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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24화 (124/424)

00124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서울에 있는 어느 커피숍.

봉순은 생각지도 못한 전화를 받고 많이 망설였다. 얼마 전까지의 자신이라면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오니 그 사람이 앉아있었다. 예전에 채은성의 휴대폰에서 몇 번 봤기 때문에 얼굴이 기억났다.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걸어갔다.

“저... 이현주씨 되시나요?”

“네. 제가 이현주에요. 그럼 그쪽이 도봉순씨겠군요. 우선 앉아요.”

“네.”

현주는 냉랭한 목소리고 봉순에게 자리를 권했다.

“역시 미인이시네요. 남편이 빠질 만 했어요.”

“죄송합니다. 그것 말고는 뭐라고 드릴 말이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봉순의 ‘죄송하다.’는 말에 현주는 기가 막혔다. 이곳에 나오면서 수만 가지 생각을 했었다. 도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할까, 머리채라도 잡아끌까, 물이라도 뿌려버릴까, 귀싸대기라도 한 대 올려붙일까. 그런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사죄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허무하기만 했다.

“죄송할 짓을 왜했어요?”

“철이 없어서 그랬나 봐요. 이미 채 사장은 만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시나리오는 현주에게 없었다. 차라리 싸가지 없이 나왔으면 마음 편하게 머리채라도 잡을 텐데,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니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왜 헤어져요? 저는 그 사람과 이혼할 생각이에요. 이제 같이 살면 되겠네요? 아, 구속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나 봐요?”

“벌써 구속되었나요?”

“벌써라니요? 마치 구속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네요.”

봉순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현주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고발했습니다. 너무 인간 같지 않은 행동을 해서요.”

“뭐... 뭐라고요? 좋아 죽을 때는 언제고, 갑자기 왜요? 그 사람이 대체 무슨 인간 같지 않은 행동을 했는데요?”

“죄송합니다. 그냥 그렇게만 알아두시면 안 될까요?”

“이혼한다고 해도 저, 아직은 채은상씨 와이프에요. 그러니 저도 알 권리가 있잖아요.”

봉순에게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렇지만 마음을 다잡고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동수에게 말할 때처럼 눈물도 나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인데 꼭 남의 이야기처럼 아무 느낌이 없었다.

“됐어요. 더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끔찍해서 더 듣고 싶지도 않아요. 그만 가보세요. 이미 헤어졌다는데 무슨 말을 나누겠어요. 둘이서 만나고 있을 때 눈치를 못 챈 내가 바보죠.”

이야기를 들은 현주의 마음은 절망감으로 가득 찼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어도, 5년 넘게 같이 살았던 남편이다. 중매로 만나 결혼했고, 남편은 조금 무심했어도 다정한 시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결혼자체를 부정하고 싶어졌다.

“저...”

“왜요? 무슨 할 말이 또 남았어요?”

“이거 드리려고요.”

봉순은 이곳에 나오면서 가져왔던 2억이 든 가방을 현주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투서랑 같이 보냈던 장부와 같이 있던 돈입니다. 2억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지금 나 동정하는 거예요?”

현주는 정말 기가 찼다. 남편이 자신 몰래 2억이라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고, 그 돈을 돌려주는 봉순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다.

“제가 감히 누구를 동정하겠습니까? 원래 주인에게 돌려드리는 겁니다. 순간 욕심이 나서 가지고 나왔지만, 이걸 가지고 있으면 전 불륜녀에 도둑년까지 되는 겁니다. 꼭 받아주세요.”

“그래서 그 돈 돌려주고 마음 편해보겠다고요?”

“그런 영악한 계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신고하면 어떡하려고요?”

“그럼 죗값을 받아야죠.”

현주는 이제 봉순이라는 여자가 꼴도 보기 싫어졌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차갑고 냉랭하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계속 빌기만 하니 꼭 자신이 나쁜 여자가 된 것 같았다.

“죗값은 무슨. 됐어요. 들어갔다 나오면 마음이 편해질 것 아니에요. 그냥 평생 양심의 가책이나 받으면서 살아요. 저 먼저 일어날게요.”

결국 현주가 먼저 일어났다. 그리고 나오면서 가방도 같이 들고 나왔다. 원래 남편의 돈이라고 하니 우선은 가지고 나오긴 했는데, 이 돈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그래도 살 맞대고 5년을 살았는데 남편의 죄가 가벼워질 수 있도록 도와줘야할지 아니면 이혼 후를 생각해서 자기가 가져야할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까 그 아저씨는 누구에요?”

마음이 진정된 시연이는, 내게 이 대리에 대해서 물었다.

