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5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거참. 웬만하면 합의하세요. 밤새도록 여기 계실 겁니까?”
“그렇게는 못합니다. 저놈들 콩밥을 먹여야 한다니까요. 제 친구 얼굴 좀 보세요. 눈두덩이 찢어지고, 입술이 터졌습니다. 완전 무뢰배들이라니까요.”
“와! 저 아저씨 말하는 것 좀 봐. 그러는 우리는. 여기 내 머리 좀 봐요.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빠졌어요. 그리고 여기 보세요. 와이셔츠 찢어진 곳. 손톱자국 보이시죠? 혼자서 네 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하더니, 할퀴는 기술만 배웠나 봐요. 손톱으로 조금만 더 깊이 배에 구멍이 날 뻔 했어요. 또 어디있더라. 맞다. 팔. 여기 팔 좀 보세요. 여기 이빨자국. 무슨 고양이 새끼도 아니고 물고 뜯고 할퀴고. 어휴.”
태균이를 혼자 두고 현우에게 갔더니 이 녀석은 상의를 다 벗고 여기저기 상처자국을 보이면서 아주 진상(?)을 떨고 있었다. 옆에 있는 정수는 코피가 나서 휴지로 코를 막고 있었고, 나도 입술이 터져서 입주변이 화끈거렸다.
“자자자. 고정들 하시고. 이쪽 분들이 저쪽 분에게 먼저 주먹질을 했으니, 잘못은 이쪽 분들에게 더 있습니다.”
“거봐! 너희들, 오늘 합의 없는 줄 알아. 무릎 꿇고 빌어도 용서 안 해준다. 특히 너. 계속 깐죽거리던 너. 어디 두고 보자.”
“아니. 경찰 아저씨. 세상에 이렇게 억울한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앞으로 자기 여자 친구를 희롱해도 그냥 두 눈 뜨고 지켜만 봐야한다는 말 아닙니까? 절대 인정 못합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습니다. 폭력에 대한 처벌은 그렇다는 이야기고. 문제는 저쪽 분들이 이쪽 분들의 일행인 여자를 희롱했다는 것입니다.”
“그냥 희롱이 아니라, 성희롱이요. 성범죄자로 집어넣어야 한다니까요.”
“네. 네. 그 참 끝까지 이야기를 좀 들어주세요.”
오늘 만난 경찰은 무척 성실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원만히 합의를 보도록 노력하고 있는데, 상대방의 괄괄한 남자와 현우가 옆에서 너무 떠들어댔다.
“현우야. 일단 이야기부터 듣자. 진정해라.”
“왔냐? 태균이는?”
“그냥 생각이 많은가봐. 그냥 두고 왔어.”
“아. 정말 저 자식 어떻게 콩밥 먹일 방법 없냐? 내가 정말 속이 터져서 살 수가 없다.”
“어쩌겠냐? 그래도 태균이가 시원하게 한 방 갈겼잖아. 그걸로 만족해야지. 법이 그런데 우리라고 어쩔 수 있냐.”
“정말 속상해 죽겠네. 태균이 저놈 풀 죽어 있는 모습을 보니 짜증이 난다. 어디 잘 아는 변호사 없냐? 내가 콩밥 먹는 한이 있더라도 시비 걸었던 그놈은 봐주기 싫은데.”
“이런 일로 무슨 변호사까지. 너 콩밥 먹으면 태균이랑 선희씨는 기분이 어떨 것 같냐? 진정하고 일단 이야기나 끝까지 들어보자.”
“그래. 내가 참아야지. 어휴.”
아직까지 화가 풀리지 않아 빠득빠득 이를 가는 현우를 겨우 진정시키고 나서야 경찰의 말을 계속 들을 수 있었다. 나도 화가 났다. 그래도 성질대로 살 수만은 없다. 예전에 시연이와의 일이야 당사자가 나 혼자였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이번 일은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선희씨의 프라이버시도 걸린 일이기 때문에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휴. 이제 다들 진정하신 것 같으니 계속 말씀을 드리죠. 우선 성희롱으로 형사 처분을 하려면 신체적으로 접촉한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까?”
“그럼요. 팔 만졌어요. 우리가 전부 똑똑히 지켜봤어요. 그건 저쪽 사람들도 부인하지는 못할 겁니다.”
