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0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1주일. 앞으로 1주일 안에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물론, 마케팅에서 1등의 법칙이 중요해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1위의 법칙을 깨뜨리는 예외적 상황은 얼마든지 많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우리나라 최초로 힙합을 소개한 것은 아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도 힙합 하면 ‘서태지와 아이들’을 떠올리는 것도 그런 예외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태지는 우리나라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이다. 우리에게 1주일이 아니라 1년의 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스포츠센터의 패러다임을 바꿀 대박 아이템을 장착할 능력은 없다. 뭔가 수를 내야하는데 지금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다.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법이다. 그래도 회의를 하면 뭔가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희망에 기댈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중요한 것은 다 본 것 같은데, 그만 돌아가자. 정 주임.”
“더 안 보시고요?”
“응. 봐서 뭐해? 목동에 제 1호 스포츠센터를 연다고 하잖아. 여기서 더 지켜본다고 무슨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야. 가서 사람들하고 머리라도 맞대봐야지. 암담하다.”
“그러게요. 하필 목동이라니. 정말 가야호텔이고, 대박 스포츠센터고 둘 다 정말 마음에 안 드네요. 팀장님에게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하네요.”
우리는 부랴부랴 행사장에서 나와 회사로 향했다. 내가 운전하는 사이에 정 주임은 조 팀장님에게 오늘 조인식 행사에 대한 사항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조 팀장님의 화난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내 귀에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을 보니, 지 이사님에게 야단을 단단히 맞고 오신 것 같았다. 세상일은 정말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겨우 휘트니스 클럽 하나 만드는 것도 이렇게 가시밭길인데, 나중에 고 이사와 함께 일을 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들 왔으니까, 일단 회의부터 하자.”
조 팀장님은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를 소집하셨다.
“다들 상황을 알 수 있도록, 다녀온 사람들이 간략하게 보고부터 해봐.”
“아시는 것처럼, 가야호텔과 대박 스포츠센터가 협력해서 노블레스 짐(Gym)이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강서, 강북 진출을 선언했다는 사실도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협력해서 만들 첫 번째 초대형 스포츠센터가 목동에 건립된다는 점입니다.”
“아까 얼핏 들으니 6개월 만에 완공한다던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김 대리가 공사기간에 대해 질문을 했지만, 우리도 정확한 것은 모른다.
“저희도 조금 전에 듣고 온 이야기라서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가야그룹 산하의 가야건설에서 새로운 공법으로 짓는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높은 건물은 아니니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설마 그렇게 발표까지 했는데,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겠죠.”
“그럼 정말 큰일이네요. 우리는 아직 부지도 확정되지 않았잖아요. 많이 뒤처지겠는데요.”
“부지는 어제 확정됐어. 목동 홈플러스 옆에 넓은 공영주차장이 있거든, 그곳에 스포츠센터를 짓는다고 결정했다더군. 나도 좀 전에 이사님께 들었어.”
어제 들었다면 그 소식에 좋아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부지확정 소식을 듣는 것은 상황이 더욱 암울하다는 이야기다. 그들과 경쟁을 피해 목동이 아닌 다른 장소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럼 스포츠센터를 다른 지역으로 변경하는 것도 힘들겠군요.”
“부지만 확정한 것이잖아요. 그 땅은 나중에 다른 용도로 쓰고 D&Y휘트니스 클럽 1호점을 여의도나 그게 힘들면 다른 지역으로라도 옮기는 것이 어떨까요?”
“회장님 성정을 몰라서 그래? 시작도 하기 전에 꼬리부터 만다고 노발대발 하실 걸? 원래부터가 지기 싫어하시는 성격이신데, 하필이면 상대가 가야그룹이야. 거기 회장하고 우리 회장님하고 어린 시절부터 사이가 나쁜 거 몰랐어?”
