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0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AM 08: 45
정 주임과 준호가 공사장 입구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자 미래건설의 현장 직원들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만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직원 한명이 현장사무소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책임자에게 보고를 하러 들어가는 길일 것이다. 이제 나도 출동이다.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차 밖으로 나왔다. 사진 동호회에서 만든 가짜 기자 신분증을 가슴에 착용하고 왼손에는 카메라를 든 채 천천히 현장을 향해 걸어갔다.
“안양천에서 도롱뇽이 발견되었습니다. 미래건설은 즉각 철거를 중단해야 합니다. 철거작업 때문에 나는 먼지와 소음이 우리 뇽이를 죽일 겁니다. 철거반대.”
“철거반대. 철거반대.”
정 주임은 구호를 외치면, 옆에 있던 준호는 ‘철거반대’라고 소리치며 피켓을 들고 그녀의 주위를 돌았다. 진지해야 하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겨우 웃음을 참고 나서야 겨우 그들 주변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찰칵. 찰칵.
나는 최대한 사진기자인 척 열심히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기자까지 등장한 것을 본 현장사람들은 그제야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잠시 후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정 주임에게 질문을 했다.
“저희는 ‘안양천에 사는 도롱뇽을 살리자 연합본부’에서 나왔습니다. 당장 철거를 중단하세요. 우리 뇽이가 죽어갑니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철거작업은 즉각 중단하라.”
“중단하라. 중단하라.”
정 주임은 있지도 않은 ‘안양천에 사는 도롱뇽을 살리자 연합본부’라는 가명을 말하며 철거 중단을 요구했다. 누가 보면 정말 도롱뇽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환경운동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진지한 표정으로 구호를 외쳤다.
찰칵. 찰칵.
“왜 자꾸 사진은 찍고 그러십니까? 그쪽은 또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저도 ‘안양천에 사는 도롱뇽을 살리자 연합본부’에서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지금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겁니까? 이러시면 언론탄압을 하시는 겁니다."
“흠흠. 거기서 갑자기 언론탄압은 왜 나옵니까?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람.”
AM 08:50
쿠구구구구궁.
그때 요란한 소음을 내면서 거대한 철거장비들이 공사현장 입구에 도착했다. 다들 입구를 막고 있는 우리들을 보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파트가 가까워서 주변에 보는 사람들도 많다보니 함부로 쫓아내지도 못하고 책임자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러지 마시고 우리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그럴 수는 없죠. 철거중단을 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기전까지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자리를 옮기면 저기 있는 중장비로 바로 철거작업에 들어갈 거잖아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도롱뇽을 살립시다. 뇽이가 죽어가요. 철거반대.”
“철거반대. 철거반대.”
다행히 지금 당장 강압적인 수단을 취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절대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자꾸 철거작업이 지체되면 힘으로라도 우리를 끌어내려 할지도 모른다.
AM 09:20
◆ 주식회사 동지 회장실.
동지그룹의 오너인 고 회장 앞에 지혁권 이사와 조기훈 팀장이 긴장을 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이 자신을 지켜보는 모습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비서가 타다 준 차를 마시고 있었다.
“흠. 우리 비서가 타주는 차는 정말 일품이야. 내가 가끔 이 맛을 느껴보려고 집에서 시도를 해봤는데 생각처럼 맛이 안 나와. 그까짓 찻잎 끓이는 일이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사람을 속을 썩이는지.”
고 회장은 곁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힐끔 쳐다보고 나서는 다시 차를 마시는 일에 집중했다. 지 이사와 조 팀장은 그런 회장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숨죽인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회장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비로소 두 사람을 쳐다봤다.
“뭔 일이기에 차도 마음 놓고 마시지 못하게 아침부터 와서 성화야?”
고 회장은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여유롭게 차를 마신 사람답지 않게 짜증부터 냈다.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지 이사와 조 팀장의 표정은 더욱 굳어갔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다행히 그동안 고 회장을 옆에서 보필한 경험이 있는 지 이사라서 그런지, 고 회장이 내뿜는 위압감 속에서도 겨우 입을 열어 대답은 할 수 있었다.
