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18화 (118/424)

00118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판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띠링.

도봉순이라는 여자와의 어처구니없는 만남이 있은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나는 평소처럼 여유를 가지고 일을 하고 있었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점심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와 커피를 한 잔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순간 어제의 그 아찔했던 광경이 다시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약혼자까지 있는 마당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기억을 지워보려고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더욱 선명해졌다.

“휴. 이건 도봉순 때문이 아니라 윤시연 때문이야. 그날 그렇게 참았으니 후유증이 올만도 하지. 빨리 시연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약혼날짜부터 잡아야겠다.”

잠시 다른 여자를 떠올린 죄책감을 그렇게 합리화하며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집에 가서 자기 꼴을 확인했다면, 나 같으면 쪽팔려서라도 다시 연락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일까 싶었다.

[안녕하세요. 마동수씨. 어제 해주신 따끔한 충고는 여자 도봉순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서는, 작가 도봉순이 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항상 제게 예쁘다는 소리만 했지 아무도 정신 차릴만한 충고나 조언을 해준 적이 없었던지라, 마동수씨의 말씀은 저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금과옥조와 같은 말, 평생 가슴에 품고 살겠습니다.

영보문고 익명게시판에 들어가 보시면 악착같이 살기로 한 인간 도봉순이자 작가 도봉순의 첫 발걸음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은인에게 제 첫 출발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민망한 상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 보냅니다. 아무쪼록 하시는 일 모두 잘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나중에 정말 제대로 된 책을 출판하게 된다면 선물로 보내드릴 테니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미래 베스트셀러 작가 도봉순 올림 -

P.S. 어제 보셨던 제 민망한 꼴은 제발 잊어주세요. ]

휴. 꽤 장문으로 된 MMS문자였다. 글을 다 읽고 나자 어이가 없었다. 금과옥조와 같은 말 평생 가슴에 품고 산다는 말에 웃음이 나왔고, 은인이라는 표현은 황당하기만 했다. 나는 그냥 잘한 것도 없는 여자가 징징 짜길래, 짜증이 나서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어제도 느꼈지만, 확실히 정상적인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영보문고 게시판에 여자 도봉순이 아닌 인간 도봉순의 첫 발걸음을 남겼다는 말에 호기심이 들었다. 아무래도 어제 나를 보며 자기 혼자 힘으로 복수하겠다고 말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포탈사이트에서 영보문고를 검색해서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어디보자. 익명게시판. 익명게시판. 여기 있네. 오! 댓글이 많은 것을 보니 이건가보네. ‘여성 작가의 피를 빨아먹는 A부장을 고발합니다.’라. A부장이 바로 우리 시연이를 넘봤던 그 개자식인가보네. 무슨 내용인지 읽어볼까.”

‘여성 작가의 피를 빨아먹는 A부장을 고발합니다.’라는 글을 클릭하는 순간 화면에 등장한 처참한 사진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게시물 안에는 손발이 묶인 채 중요부위만 모자이크 처리된 중년 남자의 사진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크크크. 뭐야, 이게. 아, 도봉순 이 똘끼충만한 여자. 정말 최고다. 크크크. 아, 미치겠다. 이 자식이 바로 그 자식이라는 말이지. 생긴 것도 변태같이 생겨가지고는. 감히 우리 시연이를 넘봐. 내가 이 정도로 안 넘어간다. 변태새끼.”

그녀가 올린 글 밑에는 그동안 A부장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많았는지 피해당사자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증언도 꽤 있었다.

- ㅋㅋㅋㅋㅋㅋ 꼬시다.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고 잘살 거라 생각했냐?

- 저는 실제로 술집에 불려 간 적도 있습니다. 화가 나서 그냥 나왔더니, 다음날 영보문고 소설란에 제 책이 사라졌더군요. 이 꼴을 보니 속이 시원합니다.

- 저도 비슷한 제의 받은 적이 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안 나가길 잘했군요.

- ㅋㅋㅋㅋㅋ 다리 사이에 있는 노란 자국은 혹시 오줌? 아이쿠, 냄새. 지린내가 여기까지 진동을 한다. ㅋㅋㅋㅋㅋㅋㅋ

댓글들을 보니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통 이런 일이 터지면 해당회사에서는 쉬쉬하면서 관련자에게 사표만 받고 조용히 묻어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단순히 술 접대? 나쁜 인간은 못된 짓을 하나만 하지 않는다. 책 진열 등을 미끼로 출판사들로부터 무수한 향응을 제공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향응을 혼자 받아먹었을 리가 절대 없다. A부장의 윗선 누군가도 개입했을 것이고, 그 사람으로 인해 사표를 내는 정도로 조용히 마무리 될 가능성이 높다.

