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가 전부는 아니야-98화 (98/424)

00098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저기 팀장님. 이제 우리는 뭐부터 해야 하나요?”

모두가 이번 일에 동참하기로 결의는 했지만, 그래도 쉽지 않은 일이다보니 정 주임이 불안한 표정으로 조 팀장님에게 질문을 했다.

“조급해할 것 없어. 아직 6시간 넘게 남았거든. 일단 회장님도 보셔야 하니까 보고서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보자고. 그런데 지금 우리는 건설 쪽에 대한 전문가가 없어. 정확한 리노베이션 기간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야, 동수야!”

“왜요?”

“건설 쪽에 누구 아는 사람 없냐?”

“없는데요.”

“왜 없어? 내일 미래 백화점 철거한다는 이야기해준 친구 있다고 했잖아? 미래건설 다닌다면서?”

조 팀장님의 말씀에 김 대리가 몸을 흠칫 떨었다. 현우가 미래건설로 옮긴 것은 나도 오늘 처음 알았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는 벌써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역시 우정보다는 사랑이다.

“에이. 그 녀석은 홍보팀 소속이라 잘 몰라요. 게다가 거기로 옮긴지 보름밖에 안됐는데 별 도움도 안 될걸요?”

“그래도 우리보다는 많이 알거 아냐? 옮긴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 한참 열심히 공부할 시기네. 회사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서 자료도 확인할 수 있을 테고.”

“그건 정말 아니죠. 그럼 친구보고 회사를 배신하라는 소린데.”

“그게 왜 배신이야? 미래건설에도 좋은 일이잖아. 철거비용도 아끼고 위치도 더 좋은 곳으로 옮길 수 있고. 절대 회사를 배신하는 행위가 아니지.”

그 녀석은 별로 도움도 안 될 텐데, 자꾸 부르자고 하신다.

“지금은 우리가 더 급한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협상에서 이득을 보려면 우리가 급하다는 것을 그쪽에서 몰라야 하는데, 친구가 회사에 보고하면 어쩌려고요? 그럼 회장님을 움직이더라도 손해보고 협상해야 할지도 몰라요.”

“그 정도 믿음도 없는 친구야?”

팀장님은 말씀도 이상하게 하신다. 이건 우정과 관련된 일이 아니다. 현우가 미래건설에 우리 상황을 보고한다고 해서 회장님을 움직이는 일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자기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보고한다고 해서 우정을 저버렸다고 비난할 수 없다.

“그게 왜 믿음하고 관련이 있어요. 서로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 충성하자는 건데. 입장을 바꿔서 제가 우리 회사의 이익이 될지도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도 입 다물고 있으면 좋으시겠어요?”

“흠흠. 그런가? 그래도 은근슬쩍 물어보는 것도 안 될까? 우리도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 제대로 된 보고서를 올리지.”

“제 부탁으로는 안 되죠.”

“그럼 누구 부탁으로는 되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여유가 넘치던 양반이 갑자기 왜 이렇게 집요하게 구시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별 도움 안 되는 녀석인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으신 것 같았다. 이제는 팀원들이 모두 합심하는 일이 되었으니 책임감이 느끼실 만도 했다.

“그게요. 음.”

나는 은근슬쩍 김 대리의 눈치를 봤다.

“누가 부탁하면 되느냐고 물었는데, 왜 김 대리 얼굴은 쳐다봐?”

“제가 부탁해보겠습니다.”

“뭐? 김 대리가? 김 대리가 마 대리 친구를 알아?”

“팀장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부탁할 사람이 나섰으니 일단 기다려보세요.”

나는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로 쳐다보는 조 팀장님과 팀원들을 내버려두고, 이곳의 유일한 방인 서재로 가서 김 대리와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하시게요?”

“네. 부탁해보려고요. 팀원들에게는 중요한 일일 수도 있잖아요.”

“그럼 제가 전화를 할게요. 김 대리님은 가만히 계세요.”

“아니에요. 제가 한다고 했으니까 부탁도 제가 해야죠.”

김 대리의 마음은 충분히 알았다. 그래도 김 대리가 여기서 나서면 좋지 않다. 상황은 다르다고 해도 출판사에 다니는 진경이를 생각하니, 김 대리에게 전화를 하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자초한 일이니 이 한 몸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

“김 대리님이 부르면 그 녀석은 당연히 달려오겠죠. 그래도 말이죠. 현우 회사에 손해가 될 수 있는 일을 부탁하는 거잖아요. 어쩌면 현우에게는 마음의 부담이 될 수 있는 일이거든요. 제가 알아서 잘 말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나가 계세요. 이따 그놈 오면 반갑게 맞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아셨죠?”

