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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02화 (102/424)

00102  벼룩도 낯짝이 있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녀의 슬픈 눈동자가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안 돼!”

나와 대치하고 있던 직원들은 놀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안 돼.’라고 소리만 지르지 말고 좀 잡아 줄 일이지. 붕 떴던 몸이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 느껴... 응? 느껴지지 않았다.

“아우. 이 자식 끝까지 말썽이네. 다들 뭘 보고만 있어. 곰탱이 같은 자식 엄청 무거워. 빨리 좀 와. 내 팔 떨어질 것 같아.”

바로 앞에서 들리는 사람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에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새카맣게 탄 얼굴 때문에 유독 하얗게 보이는 치아를 드러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주변 사람들이 몰려와 나를 옥상 위로 끌어올렸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다. 난 살았다.

최소한 중상이라고 절망했던 상황에서 손끝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났다. 이제는 시연이 뿐만 아니라 부모님과 동생 부부 그리고 조카의 얼굴도 그리워졌다. 까딱 잘못했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다시는 회사일 따위에 목숨을 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 같은 인간은 역시 잔머리나 굴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어울린다.

“야, 이 곰탱이 같은 자식아. 지금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이따위 짓을 해?”

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나를 살려준 남자가 나를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를 끌어올리느라 힘이 들었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를 보니 너무 반가웠다. 감사했다. 나는 고마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 남자를 와락 껴안았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남자의 땀 냄새가 이렇게 정겹게 느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야. 이... 이거 안 놔? 남자가 안기는 거 사절이거든. 당장 안 떨어져?”

“하하하. 살았다는 생각에 너무 기쁘고 고마워서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새로 시작할 D&Y휘트니스 클럽 리노베이션 공사의 동지그룹 담당자인 마동수 대리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봐주십시오.”

남자의 투박한 목소리를 듣자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떨어져 다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명함을 건넸다.

“무슨 헛소리야? 뜬금없이 D&Y휘트니스 클럽은 뭐고? 또 동지그룹은 뭐야?”

치직. 치직.

“철거작업 중지. 철거작업 중지. 공사 내용이 변경되었다. 반복한다. 철거작업 중지. 공사 내용이 변경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잠시 후 다시 알려주겠다.”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는데, 무전기를 통해 철거중지명령이 내려왔다. 내가 건네는 명함을 받고 어리둥절하던 남자는 그제야 뭔가 눈치를 채고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정확하게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을 보니 헛소리는 아닌 모양입니다. 평소 동지그룹에 미친 인간들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한꺼번에 미친 인간을 세 명이나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저도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미래건설의 백우찬 과장입니다.”

그도 작업복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넸다. 이름도 멋지다. 생김새도 멋지고, 목소리도 멋졌다. 생명의 은인이라서 그런지 그의 모든 것에 호감이 갔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우찬 형님.”

“네?”

내가 갑자기 형님이라고 부르자 우찬 형님은 당황하며 반문했다. 얼마 전 같으면 돈으로 보상을 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국민은행 박 차장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 내 생명의 은인이다. 돈 따위를 주며 고맙다고 하는 것은 내 목숨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의미와 같다. 내 전 재산을 다 합쳐도 목숨과는 바꿀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두고두고 이 은혜를 갚을 생각이다. 시연이와 우리 가족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내게는 형님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제 생명의 은인 아닙니까?”

“무... 무슨 생명의 은인씩이나? 그냥 공사장에서 사고가 나는 것을 막고 싶었을 뿐인데...”

“어쨌든, 형님 맞지 않습니까? 저는 올해로 서른입니다. 딱 봐도 우찬 형님보다 어려보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러니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흠흠. 내가 서른다섯이긴 한데. 미친 인간하고는 호형호제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지.”

“미친 인간이 한 번 은혜를 입으면 물불가리지 않고 은혜를 갚으려고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말씀만 편하게 하시면 물불은 가리겠습니다. 네?”

“이것 참. 정말 미친 인간을 동생으로 삼게 생겼네. 오늘 여러 번 놀란 일을 생각하면 뒤통수나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지 뭐. 거창하게 도원결의 같은 것은 필요 없고 간단하게 악수나 한 번 하자.”

잠시 망설이던 우찬 형님은 내가 자꾸 조르자, 마침내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해왔다.

