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7 벼룩도 낯짝이 있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표창장 제 XXX호 이름 조기훈. 직급 팀장 대우. 위 사람은 평소 품행이 단정하고 투철한 사명감으로 맡은 바 업무를 성실히 수행해왔으며, 특히 이번 D&Y휘트니스 클럽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타의 모범이 되는 살신성인의 자세를 몸소 실천하였기에 이 상패를 수여함. 2009년 9월 XX일. 주식회사 동지 회장 고대성 대독. 부상으로는 특별 상여금 1억 원을 지급합니다.”
짝짝짝
‘동지 회장 고대성 대독’이라고 사회자가 읽자 시상식에 참여한 팀장 이상의 간부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상으로 1억을 지급하다는 이야기가 들리자마자 박수소리는 웅성거림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들뿐만 아니라 표창장을 받는 조 팀장님과 다음 순서로 대기하고 있던 나와 김 대리, 정 주임, 준호도 역시 놀라버렸다.
세상에, 무려 1억이다. 1천만 원도 아니고, 5천만 원도 아니고, 무려 1억 원이다. 내가 아무리 재산이 많이 늘었다고 해도 1억은 거금이다. 우리도 시상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의 특별 상여금이 있다는 사실은 예상했었다. 그래봤자 고작 1천만 원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가 예상한 금액을 비웃기라도 하듯 열 배나 되는 특별상여금을 지급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가 낸 수익만 따지면 각자 1억? 충분히 받을 만 했다. 그렇지만 회사 오너인 스페셜 원이 직접 표창장을 수여하기 위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특별상여금 1억 보다 더한 쇼크였다. 뭐, 회장님이 계신 곳에서 저렇게 웅성거리는 것을 보니 특별상여금 1억이 더한 쇼크인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번 특별상여금 지급 금액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동지는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심각한 정체기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본인은 조기훈 팀장과 팀원들의 맹활약 상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것이다.’라며 무릎을 쳤습니다. 우리 동지의 직원들이 저들처럼 주인의식을 가지고 회사 일에 충성을 한다면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것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동지그룹 가족여러분. 제가 이 자리에서 공언하겠습니다. 앞으로 우리 동지그룹의 직원들이 살신성인의 자세로 회사를 위해 큰 공을 세운다면 지금 부상으로 수여한 특별상여금보다 더 많은 보너스도 지급할 계획입니다. 조기훈, 김수현, 마동수, 정지영, 태준호. 여러분들도 이들 5명처럼 될 수 있습니다. 회사를 단순히 직장이 아니라 가정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해 주십시오. 여러분의 노력이 모인다면 우리 동지는 대한민국의 1위 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표창장 수여식이 끝나자 회장님의 연설이 이어졌다. 오늘 이 행사는 처음부터 동지그룹 전체에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회장님이 참석하신 이유가 바로 저 무시무시한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연설이 끝나자 참석한 간부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화와 같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정 주임과 준호도 회장님의 연설이 끝나자 상기된 표정으로 손바닥이 터져라 맹렬하게 박수를 쳤다. 저들의 모습을 보니 방송을 보던 다른 직원들도 크게 다를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저 양반이 지금 얼마나 무서운 소리를 하고 있었는지 깨닫고, 그의 음흉함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봤을 때는 나 역시도 회사 일에 목숨을 걸었다. 정 주임과 준호의 모습을 보며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 뼈저리게 느껴었다. 돈이 수십, 수백억이 있으면 뭐하나? 목숨은 하나뿐이다.
정 주임과 준호 그리고 나 역시도 돈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 조 팀장님의 신뢰가 바탕이 되었고, 정 주임의 놀라운 배짱이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정말 돈 때문에 위험천만한 일에 나서는 사람이 생길 수 있고, 차근차근하게 성과를 거두려는 사람보다 한 방을 노리고 모험을 하려는 사람이 늘어날 수도 있다. 안정적이고 좋은 기업체의 모습이 절대 아니다. 우리의 시상식은 직원들을 위험으로 내몰기 위한 하나의 쇼에 지나지 않았다.