그녀는 내 말에 느끼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김 대리는 원체 말을 돌려할 줄 모른다. 그 상황에서 무슨 오해가 생길지 모른다. 아무리 사랑에 눈이 뒤집혔다고 해도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손해가 되는 일을 연인에게 부탁받는다면 나중에라도 그게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그냥 그 녀석이 알아서 나서게 만들면 된다.

Rrrr

“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자다 깼는지 현우는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부탁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나는 현우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김 대리 이야기는 빼고, 우리 회사가 지금 상황이 급한데, 네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래? 그래서 나보고 도움을 달라? 너희가 급한 사정은 회사에 보고하지 말고?”

“응”

“미쳤냐? 싫어. 내가 보고한다고 네가 잘못되는 상황도 아니잖아? 이건 선의의 경쟁이야. 친구야! 고맙다. 좋은 정보 줘서. 내일 아침에 출근하면 당장 보고해야겠다. 이 일로 이사 한 명이 잘린 거 알고 있지? 덕분에 칭찬 좀 받겠다. 하하하.”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그래? 지금 김 대리가 우리 집에 있는데, 네가 이렇게 치사한 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잠이나 계속 자라.”

“자... 잠깐. 누가 있다고? 우리 수현씨가 왜 너희 집에 있어? 똑바로 이야기 안 해?”

“궁금하면 와 보던가. 이만 끊는다.”

“도.. 동수야. 야, 임마!”

현우가 뭐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짜식이, 어디 형님 앞에서 잔머리를 굴리는지 모르겠다. 집도 가까우니 30분 안에 총알같이 달려올 것이다. 흐흐흐.

“그래, 어떻게 됐어?”

“아마 오고 있을 겁니다.”

“직접 이곳으로 와준데? 다행이네. 시작부터 조짐이 좋아. 하하하.”

팀원들은 현우가 올 동안 내가 찍은 사진과 인터넷에 있는 미래백화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선 공유기 하나로 각자 가져온 노트북을 돌리다보니 인터넷이 좀 느리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

띵동띵동.

쾅쾅쾅..

“야! 마동수 빨리 문 안 열어?”

한참 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두들겼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현우였다. 30분은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20분 만에 도착했다. 대체 무슨 상상을 했기에 목소리가 저렇게 격앙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랑에 빠진 인간들은 맹목적으로 변한다더니. 내가 장난을 좀 심하게 쳤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살짝 들었다.

“왔냐? 들어와라.”

“너 꼭 이런 장난을 쳐야겠냐?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사람 마음이 그게 아니잖아. 전에도 그러더니만, 너 자꾸 우리 수현씨를 가지고 수위를 넘는 농담을 하면...”

내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짜증부터 부리면서 집으로 들어오던 녀석은, 방안의 상황을 보고나서야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 헬스장 바닥에 앉아 통곡을 하던 모습이 기억나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까칠하던 녀석이 어떻게 이렇게 허술하게 변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서로를 변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니 보기는 좋았다.

“아이고, 도움을 주시기 위해 여기까지 와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동수가 있는 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조기훈 팀장입니다. 제 집은 아니지만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하하하.”

조 팀장님은 어안이 벙벙해 우두커니 서 있는 현우에게 다가가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녀석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팀장님을 따라 팀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수... 수현씨가 진짜 있었네? 일 도와달라고 꼼수부린 것 아니었어?”

“내가 없는 말 하는 줄 알았어? 이번 일만 잘되면 김 대리님도 안전하게 과장 다는 거니까 좀 도와주라. 응?”

“망한 놈의 자식. 내가 이대로 안 넘어간다.”

“안 넘어가면?”

“두고 보면 알아.”

현우와 나는 그렇게 귓속말을 나누면서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지영 주임이라고 해요. 샤프한 느낌이 물신 풍기는 게 꼭 차도남 같아요. 김 대리님이랑 같이 다니면 주변이 아주 얼어붙겠는걸요? 호호호.”

“누가 그럽니까?”

“네?”

“누가 우리 수현씨보고 차갑게 생겼다고 하느냐고요? 동수 저 자식이죠? 정말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 수현씨야 말로 얼마나 마음 따뜻하고 표정이 풍부한 사람인데요. 앞으로 그런 말씀마세요.”

“어머... 제가 몰라봤네요. 죄송해요. 자기 연인을 위해 이렇게 멋진 말씀도 하시고, 우리 김 대리님 좋은 남자 만난 것 같네요. 호호호.”