“만지긴 뭘 만져? 그냥 잡아당기기만 하던데.”
“저 보세요. 저 사람들도 인정하잖아요.”
잡아당긴 것이나 만진 것이나 어감은 달라도 어쨌든 신체적 접촉은 분명히 있었다. 다행히 저들이 너무 쉽게 그 사실을 인정하는 바람에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신체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시는군요.”
“그냥 잡아 당겼다니까요?”
“그래도 신체접촉은 신체접촉입니다. 서로 잘못이 있으니 그냥 이쯤에서 합의보시죠?”
현명한 경찰덕분에 술집에 대한 피해만 우리가 보상하는 것으로 합의를 마칠 수 있었다. 현우는 그 돈도 절대 줄 수 없다고 펄펄 뛰었지만, 주먹질을 먼저 해서 술집을 개판으로 만든 것은 우리였다. 그리고 태균이의 눈치를 보니 고민이 끝난 것 같았다. 좋은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면, 혹시라도 초초하게 태균이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선희씨를 생각해서도 빨리 끝내는 것이 나았다.
“나, 너희들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합의를 끝내고 신촌지구대를 나오자 태균이가 우리를 불러 모았다.
“뭔데 그렇게 진지해. 말해봐.”
“오늘 일 평생 모른 척 해주라. 선희씨 못 놓겠다. 그리고 너희들도 잃고 싶지 않다. 그러니 오늘 일은 잊어주라. 부탁한다.”
“별 소리를 다한다. 난 네가 무슨 부탁을 하는지도 이미 잊었어.”
“걱정 말고 가봐. 여기 일은 우리가 마무리 할게.”
“고마워. 그럼 나 먼저 간다. 나중에 연락할게.”
태균이는 그 말을 남기고 쏜살같이 도로로 달려가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
“다행히 별일 없을 건가 보네.”
“그러게. 우리는 술집에 변상이나 해주러 가자.”
◆ 선희의 집.
예전에 사귀었던 남자가 보여줬던 상식이하의 행동에 모멸감을 느낀 선희는, 태균과 그의 친구들과 더 이상 있을 자신이 없어 도망치 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집에 도착하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처음 그 남자를 만났을 때는 그렇게 비열한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자신의 멍청함이 저주스러웠다.
거의 2년이 다 된 일이었다. 그리고 집을 옮기는 과정에 실수가 있어 며칠만 있게 해달라고 해서, 그때는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별생각 없이 그러라고 했다. 딱 일주일동안 같이 지내는데, 그 기간이 자신에게 이렇게 치명적으로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혹시나 싶어 기다려봤지만, 태균은 오지 않았다. 최소한 자신에게 변명이라도 요구할 줄 알았는데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1시간이 지나도, 2시간이 지나도 연락조차 없었다. 더 이상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초초했던 마음도 담담해졌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그 정도의 남자였다면, 나중에 자신의 순결문제를 가지고도 따지고 괴롭혔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자신은 왜 이렇게 남자 운이 없을까 한심했고, 여자에게만 굴레를 씌우는 한국의 보수적인 성문화가 증오스러웠다.
탕탕탕.
“누... 누구세요.”
“나예요. 선희씨. 이야기하게 문 좀 열어봐요.”
겨우 그렇게 합리화하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는데 갑자기 찾아온 태균 때문에 선희는 당황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순간은 반가웠다. 그러나 왜 이제야 나타났을까하는 생각이 들자 반가운 마음이 금방 사라졌다. 고민을 했다는 이야기다. 결론을 어떻게 내렸던 자신의 과거가 이제 태균에게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하다가도 나중이 되면 자꾸 질문하고 집착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것은 주변 친구들을 통해 알 만큼 알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세요.”
“일단 얼굴 보고 이야기해요.”
“싫어요. 당신도 나를 동거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잖아요. 고민하다가 이제야 온 거잖아요. 태균씨도 결국 남자에요. 평생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죄인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내가 늦게 와서 미안해요. 얼굴 보고 이야기해요. 네?”
