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0 피는 물보다 진하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회사일 하랴 이벤트 알아보러 다니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나와 시연이의 100일 기념일이 되었다. 그녀를 데리러 집 앞으로 가고 있었는데, 시연이가 나를 발견하고 멀리서부터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은 보라색 줄무늬 원피스가 바람에 휘날리며 시연이의 매력적인 볼륨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내가 운전하면 금방 도착할 거리인데 그 잠깐이 싫다는 듯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뿌듯해졌다.
“동수씨.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냥 서서 기다리지. 힘들게 뭐 하러 여기까지 뛰어와.”
“그럼 더 빨리 볼 수 있잖아요. 요즘 많이 바빴어요? 며칠 동안 얼굴도 못보고 통화도 제대로 못하고.”
차에 탄 시연이는 며칠 동안 자주 연락하지 못한 것이 많이 서운했는지 투정을 부렸다. 나야 레스토랑도 알아보고, 시연이를 위한 선물을 사느라 바빴지만 그걸 알 길이 없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서운함을 느낄 만도 했다.
“응, 회사일 때문에 급하게 준비할 것이 좀 있었거든. 서운했어?”
“아뇨. 안 서운해요. 회사일 때문에 바쁜 거였잖아요. 음, 사실 쬐끔 서운하기는 했어요. 그래도 오늘 이렇게 얼굴을 보니 그런 기분은 싹 사라졌어요. 히히히.”
옆에서 예쁘게 웃는 시연이의 입술이 오늘따라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내 팔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탐스러운 입술에 살짝 키스를 했다. 살짝만 키스를 하고 입술을 떼려고 하자, 시연이는 내 목을 감싸고 방금 전의 가벼운 키스와는 전혀 다른 열정적인 키스를 해왔다.
시연이의 말랑말랑한 혀가 입안으로 들어와 나의 혀를 유혹했다. 나는 입에 힘을 주고 장난스럽게 그녀의 혀를 빨아 당겼다. 깜짝 놀란 시연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내가 짓궂은 웃음을 짓자 그녀는 살짝 눈을 흘기며 다시 키스에 열중했다.
“하... 하...”
뜨거운 키스를 끝내고 떨어진 시연이는, 호흡이 가빠졌는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날도 밝은데 너무 과감한 거 아냐? 동네 주민들이 보면 어쩌려고?”
나는 얼굴이 상기된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농담을 했다.
“동... 동수씨 입이 닿으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돼요. 제가 이상한 걸까요?”
나는 가벼운 농담을 했을 뿐인데, 시연이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하하. 아냐. 나도 항상 그래. 하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걱정 마.”
“동수씨도 그래요?”
“그럼. 심지어 꿈에서도 나와.”
“정말요? 저도 그런데. 그럼 우리 꿈에서 만나는 거네요.”
“그런데 시연아. 여기 살짝 번졌다.”
“어떡해. 오랜만에 얼굴 봐서 예쁘게 보이려고 화장도 했는데 다 지워졌네. 히잉.”
내가 입술 주변에 번진 립글로즈를 닦아주자 뒤늦게야 화장이 살짝 지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화장을 하지 않는 시연이의 모습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모르는 것 같다. 남자들이 이렇게 말하면 여자들에게 비웃음을 당한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 화장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면서.
“괜찮아. 아무것도 안 해도 예쁘니까 신경 쓰지 마. 이제 밥 먹으러 가자.”
울상을 짓고 있는 그녀를 달래고, 나는 고 이사가 추천해준 삼성동에 위치한 레스토랑으로 차를 출발했다. 레스토랑 대관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몇 가지 준비해놨기 때문에 그곳으로 향하는 내 마음이 몹시 설렜다.
“오늘은 뭐 먹으러가요?”
“맛있는 거.”
“맛있는 거 뭐요?”
“글쎄? 가보면 알아. 궁금해도 조금만 참아.”
“살짝만 알려주면 안 돼요? 동수씨가 밥 먹지 말고 있으라고 해서 참았더니 배고파요.”
“음. 한식, 중식, 일식은 아니야. 힌트는 여기까지.”
전에 이야기하는 것을 봤을 때는 백일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는데 지금은 그냥 순진한 눈망울에 호기심만 가득해보였다. 모르는 척 하는 건가? 아님 내가 최근에 바쁘다며 통화를 오래 못해서 기대를 버린 건가? 모르는 척 하는 시연이라. 이제 그녀도 점점 여우가 되어가는 가 싶었다.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내가 아무리 개(강아지)같은 여자가 좋다고 해도, 여자는 어느 정도 내숭이 있어야 더 매력적인 법이다.
