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1 피는 물보다 진하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탈리아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라서 그런지 용어는 좀 낯설었다. 스투치카니(식전음식)부터 시작해서, 안티파스티(전채요리), 프리미 피아티, 세콘티 피아티라 불리는 메인요리, 콘토르니(곁들임 채소), 포르마지(치즈), 돌체(후식), 피콜라 파스티체리아(단과자), 카페(차)까지 이르는 정찬코스는 풍성하면서도 맛깔났다.
“안티파스티입니다.”
다만 용어가 좀 거슬렸을 뿐이다. 지배인이 직접 서빙하면서 요리이름을 설명했는데, 나는 이게 무슨 파스타의 종류인줄 알았다. 올라오는 음식을 보고나서야 전채요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그럼 그냥 전채요리라고 할 것이지.’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날이 날인지라 참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시연이와 함께 갔던 ‘은행골’이라는 일식집에서 나왔던 ‘도로초밥’을 보고 참치초밥이라고 하지 않느냐며 따지지는 않았다. 결국 일본어는 알아서 가만히 있었고, 이탈리아어는 몰라서 욱했을 뿐이었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
“동수씨”
“응?”
메인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를 즐길 시간이 되자 시연이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분위기도 이렇게 좋고, 음식도 정말 맛있는데 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 글쎄.”
“솔직하게 말해 봐요. 식당 전체를 빌린 거죠?”
“그... 그럴걸?”
“왜요?”
왜요? 능청을 떠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준비를 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분명히 백일을 기대했었는데, 갑자기 저렇게 나오니 당황스러웠다.
“왜긴. 오늘이 우리 백일이잖아.”
“그건 내일인데요.”
이게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오늘이 아니라 내일?
“뭐?”
“헤헤헤. 우리 동수씨 99일도 이렇게 멋지게 꾸며줬는데, 100일이 되는 내일은 얼마나 멋진 이벤트를 준비했을지 기대가 되는데요. 내일 기대해도 되죠?”
“응? 내... 내일?”
“히히히. 농담이에요. 고마워요. 동수씨. 100일은 아니지만, 마음은 충분히 받았어요. 사실 내일이었으면 뭔가 기대를 하고 나왔을 텐데,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다가 이런 좋은 시간을 가져서 더 행복한 것 같아요.”
끄응. 나의 100일 이벤트는 어쨌든 실패였다. 그래도 시연이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저렇게 예쁜 말을 해주니 고마웠다.
“미안해. 내가 계산을 좀 잘못했나봐.”
“괜찮아요. 저는 충분히 행복하니까. 대신요.”
“대신?”
“내일도 같이 시간 보내줘야 해요. 그냥 재미있게 데이트만 해요.”
“그럼. 내일은 토요일이니 아침부터 만나자.”
“네. 좋아요. 그리고요.”
“그리고?”
“피아노 연주해주면 안 돼요?”
피아노? 내가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심벌즈, 캐스터네츠, 탬버린이 전부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리코더? 이런 나를 보고 지금 피아노를 연주하라니.
“나 음악에 소질이 없는데. 저번에 자장가도 들었잖아.”
“그래도요. 동요라도 괜찮아요. 간단하게 사진만 찍을게요. 네?”
요즘 시연이는 사진촬영에 완전히 빠져 살고 있다. 오늘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음식 하나하나를 열심히 찍었다. 이런 행동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야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모습들도 예뻐 보였다. 더군다나 내가 선물해준 카메라로 저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면 역시 선물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피아노는 좀. 시연이의 눈에서 강렬한 염원이 담긴 레이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아, 점점 내 마음이 약해졌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둘만 있는 곳이니 용기를 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99일을 100일로 착각했으니 그 정도는 들어줘야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아노 앞으로 갔다. 다음 곡을 준비하고 있던 연주자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시연이의 표정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띵. 띵. 띵.
잠깐 건반을 눌러봤는데 어디가 ‘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기. 여기 건반에서 ‘도’는 어디인가요?”
나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옆에 있던 연주자에게 건반 위치를 물었다.
“아. 네. 여기. 여기를 누르시면 돼요. 여자 친구 분이 부탁하신 것 같은데 힘내세요. 호호호.”
연주자는 이런 모습을 많이 봤는지, 호의어린 목소리로 건반을 알려줬다. 나는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을 높이 세웠다. 그리고 어릴 때 배웠던 동요 중에 유이하게 계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학교 종이 땡땡땡’과 ‘옹달샘’ 중 그나마 품격(?)있는 옹달샘을 선택했다.
