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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93화 (93/424)

00093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OO출판사 사장실

“어떻게 됐어?”

“그게. 밀린 물량이 많다고 당장은 곤란하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오면 어떻게 해?”

남자 직원의 말에 채은성 사장은 버럭 화를 냈다.

“요즘 우리 출판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뭐? 무슨 소문? 안 좋은 소문이 날게 뭐가 있다고? 윤시연이가 만든 책 잘나가고 있잖아.”

“그렇긴 한데, 조만간 부도가 날지도 모른다고 소문이 나서 인쇄소에서도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냥 소량으로 조금씩 인쇄하시죠?”

“그럼 돈이 더 들잖아. 베스트셀러 순위가 계속 오른다며? 한 번에 많이 뽑아놔야 나중에 물량 부족할 일이 안 생기지. 어떻게 설득할 방법 없어? 대금을 이번 달에 준다고 해. 급행료로 조금 더 얹어준다고 하고.”

“그...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있습니까? 책 판매대금이 들어온다고 해도, 나갈 곳이 많은데요.”

“됐어. 그 책 말고도 다른 곳에서 들어올 대금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메꿀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이번 달에 바로 정산해준다고 약속하고 책 인쇄해달라고 해.”

“그래도...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머뭇거리던 남자 직원은 채 사장이 눈을 부라리자 마지못해 대답을 하고 사장실 밖으로 나갔다.

“에잇, 전부 밥벌레들도 아니고. 어떻게 시킨 일을 하나 제대로 못해. 이번 책 팔아서 돈 벌면 직원들 물갈이나 싹 해버려야지. 믿을 놈들이 없어. 믿을 놈들이.”

“똑똑”

“누구야”

“사장님. 우체국에서 찾아오셨는데요. 직접 전해줘야 한다고 그러시네요.”

“우체국에서? 무슨 일이지. 일단 들어오시라고 해.”

“손님. 들어가시죠.”

노크를 한 여직원은 그렇게 설명을 하고 집배원을 사장실로 안내했다.

“채은성씨 되십니까?”

“네. 제가 채은성입니다만.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저는 이것만 전해드리면 됩니다. 사인해주시고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채 사장은 과속 카메라에라도 찍혔나 싶어 속으로 뜨끔했다. 봉순과 데이트를 갔다가 찍혔다면 위험하다. 진작 차를 회사 명의로 바꿔놓은 것이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집배원은 채 사장에게 서류 봉투 하나만 건네고는 자기 할 일을 마쳤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어디 보자. OO변호사 사무소? 여기서 무슨 일이지?”

남자가 건넨 서류봉투를 열어보던 채 사장은 갑자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용증명? 마동수 이 자식이 정말 해보자 이거지. 내용증명 따위를 보내면 누가 겁먹을 줄 아나보지? 어림도 없다 이놈아. 두고 보자. 윤시연 그년을 내가 제대로 부려먹어 주마.”

◆ 윤 스포츠센터 고문 변호사실

“변호사님”

“네. 사모님.”

“소문은 제대로 내고 있죠?”

“그럼요. 아마 이번 달 말이 되면 제도권 금용 쪽에서는 돈 빌리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리고 거래하고 있는 인쇄소와도 이야기를 끝내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은데, 우리 딸의 명예가 달린 일이라서요.”

“물론입니다. 감히 누구에게 그런 허접한 짓을 저지르려고 했는지 단단히 깨닫게 해주겠습니다. 아, 그리고 조사해보니 OO출판사에서 책을 낸 여자 작가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머. 정말 상종 못할 인간이네요. 그런 작자가 책을 만들고 있다니. 우선은 내버려 두세요. 9월이 지나면 집에 알리도록 하죠. 그쪽 부인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요. 나중에 소송을 도와줘서 위자료로 가지고 있는 지분을 전부 다 토해내도록 해야겠네요. 지분이 부인 명의로 완전히 넘어가면 그때부터 제대로 배당금을 지급하든 지분에 맞는 금액을 보상하든 하면 되겠죠.”