“잠깐 있어봐.”
나는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를 세운다음 내리려는 시연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나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원래 이런 행동 싫어했는데, 딱 오늘 만이다. 나도 그녀를 만나면서 참 많이 변했다.
“내리시지요. 시연씨.”
조금 과장된 말을 건네며 문을 열자, 그녀의 표정은 잠깐 동안 어리둥절하게 변했다. 내 행동이 낯선 모양이었다. 양 팔에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지만, 시연이를 위해 오글거려도 참았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히히히.”
차에서 내린 그녀는 치마를 살짝 들고 무릎을 굽히며 장난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와락 안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준비한 이벤트만 아니었으면 그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멀리멀리 가버리고 싶었다.
“하하하. 왕자님? 나처럼 곰같이 생긴 왕자님도 있어?”
“그럼요. 동수씨는 제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왕자님의 모습에 딱 이에요. 그래서 첫눈에 보고 반한 거잖아요. 저는 아직 동수씨를 처음 봤을 때를 잊지 못해요.”
내가 좋다는 이야기는 했어도,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는지는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첫눈에 반하다니. 못생긴 것은 아니라고 해도 소녀의 감수성을 자극할만한 미소년 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그녀의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첫눈에 반했다고?”
“제가 이야기 안했어요?”
“응. 안 했어.”
“맞다. 여자가 먼저 반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남자들이 싫어한다고 친구들이 말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안했구나. 그만 이야기할래요.”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시연이처럼 예쁜 사람이 좋다고 하는데 그걸 싫어하는 남자가 있을까 싶다. 자꾸 엉뚱한 정보만 알려주는 시연이의 친구들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같은 20살일 텐데 그녀들이 정말 도움이 될까? 자신들도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보고 TV나 소설 그리고 로맨스 만화 같은 것을 보며 ‘대충 이럴 것이다.’라며 추측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시연이의 친구들도 만나야할 텐데, 호기심 많은 20살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질문 공세에 시달리면 내가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나는 궁금한데. 알려주면 안 돼?”
“음. 안 되는데. 좀 부끄러운 이야기거든요.”
“그냥 과외하면서 생긴 감정이 아니었어?”
“당연히 아니죠. 그때는 이미 동수씨를 좋아하는 마음이 이만큼 커졌을 때고요. 사실 그전에 만난 적이 있어요.”
시연이는 두 팔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나도 모르는 그녀와의 첫 만남이라, 저렇게 주저주저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궁금해졌다.
“윽! 궁금해서 운전이 안 돼. 언제인데? 응?”
“역시 기억하지 못하네요. 조금 서운해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알려주면 안 될까? 지금부터 열심히 기억해둘게.”
“예전에 서초동에서 과외한적 있으시죠?”
“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서초동이면 군 제대하자마자 과외를 했던 곳 같기도 하고.”
“그 집이 제 친구 집이었거든요.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과외 하러온 동수씨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어요. 그리고 집에 가서 부모님을 졸라서 과외를 하게 된 거구요. 그때 안 된다는 부모님을 조른다고 제가 며칠 동안 밥도 굶었... 헤헤헤. 마지막 이야기는 못들은 것으로 해주세요.”
맙소사. 기억이 났다. 겨울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중2가 되기도 전이다. 초등학생과 겨우 1살 차이나는 정말 아이나 다를 바 없는 시기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했다. 그때 나는 대학에서 은근히 노땅 취급을 받는 복학생이었고, 시연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은 꼬맹이였을 시절이었다. 정말 맙소사였다.
“그... 그렇구나. 어서 밥이나 먹으러가자.”
“어. 표정이 이상해졌어요. 제가 괜히 이야기한 것 아니죠?”
“아냐. 그렇게 오래전부터 나를 좋아해줬다니 너무 고마워서 그러지.”