태균은 아까 술집에서 했던 행동이 후회가 되었다. 주먹도 아까운 그런 쓰레기 같은 자식에게 시간을 낭비하는 바람에 지체했던 것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찰서에 가는 바람에 선희의 말처럼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생각이 더 명확해졌다.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데 이미 신뢰를 잃어버린 것인지 선희의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냥 이쯤에서 서로 그만두기로 해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서로에게 상처가 될 거예요. 저 정말 태균씨 사랑했어요. 지금처럼 좋은 기억만 남아있을 때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중에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지경까지 돼서 그만두면 그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얼굴은 보고 이야기해요. 어떻게 얼굴도 보지 않고 이별을 통보할 수 있어요? 당신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미안해요.”
쾅쾅쾅.
“선희씨 제발요.”
“미안해요. 돌아 가주세요.”
선희는 문 앞에 등을 대고 기대면서 쪼그려 앉았다. 진이 다 빠졌다. 정말 이 남자는 괜찮을까하는 희망이 자신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시커먼 물체가 등장했다.
“꺄악...”
“서... 선희씨 무슨 일이에요? 안에 무슨 일 있어요?”
벌컥.
갑자기 들리는 비명에 태균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경찰에 신고라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바... 바퀴벌레요. 흑흑. 지난번 그 바퀴벌레보다 더 큰 것 같아요. 어떡해요.”
갑자기 나타난 바퀴벌레에 놀란 선희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예전에 늠름하게(?) 해충을 박멸했던 태균이 문 앞에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고민은 까맣게 잊고 문을 열었다. 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반가움에 눈물이 왈칵 나왔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본다는 것이 이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다려 봐요. 제가 치울 테니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요.”
태균은 선희를 뒤로 물리고 바퀴벌레에게 다가갔다. 더 이상 이 바퀴벌레가 무섭지 않았다. 신발장에 위에 있는 신문지를 말아서 다가갔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바퀴벌레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태균은 선희가 보지 못하게 등으로 시선을 가린 후 바퀴벌레를 냉장고 뒤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담배를 끊으면서 가지고 다니던 자두맛 사탕을 꺼내 냉장고 뒤로 던져줬다.
“선희씨. 이제 바퀴벌레 없어요. 안심하세요.”
“정말이에요?”
“그럼요. 이제 이야기 좀 해요.”
“태균씨! 얼굴이 대체 왜 그래요? 싸웠어요? 저 때문에 싸운 거예요?”
그의 얼굴을 보면서 느낀 반가움 때문에 자신은 태균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 주위에 생긴 시퍼런 멍을 발견했다. 이제야 그가 늦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태균을 원망만 하고 있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이야기부터 해요.”
“어떡해요. 저 때문에. 미안해요. 저는 태균씨에게 좋은 여자가 아닌가 봐요. 흑흑.”
“웃기지마. 넌 좋은 여자야. 방선희! 울지 말고 잘 들어.”
“네?”
갑작스러운 태균의 반말에 선희는 깜짝 놀랐다.
“결혼하자.”
“네?”
태균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내 선희의 손가락에 끼웠다.
“결혼하자. 원래는 더 근사한 곳에서 하려고 했는데. 이제 어쩔 수 없어. 결혼하자.”
“네? 겨... 결혼요?”
“그래. 난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 여자와 결혼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사랑해. 방선희. 우리 결혼하자.”
“저... 정말 그런 확신이 들어요?”
“그래. 아까 당신이 가버리고 나자,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 생각이 드니까 미치게 보고 싶어졌어. 난 이제 당신 없이는 못살 것 같아. 결혼해줘. 응?”
“네. 할게요. 할래요. 당신과 결혼.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태균과 선희는 서로를 깊이 안았다. 선희의 눈에서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퀴벌레가 그 둘의 머리 위를 한 바퀴 휙 돈 다음 냉장고 뒤로 사라졌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주변에는 자두향이 가득해졌다.
바퀴벌레 시리즈 제 3화. 최종회 : 사랑은 바퀴를 타고. 끝.
============================ 작품 후기 ============================
바퀴벌레의 '바'자만 봐도 싫으신 분들도 계신 텐데 자꾸 이용해먹죠? 이제 바퀴벌레 이야기는 끝입니다. 제 글의 가장 퓨전적 요소가 아닐지 ^^ 저는 왜 이런 글을 쓸때가 가장 잘 써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조금 키워서 한 권짜리 로맨스 소설을 출판 하고 싶네요.. 쿨럭. 농담입니다. 그 동안 친구들이 스토리에서 소외된 것 같아서 다시 관심을 가지려고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가시기전에 선추코 잊지마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