정 주임의 캐릭터를 파악하지 못한 현우는 그녀의 농담에 단호하게 대처해버렸다. 다행히 정 주임은 그런 현우의 모습을 오히려 칭찬하면서 어색할 뻔한 분위기를 잘 무마했다. 그래도 김 대리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Rrrr

서로 간단한 소개를 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데 갑자기 시연이에게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한 번도 전화를 건 적이 없는 그녀라 걱정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잠시 만요. 저 전화 좀 받고요. 여보세요.”

“동수씨. 제가 정말 동수씨를 믿는데요. 그런데 갑자기 현우오라버니에게 이상한 전화를 받아서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잠이 안 와요. 히잉. 무슨 일 있어요?”

현우 자식의 두고 보자는 말이 이것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내가 장난을 쳤기로서니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다니. 시연이는 나에게 따지듯 묻지는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걱정스러움이 묻어있었다. 다른 여자 같았으면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며 따지고들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역시 여자 복은 타고난 것 같다. 현우를 노려봤더니 개구지게 웃음을 지으며 딴청을 피웠다.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현우에게 장난을 쳤더니 그 녀석이 복수한답시고 네게 전화를 했나봐. 회사 일 때문에 직원들이 전부 우리 집에 모여 있거든.”

나는 현우에게 장난친 일과 직원들이 우리 집에 모인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아. 그런 거구나. 저는 절대 오해해서 전화한 거 아니에요. 아시죠?”

“하하하. 그럼. 알지. 자다가 깬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자야지.”

“있잖아요. 동수씨.”

“응? 왜 무슨 할 말 있어?”

“잠이 안 와서 그러는데 자장가 불러주면 안 돼요?”

망할 놈의 현우 때문에 내가 별 짓을 다한다. 그래도 내가 시작한 장난이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재로 들어왔다.

“그... 그런데 나, 노래 못 불러.”

“괜찮아요. 동수씨의 듬직한 저음으로 흥얼거리기만 해도 잠이 올 것 같아요.”

나는 시연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고 핀잔을 듣는 형편없는 실력이었지만 그녀가 원한다니까 해주고 싶었다. 내 노래를 들으며 시연이는 까르륵 웃으며 즐거워했다.

“이제 졸려요. 고마워요. 히히히. 일 하는데 제가 너무 잡고 있었던 거 아니죠?”

“아냐. 괜찮아. 아직 여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잘 자.”

“저 먼저 잘게요. 사랑해요. 쪽.”

시연이의 작별키스를 받으니 왠지 이번 일이 잘 될 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다.

“그래.”

“동수씨.”

이제 잠이 온다는 시연이와 인사를 나누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그녀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응?”

“저만 뽀뽀해요? 동수씨는요?”

“그... 그거? 알았어. 사랑해. 잘 자. 쪽.”

나는 온몸에 돋는 닭살을 참아내며 전화기에 대고 뽀뽀를 했다.

“우와. 저, 동수씨에게 사랑한다는 말 처음 들었어요. 설레서 잠이 올지 모르겠어요. 히히히. 그래도 일 방해하면 안 되니까 그만 끊어요.”

전화를 끊고 그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정말 그동안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나? 그깟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아껴뒀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앞으로는 자주 사랑한다는 말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시연이 방

전화를 끊은 시연이는 침대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꺄악! 사랑한데. 동수씨가 나보고 사랑한데. 이렇게 좋은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그냥 말 한마디뿐이었는데, 그동안 마음 고생한 것이 전부 다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말은 못했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못한 것이 은근히 신경이 쓰였었다. 그런데 이제 아니다. 이제야 진정으로 그와 이어진 것 같아서 행복했다.

“에이, 이게 무슨 청승이야. 이렇게 좋은 날 울면 안 되지. 잠이나 자야겠다. 부처님, 하느님, 천지신명님. 우리 동수씨 하는 일 잘 되게 해주시고, 오늘 제 꿈속에도 나타나게 해주세요.”

침대에 누워 잠시 기도를 한 시연이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 작품 후기 ============================

공지가 껴 있긴 해도 어쨌든 100회네요. 100회를 어떻게 마무리할까 고민을 하다가 시연이를 이야기 속으로 끌고 왔습니다. 왠지 섭섭하더라고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쓴다고는 했는데 어색하지는 않으셨는지요? 회사 일은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100회에 이르는 동안 제 글이 어떤 독자층에게 읽히는지 많이 궁금해져서 설문조사를 좀 하겠습니다.  설문조사 꼭 참여해주세요.^^

잠시 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