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우와. 여기가 남자 혼자 사는 집이 맞아요? 킁킁. 홀아비 냄새가 하나도 안 나네? 잘 해놓고 사시네요. 이 정도면 신혼집 해도 되겠다. 호호호.”
집이 가까워서 그런지, 정지영 주임이 제일 먼저 도착했다. 그녀의 수다는 여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야기는 다들 모여서 하기로 했으니, 업무에 대해 논의를 하자고 끌어 앉힐 수도 없어 내버려뒀더니 아주 신이 나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어머. 여자 친구인가보네요. 예쁘다. 그리고 어려보이네. 와! 우리 마동수 대리님 알고 보니 엄청난 능력자셨구나.”
내가 사는 오피스텔을 열심히 구경하더니 결국 시연이가 사다준 컵을 발견하고는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오피스텔 자체가 뻥 뚫린 구조고, 컵을 어디 숨겨둔 것도 아니니 금방 눈에 띄었나보다.
“흠흠. 뭘 또 능력자까지. 사람 사귀는 게 다 똑같지.”
“에이. 그래도 미인을 사귀는 남자는 따로 있죠. 팀장님도 한 번 보세요. 엄청 미인이죠?”
정 주임은 혼자보기 아깝다면서 그 컵을 들고 팀장님에게까지 보여줬다.
“어디. 오! 정말 미인이네. 이 정도면 가수나 배우해도 되겠다. 야! 마 대리. 넌 이런 미인을 사귀고 있었으면서 내게 그동안 보고도 안했어?”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요. 하하하.”
자기 연인 예쁘다고 칭찬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냥 흐뭇한 웃음만 지었다. 어렸을 때는 누군가가 내 여차 친구를 쳐다보는 것만 해도 싫었었다. 마치 세상 남자들이 내 여자에게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은 불쾌감이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나 빼고 모든 남자는 늑대야.’라고 생각하며 살다보니 여자 친구에게 자꾸 간섭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철이 좀 들자 내가 그동안 얼마나 세상을 피곤하게 살아왔는지 깨닫을 수 있었다.
그래서 생각을 바꿔 먹었다. ‘그래 너희들은 군침이나 흘려라. 그래봤자 이 여자는 내 여자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나니 세상 남자들에 대한 적의가 사라졌다. 그때부터는 여자 친구가 좀 야한 옷을 입어도 터치를 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철이 없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내 눈에만 예쁘게 보였을 여자 친구를, 설사 남들 눈에도 예쁘다고 해도 그냥 한 번 쓱 보고 지나갈 일을, 뭐한다고 그렇게 과잉보호를 하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온다.
첫사랑과 잘 이루어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연애를 처음 해보는 상황에서 오는 미숙함. 이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생기는 갈등 때문에 싸움이 잦아지고 결국 헤어지고 만다. 그렇게 이별을 경험하면서 사람은 성숙해지고 좀 더 너그러워진다. 그리고 다음 사람을 만났을 때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성숙해지다보면, 비로소 제 짝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상대가 자신의 진정한 짝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연애에 자신의 몸을 맞춰서 큰 갈등이 생기지 않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첫사랑과 결혼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다. 그 사람들도 분명 수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시행착오들을 현명하게 잘 극복해서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맺었을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한 명의 이성만 알고 지낸다니 얼마나 불행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평생을 단 한 사람만 알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이 익네. 어디서 봤지?”
“보긴 뭘 봐. 그냥 평범한 학생이야.”
“학생? 아, 맞다. 윤시연. 윤시연 작가네. 설마설마 했는데, 그럼 그 책에 적혀있던 마동수라는 사람이 정말 마 대리님이셨어요? 난 그냥 이름이 똑같은 사람이 있구나 했죠. 우와! 어쩜 이런 일이. 마 대리님. 저 그 책 너무 좋아해요. 나중에 윤시연 작가님에게 사인 좀 받아주시면 안 되나요?”