“감사합니다. 우찬 형님.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꾸벅 인사를 하며 우찬 형님과 악수를 나눴다. 단단한 손아귀에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현장에서만 근무해서 그런지 얼굴은 새카맣게 탔지만, 가지런한 치아덕분에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은혜는 됐고, 앞으로 사고만 치지 말자. 그 미친 여자는 제발 부탁이니 눈에 띄지 않게 해주고. 꿈에라도 나올까 겁난다.”

“꿈에서요? 혹시 반하신 것은 아니고요? 음. 나이 차이는 좀 나는데. 소개라도 해드릴까요?”

“무... 무슨 소개! 큰일 날 소리 하지 마. 우리 애인이 알면 날 죽이려고 들 거야.”

“그래요? 형수님이 계셨어요? 언제 날 잡아서 저도 소개 좀 시켜주세요.”

“이 인간 정말 넉살 한 번 좋네. 언제 봤다고 형수님이야. 꼭 원한다면 뭐 나중에 시간 내서 함께 한 번 보던가.”

“그럼요. 꼬옥 원합니다. 그러니 꼬옥 보여주세요.”

나는 어색함을 없애기 위해 최대한 애교를 부렸다. 뭐랄까? 잠깐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 남자에게서는 투박하면서도 진솔한 모습이 보였다. 우리의 전통 그릇인 투박한 옹기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정말 괜찮은 사람과 인연을 맺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네?”

“그 난리를 쳐 놓고 그냥 가려는 생각은 아니지? 리노베이션 한다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이 계속 그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냥 넘어가려고?”

“아니죠. 미래건설 직원 분들 모아놓고 정중하게 사과드려야죠. 그리고 사과의 의미로 점심은 제가 시원하게 쏘겠습니다.”

우찬 형님의 말을 듣고 보니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우리가 땡깡을 부리는 바람에 반나절동안 시간을 허비하며 고생했던 사람들이다. 그의 말이 아니었으면 큰 실례를 할 뻔 했다. 나는 현장 사무소에 찾아가 이곳의 소장님과 다른 직원들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제 사과로 부족하면 아까 그 여직원도 같이 불러서 사과를 하겠습니다. 물의를 일으켜 정말 죄송합니다.”

“헉. 그 무슨 참담한 말을... 됐습니다. 꼭 협박처럼 들리네요. 같은 직장인으로서 그 여자 분이 존경스럽기는 해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허허허. 그쪽도 회사를 위한다고 한 행동이니 우리가 이해를 해야죠. 별도의 보상이 있다고 하고, 점심도 쏜다고 하니 이번 일은 이쯤에서 정리합시다. 자, 다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동지그룹에서 점심을 산다고 하니 오랜만에 목에 기름칠이나 해야지.”

우리 행동을 어처구니없게 생각은 했지만, 다행히 크게 기분 나빠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나는 식사를 하는 도중, 막걸리 병을 들고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미래건설 직원들에게 술을 따르며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수십 명의 사람이라 일일이 술을 따르는 것도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우리의 행동을 재미난 무용담쯤으로 이해해주는 분위기 덕분에 더욱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동수야. 덕분에 잘 먹었다. 그런데 너무 돈이 많이 나온 거 아냐?”

수십 명이 고기와 술을 먹었으니 밥값도 엄청났다. 옆에서 계산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우찬 형님이 걱정스럽게 말을 꺼냈다.

“별 말씀을요. 어차피 회사에 영수증 처리할 건데요, 뭐.”

당연한 말이다. 우리 회사야 근거만 확실하면 접대비는 넉넉하게 지원해준다. 물론 마케팅 부에 한해서만 그렇다. 그만큼 우리 부서에 대한 회사의 지원이 막강하다는 이야기다.

“그럼 다행이고. 우리는 이제 들어가서 다시 회의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쩔 거야?”

“저도 이제 회사에 들어가 봐야죠. 형님!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제가 꼭 연락할 거니까 모른 척하기 없습니다. 아셨죠?”

“하하하. 알았다. 알았어. 내가 오매불망 네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염려 놓으시죠. 거머리 같은 동생님.”

겨우 하루를 만났는데 왜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지 모르겠다. 우찬 형님과 미래건설 직원들이 모두 돌아가자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술기운까지 올라 지금은 회사로 돌아갈 힘도 없었다. 옥상에서 떨어지는 순간 떠올랐던 시연이의 슬픈 눈동자가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럴 때는 시연이를 만나 기운을 충전해야 한다.