‘미솔도미솔 파라라 솔시레파미레 도, 도미솔 파미레 솔시레파 미레도, 미솔도미솔 파라라 솔시레파미레 도.’
휴, 다행히 계이름을 잊지 않고 있었던 내가 용했다. 덕분에 무사히 연주(?)를 끝낼 수 있었다.
짝짝짝.
연주가 끝나자 시연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쳤다. 아, 저 녀석은 이 상황이 전혀 부끄럽지가 않아 보였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고 재빨리 자리로 돌아갔다.
“멋있었어요.”
“옹달샘 연주하는 게 뭐가 멋있어?”
“어때요? 내 남자가 나를 위해 용기 내서 연주한 곡인걸요. 저는 지금 세상 어떤 여자보다 행복한 것 같아요. 고마워요. 동수씨.”
나를 바라보는 시연이의 눈가가 약간 촉촉해졌다. 이제 준비했던 선물을 전해야할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고 안주머니에 넣어준 작은 상자를 꺼냈다. 여전히 촉촉하게 나를 바라보는 시연이의 손을 잡고 작은 상자에서 꺼낸 반지를 그녀의 왼쪽 손위에 올려놓았다. 까르띠에 매장에 가서 산 캐주얼한 느낌의 웨딩밴드였다.
약혼을 청하기 위해 무려 3천만 원을 훌쩍 넘는 반지를 샀다. 특별상여금의 나머지 돈도 레스토랑을 빌리는데 전부 들어갔다. 그런데도 전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10월이 돼서 정식으로 약혼식을 올리기 전에 이렇게 둘 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나 혼자 무작정 약혼식을 진행하기가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약혼은 어떻게 하자고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 반지를 건네고 여자가 그것을 승낙하면 그때부터 약혼을 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무작정 따라했다.
“어머, 반지네요? 예쁘다.”
자신의 손 위에 올려진 반지를 확인한 시연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응. 그게, 있지.”
고민을 해봤지만, 말하기가 좀 이상했다. 결혼이면 그냥 ‘결혼하자.’라고 말하면 되는데, ‘약혼하자.’라고 말하려니까 뭔가 좀 이상했다.
“할게요.”
내가 머뭇거리는데 시연이가 먼저 대답을 했다. 시연이 부모님이 그녀에게 뭔가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미리 저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놓였다.
“고마워 시연아.”
“아니에요. 저도 결혼하고 싶었어요. 할게요. 결혼. 사랑해요. 동수씨.”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품에 들어와 안기더니 갑자기 결혼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3년 뒤에 결혼하겠다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그... 그런데 시연아.”
“걱정 마세요. 우리 부모님은 제가 설득할게요. 안 되면 제가 또 단식 투쟁이라도 하죠. 히히히.”
“아... 아니... 그..”
“염려마시라니까요. 동수씨는 저만 믿고 따로 오면 돼요. 설마 유부녀라고 저 같은 인재를 아나운서에서 떨어뜨리겠어요?”
이대로 두면 혼자 결혼계획에 출산계획까지 잡을 기세다. 말려야 한다.
“시연아. 잠깐만 내말 좀 들어봐. 응?”
“네. 동수씨.”
“결혼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네? 그... 그럼 이 반지를 왜?”
내가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품에서 떨어진 시연이가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야... 약혼 하자고. 결혼은 네가 대학을 졸업한 다음에 해야지. 그런데 그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약혼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앗! 그... 그런거였어요? 전 그것도 모르고, 히잉. 제가 너무 결혼에 목숨 건 사람처럼 보였죠.”
“하하하. 아냐. 너무 귀여웠어. 그런데 약혼은?
“할게요. 할게요, 약혼. 그럼 전 지금부터 동수씨 피앙세가 되는 거네요?”
그제야 자신이 너무 서둘러 대답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연이는, 얼굴이 붉게 변한 채 약혼을 승낙했다.
“그래. 이제부터 윤시연은 마동수의 피앙세다. 고마워, 약혼 받아줘서.”
재미있는 착각을 한 흥미로운 100일 이벤트였다. 나는 99일을 100일로 착각하고, 시연이는 약혼을 결혼으로 오해하고. 우리가 나중에 결혼을 한다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첫 이벤트가 될 것 같았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그녀를 데리고 코엑스에 있는 코엑스아티움 현대아트홀로 갔다. 그냥 식사만 하고 끝내기에는 아쉬워서 뮤지컬을 예매해뒀다. ‘젊음의 행진’이라는 뮤지컬이었다. 30대가 된 왕경태와 영심이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인데, 나오는 노래의 대부분이 80, 90년대 노래라서 과연 시연이게 맞을까 고민을 했었다. 다른 곳에서 하는 공연은 너무 멀어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예약을 했는데, 다행히 그녀는 정말 즐겁게 공연을 관람했다.