“중요한 일이겠지. 당연히. 안 그랬으면 이렇게 아침부터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야. 무슨 일인지 어디 말해봐. 들어보고 별일 아니면 혁권이 네 정강이가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
“가야그룹과 관련된 일입니다.”
지 이사는 고 회장이 가장 관심을 가질만한 이슈부터 꺼냈다.
“뭐?”
“지난번에 가야그룹에서 우리보다 먼저 스포츠센터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보고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랬지. 그 괘씸한 놈이 제대로 뒤통수를 쳤지.”
“저희가 다시 한 방을 먹일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래? 이미 공사에 들어간 놈들에게 무슨 수로?”
“자세한 것은 이번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조기훈 팀장이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조.기.훈.입니다. 보고를 시작하겠습니다.”
지 이사의 말에 조 팀장이 잔뜩 굳은 표정으로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등병들에게나 볼 수 있는 큰 목소리로 고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조 팀장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
“귀 안 먹었으니까 조용히 말해도 다 들려. 일단 읊어봐.”
고 회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 팀장은 팀원들이 열심히 만든 보고서를 건네며 설명을 시작했다. 현재 미래백화점에 대한 상황, 그곳과 동지가 확보한 부지를 교환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 그리고 왜 고 회장이 직접 나서야 하는지에 대해 또박또박하게 보고를 했다.
“나를 움직이겠다? 허허. 맹랑한 녀석들이네. 그래서 지금 나머지 팀원들은 공사현장에 가서 철거를 막고 있다 이 말이지?”
“네. 회장님.”
“의욕이 넘치는 것은 좋은데 말이야. 내가 미래그룹 회장과 협상을 하던 도중에 철거가 진행되어 버리면 어떡할 건가? 그럼 정말 중대한 실수가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네. 외람되지만 그것도 이미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소리겠지?”
“현장에 출동한 팀원들이 목숨을 걸고 막겠다고 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설명은 모두 끝났다. 팀원들과 함께 밤새워 작성한 보고서를 통한 논리적인 설득은 충분히 했다. 이제 조 팀장의 머릿속에는 무조건 믿어달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껄껄껄. 목숨을 걸고 막는다? 이봐 조 팀장.”
조 팀장의 말에 고 회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회장님.”
“자네들 목숨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어. 이번일이 잘못되면 수백억의 손해뿐만 아니라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어. 그런데도 그냥 무조건 믿어 달라? 고작 자네들 목숨 아니지 정확하게 말해 일자리를 걸고 나를 움직이겠다?”
웃음을 멈추고 이야기를 하던 고 회장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회장님은 주식회사 동지에 속한 직원들에게는 부모님과 같은 존재이십니다. 저희가 회장님에게 말씀드린 일은 자식이 부모 앞에서 목숨을 걸겠다고 맹세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제 팀원들을 누구보다 믿습니다. 신뢰만큼 사람을 신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팀원들의 결심으로도 믿음이 가시지 않는다면 제 진짜 손목이라도 걸겠습니다.”
조 팀장은 고 회장의 호령보다 현장에서 고생하고 있을 팀원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공사 현장이라는 것이 언제 무슨 돌발적인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곳이다. 자칫 몸싸움이라도 나서 팀원들이 다치는 일은 정말 일어나서 안 된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무시무시한 회장조차 무섭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조 팀장은 미친척하고 자신의 손목을 걸겠다고 했다.
“미친 녀석일세. 여기서 무슨 양아치 집단이야? 손목을 걸게. 혁권아.”