공사현장 앞에 세워둔 차를 저렇게 그냥 둘 수가 없어서 대리운전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나처럼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인간이 많은지 조금만 기다리면 여기로 기사를 보내겠다고 했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차안에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사랑한다.’는 말 뿐만 아니라 여태껏 꽃 한 송이도 선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학교에 도착한 나는 근처에 있는 꽃집에 가서 빨간 장미 20송이를 샀다. 평소 같으면 이런 꽃다발을 들고 학교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했을 나였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런 내 모습이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마테오관에 도착해서 문자를 보내니 5층에서 수업을 듣는다는 답문이 왔다. 꽃을 들고 5층까지 걸어 올라가다보니 지나가는 학생들이 나를 보며 뭐라고 쑤군거렸다. 대학이라고 해도 남자가 꽃을 들고 학교로 오는 일은 졸업식 말고는 거의 없는 일이다. 전혀 창피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여기는 아직 아는 사람들도 많은 곳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용기를 내고 수업이 있는 강의실 앞에 있는 라운지에 앉아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고 교수님까지 나왔는데도 시연이가 나오지 않아 강의실 안을 살펴보았다. 교수님이 조별 과제를 줬는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의실을 쭉 살펴보다가 오른쪽 창가에서 사람들과 말을 하고 있는 시연이를 발견했다. 그냥 눈에 확 띄었다. 그녀의 자체발광(?) 미모가 강의실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느낌이었다.

“또 야?”

“이번에도 윤시연 때문이겠지?”

“어떻게 일주일에 몇 번씩은 이런 일이 생기냐.”

“이번에는 직장인 같은데?”

“이제 졸업한 선배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난건가?”

“그럼 뭐해? 윤시연이 쓴 책도 못 봤어? 임자 있다잖아.”

“그러게 오늘도 윤시연에게 냉정하게 차이는 불쌍한 남자를 구경하겠구나.”

내가 꽃을 들고 시연이쪽으로 걸어가자 주변 학생들이 쑥덕쑥덕 거리기 시작했다. 1학년이 듣는 ‘경영학 원론’ 수업이라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시연이에게 찝쩍거리던 인간들이 그렇게 많았다니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마지막에 남자들이 냉정하게 차였다는 소리만 듣지 못했어도 쑤군거리던 사람에게 다가가 어떤 놈들이 그랬냐고 따져 물었을지도 몰랐다. 냉정하게 차이는 꼴을 보고 싶은가본데 ‘흥’이다 이것들아.

“동수씨!”

사람들의 쑤군거림이 커지자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던 시연이가 나를 발견하고는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내가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자 시연이는 후다닥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헉, 가... 강의실에서 이러면 좀 곤란한데.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몰렸다.

“저 남잔가 봐. 윤시연 책에 등장한 남자가. 우리학교 선배라던데.”

“곰같이 생겼다더니 덩치 봐라.”

“미녀와 야수가 따로 없다.”

“어우야. 그래도 그림은 된다. 시연이 키가 보통 키가 아닌데 품에 속 들어가는 것 좀 봐. 부럽다. 윤시연.”

이제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대놓고 떠들었지만, 나는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만끽하느라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아! 정말 그리웠던 시연이의 달콤한 향기가 내 마음을 풍족하게 해줬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와. 이거 생각지도 못한 코멘트들이 엄청 올라왔네요.ㅎ 여러분들의 상상력에 제가 잠시 유혹을 느꼈습니다. 특히 이계진입 스토리는 정말 강렬한 유혹이었습니다.^^ 어쨌든 기다리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 무리를 했습니다. 지금 자면 얼마 자지도 못하겠네요. ㅠ

이계진입이 나와서 말입니다만, 요즘 제가 판타지도 끄적거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계진입 스토리는 아니고요. 우선은 그냥 세계관만 상상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일반적인 판타지 세계관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독특한 세계관도 아닌 그런 판타지 세계입니다. 글이 너무 써지지 않을 때만 조금씩 쓰고 있는데, 언젠가는 이 이야기도 연재를 해보고 싶습니다. 당연히 '로또가 전부는 아니야'가 끝난 다음이겠죠.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가시기 전에 선추코 잊지마세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코멘트 많이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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