“오늘 정말 너무너무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동수씨.”
시연이는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내 팔에 꼭 매달리면서 이야기를 했다. 휴. 어쨌든, 이것으로 오늘 준비한 100일 기념 이벤트는 모두 무사히 마쳤다. 뭔가 회사 프로젝트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해결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녀와 팔짱을 낀 채로 코엑스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멋진 식사도 하고, 재미있는 공연도 봤는데 뭔가 좀 아쉬웠다.
“동수씨.”
“응?”
“나요. 꼭 받고 싶은 게 하나 있거든요.”
코엑스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시연이가 뭔가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는지 애교를 부리며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작은 선물을 사주는 아기자기한 데이트는 한 번도 한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선물 한 것은 목걸이, 블레이슬릿 그리고 오늘 준 반지가 전부였다. 너무 30대 위주의 데이트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뭔데. 말해봐.”
“저기 매장에 있는 곰돌이 인형이요. 저거 사주면 안 돼요?”
그녀가 가리키는 매장을 보니 그곳에서는 정말 다양한 인형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단 들어가 보자. 어떤 인형을 말하는 거야?”
“히히히. 요 녀석이요.”
시연이는 매장으로 냉큼 달려가 자기보다 덩치가 큰 곰 인형 앞에 섰다.
“다른 인형은 안 돼? 너무 험상궂게 생겼어. 게다가 해적 안대를 한 곰 인형이라니. 인형이면 귀여운 맛이 있어야지.”
그녀가 가리킨 인형은 정말 못생기다 못해 험상궂게 보이는 곰 인형이었다. 그리고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는 해골마크가 들어간 까만색 안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요 녀석으로 사줘요. 네? 꼭 우리 동수씨 같아서 너무 맘에 들어요. 히히히.”
헉. 그럼 그 동안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이미지가 저런 곰 인형 같은 느낌이었다는 말이 된다. 뭔가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뭔가 이상하게 납득이 갔다. 뭐랄까, 동류를 만난 느낌? 그래서 저 곰 인형을 보자마자 기분이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저렇게 못생겼어?”
“어머머. 이렇게 귀여운 인형을 보고 못생겼다니요. 얼마나 귀여운데요. 그지 똥수야.”
얼씨구, 벌써 곰 인형에 이름까지 지어버렸다. 하고많은 이름 중에 ‘똥수’가 뭐냐! 그렇다고 여기서 곰돌이 따위와 감정싸움(?)을 할 수는 없었다. 닮았다는데 어쩌겠나. 사주는 수밖에. 계산을 하고 나왔더니 시연이가 자기보다 큰 곰 인형을 감당하지 못해서 술 취한 사람처럼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고 있었다. 어휴. 내가 정말 20살과 사귀다보니 별의 별짓을 다하는 것 같았다.
“이리 줘.”
시연이가 들고 있는 인형을 받은 나는, 유도할 때 업어치기를 하는 것처럼 한 쪽 팔을 어깨에 걸쳤다.
“우와! 그 큰 곰 인형이 동수씨에게는 동생처럼 보이네요. 히히히. 둘이 너무 잘 어울려요. 사진 한 장만 찍을래요. 괜찮죠?”
"사... 사진을?"
끄응. 그래, 참자. 다른 날도 아니고 100일 기념일이다. 게다가 서로 약혼을 하기로 한 기분 좋은 날이다. 이런 날 아니면 내가 언제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해보겠나. 나는 시연이가 요구하는 대로 곰 인형을 들고 매장 옆에 섰다.
“호호호. 곰이 두 마리다.”
“대박, 둘이 닮았어.”
“그러게 안대만 쓰면 딱 일 것 같다. 얘.”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하면서 키득거렸지만, 해실해실 웃고 있는 시연이를 보면서 억지로 포즈를 취했다. 그녀는 한 장만 찍겠다더니 여러 가지 포즈를 취하게 만들었다. 젠장, ‘똥수’녀석! 인형 주제에 은근히 무거워서 팔이 저려왔다.
============================ 작품 후기 ============================
1시간 정도 이따가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아직 100일은 끝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