조직 사회라는 것은 어딜 가나 똑같다. 혼자 비리 저지르는 간 큰 인간은 찾아보기 거의 힘들다. 있다고 해도 금방 탈이 난다. 게시물에 달린 댓글들만 봐도 꽤 오랫동안 저런 비슷한 짓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런 인간은 그냥 사표를 쓰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사회에서 매장을 시켜야 다른 사람들도 겁을 먹고 비슷한 짓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A부장의 윗선보다 강한 힘이 있는 사람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

Rrrr

어제 시연이 어머님과 통화하면서 내가 조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자, 앞으로 당신께 직접 말하기 불편한 일이면 전화해보라고 알려주신 번호가 있었다. 윤 스포츠센터의 고문변호사로, 이번 OO출판사 인수를 위해 시연이 어머님을 많이 도와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렇지 않아도 엄마에게 이르는 아이가 같아서 민망했는데, 먼저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편하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네. 이용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마동수라고 합니다. 노하원 여사님이 번호를 알려주셔서 전화했습니다.”

“아,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을 하면서 마동수씨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꽤 재치 있게 일을 꾸미셨더군요. 하하하.”

재치 있게 일을 꾸미다니, 역시 변호사라서 그런지 듣기 좋게 말을 했다.

“어휴, 영악한 잔머리일 뿐이죠. 제가 전화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영보문고 책임자로 있다는 부장이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혹시 이야기들은 것 계십니까?”

“네. 그래서 저도 알아보는 중입니다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사실은 오늘 영보문고 온라인 쪽에서 일이 좀 있었습니다.”

나는 이 변호사에게 조금 전에 게시판에서 봤던 일을 그대로 전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럼 따로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조만간 자체 징계를 받겠군요.”

이 사람이 설마 이 정도로 만족하고 끝내려는 건가?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혹시라도 이렇게 나올까봐 미리 전화를 한 것이다.

“자체 징계로 끝내면 곤란하죠. 사표 쓰고 말텐데요. 저는 이 정도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변호사님이 생각하시는 이상으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거든요. 아마 뇌물이나 횡령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뒤를 봐주는 윗선도 있을 테고요. 그쪽으로 좀 알아봐 주셨으면 해서요. 웬만하면 사법처리까지 갔으면 좋겠거든요.”

“하하하. 노 여사님뿐만 아니라 윤 사장님도 가끔 말씀을 하시기에 어떤 분인가 궁금했었는데 상상했던 이미지 그대로네요.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습니다. 시연양과도 관련된 일이니 가볍게 끝내면 안 되겠죠. 만족하실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윤 사장님이 평소에 무슨 말을 하셨기에 저렇게 웃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내가 원하는 대답은 들었으니 마음이 놓였다.

“혹시 제가 주제넘게 나선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조만간 약혼 한다는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윤 사장님과 가족이나 마찬가지죠. 그러니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바쁘신 것 같은데 이만 끊겠습니다.”

만날 구박만 하시던 윤 사장님이, 내가 인사를 드리러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고문변호사에게 약혼이야기까지 하시다니 의외였다. 으이그, 좋으면 좋다고 그냥 말씀을 하시지. 이용대 변호사와의 전화를 끊고, 나 대신 재미난 복수를 해준 도봉순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제 제가 기억할만한 일이 있었나요? 나중에 채 사장과 A부장에 대한 재미난 소식이 들릴 겁니다. 건필 하십시오.]

그녀가 보낸 장문의 글은 어이가 없었지만, 나를 은인으로 생각한다는데, 이 정도 문자는 보내줘야 할 것 같았다.

◆ 윤 스포츠센터 고문 변호사실.

노 여사가 이용대 변호사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됐죠?”

“네. 사모님.”

“금액이 별로 크지 않아서 당장 부도는 어렵겠죠?”

