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8 피는 물보다 진하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윤 스포츠센터에서 대학원생 3명을 포함해서 총 6명의 사람이 합류한다는 연락이 왔다. 석나련 실장, 한정석 과장, 김동호 대리는 윤 스포츠센터의 원래 직원이었고, 김정화, 곽효철, 소은규는 대학원생들이었다. 5명이 사용하던 장소를 11명이 함께 사용하기는 힘들 것 같아 부랴부랴 사무실을 옮겨야 했다.
11명이 함께 사용할 마땅한 공간이 나오지 않자, 총괄부장이신 지혁권 이사님은 결국 마케팅 1부 3팀과 사무실을 바꾸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1부 3팀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그렇게 개고생을 했던 바로 그 팀이었다. 회장님이 큰 관심을 가지시다보니 팀장이 운영하는 팀을 팀장 대우가 운영하는 팀이 밀어낸 것이다. 양 팀장에게는 정말 자존심이 상하는 일임이 분명했다.
이사 당일 양 팀장과 이 대리의 표독스러운 표정을 보니 화장실 가서 밑을 닦지 않은 것처럼 개운치가 않았다. 금의환향하는 기분이 들면서도 나중에 저들이 또 무슨 다른 짓을 벌일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방으로 파견 가는 일은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윤 스포츠센터에서 파견 나온 석나련 실장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이 팀의 팀장 조기훈이라고 합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군요. 이렇게 미인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나와 정 주임이야 윤 스포츠센터를 들락날락거리며 인사를 나누었기 때문에 다들 아는 얼굴이었지만, 다른 팀원들은 서로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35살인 석나련 실장은 조 팀장님의 말씀처럼 꽤 미인이다. 딱히 동안이거나 그렇지는 않다. 딱 자기 나이대로 보이는데, 성숙한 느낌과 함께 눈가의 옅은 잔주름이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얼굴이 무슨 대순가요? 일을 잘해야죠.”
조 팀장님의 부드러운 인사와는 달리, 석 실장은 처음부터 기선제압에 들어갔다. 소속이 다르다보니 서로가 친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어쨌든, 묘한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첫 대면식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남자 대학원생 두 명은 나도 잘 알던 후배들이었다. 그렇지만 김정화라는 여자 대학원생은 나도 오늘 처음 봤는데 발랄한 느낌의 미인이었다.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정 주임은 위층 사무실에서 받은 사람이니, 아무래도 이곳이 ‘터가 좋긴 좋은 곳이었구나.’라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합류하자 업무는 제대로 분위기를 탔다. 원래 우리 팀원들이야 스포츠센터 자체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조언해주는 사람이 생기니 확실히 일이 편해졌다. 그리고 스포츠센터 설계는 윤 스포츠센터의 설계도를 수정해서 사용하기로 결정해서 시간은 더욱 절약할 수 있었다.
회사일이 정상궤도에 오르자 정말 오랜만에 칼퇴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여유가 생겼다고 해도 그 시간을 100일 기념일 준비하느라 보냈기 때문에 바쁜 것은 여전했다. 별거 아닌 것 같았는데 이게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20살인 시연이를 위해 발랄한 느낌으로 가야할지, 그런 분위기에 전혀 적응할 수 없는 나를 위해 그냥 격식을 차리는 정도로 준비해야할지도 제대로 결정하기 힘들었다.
“젠장. 요즘 젊은 애들은 정말 닭살스럽게 노네.”
인터넷으로 100일 이벤트를 확인해보니 정말 별의 별 이벤트가 다 있었다. 유치찬란한 풍선 이벤트, 촛불 이벤트, 폭죽 이벤트와 같은 노가다성(?) 행사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 요즘은 이런 이벤트들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돈만 주면 예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꽤 아기자기하게 기념일을 보낼 수 있는 방법도 있었다. 내부 공간을 꽃과 촛불 그리고 케이크를 가지고 예쁘게 장식해서 기념일을 맞은 커플들이 충분히 행복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 놨다. 가격도 비싸봐야 100만 원이면 충분했다.