책이 잘 팔린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벌써 알아보는 사람이 생길 줄은 몰랐다. 게다가 수다쟁이 정 주임이라니. 곤란하다. 자칫 소문이 나서 시연이가 윤 스포츠센터 사장의 딸이라는 사실이라도 알려지면 자칫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밝혀지겠지만, 최소한 이번 프로젝트가 안정될 때까지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다.
“하하하. 정 주임.”
“네. 마 대리님.”
“사인은 받아 줄 테니까 대신.”
“대신? 뭐든지 말씀하세요. 대신 뭐요?”
“회사에서는 그냥 비밀로 하자. 응?”
“왜요? 나 같으면 이렇게 어리고 예쁜 여자 친구가 있으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겠구먼. 윤시연 작가님 나이가 20살인데, 그러고 보니 10살 차이네. 세상에 이런 도둑놈이.”
“그래서 그래. 농담으로 도둑놈이라고 놀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말 안 좋게 생각해서 뒤에서 욕하는 사람도 생길 수 있잖아.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꽤 있어. 그러니 비밀이다. 알았지?”
“음. 그렇긴 그러네요. 어쩌지. 내 입이 좀 가벼운데.”
결국은 들어줄 거면서 튕김질이다. 어휴. 또 무슨 부탁을 하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알았어. 뭐 맛있는 것이라도 사줄까?”
“아뇨. 음. 나중에 같이 식사라도 하게 해줘요.”
“식사?”
“네. 만나서 사인도 받고. 인증샷도 찍으려고요. 마 대리님 얼굴은 안 찍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 부탁만 들어주시면 제 가벼운 입이 엄청 무거워질 겁니다. 호호호.”
“그래.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해줄 테니까. 비밀 지켜.”
“야. 나는?”
“팀장님이요? 팀장님까지 그러시면 저 그냥 여기서 일 접어버리고요.”
“하하하. 마 대리. 농담이야. 농담. 그나저나 올 시간이 다 되었는데.”
띵동.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둘 중 누군가가 왔나보다. 문을 열었더니 김 대리와 준호가 함께 도착을 했다.
“어라.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이.”
“아. 오피스텔 입구에서 만났어요. 그런데 정말 무슨 방법이 생기신거에요?”
“우선 앉아서 이야기하자. 김 대리님도 앉으세요.”
우리 팀원이 모두 거실에 둥글게 모여 앉자, 조 팀장님과 논의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다들 나의 황당무계한 계획에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말단 대리가 그룹의 회장님을 움직일 생각을 하다니. 다들 이게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준호는 이미 봤겠지만, 정말 괜찮은 건물입니다. 따로 증․개축을 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규모죠. 별동으로 지어야 할 골프연습장이야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으니 공사가 끝나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마 대리님과 함께 백화점 건물을 봤습니다. 가능성만 있다면 한 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그렇지만 회장님이 직접 나서야 한다면서요? 그게 가능할까요?”
“그래서 지금부터 우리 마케팅 총괄 부장이신 지혁권 이사님을 설득할 수 있는 보고서를 만들어야죠. 그래야 회장님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건물부터 직접 확인하고 싶네요. 밤이라고 해도 대략적인 느낌이야 알 수 있겠죠. 결국 일자리를 걸고 덤벼들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럴 가치가 있는지 확인하고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겠죠.”
정 주임과 준호는 그냥 ‘큰일이구나.’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김 대리는 성격만큼이나 날카롭고 예리하게 문제점을 지적했다.
“맞습니다. 우리는 회사를 위한다고 준비를 했지만, 만약 회장님이 우리의 행동을 고까워하신다면 팀원 모두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직접보고 ‘이 정도면 회장님도 설득할 수 있겠구나.’라고 판단이 드는 사람들만 참여하면 됩니다.”
