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4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퇴근 시간을 앞둔 사무실 분위기는 축 가라앉았다. 내가 괜한 일을 벌여 사람들 고생 시킨 것은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남은 일은 조인식 행사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다. 노블레스 짐(Gym)보다 훨씬 내용 있는 행사를 준비했으니 우리가 그동안 한 수고가 전부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Rrrr
슬슬 퇴근 준비를 하려는데 현우에게 전화가 왔다.
“왜?”
“정수가 삐졌다.”
“그 놈이 왜 삐져?”
“무심한 놈. 태균이나, 너나, 나나 전부 애인이 생겼잖아. 요즘 주말에 몇 번 안 놀아줬더니 단단히 삐져서 전화로 꼬장 부리더라. 오늘 그 놈 데리고 술이나 한 잔 빨자. 신촌 OObar다.”
“크크크. 알았다.”
꼬장 부리는 정수가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우리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거의 매주 보던 상황에서 한 명 두 명 빠져나가더니 결국 정수 혼자 남아, 주말이면 외로이 방바닥만 긁었을 것이 분명하다. 불쌍한 녀석. 어쨌든, 술 마시자는 이야기가 반가웠다. 일이 어그러지고 보니 오랜만에 술 생각이 간절했던 차였다.
“어. 왔냐?”
퇴근하고 약속장소로 왔더니 정수와 현우는 이미 도착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야 임마. 심심하면 놀아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꼬장을 부리냐?”
“에이씨. 오자마자 구박이야. 나도 오죽 심심했으면 이랬겠냐? 너무 심심해서 강남까지 넘어가서 재형이랑 형진이 만나서 놀았다니까.”
“풉. 네가 강남을 넘어가? 세상에! 내일 시욱이 형에게 전화가 와서 ‘나 이제 여자 끊었다.’라고 선언하는 거 아냐?”
시욱 선배에게 화류계는 삶의 낙이다. 대학생 때 돈이 없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그 생활은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그 선배가 여자를 끊는다는 말은 화류계를 더 이상 다니지 않겠다는 소리고, 그것은 우리들에게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과 동급인 사건이다.
“치사한 놈들. 친구고 뭐고 다 필요 없다니까. 여자만 생기면 그냥 생을 까시니.”
“우릴 탓하지 마. 이게 다 현우 때문이야.”
“왜? 내가 갑자기 거기서 왜 튀어나와?”
“현우 저놈이 아직 김 대리 눈치만 보고 사니까, 커플끼리 어울릴 수가 없잖아. 커플들끼리 어울리다보면 정수도 자연스럽게 끼어서 같이 놀고. 좀 좋아?”
“그래서? 나보고 지금 너희 연애질하는데 끼어서 같이 놀자는 말이야?”
“왜 싫어? 혹시 알아? 우리 시연이야 너무 어려서 힘들어도, 선희씨나 김 대리는 소개팅을 해줄지도 모르잖아. 김 대리는 힘들려나? 성격이 좀 깐깐해야지.”
“우리 수현씨가 뭐가 어때서? 얼마나 여성스러운지 네가 알아? 나이도 10살이나 어린 꼬맹이를 사귀고 있으니 여성스러운 것이 뭔지 알 턱이 있나?”
내가 김 대리의 깐깐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현우가 발끈했다. 저녀석은 모자란 놈이 분명하다. S라인 쭉쭉빵빵에 웃음까지 예쁜 우리 시연이를 보톡스를 잘못 맞아 얼굴이 굳은 것처럼 무표정한 김 대리와 비교하다니.
“꼬맹이? 너 임마. 우리 시연이가 높은 힐만 신어도 너보다 커. 누구보고 꼬맹이래?”
쾅...
현우와 내가 누구 애인이 더 나은가를 두고 배틀을 벌이려는 순간 정수가 탁자를 내리쳤다.
“둘 다 그만하지. 이것들이 사람 불러놓고 뭐하는 짓이야. 너희들 나 약 올리려고 일부러 짰지? 우리 시연이? 우리 수현씨? 아주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야. 정수 삐졌다. 그만하자. 그래도 우리 수현씨가 얼마나 여성스러운데. 안 그러냐? 정수야?”
“미친 놈. 스포츠센터에서 얼핏 봤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 제대로 얼굴이나 보여주고 그런 소리를 하지?”
“그러니까! 저놈은 김 대리 눈치만 보느라 우리에게 정식으로 소개시켜 준적도 없다니까. 한신한 놈. 아마 현우 저 녀석은 평생 김 대리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닐 거야.”