“말씀하십시오. 회장님.”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지. 눈빛만으로 서로를 믿고 회사를 꾸려나갈 때가 말이야. 이젠 늙어서 그런 기억도 가물가물해.”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제게 말씀하십시오. 회장님의 믿음이 있다면 아직도 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됐네. 이 사람아. 늙어서 주책 떨지 말고. 어쨌든,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해줬으니 부탁 정도는 들어줘야지. 사람이 이렇게 감성적으로 움직이면 안 되는데 말이야. 자네들이 건설현장을 만만하게 본 것인지 아니면 정말 막을 자신이 있었는지 두고 보자고. 일단 미래그룹에 전화부터 넣어서 그쪽 회장과 통화할 수 있도록 시간 약속 잡아. 그리고 조 팀장은 그만 나가보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고 회장의 말을 끝까지 듣던 조 팀장은, 미래그룹과 통화를 하겠다는 회장의 말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90도 인사를 하고 회장실에서 물러났다.
AM 10:00
드르르르릉 쿵구구궁.
미래건설 직원들은 보기만 해도 위협적인 대형 철거장비들을 공사장 입구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우리들에게 압박을 주기위한 행동 같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준호의 목울대가 꿀꺽하고 넘어가는 것을 보니 녀석도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이까짓 장비로 나를 위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흥,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안양천에 살고 있는 도롱뇽을 살립시다. 철거반대.”
주눅 든 준호의 모습과 다르게 정 주임은 오히려 철거장비 앞에 가서 시위를 시작했다. 한 발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정말 정말 보통 깡이 아니었다. 그녀의 용기에 준호도 다시금 힘을 내서 구호를 외쳤다.
둘의 모습을 보던 공사현장 책임자는 주변에 있는 다른 직원들을 모아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들도 1시간이나 기다려줬으니 많이 참아준 것이다. 무슨 방법을 취하든 조만간 행동으로 보여줄 것 같았다. 과연 조 팀장님이 시간 안에 회장님을 움직여 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Rrrr
“네. 팀장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휴, 말도 마. 무서워서 오줌까지 지릴 뻔 했다니까. 그래도 미래그룹에 전화주신다고 하셨어. 그쪽 회장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오전 중에는 협상이 끝날 것 같아. 거기는 어때?”
“위태위태합니다. 정 주임이 엄청나네요. 우락부락한 현장 인부들과 대형 중장비 앞에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버티고 있어요. 옆에서 편하게 사진만 찍고 있는 제가 미안할 지경이네요.”
“그래도 마 대리까지 나서면 안 돼. 아직 협상은 시작도 안했으니까. 잘못해서 저쪽에서 이상한 눈치라도 채는 날에는 말짱 도루묵인 거 알지? 어떻게 해서든 버텨.”
이곳의 긴박한 상황을 보지 못하는 팀장님 입장에서야 저렇게 속편한 소리를 할 수 있겠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는 조마조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다행히 회장님을 설득하는 것에는 성공했다고 하니 이제는 정말 시간 싸움이었다.
AM 10:30
드디어 미래 건설 직원들이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위를 하고 있는 정 주임과 준호의 주변으로 인(人)의 장벽을 쳤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저렇게 나오면 정말 우리도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건설 현장 직원들이 준호의 팔다리를 잡고 밖으로 현장사무소 쪽으로 움직였다. 정 주임은 여자라서 조심하고 있었지만 조여 가는 포위막 때문에 그녀도 조만간 준호와 같은 신세가 될 것 같았다.
“꺄악... 이거 안 놔. 이거 성추행이야.”
직원 한 명이 용기를 내서 정 주임의 팔을 잡자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정 주임의 단호한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잠깐 멈칫했다. 그것도 잠시 현장 책임자가 뭐라고 호통을 치자 직원들은 그녀를 다시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때 정 주임이 엄청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김 대리와 서재에 들어가 뭔가 이상한 일을 꾸미고 나왔을 때부터 수상쩍긴 했지만 설마 저런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정 주임은 단추가 뜯어지든 말든 그냥 상의 앞섶을 잡아당겨 풀어버리고, 남자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블라우스를 벗어버렸다. 브래지어로 겨우 가린 그녀의 엄청나게 풍만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정 주임의 배와 등에는 ‘도롱뇽을 살리자.’, ‘뇽이를 살려 주세요.’라는 문구가 가득 적혀있었다. 정말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내일은 마무리 할 수 있도록 할게요.ㅠ
자정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