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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09화 (109/424)

00109  피는 물보다 진하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여보세요? 이봐 듣고 있는 거야? 마 대리? 여보세요? 마 대리?”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고 이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네, 말씀하세요. 고 이사님.”

“들려? 난 또 전화가 끊어진 줄 알았네.”

“아직 동지랜드에 계세요?”

“응. 동생이 자꾸 졸라서, 이번 달까지만 여기 있으려고.”

이제 슬슬 본사로 돌아와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동지랜드에 있는 것을 보니, 동생인 고장희에 대한 고 이사의 애정은 정말 각별한 것 같았다. 장희 그 녀석도 혼자 힘으로 다할 것처럼 굴더니, 역시 막내는 막내인 모양이다.

“제가 지금 그리로 갈게요.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거든요.”

“왜 무슨 묘안이라도 있어?”

“아뇨. 일단 만나서 이야기할게요.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요.”

나는 전화를 끊고 고 이사가 있는 동지랜드로 향했다. 그가 독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세계가 있다. 정상에 오르려면 가끔은 독해지기도 하고, 가끔은 치사해지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 사람의 인품에 반한 것이 아니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함께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남자 쪽을 압박해본다는 말은 고 이사답지 않았다.

동지랜드에 도착하자마자 사무실로 급하게 뛰어갔다. 마음이 왜 이렇게 조급한지 모르겠다. 고 이사는 다행히 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급한 할 말이 있기에 여기까지 왕림하셨어?”

“조연서씨 때문에요.”

“조연서씨가 왜? 무슨 문제가 있어?”

“아까 하신 그 이야기 있잖아요. 남자 쪽을 건드려보겠다는 말. 그거 회사를 그만두게 한다거나 재정적으로 문제를 일으켜보겠다는 말씀이죠?”

“그거? 해보다 안 되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는 거지. 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되면 나도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는데. 솔직히 꽤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하면 넘어올 줄 알았거든. 그런데 친해지기조차 쉽지 않으니 원. 재벌가 자식이 이렇게 인기가 없을지는 나도 미처 몰랐어.”

고 이사가 정말 독해지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조연서씨가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었다. 이렇게 하나 둘씩 자신을 합리화하면 그도 결국 회장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다면서요.”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잖아. 목소리가 좀 흥분한 것 같은데, 잘 아는 사람이었어? 아니지, 잘 아는 사람이면 이런 일에 소개시켜 주지도 않았을 텐데.”

흥분한 나와 달리 고 이사의 표정은 담담했다. 내 마음이 급해서 고 이사가 어떤 사람인지 잠시 잊었다. 능구렁이 같은 그와 이야기하려면 처음부터 솔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제가 소개시켜 준 사람이잖아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죠.

“마 대리.”

“네. 이사님.”

“원래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잖아? 난 마 대리의 최대 장점이 냉철한 이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미래백화점 일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마 대리답지가 않아.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소개시켜주지를 말았어야지. 갑자기 이러면 나도 곤란하다고.”

그래. 나도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헷갈린다. 연애에 빠져 냉철한 이성을 잃은 것인지, 그게 아니면 좀 더 철이 들어가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쩌면 나라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중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와 관련된 사람에게는 많은 관심이 가지만, 그밖에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심이 없었다. 고 이사에게 독한 모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고 회장을 닮아가는 모습은 싫다.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사님.”

“말해.”

“이사님은 회장님의 경영철학을 싫어하신 것 아니셨습니까? 그런데 조연서씨와 남자 친구에게 하려는 행동은 회장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아직 생각 중이라고 했잖아.”

고 이사는 오늘 만나서 대화하는 도중에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넘어야 할 벽이자 그의 콤플렉스 같았다. 나는 그의 상처를 좀 더 건드려보기로 했다.

“뒷골목을 주름잡는 양아치 깡패에게도 명분은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회장님과 다르게 그룹을 이끌겠다는 포부를 가지신 분이 시작도 하기 전에 자신과의 약속을 깨트리면 곤란하죠. 명분을 잃으면 따를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됩니다.”