내가 한소리 해서 그런지 오늘은 준호도 헤매지 않고 그럭저럭 운전을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앞만 똑바로 보고 운전하니 어제와 같은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진작 그랬으면 욕먹을 일도 생기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 후배를 대하면서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면 곤란하다. ‘하여간 욕을 먹어야 일을 잘해.’라는 생각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 익숙해지면 허구한 날 욕을 하면서도 ‘이게 다 너를 위해서다.’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런 생각은 내가 극도로 싫어하고 경계하는 모습이다. 군대에서 후임을 두들겨 패면서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라고 하거나, 선생님이 이성을 잃고 학생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이면서 나중에 불러서는 ‘그게 다 너 잘 되라고 선생님이 일부러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모습을 10대, 20대 시절에 꽤 봤다. 심지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중에는 ‘이게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라며 자신을 정당화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내가 꼬마일 때, 나이 많은 어르신 들이 가끔 ‘조선 놈들은 맞아야 정신 차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몰랐었다. 나중에 그 말의 뜻을 알고, 어떻게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그렇게 비하하는 발언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었다. 그래서 그런지 폭언이나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신을 합리화 하는 사람을 보면 아직도 우리나라에 식민지 잔재가 남아있는 것 같아 씁쓸할 때가 있다. 나도 우리 조 팀장님처럼 여유를 가지고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데, 이놈의 소갈딱지가 좁아터져서 쉽게 되지가 않는다.

열심히 돌아다녀도 마땅한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준호가 제대로 운전을 한다고 해서 없던 건물이 갑자기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공터는 간간히 보이는데, 주상복합 같은 큰 건물을 짓는 곳도 없었다. 부동산에 들러 은근슬쩍 물어보니, 2005년 트라팰리스와 보미리즌빌 이후로 주상복합 아파트는 더 이상 목동에 지어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9월 중순 영등포에 타임스퀘어라는 대단위 복합건물이 완공된다고 하는데, 몇 달 지체만 되지 않았으면 차라리 그쪽에 입주하는 것이 가장 좋을 뻔 했다.

“준호야. 잠깐 차 좀 세워봐.”

목동동로를 따라 쭉 내려 가다보니 오른편에 넓은 건물 하나가 차단막에 둘러싸여 적막하게 서 있었다. 6층 건물이었는데, 폭이 꽤 넓었다. 얼마 전까지 백화점 건물로 사용했는지, 미래백화점이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있었다. 나는 혹시나 뭐라도 정보를 얻을까 싶어 근처에 있는 부동산에 들렀다.

“실례합니다.”

“네. 어서 오세요. 집 보러 오셨어요?”

꽤 넓은 부동산 사무실 안에는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50대로 보이는 중년 남자 한 명만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집이라도 보러 왔다고 생각했는지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그게 아니라, 뭐 좀 물어보려고요.”

“아. 그러시구나. 물어보세요. 손님도 없으니 제가 아는 것이 있다면 알려드리죠.”

“옆에 있는 미래백화점 말입니다. 리모델링이라도 하는 겁니까?”

“아, 거기요? 요즘 백화점 치고는 너무 낮아서 부수고, 미래건설에서 주상복합 아파트를 짓는다고 하네요. 이쪽에는 주변에 아파트가 많아서 높이제한이 있는데도, 백화점은 적자고 마땅한 부지는 나타나지 않아서 결국 며칠 전에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언제 완전히 철거한다고 해요?”

“다음 주 수요일인가 그때 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보슈?”

“별일 아닙니다. 하하하. 아는 친구가 저기 백화점에서 일한다고 해서 왔는데, 이미 다른 백화점으로 옮겼나보네요. 연락이나 해보고 올 걸 그랬네요. 말씀 잘 들었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젠장. 여기도 또 늦었다. 갑자기 요즘 들어 되는 일이 없었다. 미래그룹에서 이미 결정한 일이니 우리가 끼어들어봤자 소용이 없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불과 며칠 전에 결정이 난 것 같았다. 미리 알았다고 해도, 없는 땅을 우리가 만들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니 별로 달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조금만 더 미리 알았다면 뭔가 방법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가자. 여기도 글렀다.”

“그래요? 아쉽네요. 제가 봐도 딱 적당해 보이는데.”

“그르게나 말이다. 다음 주에 철거한단다. 계속 돌아다녀보자.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물이 보였으니, 좀 더 발품을 팔다보면 더 괜찮은 곳도 나오겠지.”

주말까지 반납하면서 일요일까지 준호와 함께 돌아다녔지만, 완전히 마음에 드는 건물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공을 들여 리노베이션을 하면 쓸 만할 것 같은 건물 두 개는 발견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일단 모여서 이야기부터 하자.”