단순히 직원들을 독려하려는 정상적인 성과급체계가 아니다. 큰 공을 세웠다고 해서 말단 직원을 바로 부장으로 승진시키는 대기업은 없다. 상식선이라는 것이 있다. 성과급도 그런 체계가 있어야 한다. 연말에 최고의 성과를 거둬 상여금을 받는 직원도 자신의 통장을 확인하면서 우리가 받은 특별상여금을 떠올릴 것이다. 분명히 위화감을 느낄 것이다. 앞으로 우리 말고도 대박을 터트리는 직원들이 있다면 그 위화감은 점점 더 커져갈 것이 분명하다.
조직이란 시계와 같다. 눈에 보이는 시계바늘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 열심히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이 서로 완벽하게 맞물려야 정확한 시간을 알려줄 수 있다. 회사에는 눈앞에 보이는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포지션이 있는 반면, 인사, 총무, 비서, 관리와 같은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필요한 부서와 현장에서 제품을 직접 제조하는 생산직 근로자들도 있다. 그들이 제대로 납득하지 못하는 성과급 체계는 결국 우리 회사의 뿌리를 흔들 것이다.
내 손에 들려있는 1억이라는 돈이 참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회장님은 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연설을 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동지랜드에서 만난 고 이사가 왜 하필 세종대왕의 고사를 가지고 은근한 소문을 퍼트렸는지 확실히 납득이 갔다. 그때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경영철학을 뒤집어엎으려고 하고 있다. 두 형님 뿐만 아니라 회장님까지 극복하겠다는 엄청난 포부를 가지고 있는 그 남자가 5년 후에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지 정말 기대가 됐다.
“여기에 정말 1억짜리 수표가 들어있는 건가요? 태어나서 1억이라는 돈은 처음 만져보는데.”
“당연히 비어있지. 준호야. 생각을 좀 해봐라. 지금 우리 수중에 1억씩의 돈이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수표니까 강도는 들지 않는다고 해도 돈 빌리려고 찾아오는 직원들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지도 모른다. 당연히 통장으로 입금하겠지.”
“아. 그렇겠군요. 그래도 이렇게 큰돈을 특별상여금으로 지급할지는 몰랐네요.”
“호호호. 꼭 모바일 화보를 찍은 연예인이 된 기분인걸요? 사실 전 돈도 돈이지만 회장님이 연설하실 때, 우리 팀원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는 것 보셨죠. 연설문을 들고 계신 것도 아니었어요. 정말 우리 이름을 외우고 계신다고 생각하니까 소름이 돋던걸요.”
“저는 좀 면목이 없네요.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머, 김 대리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세요. 뒤에서 서포트를 잘 해줬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움직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몸에 글씨를 쓴 사람은 김 대리님이잖아요. 제가 아무리 깡이 좋아도 다른 분에게 그런 것을 부탁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못하거든요. 호호호.”
정 주임은 듣기 좋은 농담으로 김 대리를 달랬다. 함께 고생을 한 것도 있고, 보고서 작성에 큰 도움이 된 현우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김 대리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나 또한 우리 팀원들이 동등한 액수의 특별상여금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단지 금액이 너무 과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뿐이었다.
“정 주임 말이 맞습니다. 현우에게 도움을 받은 것도 결국 김 대리님 덕분인걸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그런데 상여금의 20%를 기부하기로 한 것은 변함없죠?”
“흠흠.”
요즘 들어 김 대리의 말수가 부쩍 늘었다. 그런 모습은 확실히 좋아 보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팀원들이 난감해 할 수도 있는 문제를 꺼냈다. 그 말에 당황한 팀장님이 바로 헛기침을 하셨다.
“저기 원래 우리가 2백만 원 정도를 생각하고 기부하려고 했잖아요. 상여금이 조금 늘었으니까 두 배! 아니다, 딱 잘라서 5백만 원만 기부하는 게 어떨까요?”
“그... 그거 괜찮네. 5백만 원씩 5명이면 2천 5백만 원이잖아. 엄청 큰 액수네. 그렇지 않냐? 동수야.”
화장실 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준호가 잔머리를 굴리자 팀장님도 바로 동의를 하셨다. 처음부터 말했지만, 나는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기부라는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법이다.
“기부야 자기 형편에 맞게 하는 거죠. 팀장님 알아서 하세요.”
“그렇지, 동수야. 그럼 우리 5백만 원만 낼까?”
“그 말이 아니라. 형편에 맞게 내자고요. 전 옥상에까지 올라가서 도롱뇽을 살리자고 주장했던 사람이라 양심에 찔려서 안 되겠어요. 그냥 2천만 원 낼게요.”