“정말요? 휴, 다행이다. 말을 많이 했더니 배고파요. 어서 가요.”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안기듯 내 팔짱을 꼈다. 시연이의 풍만한 가슴이 내 팔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 예전 일을 생각하면 뭐하나. 지금은 누구보다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는데. 갑자기 떠오른 초등학생과 별 차이가 없는 시연이의 어린 시절 모습을 재빨리 지우고 미리 예약했던 식당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략적인 도착시간만 알려줬는데, 지배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고 이사의 추천으로 미리 한 번 와봤지만 이곳은 정말 우아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전경도 좋았고, 고풍스러운 내부 분위기와 종업원들의 옷차림만 봐도 품격이 느껴지는 레스토랑이었다. 시연이에게 줄 선물을 제외하면 특별상여금으로 받은 돈의 대부분을 오늘 하루 이곳을 빌리는데 사용했지만,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동수씨. 여기 좀 이상해요. 손님이 아무도 없어요.”
지배인이 레스토랑 안으로 우리를 안내하자, 텅 빈 내부를 보고 시연이가 귓속말을 했다. 그녀는 이곳이 손님에게 인기가 없어서 아무도 찾지 않는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뇨. 분위기는 너무 좋은데, 손님이 하나도 없어서요. 음식이 엄청 맛없거나 서비스가 엉망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걱정하지 마. 여기 유명한 곳이래. 예약제라서 다른 손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보지.”
“그래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
“자, 걱정은 접어두시고 이제 자리에 앉으시죠. 시연씨.”
나는 능청을 떨며 시연이가 앉을 자리의 의자를 빼줬다.
“와! 오늘 동수씨 너무 제게 잘해주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나는 그냥 차문을 열어주고, 의자를 빼줬을 뿐인데 그녀는 정말 감동을 받은 눈치였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데 좋아하는 시연이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미리 주문하신 음식은 이제 막 조리를 시작했습니다. 우선 아페리티프(식전주)부터 올리겠습니다.”
자리에 앉자 지배인은 두 잔의 와인 칵테일을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식전와인으로 많이 사용되는 커(kir)라는 술이었다. 부르고뉴의 드라이하고 산도가 강한 화이트 와인을 베이스로 과실시럽 리큐어인 크렘 드 카시스(Creme de Cassis)를 적당한 비율로 블렌딩 한 후 약간의 얼음을 넣고 레몬조각을 짜서 흔들면 완성된다. 지난번에 내가 찾아갔을 때 오늘 나올 음식들에 대해 지배인이 설명을 해줬지만, 사실 와인 칵테일이 있다는 이야기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띠링 ~♫
우리가 가볍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레스토랑을 환하게 밝히던 불빛이 꺼지고 은은한 조명과 촛불로만 내부를 밝혔다. 그리고 미리 부탁해뒀던 대로 연주자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클래식도 싫고, 너무 가벼운 가요도 싫어서 밝고 부드러운 느낌의 뉴에이지 피아노곡을 부탁했었다. 많이는 아니라도 이루마, 류이치 사카모토, 어쿠스틱 카페, 시크릿 가든 정도의 곡은 나도 가끔 듣는 편이었다.
저물어가는 태양 때문에 불그스름한 황금빛으로 변한 한강과 은은한 조명으로 밝혀진 레스토랑 내부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속에서 듣는 밝고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따뜻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나와 시연이는 뭔가에 홀린 듯 홀 안에 울려 퍼지는 피아노 연주에 빠져들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바깥 풍경도 그렇고 피아노곡도 그렇고.”
“마음에 든다니 정말 다행이네.”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이 모든 것이 저를 위해 준비된 느낌이에요. 그래서 더 좋은 것 같아요.”
시연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곳의 모든 아름다움을 즐겼다. 테이블 옆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그녀가 느끼는 감동이 내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지배인이 내게 저녁이 되면 정말 좋다는 귀띔을 해줬지만, 이 정도로 황홀한 분위기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고 이사가 장담할 만 했다. 역시 재벌 2세(?)가 소개해준 곳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우리는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행복함을 만끽했다.
============================ 작품 후기 ============================
코멘트를 보니 재미있는 말들이 많네요. 오랜만에 코멘트를 남기시는 분도 계시고요. 한동안 보이지 않길래 재미가 없어서 선삭하셨나 걱정했었죠.^^ 어쨌든, 미의 기준은 다들 다를겁니다.
10살 차이나는 커플을 만들어놓은 이런 말은 좀 웃기지만, 20살에는 20살이 가장 예뻤고, 30대가 되자 30대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작가입니다. 20대에 눈을 돌리면 도둑놈 소리를 들을 나이라 ㅠ 그리고 40대가 되면 제발 곁에 부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ㅠ
솔로 독자 여러분. 내년 겨울에는 꼭 따뜻한 크리스마스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