“똥수. 너도 닥쳐. 이 로리콤아!”
“뭐? 로리콤? 그냥 좋은 말로 도둑놈이라고 불러주면 안 돼?”
“그래 알았어. 도둑놈아. 헛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주위에서 보면 굉장한 싸움이 난 것 같아 보이겠지만, 우리가 만나면 보통 이러고 논다. 정말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서로를 구박하는 것이 우리의 애정 표현이다.
“근데 태균이는?”
“그 놈은 선희씨와 같이 오겠다고 그러네.”
“그래? 그러다가 올해 안에 정말 결혼한다고 그러는 거 아냐?”
“크크크. 그럼 재미있겠다. 선희씨 친구들하고 뒤풀이 할 것 아냐.”
“그게 왜 재미있냐?”
“우리들에게는 누님 아니냐? 얘기 들어보니까 연상연하 커플이 결혼을 하면 신부친구들이 신랑 친구들을 그렇게 예뻐한단다.”
“그래서 어쩌라고?”
“됐다. 이것들아! 이제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다른 여자들은 눈에도 안 들어온다.’ 이건가 본데.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웃긴 놈이네. 그런데 가서 제대로 놀 주변머리도 없는 놈이.”
“정수 저놈은 좋다고 헤벌쭉 거리며 따라갔다가 누님들에게 잡아먹힐지도 몰라. 크크크”
“누가 누구를 잡아먹는다고?”
우리끼리 헛소리나 하면서 신나게 놀고 있는데, 태균이가 선희씨의 손을 꼭 잡고 나타났다.
“아... 아냐. 그냥 우리끼리 우스갯소리 한거야. 어서 오세요. 선희씨. 오랜만이네요.”
“네. 동수씨도 오랜만이네요. 어린 여자와 사귀신다더니 얼굴보기가 힘드네요. 호호호.”
“그럴 리가요. 저는 바빠도 친구들과 여행은 다녀왔잖아요. 누구처럼 친구들은 버리고 여자 친구와 둘이 여행을 간 녀석보다는 전혀 안 바쁩니다. 하하하.”
지난번 캐나다여행에는 태균이만 빠졌었다. 여자 친구와 둘이 즐거운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나의 짓궂은 농담에 선희씨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올 사람은 다 왔으니 신나게 술 마시는 일만 남았다. 우리 사인방이 다 같이 모인 것은 오랜만이라 그동안 밀린 이야기도 많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방선희 아니야. 야, 방선희 오랜만이다. 나랑 헤어지고 회사도 그만둬서 어디서 뭐하고 사나 싶었더니, 그새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이렇게 즐겁게 놀고 있을 줄은 몰랐네. 이거 갑자기 배신감이 느껴지는데.”
우리끼리 신나게 수다를 떨며 놀고 있는데, 웬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선희씨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니 예전에 알고 지냈던 남자 같았다.
“그 손 놓고 가던 길 가시지. 술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그쪽이나 신경 끄시지. 나는 이쪽하고 이야기 중이거든.”
“나는 상관있는 사람이거든. 보아하니 술도 제법 먹은 것 같은데 좋게 말할 때 그냥 가라.”
현우가 까칠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그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선희씨의 팔을 잡고 이곳에서 끌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태균이가 선희씨의 팔을 잡아끌고 있는 그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넌 뭐야?”
“나? 난 선희씨 애인이다. 하는 꼴을 보니 예전에 잠깐 만났던 사이 같은데 헤어졌으면 그만이지 남자새끼가 찌질하게 여자에게 행패를 부려.”
“태균씨 그냥 상대하지 말아요. 상종할 가치도 없는 남자예요.”
화를 내는 태균이를 옆에 있던 선희씨가 말렸다. 그 남자는 선희의 말을 들으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선희씨 앞으로 한발자국 다가갔다.
“어이. 방선희.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섭섭하지. 그래도 한때는 같이 동거까지 했던 남자에게 상종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니.”
“다... 당신. 정말 이렇게 비겁한 인간인줄은 몰랐네요. 태균씨 미안해요. 저 먼저 가볼게요. 소란 일으켜서 미안해요.”
그 남자의 폭탄 같은 발언에 우리 일행은 전부 얼어붙어버렸다. 그리고 선희씨는 그의 말에 얼굴이 차갑게 굳은 채 자리에서 떠나고 말았다.
“서... 선희씨.”
“어이. 이봐. 따라갈 것 없어. 당신 운 좋은 줄 알아. 저년이랑 사귀고 있었나본데, 저렇게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랑 사귀었다가는 나중에 집안 꼴만 우스워져. 나랑 동거했던 사실을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좋은 분위기를 박살내버린 남자는, 자리를 떠난 선희씨를 따라 나가려던 태균이를 붙잡고 아주 야비한 소리를 지껄였다.
