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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26화 (126/424)

00126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약혼식을 위해 정식으로 인사를 드린 다음날 나와 시연이는 한강으로 갔다. 나는 면허시험에 떨어졌지만, 다른 세 사람이 합격한 바람에 결국 중고요트를 구입했다. 오늘이 바로 그 요트가 오는 날이었다.

“여! 왔어? 시연이도 안녕.”

“안녕하세요. 재형 오라버니.”

우리가 도착하자 재형이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진이는 아직 이야?”

“아니. 낚싯대 챙기러갔어. 한강에서 무슨 낚시를 하겠다고. 그놈도 어지간히 낚시를 좋아하는 것 같아.”

“응? 벌써 배가 도착했어?”

“생각보다 일찍 왔더라고.”

“어디 있는 건데?”

“저기. 있잖아. 너희가 부탁한대로 배 이름도 YeoNi(여니)로 바꿔서 왔더라.”

재형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자 하얀색의 작고 귀여운 요트가 정박되어 있었다. 배 이름도 영문인 YeoNi(여니)로 깨끗하게 쓰여 있다. 이름은 시연이의 강력한 요청으로 그렇게 정했다. 친구들이야 배 이름이 뭐든 상관이 없다고 해서 별 어려움 없이 바꿀 수 있었다. ‘여니’는 ‘시연이’에서 ‘연이’를 부드럽게 발음한 것이다.

“우와! 정말 예뻐요. 그 중에서도 배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히히. 지금 타 봐도 돼요?”

“안 돼. 돼지머리는 없지만, 떡이랑 과일은 준비했거든. 이제 올 사람은 다 왔으니 간단하게 고사부터 지내야지.”

생각지도 못했는데, 재형이 녀석은 고사까지 준비했다. 종교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야 딱히 특정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 고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없다. 단지 그것을 맹신하거나, 너무 과한 금액을 들이는 것은 반대다. 어쨌든, 재형이 저 녀석은 용왕에게 안전운항을 기원하기 보다는, 많은 여자를 데려와도 별 탈 없기를 부탁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낚싯대를 가지러 간 형진이가 오자 우리는 재형이가 준비한 고사 상 앞에서 절을 했다. 그리고 어설픈 솜씨로 첫 운항을 시작했다. 제법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요트는 힘차게 한강을 가로질렀다. 운전대도 한 번씩 잡아보고, 준비해온 음식도 나눠 먹고, 쓸데없는 수다도 떨면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난다는 두물머리까지 도착했다.

두물머리는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씩은 들르는 곳이다. 자주는 아니지만, 새벽의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날이면 정말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처에 있는 요트정박장에 배를 대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야. 물길을 헤치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좋은데 말이야. 꼭 드라이브 온 기분이네. 가을이라 수영도 할 수 없고, 여름이라고 해도 한강에서 수영하기는 좀 그렇겠다.”

“그리고 2시간 넘게 운전하려니 지겹다, 좀. 엔진음도 생각보다 크네. 지난번 캐나다 갔을 때는 왜 몰랐지?”

“돛이라도 있으면 바람 타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파워보트라서 그런 재미도 없네. 풍경도 한강에서 보나, 강변도로에서 보나 뭐 그게 그거네. 사진을 찍으려고 해도 배에서 내려야 하니까, 결국 한 번에 수십만 원씩 기름을 뿌리며 드라이브를 온 거네.”

처음 한 시간은 신났다. 그런데 시끄러운 엔진음을 들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물길을 달리다보니 금방 지루했다. 캐나다에서처럼 바다에 풍덩 빠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강물 위에서 낚시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을 빼면 아무 것도 없었다.

예전에 256mb나 512mb짜리 MP3 플레이어가 유행할 시절 10기가짜리 MP3플레이어를 산 기분이 딱 이랬다. ‘너희는 많아봐야 1기가지, 난 10기가다.’라며 흐뭇한 기분으로 제품을 구입했는데, 막상 사용해보니 외장하드만 거대한 크기 때문에 불편해서 그냥 구석에 처박아뒀던 그때 그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배에서 내려 잠깐 구경 다닌 후, 돌아오는 배안의 분위기는 참 우중충했다. 처음 배를 탈 때는 서로 운전하겠다고 그러더니, 이제는 귀찮다고 미뤘다. 결국 우리 착한 시연이가 운전하려고 나서는 바람에 무면허인 내가 잠깐 운전대를 잡기도 했다. 한참을 운전해 처음 출발했던 잠실에 도착하자 큰 허무함이 느껴졌다. 왠지 내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형진이와 재형이의 이성 유혹용으로나 유용하게 쓰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Rrrr

첫 시승식이 끝나고, 그 허탈함을 달래기 위해 시연이와 재미난 데이트를 하려는데 윤 사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네. 아버님.”