“아, 이 대리? 신경 쓸 것 없는 사람이야.”

“동수씨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요?”

“이 대리가 있는 팀이 쓰던 사무실을 얼마 전부터 우리가 쓰게 되었거든. 그래서 우리 때문에 사무실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하나봐.”

“풉. 정말요? 엄청 쪼잔한 사람인가보네요. 그런 일로 삐지고.”

“그러니까 말이야. 사람이 좀 피곤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오늘 가려던 ‘매드포갈릭’이라는 식당에 벌써 도착했다. 평일 점심시간이라 근처에 있는 밥집은 직장인들로 득실 거실 것 같아 일부러 이곳으로 선택했다. 메뉴판을 보고 고르곤졸라 피자와 해물 파스타를 시키고 나자, 그녀가 뭔가 내게 전해줄 것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까 내게 뭐 전해줄 것이 있다고 문자 보내지 않았어?”

“그랬어요. 그런데 미워서 안 주려고요.”

내 말을 들은 시연이가 샐쭉하게 쳐다보며 장난을 쳤다.

“하는 수 없지 뭐. 안 미워지면 그때 줘.”

“안 궁금해요?”

“궁금해도, 어떡해. 윤시연양이 무서워서 참아야지.”

“피. 말은.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자, 여기 있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100일 선물이랑 또 다른 선물이에요.”

“100일 선물?”

생각해보니 100일이라고 그녀에게 뭔가를 받은 기억은 없었다.

“100일 선물도 안 줬는데, 서운하지도 않았어요?”

“그러네. 섭섭해 할 걸 그랬네. 하하하. 나야 이벤트만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지.”

“100일 선물은 미리 준비했었는데, 동수씨가 약혼하자고 하는 바람에 약혼선물과 같이 주려고 미뤘어요. 이벤트도 그렇고 반지도 그렇고 너무 좋은 것을 받아서 100일 선물만 주기 미안했거든요. 히히.”

“약혼 선물?”

“네. 얼른 풀어 봐요. 100일 선물은 엄청난 의미가 담겨져 있단 말이에요.”

시연이의 재촉에 나는 그녀가 건넨 쇼핑백을 열어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벨트가 들어있었다. 벨트에 엄청난 의미가 담겨져 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다.

“벨트네. 고마워. 그런데 여기에 무슨 의미가 담겨져 있는 거야?”

“음... 이... 있잖아요.”

시연이는 조금 전까지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이 달아오른 채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그녀의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 그게 앞으로 그 벨트를 풀 수 있는 여자는 저밖에 없다는 의미에요. 아, 창피하다.”

잠깐 망설이던 시연이는 속사포같이 말을 내뱉고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뭐, 의미를 들어보니 창피해 할만 했다. 그 말을 들은 나조차도 당황했으니 말이다.

“뭐? 하하하. 그런 엉뚱한 상상력은 누가 가르쳐주디?”

“그냥요. 동수씨도 필요한 것들은 다 있잖아요. 고민고민 하다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선물을 하자고 결심을 했죠. 아무튼, 엄청난 의미가 담겨져 있으니 꼭 지켜야 해요.”

“그래. 알았어.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그래. 음. 그럼 나도 선물을 하나 해야겠는걸.”

부끄러움을 타는 시연이의 모습을 보자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무슨 선물이요?”

나는 호기심에 눈이 동그랗게 변한 시연이를 손짓으로 불러 귓속말을 했다.

“속옷 선물.”

“네? 그... 그걸 왜요?”

“왜긴 왜야? 윤시연 속옷은 나만 벗길... 하하하. 여기까지만 할게.”

“으엑! 동수씨 너무 음흉해요.”

내가 조금 짓궂은 농담을 하자 얼굴이 불타오를 것처럼 금방 빨개졌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내 장난이 좀 과했나 싶었다. 벨트야 그냥 바람피우지 말라는 장난스러운 의미가 담겨있지만, 속옷이야기는 좀 노골적인 이야기긴 했다.

“흠흠. 장난이야. 장난.”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20살 아가씨를 괴롭히는 30살 아저씨가 된 기분이랄까?

“그런데요, 동수씨.”

“응?”

“도... 동수씨는 어떤 속옷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예상 밖 질문에 혹시 다른 의도가 있나싶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지만 시연이의 얼굴은 순수한 호기심만이 가득했다. 내가 잠시 잊었다. 시연이는 직진밖에 모르는 여자라는 사실을.

“자.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약혼 선물이 먼지 풀어볼까?”