우리는 팀장님 차를 타고 목동으로 이동했다. 나는 일부러 카메라도 챙겼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팀원들은 차에서 내려 얼마 전까지 백화점이었던 건물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음. 마 대리가 이렇게까지 모험을 하려고 했던 이유가 있었군. 이미 입주시설을 비롯한 내부 정리는 끝난 상태고, 규모도 딱 적당하네. 마 대리. 일단 사진부터 좀 찍어. 미래백화점 외양이야 인터넷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알릴 필요도 있으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조 팀장님은 건물을 보자마자 마음에 드셨는지 사진부터 찍으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팀원들도 표정들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도 모험을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알아서 판단하도록 두고, 건물 외부를 카메라로 담는 것에만 신경 썼다.
“자. 다들 충분히 봤지? 그럼 다시 마 대리 집으로 가자고. 판단은 차 안에서 각자 해보도록 하고, 이야기는 도착하면 그때 하자.”
팀원들에게 충분히 살펴볼 시간을 준 다음 우리는 다시 마포로 돌아왔다. 다들 생각이 많은지 차안은 조용했다. 알아서 판단하라고 말은 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부하직원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강요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팀장님과 나도 최대한 침묵을 지켰다.
“자. 어려운 문제를 짧은 시간 안에 결정하라고 해서 미안해. 다들 알다시피 시간이 촉박한 문제야. 철거날짜가 내일이니까. 다시 말하지만 강요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 빠진다고 하면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는다고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한다. 그리고 보고서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을 거니까 일이 잘못되어도 피해는 없을 거야.”
우리 집에 다시 도착하자 조 팀장님은 팀원들에게 최대한 부담이 가지 않도록 말을 했다. 부하직원들을 어쩔 수없이 따르게 하지 않고 진심으로 함께 일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 우리 팀장님이다. 내가 나중에 팀장이 되었을 때도 과연 저런 관록이 생길까? 그래도 좋은 롤모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저는 하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 신입이라서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더라도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영악한 생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팀장님과 마 대리님을 믿고 가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고생한 것이 억울해서라도 가야그룹과 대박 스포츠센터에 한 방 먹여주고 싶거든요.”
준호가 가장 먼저 결정을 했다. 녀석의 솔직한 말도 마음에 들었고, 경쟁업체에 한 방을 먹이고 싶다는 패기가 기특했다.
“저도 하겠습니다. 어차피 지금 상황이라면 과장 대우로의 승진은 취소되고 다른 팀으로 옮겨야 할지도 모르는데 포기하기는 아깝네요.”
김 대리도 찬성을 했다. 지금 저 말은 분명히 농담이었다. 세상에, 농담을 저런 무표정한 얼굴로 하니 다들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래도 그녀의 행동은 놀라운 변화다. 김 대리가 농담을 다 하다니. 현우가 갑자기 존경스러워졌다.
“당연히 저도 해야죠. 아직 장가도 못간 우리 팀장님과 목 때가 꼬질꼬질한 와이셔츠를 입고 다니는 준호씨를 내가 아니면 누가 챙겨요. 호호호.”
바로 저거다. 저렇게 생글거리면서 말을 해야 사람들이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현우가 기계 같은 김 대리에게 영혼은 집어넣었지만, 아직 감정은 제대로 집어넣지 못한 것 같다. 녀석, 앞으로 김 대리를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키려면 고생 꽤나 할 것이다.
현우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냥 나와 조 팀장님 둘이서만 진행해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팀장님이 처음에 팀원들을 모으자고 했을 때는 오히려 일을 번거롭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모여서 팀원들의 결의를 듣고 보니 마음이 든든했다. 어떤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최악의 경우는 철거작업 현장에 가서 몸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는 사실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조 팀장님은 팀장으로서의 자각이 아직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제부터 엉덩이가 무거운 스페셜 원의 궁둥짝 때리기 계획(?)에 돌입할 시기가 되었다.
============================ 작품 후기 ============================
출판사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답답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어음 만기일이 돌아와야 스토리가 진행될 수 있기때문에 뒤로 미뤘습니다. 다음 챕터가 시작되면 시기에 맞춰 자연스럽게 등장할겁니다.^^
벌써 99회네요. 미리 100회를 축하해주신 분도 계십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다음 회는 대망의 완결은 아니고 소챕터 완결이 될 것 같습니다. 내일 자정에 뵙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