“넘어야할 벽이 높으면 독해지기도 해야 하는 법이지.”

양아치 이야기까지 끌어들이며 고 이사를 자극했지만, 그는 어느새 평정을 찾고 침착하게 변했다. 확실히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답답해졌다.

“저도 고 이사님에게 독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가 쉽지는 않죠. 그래도 지켜야하는 선이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은 독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겁니다.”

“독한 것과 악한 것의 차이라... 휴.”

내 말을 들은 고 이사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을 계속 이었다.

“그래, 내가 조금 조급했던 것 같네. 그런 일은 고민 조차하면 안 되는 것이지. 그럼 남자는 놔두고 조연서씨에게 계속 집중해야겠군. 그 정도는 독한 것이지 악한 것은 아니잖아. 뭐, 남자 친구를 정말 사랑한다면 꿈쩍도 하지 않겠지.”

거의 넘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마지막에 저런 사족을 다는 걸까? 역시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이 정도 일로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연서라는 사람이 우찬 형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전에 내가 소개한 사람만 아니었어도 나는 여기서 물러났을 것이다. 이제는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고 이사에게 발목 잡히기 싫다고 우찬 형님에게 피해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을 모른 척 넘어간다면 나야말로 양아치가 된다.

“남자 쪽을 제가 좀 압니다.”

“어떻게?”

“이번에 미래백화점 건에 대해서는 이야기 들으셨죠?”

고 이사는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았다.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그에게 우찬 형님이 어떻게 나를 구해줬는지 간단하게 이야기해줬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흠. 그러니까 그 백우찬이라는 남자가 마 대리를 구해준 사람이다?”

“네.”

“그것 참. 처음부터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이렇게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었잖아. 흠, 이제 마 대리냐 조연서냐 나는 지금부터 그걸 고민해야하나?”

말을 하는 품새를 보니 역시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나도 내가 이렇게 감성적으로 변할지는 몰랐다. 감성적으로 변하지 않았으면 옥상에 올라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조연서씨에게 신경 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다. 그것보다는 처음부터 생각 없이 소개해준 내 잘못이다. 내가 뿌린 씨앗은 내가 거둬야 한다.

“조연서씨는 넘어가지도 않았잖아요. 친분도 제대로 못 쌓았다면서요? 지금 그게 고민거리라도 되는 거였습니까? 넘어올지 말지 확신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나는 지금도 마 대리가 내게 가장 필요한 인재 중 한 명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어. 음. 조연서씨 일이야 다른 방법을 강구하면 되는 것이고. 나는 마 대리가 점점 탐이 나거든.”

고 이사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빨리 말을 할 것이지, 사람을 은근히 비행기 태우는 모습이 왠지 불안했다.

“저는 그렇게 별 볼일 있는 인간이 아니라니까요.”

“이번 일도 봐. 미래백화점 그 일도 마 대리 아이디어라며?”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운이 좋았죠. 이번에는 정말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전에도 말한 것처럼 그 운을 나도 좀 나눠쓰자니까. 그리고 솔직히 운은 아니지. 그런 판단력과 추진력을 동시에 가진 사람은 정말 드물어. 이것도 내가 전에 이야기했지?”

기억난다. 나도 그 말에 홀랑 넘어갔으니.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면, 무데뽀이긴 한데 잔머리가 좋다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또다시 사람을 이렇게 칭찬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이번 일을 쿨하게 넘어가주시면 제가 고 이사님을 정말 인간적으로 존경할 것 같은데요.”

“에이, 내가 마 대리 추천 때문에 이것저것 알아본다고 얼마나 시간낭비를 많이 했는데. 내가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마 대리가 섭섭하잖아? 그렇다고 지금부터 같이 일하자고 하는 말은 아니니 겁먹지 말고. 나도 자네에게 ‘내가 이 정도 사람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니까.”

“그럼요?”