“뭐라고 이 개자식아? 비겁한 새끼. 어디 한 번 죽어봐라.”
“크윽...”
남자의 말에 화가 난 태균이는 우리가 말릴 틈도 없이 그에게 주먹을 날려버렸다. 태균의 갑작스러운 주먹질에 건너편 테이블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남자의 일행들이 끼어들었고, 그때부터 술집은 아주 난장판으로 변해버렸다. 상대방 다섯과 우리 네 명의 싸움. 주먹을 피하는 멋진 동작 따위는 없었다. 물고 뜯고 잡아당기는 그야말로 볼품없는 개싸움은, 누군가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왔을 때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우린 억울합니다. 저쪽이 먼저 주먹질을 했다니까요.”
“지랄하네. 조용히 술 마시던 우리에게 와서 행패를 부린 게 누군데. 경찰 아저씨. 우리가 먼저 주먹질 한 것은 맞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쪽이 먼저 우리 일행이던 여자에게 성희롱을 했습니다.”
“뭐? 지랄? 이 자식들이 아직 덜 맞았나? 내가 오늘 술만 안마셨어도 너희 네 명쯤은 나 혼자 처리할 수도 있었어.”
“등신. 여기 술 안 마신 사람이 어디 있다고? 우리 집에는 집채만 한 금송아지가 있다. 이 머저리 같은 자식아.”
쾅쾅쾅.
“그만들 좀 하세요. 그 알 만한 사람들이 정말 왜들 이러십니까?”
우리는 출동한 경찰들에 의해 신촌지구대로 끌려왔다. 말리는 사람이 생기자 주먹질 대신 입 싸움이 시작되었다. 상대방 쪽의 성격 괄괄한 남자와 우리 까칠대마왕 현우의 입씨름이 도를 넘어서자, 경찰관 한 명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요즘은 정말 내게 마가 낀 것 같다. 평생 가보지 못했던 경찰서를 올해는 벌써 두 번째 왔다.
제일 먼저 주먹질을 했던 태균이는 자신의 왼쪽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저 녀석도 생각이 많을 것 같았다. 내가 태균이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솔직히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동거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없다. 일주일에 몇 번 만나 섹스를 하는 거나, 같은 공간에 지내면서 섹스를 하는 거나 무슨 차이가 있겠나? 성관계를 10번 한 여자는 괜찮고, 100번 한 여자는 싫다는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여자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문제는 친구들이 알아버렸다는 사실이다. 당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의 수군거림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여러 번 봤다. 한국사회가 아직 성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라서 그렇다. 자존심 강한 태균이가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저 녀석을 잘 알고 있는 나도 예상하기 힘든 문제였다.
“뭘 그렇게 생각하냐?”
“응? 그냥.”
나는 생각에 잠긴 태균이의 옆에 가서 앉았다.
“고민 되냐?”
“네가 뭘 알겠냐? 세상 물정 모르는 20살짜리 꼬마랑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는데.”
태균이는 내 말에 쓴 웃음을 지으며 뼈있는 농담을 했다. 녀석의 말이 맞다. 나는 실컷 놀 것 다 논 주제에 지금은 순진해 빠진 시연이와 만나고 있다. 내가 태균이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꼭 한마디는 해주고 싶었다.
“그래 내가 뭘 알겠냐? 나도 들은 이야긴데, 친하게 지내던 고향 선배가 그러더라. 여자 때문에 고민이 되면 딱 한 가지만 생각하라고. 그 사람이 없어졌을 때를 상상해봐. 그러면 상황은 명확해진다고 하더라. 그럼 난 현우나 좀 진정시키러 간다.”
“없어졌을 때를 상상해라... 없어졌을 때...”
나는 태균이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상대방과 여전히 입씨름을 하고 있는 현우에게 갔다. 녀석은 내 말을 계속 되뇌며 생각에 빠졌다.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오지랖을 떨었다. 선택은 태균이가 알아서 할 일이다.
============================ 작품 후기 ============================
주인공이 너무 많은 일을 벌인 것 같다는 의견이 있네요. 빌딩관리는 외주업체에 맡기고, 출판사 일은 시연이 어머님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법관련 일은 변호사가 대행하고 있죠.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지 않나요?
목동에 살지 않습니다. 그냥 일이 있어 몇 번 갔다가 고생을 했었죠. ㅎ
금방 한 편 더 올릴게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