“아마 그럴 겁니다. 어제부로 계좌는 전부 동결시켰습니다. 그래도 아마 숨겨둔 꽁돈이 1~2억 정도는 있을 겁니다. 그러니 최종부도는 한 달 뒤에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돈 나갈 구석은 전부 막아놨죠?”

“혹시 빌리러 갈까 싶어 사채 쪽에도 손을 써놨습니다. 그 조그만 출판사 하나 때문에 윤 스포츠센터와 척을 질 곳은 없습니다. 염려놓으십시오.”

“수고하셨어요. 이 변호사님.”

“별말씀을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오늘 만기되는 어음은 바로 지급 요청하시고, 그리고 아이참. 입에 담기도 그러네.”

“하하하. 불륜 증거 사진들도 오늘 바로 채 사장 집에 전달하겠습니다.”

“네. 저는 불륜 저지르는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다 싫지만, 가끔 그런 짓을 저질러도 용서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걱정이네요. 아무 죄도 없는 부인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거든요.”

노 여사는 자신의 행동으로 괜히 평온하게 살던 부인이라는 사람에게 시련을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채 사장을 제외하면 이번 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연녀가 있으면서도 다른 여자까지 만나고 다닌 정황이 담긴 사진이 있는데 설마 참고 있겠습니까? 현명한 선택을 할 겁니다.”

“그래요.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 믿어야죠.”

◆ OO출판사 사장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남자직원 한 명이 야단법석을 떨며 노크도 없이 사장실을 벌컥 열었다. 사장실에 앉아 조만간 찾아올 핑크빛 미래를 생각하며 미소 짓고 있던 채 사장은, 자신의 흐뭇한 상상을 깨뜨리며 호들갑을 떠는 직원에게 짜증이 났다.

“무슨 일인데, 이 난리야?”

“회사 계좌가 전부 동결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멀쩡한 계좌가 왜 동결이 돼?”

“저도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법원에서 계좌동결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만 은행에서 알려줬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채 사장은 그동안 책 판매중지 문제에 대한 건으로 법원 등에서 연락이 왔던 것이 생각났다. 마동수가 발악을 하는 것이라며 별일 아니라고 무시했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오늘이 9월 말일이잖아. 그럼 어음은?”

“돈이 없는데 어떻게 어음을 결제하겠습니까?”

“젠장. 이번 달에 갚아야 할 어음이 총 얼마야?”

“1억 조금 넘습니다.”

“뭐 그렇게 많아?”

“지난번에 인쇄소에 책 출판을 맡기면서 이번 달 안에 지급하기로 한 돈이 꽤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금액이 더 커졌습니다.”

“누가 일을 그 따위로 하라고 했어?”

그 말을 들은 직원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안 된다고 그렇게 말려도 끝까지 우겨서 진행한 사람이 채 사장이었다.

“사... 사장님이 직접 지시하신 일이었습니다.”

“흠흠. 이렇게 되는 일이 없어. 그... 그럼 서점에서 우리에게 줄 돈은? 은행에 넣지 말고 바로 우리에게 달라고 해보지.”

“전화를 해봤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지 돈을 지급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왜 우리에게 당연히 줘야 할 돈을 자기들 마음대로 미뤄? 그동안 접대로 들어간 돈이 얼만데. 당장 서점들 돌면서 사정이라도 해봐. 우리 부도나게 생겼다고 바지 끄덩이라도 잡고 늘어지란 말이야. 여기서 호들갑만 떨지 말고.”

직원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채 사장은 그에게 호통을 치며 당장 해결하라고 내보냈다. 탈세를 위해 2중 장부를 만들고 그 동안 빼돌린 돈이 제법 있었다. 직원들 수당까지 지급하지 않고 만든 돈이라 아까웠지만, 서점에 사정해보고 안 되면 그거라도 사용하면 된다는 생각에 약간은 마음이 놓였다. 오늘따라 자신의 선견지명이 기특했다. 그리고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자신을 귀찮게 한 마동수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 작품 후기 ============================

제가 드디어 미친 것 같습니다. 밤을 꼴딱 세워서 글 마무리하고 올립니다. 2시간도 못 잘 것 같은데 큰일이네요. ㅠ

요즘들어 인기도를 나타내는 여러가지 수치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좌절했지만, 생각해보니 저는 처음 글을 쓰는 사람이더군요. 이정도 관심만 해도 엄청난 행운이죠. ^^ 앞으로도 꾸준한 성실 연재로 보답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