머님은 참 편안하면서도 어려운 분이시다. 시연이를 닮은 순진한 얼굴로 돌직구를 던지시는데, 그 물음의 의도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어 난감했다. 지난 일을 겪으면서, 그냥 모든 것에 솔직한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었다.
“글쎄요. 꽃말은 생각도 못하고 그냥 예뻐서 샀는데, 혹시 안 좋은 의미라도 있습니까?”
“음. 상황에 따라서는 안 좋을 수도 있죠.”
윽. 그럼 큰일이다. 정말 남자들의 삶은 피곤함의 연속이다. 꽃을 선물하면서 꽃말도 일일이 알아야 하는가 싶었다. 그냥 장례식장용 꽃만 피하면 되는 것 아니었나? 어렵다. 어려워.
“그... 그렇습니까? 제가 혹시 실례를 했나요?”
“리시안서스의 꽃말이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뜻이거든요. 설마 제게 사랑 고백하러 오셨어요? 아이참, 그럼 우리 딸과 연적이 되는 건가? 갑자기 고민이네요. 마 선생님.”
역시 엉뚱하신 분이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미래의 시연이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큰 실례를 한 줄 알았는데 다행이었다. 그 정도 꽃말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를 바꿀 수 있다. 내가 괜히 잔머리의 마동수가 아니다.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머님. 미래의 장모님에 대한 변하지 않는, 사위의 사랑을 담았습니다. 부담 없이 받으셔도 됩니다. 하하하.”
“바깥양반이 마 선생님더러 여우라고 하더니 괜한 말이 아니었나보네요. 호호호. 그럼 우리 예비 사위는 일단 소파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요. 차 내어 올 테니.”
시연이 어머님은 내가 선물한 꽃다발을 유리병에 꽂으시고 차와 과일을 준비하셨다.
“자. 차는 식기 전에 드세요.”
“감사합니다. 참 약소하지만 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지난번에 저희 부모님께 너무 과한 선물을 주셔서 정말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부모님이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에이. 신경 쓰지 말지. 어쨌든 고마워요. 호호호. 풀어 봐도 되죠? 우리 마 선생님이 준비한 선물이 뭘까? 어머! 이건 우리 시연이가 하고 다니는 브레이슬릿이랑 비슷하게 생긴 거네?”
“네. 어머님이 시연이가 한 팔찌를 보고 부러워하셨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어서, 비슷한 모양으로 하나 샀습니다.”
“얘는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다하고. 시연이가 하고 있으니까 너무 예쁜 거예요. 그래서 살까 하다가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것 같아서 관뒀는데.”
“별 말씀을 다하세요.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30대 초반으로 생각할걸요? 시연이와 다니시면 모녀가 아니라 자매로 알겁니다. 그 정도 디자인은 어머님께 충분히 잘 어울리시니까 걱정 마세요.”
정말 잘 꾸미고 다니시면 30대 초반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조금 과장하면, 나와 같이 나가면 연인으로 오해할 수도 있을 정도다. 실제 나이도 겨우 44살이시다. 내가 처음 시연이를 밀어내려고 했던 이유 중에는 그녀의 어머님 나이가 걸리기도 했었다. 나는 시연이와 10살차, 미래의 장모님은 나와 14살 차. 솔직히 좀 난감한 일이다.
장뇌삼을 선물로 주신 고마움에 보답하고 싶어서, 뭘 선물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었다. 부유한 집이니 웬만한 물건은 다 있을 것 같아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가, 예전에 시연이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이야기가 기억났었다. 다행히 마음에 드셨나보다. 직접 손에 걸어보면서 소녀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고마워요. 마 선생님.”
“아뇨.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도.”
나는 시연이가 쓴 책을 가방에서 꺼내 시연이 어머님께 건넸다.
“어머. 또 선물이 남았어요? 이번에는 책이네.”
“하하하. 선물은 아니고요. 지은이를 보시면 이해가 가실 겁니다.”
“표지가 예쁘네요. 지은이 윤시연? 윤시연이 내가 아는 그 윤시연이에요?”
“네. 시연이가 유럽여행을 다녀와서 그 소감을 적은 다이어리를 제게 선물했는데,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까워서 책을 만들었습니다. 아, 저는 괜찮으니까 읽어보세요.”
시연이 어머님은 딸이 직접 쓴 책이라고 하자, 당장이라도 보고 싶으신 것 같았다. 나 때문에 주저하시는 것 같아 편히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렸다. 천천히 차를 마시면서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자식이 쓴 책이라면 나라도 궁금해서 당장이라고 읽고 싶을 것이다.
“붉게 물든 나폴리 항구의 아름다운 모습은 잠시, 피터팬이 나타나 당장에라도 나를 네버랜드로 데려갈 것 같은, 환상에 빠질 만큼 몽환적이고 신비로웠다. 아, 다 읽었다. 어머, 어떡해. 마 선생님. 제가 미안해서 어떡해요?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깜빡했네요.”
나도 솔직히 어머님이 그 자리에서 책을 다 읽어버리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안하다고 말은 하시지만, 표정은 전혀 미안한 얼굴이 아니셨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그게 부모 마음이다. 그리고 시연이 어머님은 이제 내 어머니와 마찬가지다.
“괜찮습니다. 책은 재미있으셨어요?”
“네. 우리 딸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글이 너무 좋아요. 딸이 쓴 글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근래 읽었던 책 중에 가장 맘에 들어요. 날 닮아서 그런가? 나도 국문과 다닐 때, 소설가가 꿈이라서 열심히 글을 썼거든요. 호호호.”
솔직히 내가 시연이 어머님을 뵈러 온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럼요. 시연이야 외모부터 어머님을 꼭 빼닮았지 않습니까.”
“에이. 제가 농담을 했는데,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주시면 제가 주책바가지가 되잖아요.”
“아닙니다. 시연이가 누구를 보고 배웠겠습니까? 어머님이 평소에 자주 책을 읽으시니까, 시연이도 그 모습을 보고 책을 가까이 한거겠죠. 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님.”
“네?”
이제 용건을 말할 시기가 왔다. 나는 자세를 바로하고 어머님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말을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괜한 오해를 받을 수 있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내가 말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다시 정리했다.
============================ 작품 후기 ============================
주인공이 국민은행 박 차장에게 요구한 것은 개인정보가 아니라 기업정보입니다. 그리고 흥신소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금융권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상으로는 기업정보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능하지 않을까요?
제목이 이상하다는 분들이 많으셔서 바꿀까 고민 중입니다. 그래서 설문조사를 올렸습니다. [로또가 전부는 아니야.] [여우같은 남자, 늑대(개) 같은 여자.] [지랄이 풍년이다.] [잔머리 굴리는 남자.] [지옥 같은 회사에서 살아남는 법.] [없다. 작가가 생각한 제목은 전부 허접하다.] [음모다. 허접한 제목을 만들어 원안대로 가려는 작가의 꼼수가 훤히보인다.] 마지막 두 항목은 같이 합산합니다.^^ 이중에서 하나 선택해주시면 제가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괜찮은 제목이 있으시면 추천해주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선작, 추천,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