경쟁 업종이 많이 겹치면 자연스럽게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다. 가야그룹하고야 호텔과 섬유 쪽이 겹치니 사이가 나빠도 그러려니 했는데,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이야기다. 역시 온갖 소문에 발 빠른 조 팀장님다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다들 모르는 눈치네. 잘 들어봐. 옛날에 재벌 2세간의 힘겨루기에서 우리 회장님이 박살났던 일이 있었어. 예전에도 가야그룹이야 잘 나갔잖아. 그때 우리 회사는 재계 50위권도 간당간당했던 시절이었어. 소문에 의하면 두 사람이 한 여자를 놓고 큰 싸움을 벌였데. 냉혹한 우리 회장님도 혈기왕성한 20대 시절이 있었단 말이지. 한 여자를 사랑한 2명의 재벌 2세. 뭔가 그려지지 않아? 재계 다섯 손가락 안에는 항상 들던 가야그룹의 장남에게 우리 회장님이 겁도 없이...”
“팀장님!”
우리가 모두 팀장님의 말에 집중해서 회장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려는 순간 김 대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응? 김 대리 왜?”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잡담을 할 여유가 있으세요?”
“그... 그렇지? 흠흠. 자자. 계속 회의하자고.”
우리 팀장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항상 여유가 넘친다는 점. 그래도 뒷이야기가 궁금하긴 했다. 김 대리도 이야기는 마저 듣고 상황을 정리해줬어야지. 무려 우리 회장님의 비하인드 스토리 아닌가?
“아무튼, 그래서 가야그룹이 목동에 진출한다고 선언했으니 밥이 되든, 죽이 되든 목동에서 계속 진행할거라는 말씀이죠?”
“그렇지.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 바로 그거야.”
“정 주임. 조인식 행사 내용은 어땠어요?”
“아, 그게 스포츠센터 런칭행사가 아니라 무슨 패션쇼 같은 느낌이더라고요. 연예인도 많이 오고 가수들이 공연도 하고. 덕분에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꽤 북적북적 거렸습니다.”
“그럼 홍보효과가 생각보다 크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 행사야 ‘누구누구 연예인이 왔다더라.’ 정도의 기사만 나고, 나머지는 전부 참석한 연예인 사진으로 도배될 거니까요.”
“저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급하게 준비했는지 알맹이가 없는 것 같았어요. 현수막만 없었으면, 스포츠센터 런칭행사인 줄도 모를 뻔 했다니까요.”
“마 대리님? 직접 다녀왔으니 뭔가 생각해둔 것이라도 있으세요?”
지난번에는 내가 회의를 끝내버렸는데, 이번에는 김 대리가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역시 우리 팀장님은 아직 팀장이라는 인식이 부족한 것이 틀림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권위의식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팀장님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굴러가든 회의만 잘 진행되면 된다고 생각하는 우리 팀장님의 여유. 꿈보다 해몽이 좋은 건가?
“이름에서부터 그쪽의 포지셔닝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노블레스.’ 결국 스포츠센터를 고급화해서 상류층을 상대로 장사를 하겠다는 의미 같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우리가 더 잘할 수 있죠. 차라리 우리는 문턱을 낮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진행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떤 방법으로요?”
“우선 윤 스포츠센터처럼 1억이 넘는 입회비는 곤란하겠죠. 입회비는 차라리 천만 원 정도로 완전히 낮춰버리고, 단기회원을 많이 모집해서 회원 규모를 늘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대만 잘 조정해서 정회원과 단기회원 사이에 불편함만 없앤다면 해볼 만할 것 같은데요.”
“문제는 우리가 빨리 진행 한다고 해도 1년은 걸린다는 점이죠. 행사를 아무리 멋있게 진행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고 해도, 저쪽에서는 반년이나 먼저 일을 시작하게 되잖아요.”
“당장은 어떻게 손 쓸 방법이 없잖아요. 건물이 하루아침에 뚝딱 지어지는 것도 아니고. 후발 주자가 된 이상, 얼마나 매력적인 가격대와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냐가 중요할 수밖에 없죠.”
“결국 내실을 다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거네요.”
“야! 마 대리. 뭐 좋은 꼼수 없냐?”
김 대리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팀장님이 갑자기 ‘꼼수’를 찾으셨다. 그놈의 꼼수. 내가 아무리 잔머리가 좋아도 하루아침에 없는 건물을 지어낼 수는 없다.