“아. 번거로운데 그냥 이런 카페나 이용할까? 에이, 아니다. 내 성격에 이런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저런 카페 안에 있었다가는 온 몸에 돋는 닭살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겠다. 아이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참 난감하네.”
퇴근하고 바로 집에 와서 혼자 구시렁거리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내 마음에 드는 쏙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뭐랄까 좀 품격 있는 분위기 속에서 기념일을 보내고 싶은데 인터넷에 등장하는 것들은 거의 대부분 캐주얼한 너무 느낌이 강했다.
“그래 뭐. 돈 가지고 뭐하겠냐.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지.”
고민을 한참 하다 보니 내가 왜 이럴까 싶었다. 돈도 많은 내가 굳이 인터넷이나 검색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나누는 이벤트를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전에는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더니, 이번에는 궁상을 떨고 있었다. 미친척하고 제대로 질러보자는 결심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다음날부터 퇴근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유명한 레스토랑을 전부 돌아다녔다. 직접 가보고 분위기가 괜찮다 싶은 곳이 있으면 다짜고짜 금요일 저녁 시간에 대관이 가능한지 물었다. 그런데 이것도 쉽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레스토랑은 그날 예약이 많은 상황이라 거절을 했다. 하루 목돈을 벌려고 식당 이미지를 망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역시 현실은 TV에서 보는 것과는 달랐다. 내가 재벌 2세 정도 된다면 모를까 단골도 아닌 내가 대뜸 빌려 달라고 한다고 해서 그러겠다고 나서는 곳이 쉽게 나타날 리가 없었다.
재벌 2세? 음.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재벌 2세가 한 명 있기는 했다. 이런 일로 전화하는 것이 민망하기는 했지만,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솔직히 이건 그냥 핑계고 회장님 연설을 들으면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 그에게 확인하고 싶었다.
Rrrr
“오. 마 대리. 이거 오랜만이네.”
“하하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고 이사님.”
“그렇지 않아도 표창장 수여식은 잘 봤어. 축하해. 마 대리의 모습을 보니까 나도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에이, 그렇게 큰일도 아닌데 부풀린 감이 없지 않아 좀 있죠.”
“그래도 난 마 대리에게 그런 열정이 숨어 있는 줄 미처 몰랐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는데, 고 이사는 모든 사정을 아는 눈치였다. 사실 놀이공원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해도, 큰 야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정도 소식통이 없어서는 곤란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드실 걸요. 한 번 죽을 뻔하고 나니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그게 아쉬운데? 나와 일할 때도 그런 모습을 보여줄까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설마 회장님의 연설을 듣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나도 우리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 당장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악수로 변할 수 있는데 왜 그러셨는지 몰라.”
능구렁이 같은 모습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가족이면 회장님의 그런 성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회장님의 이번 선택은 확실히 과한 면이 있긴 했다. 지금도 다른 기업에 비해 조직체계가 너무 일원화 되어있어서 위태로운 편인데, 성과지상주의가 만연해버린다면 언제 위기가 찾아와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능청 떨지 마세요.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세종대왕 고사까지 가지고 와서 ‘난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 것 아니었습니까? 너무 소심하게 선언을 하셔서 눈치 챈 사람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흠흠. 뭐 그건 그렇다고 하고. 무슨 일로 전화를 다 했어? 이번 연설을 듣고 보니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큰일이 나겠다 싶어서 빨리 합류라도 하려고?”
“그럴 리가요. 저는 동지 관련 주식 하나 없는 사람입니다. 망하면 다른 회사로 옮기죠 뭐.”
“이런, 이런. 마 대리 놓치지 않으려면 내가 열심히 분발을 해야겠군.”
“그럼요. 어서 분발하셔서 제가 회사에 붙어있게 좀 해주세요. 하하하. 그런데, 저기. 제가 전화를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요. 이사님.”
나는 말을 꺼내기 창피해서 조금 주저하다가 결국 사정 이야기를 했다. 내 이야기를 듣던 고 이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거 너무 고마운걸. 날 그만큼 편하게 생각해줬다는 말 아니야? 어쨌든 마 대리도 참 대단한 정성이다. 내가 잘 아는 레스토랑 있으니까 거기로 가봐. 내가 전화 넣어 놓을 테니까. 그런데 거기 좀 비쌀 텐데. 괜찮을까? 너무 부담 간다 싶으면 내 앞으로 비용 달아놔.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흥. 나도 돈 많은 남자다. 이런 식으로 신세를 지면 바로 코가 꿰이는 신세가 된다. 그런 일은 내 입장에서 사양이다.