“그놈의 아버님 소리가 이제 입에 착착 달라붙는구먼.”

“하하하. 부러우시면 아버님도 ‘동수야’라고 부르시던지요.”

“넉살하고는. 자네 지금 어딘가?”

“지금 시연이와 한강에 있습니다. 혹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일은 아니고 내가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깜박 잊은 말이 있어서 말이야. 전화라 하기는 그렇니, 시연이는 집에 바래다주고 스포츠센터로 좀 나오게.”

뭔가 또 심술을 부리시려나? 윤 사장님이 이번에는 무슨 엉뚱한 일을 꾸미실지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이젠 귀여우시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궁금해 하는 시연이를 바라봤다.

“아버님이 지금 얼굴 좀 보자고 하시네.”

“아빠가요? 무슨 일로요?”

“글쎄. 나도 그건 가봐야 알 것 같은데. 약혼식 때문에 뭔가 할 말이 계신 것 같기도 하고.”

“히잉. 그럼 오늘 데이트는 여기서 끝이네요.”

“어쩌겠어. 나야 앞으로 윤시연양 아버지께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이잖아.”

“그래도 좀 아쉽다.”

아쉬워도 어쩌겠는가? 나는 시연이를 집에 바래다주고 윤 스포츠센터로 차를 몰았다.

“빨리 왔네?”

“아버님이 저를 보고 싶으시다는데 빨리 와야죠. 그런데 무슨 일로.”

“중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윤 사장님은 평소처럼 심술궂은 표정으로 나를 보며 아리송한 말씀을 하셨다.

“약혼식 계획만 틀어지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아버님.”

“자칫하면 약혼식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는 일이지.”

“왜 그런 살벌한 농담을 하세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약혼식 취소? 하늘이 두 쪽 나도 절대 그럴 일은 없다. 누구 마음대로 취소를 하시려고! 뭔가 심술을 부리시려고 단단히 마음먹으신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간은 아니다.

“원래 말이야. 우리 윤씨 가문에 사윗감 후보가 생기면 항상 하던 일이 있지.”

“신고식 같은 건가요?”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어려운 일은 아니야. 장인이 사윗감과 함께 목욕탕에 가서 하나만 확인하면 돼.”

“네?”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 다른 집들은 건강검진결과를 요구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도 없잖아. 무슨 고약한 병에라도 걸렸는지, 아니면 혹시 거기다 이상한 장난질을 쳐 놓지는 않았는지, 그것만 확인하면 돼.”

말씀을 들어보니 나름 합당한 이야기였다. 심술이라도 부리실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애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분신에다가 구슬을 박거나, 이상한 링 같은 것을 달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내가 딸을 가진 부모라도 그런 남자는 좀 꺼려질 것 같다. 그냥 목욕탕에 같이 가자고 에둘러 말씀하셔도 될 것을, 괜히 표현을 저렇게 고약하게 하신다. 나처럼 눈치 빠른 인간이 아니라면 윤 사장님 사위노릇을 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시죠. 아들이 없으셔서 같이 목욕탕에 가신 적도 없을 텐데, 제가 시원하게 등도 밀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흥. 아들이 무슨 대수라고.”

저렇게 말씀은 하셔도 내 말이 그렇게 싫지는 않으신 것 같았다. 부모자식 사이라고 해도 동성끼리 가질 수 있는 유대감은 분명히 존재한다. 남녀차별 발언이 아니다. 아들만 있는 집의 엄마는 사이좋게 수다를 떠는 모녀가 부럽고, 딸만 있는 집의 아버지는 목욕탕을 가는 부자가 부러운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는 윤 사장님과 함께, 한때 내가 열심히 청소했던, 윤 스포츠센터의 지하 1층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 스포츠센터에서 운동을 안 해? 건강은 젊을 때부터 챙겨야 하는 법이야.”

“여긴 너무 멀잖아요. 제가 사는 오피스텔에 자그마한 헬스장이 있거든요. 새벽에 일어나 하루 1시간 이상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너무 염려마세요.”

“그런 손바닥만 한 헬스장에서 무슨 운동을 한다고?”

“에이, 시설이 중요한가요? 꾸준함이 중요하죠.

“그래도 직장에서 성공하려면 골프도 좀 배우고 그래야 할 텐데.”

목욕탕으로 내려가는 길에, 윤 사장님은 의외의 다정한 어투로 내 건강을 신경 쓰셨다. 내가 윤 사장님과 만나서 이런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제가 자주 안 보이니까 심심하신가 봐요?”

