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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03화 (103/424)

00103  벼룩도 낯짝이 있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동수씨 몸에서 술 냄새가 나요.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시연이는 여전히 품에서 떨어지지 않고, 고개만 들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물론 무슨 일이 있었다. 그렇다고 ‘시연아! 나 오늘 죽을 뻔 했어. 잉잉.’라고 그녀에게 하소연 할 수도 없었다.

“아니야.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왔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차마 크게는 말을 할 수 없어서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나직이 귓속말을 했다. 순간 내가 시연에게 뽀뽀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강의실이 시장바닥처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만 떨어져서 이야기를 해도 좋으련만, 내 말을 들은 시연이는 얼굴만 살짝 붉힌 채 나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안다는 듯 나를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야! 마동수!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감히 신성한 강의실에서 잘하는 짓이다.”

귓가를 때리는 엄청난 호통에, 깜짝 놀란 나와 시연이는 재빨리 포옹을 풀었다. 우리 앞에는 조금 전에 수업을 마치고 나가셨던 교수님이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고 계셨다. 예전 나의 지도교수님이기도 했기 때문에 대학생 시절에는 나와 무척 친했던 분이었다.

“으갸갸갸... 교... 교수님. 아파요. 아까 나가지 않으셨어요?”

교수님은 성큼성큼 다가오시더니 내 귀를 사정없이 잡아 당기셨다. 대학 졸업 이후 이런 일을 다시 겪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수많은 후배들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인지.

“뭐 좀 놓고 간 게 있어서 다시 왔다. 불만이냐? 너는 이 자식아. 학교에 왔으면 나부터 찾아오지 않고 여자 친구에게 먼저 쪼르르 달려가? 하여간, 제자 녀석들을 아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니까.”

“교수님. 일단 놓고 말씀하세요. 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후배들 앞에서 이러시면 정말.”

“정말 뭐? 한 대 때리기라도 하게?”

“헉.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제가 교수님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잖아요. 이러시면 정말 사제 간의 따스한 정이 느껴져서 감사하다는 말씀이죠.”

나의 이런 비굴한 모습을 처음 본 시연이는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가득한 것을 보니 내 꼴이 정말 우습기는 했나 보다.

“말은 잘한다. 킁킁. 아이쿠. 이건 또 무슨 술 냄새야? 너 지금 술 마시고 여기 온 거야? 이 녀석이 정말 하다하다 못해 별 짓을 다하는구나. 왜, 어제 네 여자 친구와 한판 붙은 거야? 그래서 술 마시고 용서라도 빌러 온 거야? 팔불출 같은 녀석.”

귀를 잡았던 손은 놓으셨지만, 이제는 아주 나를 팔불출로 만드셨다. 아! 오늘 인간 마동수 학교에서 제대로 망신당하는 날이다. 여기서는 나름 카리스마 있는 선배였는데, 이제는 그런 이미지는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어떻게 교수님은 못 본 사이에 더 괴팍해지셨습니까?”

“뭐? 괴팍? 너 이놈의 자식. 진짜 괴팍함이 뭔지 보여줄까?”

“아뇨.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하하하. 이제 그만 고정하세요. 교수님.”

“흠. 거기 윤시연 학생.”

나 보고는 ‘이놈의 자식’이라고 하시더니, 우리 시연이보고는 ‘윤시연 학생’이란다. 그건 그렇고 설마 시연이까지 혼내려고 저러시는 것은 아니겠지?

“네. 교수님.”

“다음 시간에 수업 있나?”

“아뇨. 공강입니다.”

“그럼. 두 사람 모두 내 방에 잠깐 들렀다 가게나.”

이제야 점잖으신 원래 교수님의 모습을 돌아오셨다. 그런데 갑자기 교수님 방으로는 왜 데려가시려는지 모르겠다. 지금까지야 워낙 친했던 사제지간이라 과한 장난을 좀 친 것이고, 교수님 방에 가자는 것은 진지하게 뭔가 할 말이 계시다는 의미다.

“자. 일단 차부터 한 잔씩 하게나.”

교수실로 가자 교수님이 직접 차를 타주셨다. 교수실 내부는 여전했다. 좌우로 빽빽하게 꽂힌 책들하며, 창가에 줄을 맞춰 서 있는 난초들 하며. 오랜만에 들어온 교수님의 방은 변함 없는 모습으로 나를 반겨줬다. 예전에는 여기 와서 상담도하고, 무료하시다면서 같이 장기도 두고 그랬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흠흠. 그건 그렇고 여기 좀.”