월요일에 출근하자마자 며칠 간 다녀본 성과에 대한 회의부터 시작했다.

“마 대리 쪽은 좀 괜찮은 건물 발견한 것 있어?”

“아뇨. 그냥 그래요. 그래도 부지가 좀 넓은 건물 두 개는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뭐 문제 있어?”

“증·개축을 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요. 건물이 좀 작아요.”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겠지. 우리는 세 곳을 알아왔는데, 영 마땅치가 않아. 일단 입주한 가게들이 너무 많아. 그 가게들 정리하려면 오히려 시간이 더 들지도 몰라.”

조 팀장님 쪽도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지 이사님이 반드시 해내라고 했는데, 점점 암담한 기분만 들었다. 건물만 봐왔다고 끝이 아니었다. 주인이 건물을 팔 의지가 있는지도 중요하고, 혹시라도 건물 주인이 여러 명으로 나뉘어 있으면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말짱 도루묵이 된다.

“알려주신 주소 별로 등기부등본 모두 뽑아 왔습니다.”

“그래. 이리 줘봐. 어디보자... 이봐. 이봐. 이럴 줄 알았어. 하여간. 쉬운 일이 없다니까. 땅주인하고 건물 주인이 다른 경우도 있네.”

“부부인가 보죠. 아닐 수도 있겠지만.”

“염병. 그게 문제가 아니다. 두 곳 빼고는 전부 주인이 다 여러 명이야. 직접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으면, 설득하기는 더 힘들어지잖아. 골치 아프네.”

“별 수 있어요. 사표 써야죠. 뭐.”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가면 뭐 할 거라도 있어?”

“왜요?”

“나도 같이 껴서 하려고.”

“수요일까지 방법이 없으면 정말 같이 동업이라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건물 두 곳은 주인이 한 명이니, 그 사람을 찾는 것부터 해보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화요일까지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건물주 중 한 명은 제일교포라서 일본에 머물고 있어서 포기했다. 다른 한 명은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였는데,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쫓겨났다. 수십 년을 피땀 흘려 벌은 돈으로 직접 지은 건물이라면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팔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오시니 도저히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여러 명이 나눠서 소유하고 있는 건물은 이틀 동안 제대로 소재 파악도 하지 못했다.

“결국 열흘 천하네.”

“네?”

“우리 팀 내일부로 해산될지도 모르잖아. 사표는 쓰지 않겠지만, 한동안 지방 한직으로 맴돌다 와야 할지도 몰라. 내 동기들은 아직도 과장인데, 나는 팀장 달고 열흘정도 지냈으니 만족해야 하나.”

“흑. 전 벌써 지방 갔다 왔는데요. 또 가야 해요?”

“그럼 한 번 더 가야지 뭐. 이번에는 오래오래 있어야 할 거다. 흐흐흐.”

시간은 없는데 일이 풀리지 않자, 조 팀장님과 나는 회사 옥상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며 수다를 떨었다. 로또가 당첨된 이후로 처음 맛보는 실패였다. 공동명의를 가진 사람 중에 신원이 파악 된 사람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이 마당에 하루 있는 시간은 그냥 우리의 피를 말리는 고통의 순간일 뿐이었다.

30년을 살아오면서 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살아왔는데, 이번 실패는 유달리 씁쓸했다. 5개의 건물이 후보로 올랐을 때는, 솔직히 건물 하나쯤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나본 사람 중에 내가 설득을 해서 확답을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에게 팔면 분명히 더 큰 목돈을 만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이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거만해졌던 것 같다. 소 뒷걸음질 치며 쥐를 잡은 요행이 정말 내 실력이라고 믿고 열심히 잔머리만 굴렸던 것 같았다. 윤 사장님과 시연이 어머님은 시연이라는 매개체 때문에 내게 호의를 보인 것인데, 그것 또한 순수한 내 실력이라고 믿어버렸다. 이번 일을 통해 사람을 설득하는데 돈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달은 것만 해도 큰 소득이다. 그래도 정말 지방으로 발령나면 시연이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할 텐데. 흑, 갑자기 서글퍼졌다.

============================ 작품 후기 ============================

감기기운이 있어서 그런지 글이 잘 써지지가 않네요. 내일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라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쿠폰선물을 해주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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