“누... 누가 심심하다고 그래? 싫으면 관두던가.”

다정한 어투가 낯설었던 내가 조금 장난스럽게 이야기하자, 금방 삐지신다. 정말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난 그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엽다고 느껴지는지...

“앞으로 주말 아침에는 운동하러 갈 테니, 너무 심심해하지 마세요.”

“얼씨구, 아주 어른을 가지고 놀아라. 이 녀석아.”

목욕탕에 도착하자, 윤 사장님은 당당하게 옷을 벗으셨다. 스포츠센터 사장님답게 건강한 20대의 상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남성의 상징 또한 적당히 우람하셨다. 어쩐지! 목욕탕을 같이 오자고 하실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나도 옷을 벗어야 하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으시니 괜히 쑥스러워 망설여졌다.

“왜 옷을 상의만 벗어? 부끄러워서 그래?”

“그게 좀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계시잖아요.”

“남자끼린데 뭐 어때? 크기 가지고 뭐라 그럴 생각 없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 허허허.”

원하신다면 벗기(?)는 하겠지만, 지금 가지고 계신 자신감에 상처나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나는 과감하게 알몸이 되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윤 사장님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고 말았다.

“이... 이봐. 마 대리.”

“네, 아버님.”

“정말 미안한데, 약혼식 없던 것으로 하자.”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다. 나는 병에도 걸리지 않았고, 이상한 것도 달지 않았다.

“그게 물건이야? 흉기지! 난 이 약혼 반댈세.”

헐. 이 사실이 소문나면, 나는 순식간에 해외토픽감이 될 수도 있다. 장난인지 진담인지 지금의 윤 사장님 표정으로는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게 무슨 흉기라고 그래요? 별로 안 커요!”

“저리 안 치워? 징그럽게 어딜 들이밀어?”

“흉기라고 말씀하시니까 그렇죠. 이걸로 절대 사람 못 죽여요.”

“누... 누가 정말 사람 죽이는 흉기래?”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아무튼 약혼식 없던 것으로 하자는 말씀 취소하세요.”

“못해.”

“자세히 보고 말씀을 하시라니까요. 이런 말씀 드리기는 참 거시기 하지만, 제 동생도 저랑 비슷한데 얼마 전에 조카까지 낳고 잘살고 있거든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윤 사장님을 붙잡고, 내 동생까지 팔아가며 설득을 했다. 그제야 피식 웃으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장난을 치셨던 모양이다. 아! 이런 능구렁이 같은!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리고, 드디어 서로의 등판을 밀어 줄 시간이 왔다. 나는 아까 당한 복수를 하기 위해 이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휴, 이 때 좀 봐. 평소에 자주 좀 밀지 그러셨어요.”

“아... 아파. 살살 좀 밀어.”

“좀 참으세요. 나이가 몇이신데 엄살이세요. 자꾸 그렇게 등을 움직이시면 더 아파요.”

“진짜 아프다니까.”

“가만 좀 계세요. 때가 자꾸 나오는데 어떡해요.”

나는 분노의 때밀이를 시작했다. 사실 윤 사장님의 등에서는 때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하얗던 등판이 새빨갛게 변할 때까지 구석구석 혼신의 힘을 다해 때를 밀었다.

◆ 시연이 집 안방.

노 여사가 윤 사장의 등에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등이 이 지경이 되었어요?”

“마 대리가 등을 밀어준다고 그래서 가만히 있었더니 이 꼴로 만들어 놨지 뭐야.”

“네? 결국 둘이 목욕탕을 간 거예요? 아들하고 목욕탕 가보고 싶다고 하시더니 결국 소원 푸셨네요. 그런데 마 서방이 당신 등을 왜 이렇게 만들었대요?”

“몰라. 고얀 녀석. 내가 장난을 좀 쳤기로서니 그걸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나.”

“무슨 장난을 쳤는데요?”

“별 것 없었어. 그냥 이 약혼 반댈세. 그랬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당신도 그 녀석 당황하는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하하하.”

“어유, 어유. 사위를 데리고 그렇게 소원하던 목욕탕에 갔으면 그냥 정겹게 지내다 나오면 될 것을. 쯧쯧.”

노 여사가 혀를 차도 윤 사장은 웃음을 멈추 수 없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흉기가 아니니 자세히 확인해보라고 조르던 그 모습을 노 여사에게 설명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이것만 올릴게요.. 휴식이 조금 필요해요. :(

생각보다 빨리 회복하면 한 편 더 올릴 수 있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세요. 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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