“저도 돈 있어요. 회장님께서 주신 찝찝한 특별상여금 있잖아요. 그거 다 써버리려고요.”
“그 돈이 좀 그렇긴 하지?”
“네. 나중에 다른 직원 중에 정말 다치는 사람이 나온다면 왠지 미안할 것 같네요. 이런 돈은 빨리 써버리고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그래, 그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다.”
“참 그때 이야기한 청담동 bar에는 가보셨어요?”
전화를 끊기 전에 나는 청담동에서 일하는 조연서라는 바텐더에 대해서 물었다. 내가 원래 물어보려고 했던 것은 이 이야기였다. 선택은 그녀가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에 자꾸 걸렸다. 어쩌면 나도 회장님을 욕할 자격이 없을지 모른다. 냉정하게 따지면 대가를 주고 누군가를 유혹하게 하는 것이나, 돈으로 유혹해 직원들을 위험한 일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선택은 그들이 한다고 하지만, 그전에 거절할 수 없는 미끼를 던지는 수법은 둘 다 똑같다.
회장님의 연설을 들으면서 내 모습을 되돌아보니 이렇게 살다가는 나도 저 사람처럼 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애써 모른 척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행복한 마음으로 시연이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하다보니, 나에게 적의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나로 인해 불행해지는 것이 싫어졌다.
나는 이제 돈도 많은데 그렇게까지 해서 성공해야하나 싶은 자괴감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미 엄청난 행운이 두 가지나 왔다. 하나는 돈이고 다른 하나는 시연이라는 존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의 인생까지 뒤흔들어가며 아등바등 살아야 하나 싶었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거나,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요즘 와서 정말 일이 재미있고 보람도 느끼고 있다. 돈이 생겼다고 설렁설렁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단지 방법의 문제다. 꼼수를 부리며 살더라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고 싶었다. 요즘 들어 확실히 내가 너무 감상적으로 변한 것 같기는 하다. 시연이는 그녀가 있는 곳에서나 없는 곳에서나 나를 좋은 쪽으로 이끄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아 그거? 마 대리가 왜 추천했는지 알 것 같더라. 정말 엄청난 미인이더라고. 그런데 꿈쩍도 안 해. 손님으로는 친절하게 대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애인이 생겨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애인이 생겼데요?”
“응. 알아보니까 대단한 집 남자도 아니야. 그냥 대기업 다니는 평범한 과장인데, 나이 차이도 제법 나. 9살 차이인가 그래. 그 이야기 듣고 마 대리 같은 남자가 또 있구나했지.”
나는 고 이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남자에 대해서는 좀 아세요?”
“남자? 미래건설에 다닌다고 하던데. 이름이 뭐더라. 백우찬? 백찬우? 아무튼,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워. 제대로 말도 못 걸어봤거든.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해보고 그것도 안 되면, 치사하지만 남자 쪽을 압박해보려고. 나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이번에 표창장 수여식에서 보였던 아버지의 모습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여보세요? 이봐 듣고 있는 거야? 마 대리? 여보세요? 마 대리?”
‘백우찬’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인연이 어떻게 이렇게 이어지나 싶었다. 잘못했으면 은혜를 원수로 갚을 뻔했다. 아니다. 아직은 원수로 갚고 있는 중이다. 고 이사가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빨리 그를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다급해졌다.
============================ 작품 후기 ============================
저는 처음에 장르를 한 번 정하면 바꿀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장르도 바꿀 수 있더군요. 저도 오늘 새벽에 알았습니다. ㅠ 어쨌든 퓨전에서 소설로 장르 수정했습니다.
조연서라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네요. 연재소설이다 보니 중요인물이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64회를 보시면 마동수가 어떤 마음으로 고 이사에게 조연서를 소개해줬는지 나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