“야, 임마! 치사하게 그러는 게 어딨어?”
“어머, 어머. 팀장님! 그리고 준호씨! 상여금이 조금 늘었어요? 저 정말 실망하려고 해요. 왜 사람이 한 입 가지고 두말을 해요? 제가 어제 말씀드렸던 가위요. 그거 지금 사용할 수도 있어요.”
“아... 아냐. 정 주임. 나도 원래 20% 내려고 했어. 그지 준호야?”
정 주임의 무시무시한 협박에 팀장님과 준호도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강요하는 기부문화는 반대하지만, 설마 정 주임이 가위로 정말 자를 것도 아니고. 그래, 설마? 설마 아닐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기분 좋게 1억을 맞춰서 기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오후에는 회사 사보 팀이 와서 우리 팀을 취재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정 주임의 강력한 주장으로 단체사진도 촬영했다. 그리고 미래백화점 건설현장에서 있었던 일은 정 주임과 준호가 침을 튀겨가며 설명을 했기 때문에 별로 나설 일도 없었다. 물론 도롱뇽 이야기는 빼기로 했다. 그 사실이 알려져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정 주임은 심지어 내가 찍어준 사진을 사보에 올려 줄 것을 요청했다. 자신의 무용담을 전 직원에게 알리고 싶다나? 당연히 정면 사진은 아니었다. 옆모습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렇게 야해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렇지 저러다가 정말 노출증에 걸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살짝 되었다. 환경 단체를 가장한 문구가 들어있어 안 된다고 우리가 말리자, 상체를 모자이크 처리하면 된다고 졸라댔다. 결국 사보 팀에서도 좋은 그림이 생겼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내가 장담하는데 만약 사진이 9월 말 사보에 나오면 회사가 그대로 뒤집어질 것이다. 가끔 인터넷을 하다보면 ‘연예인 XXX 가슴 노출’, ‘해외 연예인 OOO 음모 노출’과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뜰 때가 있다. 실제 사진은 아주 미약한 노출이라 별로 야하지도 않은 사진이지만, 기사에 나온 사진은 과장되게 모자이크를 처리하는 바람에 정말 별의 별 상상을 다 하게 만든다. 정 주임 사진이 모자이크 처리가 되면 직원들은 대체 무슨 상상을 할까? 아마 사보 팀도 모자이크를 해보고는 화들짝 놀라 포기할 것이 뻔하다.
“조 팀장님.”
“네.”
“방금 정지영 주임이 그러던데, 이번에 받은 상여금의 20%를 환경단체에 기부한다면서요? 거기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세요.”
“아. 그거요. 흠흠. 우리 지구는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엄청난 물질문명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도 있는 법. 물질문명의 발전은 인간에게 풍요로움을 안겨줬지만, 그와 반대로 심각한 환경오염을 초래했죠. 인간은 오만하게도 환경파괴를 멈추지 않았어요. 결국 오존층이 파괴되고 지구가 온난화되어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습니다.
조 팀장님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지구의 환경을 걱정하는 투사로 변모했다. 팀원들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일그러지든 말든 일장연설은 계속되었다.
“세계 각국은 부랴부랴 대책 마련을 하고 있죠. 런던협약이나 몬트리올 의정서 같은 국제협약을 만들어 환경을 보호하려는 것도 그만큼 환경파괴가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변화에 발맞춰 ‘우리도 한 팔을 거들자’라는 생각으로 팀원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합심해서 결정한 것입니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싶었지만, 팀원들의 사정도 있고 해서 겨우 1억만 모은 것이 참 아쉽기는 합니다. 환경 보호를 위해 쓰이는 막대한 돈에 비하면 우리가 기부하는 1억이라는 돈은 조족지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티끌모아 태산이 되듯 언젠가는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그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순간 나는 박수라도 쳐야하나 고민을 했다.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데,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겨우 1억? 조금 전까지 남성의 상징을 가위로 위협받던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돌변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이제 팀장님에 대한 호감을 접을까 살짝 고민까지 했다. 사실 뭐, 가끔 저런 엉뚱한 면이 있어서 팀장님을 더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다.
============================ 작품 후기 ============================
벼룩도 낯짝이 있다. 이번 챕터는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가시기전에 선추코 잊지마세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