“나중에 내가 마 대리를 필요로 할 때 일 한 번 같이 하자. 미리 손발 맞춰보는 것도 좋잖아? 제대로 된 일을 같이 하다보면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있고.”

조연서씨의 일에 손을 떼는 조건으로 뭔가 대단한 일을 시킬 듯 사람을 긴장시켜놓고, 가볍게 손발이나 맞춰보자고 말해버리면 거절할 수가 없다. 그 일이 힘들 든 그렇지 않든 그건 나중 일이다. 내가 이래서 함께하자는 고 이사의 꼬드김에 넘어갔다. 직장인에게 ‘네 능력이 필요해.’라는 말 보다 뿌듯한 칭찬이 또 있을까? 나도 잘 모르는 내 능력을 알아보고, 그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고 이사를 보면 묘한 전율이 느껴진다.

“제가 필요한 일이 있겠어요. 잔머리나 굴릴 줄 아는 게 전분데요.”

“왜 또 운이라고 주장하려고? 그럼 정말 운이 필요한 일에 부르면 되겠네.”

헉. 저 말은 정말 무섭다. 운이 필요한 일. 다른 말로 하면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서 하늘이 도와주기를 기다리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이야기다. 한 번 튕겨보려다가 본전도 못 뽑을 것 같았다.

“하하하. 아닙니다. 운이 필요한 일 말고, 정말 제 능력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불러주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나도 찝찝하던 차에 잘 된 일이지. 고마워할 필요 없어. 덕분에 나도 명확한 기준을 세울 수 있었으니까. 독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한 이야기는 내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줬거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그냥 가려고? 연락처는 필요 없어?”

“연락처요?”

“레스토랑 연락처 알려달라며. 필요 없어?”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다. 시연이와의 100일 기념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내가 발품을 팔아가며 서울의 괜찮은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는 이유가 전부 이벤트 때문이었다.

“아뇨. 필요하죠. 그런데 이사님이 말씀하신 곳은 정말 괜찮겠죠?”

“그럼. 마 대리. 나 재벌 2세야. 내가 아무 곳이나 괜찮다고 추천했겠어? 조연서씨도 날 무시하더니 이제 마 대리까지 나를 무시하는 거야?”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고 이사는 조금 코믹한 표정을 지으며 장담했다.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서울로 올라와서 처음으로 아웃백이라는 곳을 갔을 때, 나는 그곳을 엄청나게 좋은 레스토랑이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무료로 계속 공급해주는 빵과 음료수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알고 보니 직장인들은 데이트장소로도 거의 이용하지 않는 캐주얼한 곳이 바로 아웃백이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하하하. 그냥 노파심에서 물어본 겁니다.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10살 어린 여자 친구를 위해 100일 이벤트를 하는 마 대리라. 부럽다. 나는 우리 애인 얼굴도 기억날까 말까 하는데. 전화해놓을 테니까 가서 내 이름 대면 될 거야.”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고 이사와 헤어지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경쾌해졌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고 이사가 상식적인 인간이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나중에 내가 필요해지면 부르겠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조금 걸렸지만, 그래도 우찬 형님의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소개받은 레스토랑은 삼성동에 있었다. 내가 도착을 하니 영업시간은 끝나고 마무리작업을 하고 있었다. 지배인을 만나 고 이사 이야기를 하니 반갑게 나를 맞아줬다. 창가를 통해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야경이 참 아름답다 생각했는데, 지배인 말로는 저녁 일몰시간이 되면 더욱 아름답다며 자랑을 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대관비였지만, 과감하게 계약을 해버렸다. 추가로 몇 가지를 더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뭔가 굉장히 많은 일을 한 것처럼 몸이 피곤했다.

============================ 작품 후기 ============================

조연서는 현시점에서 시연이보다 더 미인일 수 있는 여인입니다. 작가 개인적으로 여자는 서른 정도 되어야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 시연이에게는 아직 성숙함이 부족하죠 ㅎㅎ 물론 나이가 좀 더 들면 최고 미인은 시연이입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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