차를 타주신 교수님은 잠시 망설이더니 책 한 권을 우리 앞에 내미셨다. 뭔가 했더니 시연이가 쓴 ‘그에게 내 마음을 담아 보낸다.’라는 여행 에세이였다. 설마하니 교수님이 시연이에게 사인을 받고 싶으셔서 우리를 이리로 부르셨단 말인가? 우리 교수님이 이럴 리가 없다.

“교수님. 지금 설마 사인해달라고 부르신 것은 아니죠?”

“부르기야 다른 일 때문에 불렀지. 겸사겸사 사인도 받으면 좋잖아. 내... 내가 해달라는 것은 아니고, 집사람이 자꾸 졸라서 말이야. 작가소개란에 서강대 경영학부 재학 중이라고 적혀있다면서, 교수가 제자에게 사인하나 못 받느냐며 성화를 좀 부려야지.”

교수님이 저렇게 변명하듯 말을 길게 늘어놓으시는 모습을 보니, 시연이와 따로 친분도 없고 그렇다고 수업시간에 사인을 받을 수도 없으니, 사모님의 성화에 며칠 동안 고민을 하셨던 모양이었다. 아까 쑤군거리던 학생들도 그렇고 시연이의 책이 제법 입소문이 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은 좋다가 웃고 있을 채 사장의 모습이 잠시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걱정 마세요. 교수님. 이런 건 제가 오히려 영광이죠. 헤헤.”

[안녕하세요. 사모님. 저는 교수님의 ‘경영학 원론’ 수업을 듣고 있는 09학번 윤시연이라고 합니다. 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과 사모님 두 분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 윤시연 올림 - ]

시연이는 그렇게 글귀를 남기고 교수님께 다시 책을 건넸다.

“동수 너도 사인해.”

“저는 왜요?”

“지금까지 두 사람이 같이 사인해준 책은 없지? 내가 예전에 누누이 이야기하지 않았어. 경영학에서 희소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니까 잔말 말고 어서 사인이나 해.”

괜히 민망하시니까 경영학 이론까지 가져오셨다. 내가 교수님의 이런 귀여운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두 분 백년해로 하세요. - 마동수 올림 - ]

나는 교수님의 성화에 결국 간단한 글을 적고 사인까지 했다. 내 사인까지 해서 책을 건네 드리자 교수님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셨다.

“이제 집에 가서 면이 좀 서겠구먼. 그건 그렇고 동수야.”

이제 본론을 꺼내실 모양이었다.

“네. 교수님.”

“너희 회사와 윤 스포츠센터가 협력해서 D&Y휘트니스 클럽을 런칭한다며?”

벌써 소문이 학교에까지 퍼졌나보다. 경영학은 대학에서 배우는 학문 중에서 현장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과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영학과 교수님들은 항상 기업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계신다. 우리가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공공연한 비밀이나 마찬가지이니 교수님도 소문을 들으신 모양이다. 그러니 가야그룹과 대박 스포츠센터가 뒤통수를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다른 프로젝트를 하게 된다면 소문에도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네. 그렇다고 하네요.”

“의뭉스러운 놈. 네가 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거든.”

“하하하. 교수님을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괜찮아. 회사 다니면서 내부 정보를 함부로 말할 수야 없지.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앞으로는 소문에도 신경 좀 쓰고 그래라. 대학에서 애들이나 가르치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소문이 났으니 원.”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 때문에 엄청 고생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해결은 했고?”

질문하시는 뉘앙스를 보니 노블레스 짐(Gym)과 과련된 이야기도 이미 아시는 것 같았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 이 정도로 빠른 정보력을 가지고 계실지는 몰랐다.

“겨우 해결했습니다.”

“그래? 이제 보니 문제 해결했다고 기분 좋아져서 술 한 잔 먹고 여기를 찾아 온 것이구먼. 여자 친구에게 자랑하려고. 이 녀석 정말 팔푼이가 되었네. 허허허.”

“그... 그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원래 연애할 때야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은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술을 마시긴 마셨나보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을 보니. 옆에서 그 말을 듣던 시연이의 얼굴이 홍시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닭살스러운 인간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죽었다 살아나더니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허허허. 좋을 때다. 좋을 때야. 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내가 볼 때는 도저히 방법이 없어 보이던데 어떻게 해결한 거야?”