이러다가는 정말 나의 속옷 취향까지 이야기해줘야 할 것 같은 불안함이 들어 얼른 말을 돌렸다. 그리고 쇼핑가방 안에 있는 꽤 큰 박스를 꺼냈다. 무게가 제법 묵직했다. 상자를 열어보니 카메라가 들어있었다. 그것도 카메라의 명품으로 불리는 붉은색 ‘라이카’마크가 선명하게 박힌 제품이었다. 라이카 M9라는 제품은 나도 알고 있는 카메라다. 그런데 모양이 내 기억과 약간 달랐다.

“라이카 카메라가 약혼 선물이야?”

“네. 모델명은 같아도 한정판이라 구하는데 오래 걸렸어요.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너무 늦었죠? 마음에는 들어요, 동수씨?”

“어... 마음에야 들지. 그런데 한정판이면 두 배 정도는 더 비쌀 텐데.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라이카는 나와 너무 먼 이야기라, 그동안은 아이쇼핑을 하면서 입맛만 다셨을 뿐이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한정판이면 가격이 약혼반지 이상으로 비쌀 수도 있다. 내가 과연 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을 수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걱정이 돼서 차안에 놓고 다니지 못할지도 모른다.

“저 인세 받았잖아요. 그리고 약혼선물이잖아요. 너무 부담가지지 마세요. 저는 동수씨가 목숨 걸고 번 돈으로 산 반지도 끼고 있는걸요.”

저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면서도 자꾸 카메라에 눈이 가는 내 모습이 웃겼다. 뭐랄까? 돈이 많아져도 궁상맞은 내 모습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 떨려서 잘 찍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 그래도 시연이가 번 돈으로 산 약혼선물이라고 하니까 잘 받을게. 고마워.”

“히히. 그럼 된 거에요. 참, 우리 집에는 언제 올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이번 주에 가려고. 그리고 약혼식 말이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부모님께 약혼식에 대해서 말씀드렸더니 당장 그러라고 하셨다. 그리고 조만간 손주 보러 다시 올라오신다면서 고향에 내려올 필요도 없다고 하셨다. 이제 시연이 부모님만 만나면 약혼식은 바로 진행할 수 있다. 10월 중순이면 중간고사 기간이라 시험이 끝나는 주 일요일에 하면 시간도 적당할 것 같았다.

“글쎄요. 전 약혼식이 처음이라.”

“하하하. 그럼 나는 약혼식이 두 번째고?”

“그러네요. 부모님께 물어봐야 하나?”

“결혼식은 몰라도, 약혼식은 시연이 네 뜻대로 하고 싶어서 그래. 혹시 생각해둔 것이 있나 해서.”

“전 그냥 빨리 약혼식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에요. 음. 그리고 정말 축하해줄 사람만 불렀으면 좋겠어요. 부모님하고 가까운 친구들만 불러서요. 복잡한 격식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아, 캐주얼한 복장으로 하면 어떨까요? 참가하는 사람들도 편한 복장을 입어야 진심으로 축하를 해줄 수 있죠. 격식은 결혼식 때 차려도 충분할 것 같아요.”

생각해본 적 없다고 하더니 술술 이야기가 나왔다. 안 물어봤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캐주얼한 복장? 그러다가 체육복이라도 입고 오면 어떡하려고?”

‘설마 남의 약혼식에 정말 그런 식으로 입고 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전에 대학선배가 학교 동문회관에서 결혼할 때, 정말 체육복을 입고 나타난 어이없는 후배가 있었다.

“그건 그러네요. 음. 드레스 코드를 정해주면 어떨까요? 아래는 청바지, 위에는 후드티. 이런 식으로 정해주는 거죠. 아아. 이러면 되겠다. 우리 사진이 들어간 후드티를 주문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약혼식장 입구에서 축하하러 온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거죠. 바지만 청바지로 입고오라고 하면 되겠네요. 동수씨 생각은 어때요?”

듣고 보니 괜찮은 생각이었다. 우리 둘의 사진이 들어간 후드티가 조금 오글거리긴 해도, 나 혼자 입는 것도 아니고, 참석하는 사람들이 모두 입으니 부끄러울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과연 부모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그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시연이의 기대에 찬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있으니 그냥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게 뭐 어렵다고. 그렇게 하자.”

“우와! 역시 동수씨가 최고에요. 고마워요. 동수씨.”

============================ 작품 후기 ============================

남편의 내연녀와 만나는 부인의 모습. 상상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제 나름대로 풀어보기는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실 지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 우중충한 외전이라 일부러 글의 앞에 보냈습니다. 마무리는 웬만하면 밝게 하고 싶네요. ㅎ

카메라에 관심 없는 분들은 ‘뭐야 대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이번 선물은 카메라를 좋아하는 작가의 사심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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