“꼼수는 없고. 좋은 방법이야 있죠.”
“오! 그래? 역시 마 대리야. 뭔데?”
“우리도 가야건설과 수주계약을 맺는 거죠. 뭐. 그럼 스포츠센터도 비슷한 시기에 오픈할 수 있어요. 하하하”
“에이, 됐어. 그랬다가는 회장님이 우리 팀 공중분해 시켜버리실지도 몰라. 정말 없냐?”
“네. 무슨 수로 그쪽보다 건물을 빨리 지어요? 김 대리님 말씀처럼 내실을 다져서 고객들을 많이 끌어 모아야죠. 별 수 있나요? 지금 준비한 내용보다 더욱 알찬 아이템들로 구성을 해야죠.”
혹시나 회의에서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역시나 별 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윗분들의 재채기에도 화들짝 놀라야 할 신세가 되었다. 하늘은 내게 쉬운 일을 주는 법이 없는 것 같았다. 시연이 때문에 고마웠던 하늘이 갑자기 원망스러웠다.
“자 이걸로 손부터 깨끗이 닦고. 여기 도로(참치뱃살)초밥은 주방장님이 밥을 아주 살짝만 쥐어서 만든 것이거든. 그래서 젓가락으로 먹는 것보다, 손으로 먹어야 맛있어.”
“네. 동수씨. 보기만 해도 맛있어 보여요. 어디 먹어 볼까.”
답답한 마음이 들 때는 역시 시연이를 만나는 것이 내 버릇처럼 돼버렸다. 오늘은 시연이와 마포에 있는 ‘은행골’이라는 참치전문점에 왔다. 원래 본점은 구로에 있는데, 거긴 너무 멀어서 이곳으로 왔다. 여기는 일정 금액을 내면 무한대로 먹을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고급 참치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가마도로, 오도로, 쥬도로, 머리살, 뱃꼽살 등의 주요부위를 나름 저렴한 가격으로 맛볼 수 있다.
달달하고 고소한 참치회는 입에 들어가는 순간 사르르 녹아버릴 정도로 부드럽기까지 하다. 고작 10점 정도의 참치회가 3만 원 정도 하지만, 그 돈이 아깝지 않다. 미친척하고 배불리 먹으려면 20만원도 넘게 깨진다. 그래서 초밥도 같이 먹는데, 그 초밥의 맛 또한 일품이다. 오죽하면 내가 예전에 가입했던 맛집 동호회에서는 ‘성지’라고 부르며 극찬을 했을까?
“음~. 너무 마시서요.”
“맛있어도 입에 있는 건 다 먹고 이야기해. 하하.”
시연이는 오늘 입에 들어간 음식을 제대로 삼키기도 전에 극찬을 했다.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골치 아팠던 회사일은 금방 잊혀졌다. 그렇다고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두고 바라만 보는 것은 실례다.
“아이고, 많이도 드셨네요. 여자 친구 분이 아주 음식을 복스럽게 잘 드시네요. 저희 음식을 너무 맛있게 드셔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딱 잘라 25만원만 받겠습니다. 하하하.”
예전 같으면 기겁할 금액이었다. 내가 ‘은행골’에 와서 포만감을 느끼며 돌아갈 일이 생긴다니, 왠지 감격스러웠다. 사장님의 복스럽게 먹는다는 칭찬에 시연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들은 보통 ‘나는 여자가 깨작깨작 먹는 것은 싫어. 복스럽게 먹는 여자가 좋더라.’와 같은 말을 한다. 그 말을 너무 믿지는 말아야 한다. 마음 놓고 먹다가 나중에 ‘넌 음식 너무 돼지같이 먹어.’라며 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시연이처럼 예쁜 여자만이 잘 먹어도 복스럽게 먹는다고 칭찬을 받는 법이다. 불공평하다고? 원래 처음부터 세상은 불공평했다.
============================ 작품 후기 ============================
아침에 실수로 창문을 열고 갔더니 수도관이 얼어 보일러도 안돌아가네요. 망했습니다. ㅠ 자판이 잘 안쳐져요 ㅠ 머리가 나쁘니 몸이 고생하네요.
잠시 후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