“에이, 토요일이면 알게 되실 건데요.”

“소문 내지 않을 테니, 말 좀 해봐.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잠시 고민을 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며칠 후면 알려질 일이고, 교수님 성품에 그 사이를 못 참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시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게 전부 우리 시연이 덕분이었다. 나는 시연이 덕분에 아이디어를 얻게 된 상황부터 일이 해결된 과정까지의 스토리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런 묘수가 있었어? 내가 동수 네 녀석의 잔머리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말 제대로 된 꼼수네. 게다가 숨은 공로자가 바로 윤시연 학생이었다니. 네가 정말 여자 복이 있나보다.”

“하하하.”

나는 교수님의 말씀에 그냥 웃기만 했다. ‘맞습니다. 교수님 제가 여자 복은 타고 났죠.’라고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복은요. 무슨.’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경영학이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도 확실히 현장과는 어쩔 수 없는 괴리감이 생기는구먼. 교수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무래도 노블레스 짐(Gym)이 몇 발 앞서나가게 생겼다고 예측을 했거든. 역시 학문과 현실은 달라. 나중에 책이나 한 권 써봐. ‘꼼수마케팅’이라는 제목으로. 혹시 알아? 대박이 날지?”

“에이, 제가 무슨 책을 내요.”

“그만큼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대학원생들 몇몇을 그 프로젝트에 참여시킬 수 있을까?”

웬일로 이렇게 이야기를 빙빙 돌리시나 했더니 교수님이 어려운 부탁을 내게 하셨다. 요즘 대학교수는, 특히 경영학과 교수는, 그냥 공부만 해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제자들 취직자리도 알아봐주고, 오늘처럼 제자들의 현장경험을 위한 청탁도 해야 한다. 내 동기들 중에도 교수님 덕분에 쉽게 취직을 한 녀석들도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이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나는 내 입장이 있고, 교수님은 교수님 입장이 있는 법이다.

“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건의는 해볼 수 있겠지만, 제 말을 위에서 들어줄지는 저도 자신이 없네요.”

“나도 그건 잘 알고 있어. 이제 겨우 대리가 그런 건의를 하기는 힘들지. 그래서 윤시연 학생을 함께 부른 것이고.”

시연이가 윤 스포츠센터 사장님의 딸이라는 사실을 교수님도 아는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교수님의 모습을 영악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제자를 위해 아직 신입생인 시연이에게까지 부탁을 하려는 교수님의 모습이 좋게만 보였다. 우리가 대학원생 몇몇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교수님에게 돌아가는 이득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버리고, 나와 시연이에게 부탁을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스포츠센터 설립과정에 참여를 한다고 대학원생들에게 도움이 될까요?”

“그게 말이지. 요즘 학교에서 스포츠 경영학 분야를 키우고 있거든. 그래서 대학원생들도 받았고. D&Y휘트니스 클럽의 설립 과정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아이들에게는 중요한 경력이 되겠지.”

우리학교는 복수전공와 연계전공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나 역시 복수전공으로 경제학을 전공했고, 시연이도 신방과를 복수전공으로 선택했다. 36학점만 이수하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경영학과의 경우 경제학 수업 중 12학점이 필수이기 때문에 결국 24학점만 더 들으면 학위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연계전공은 더 쉽다. 예를 들어 스포츠 경영학을 연계전공으로 선택하면 스포츠 마케팅을 비롯한 이론 9학점과 실기 9학점만 들으면 된다. 나머지 18학점은 경영학 수업을 들으면 된다. 나 같은 경영학과 학생은 별 어려움 없이 학위 하나를 더 얻게 되는 것이다. 내가 대학에서 들었던 스쿠버다이빙, 스키, 라켓볼, 패러글라이딩 등의 수업도 전부 스포츠마케팅 실기 과목이었다.

그러니 별 어려움 없이 경제학 학위와 스포츠 경영학 학위가 추가로 생긴 셈이다. 하지만 그 실효성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이었다. 나 또한 그냥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여러 가지 레포츠를 배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수업을 신청한 것이지 학위에 대한 욕심 때문에 수업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러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경영대 대학원에서 스포츠 경영학을 신설했던 모양이다. 교수님의 순수한 마음을 알기 때문에 웬만하면 도와드리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합류할 방법이라. 나는 교수님을 위해 열심히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가볍게 읽어주세요. 가능하면 낮에 한 편 더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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