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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29화 (129/424)

00129  새 발의 피.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다음 날 우리 가족은 임신한 어머니를 위해 좋은 엽산, 철분 영양제도 구입하고 아직 배도 나오지 않았는데도 임부복을 산다고 법석을 떨었다.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조금 서운해 하시던 어머니도, 두 아들이 요란을 떨자 그제야 흐뭇해하시며 임산부의 위치를 만끽하셨다. 저녁까지 잘 대접하고 서울역에 가서 KTX가 떠나는 것까지 지켜 본 다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머니가 걱정이 됐다. 내가 가사 도우미라도 불러 드리겠다고 해도 아버지 식사는 당신이 직접 챙기셔야 한다면서 한사코 거절하셨다. 내가 여전히 로열티를 받는 것으로 알고 계셔서, 돈 잘 번다고 강조를 해도 요지부동이셨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몸이 무거워 지시면 그때는 억지로라도 가사 도우미를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부모님 두 분 다 서울로 모시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힘든 일이다. 아버지께서는 회사에서 정년퇴임식을 하시는 것을 정말 영광으로 생각하신다. 꼭 그 이유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포항에서 50년을 사셨는데, 갑자기 서울로 모신다고 해서 대번에 알았다고 하실 것 같지는 않다. 그곳은 두 분의 삶의 터전이라 설득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나중에 정년퇴임을 하신다고 해도 아버지 성격에 그냥 놀고 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 아버지께서 하실 만한 일거리를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지금 당장은 어떤 일을 찾아봐야 할지 감이 오지는 않는다. 그냥 프랜차이즈 식당을 마련해드릴까 싶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 중이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부모님이 혹할 만한 일을 꼭 찾아 가까이서 모시고 싶었다.

새로운 주가 시작 되었다. 지난주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된다. 목동 스포츠센터는 리노베이션이 끝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동지 호텔‧리조트는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다. 우리 회사 입장에서 스포츠센터 사업은 주된 업무가 아니다. 윤 스포츠센터와 합작을 하려고 했던 이유는 처음부터 동지 호텔‧리조트의 헬스클럽 정상화에 있었다.

우선 호텔에서 근무하던 강사진 중 업무 평가에서 하위 40%는 계약을 해지했다. 잔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호텔의 경쟁력 중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곳이 헬스클럽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족한 인원 중 절반은 이미 윤 스포츠센터에서 따로 교육을 받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새로 뽑아야 했다.

이번에 런칭행사를 하면서 언론의 평가가 좋아서 그런지 신규채용에 사람들이 많아 몰렸다. 그 많은 인원들을 모두 면접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입사지원서와 자기소개서 그리고 경력기술서를 가지고 옥석을 가리는 것만 해도 일이 엄청났다. 남들이 낸 자기소개서를 읽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경험해본 사람만 안다. 가끔은 정말 개성이 넘치는 글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패턴이다.

“정 주임. 읽을 만 해?”

“아니요. 머리가 지끈지끈 해요. 어떻게 이렇게 개성들이 없죠?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교육 덕분에 규칙적인 생활고 엄격한 자기 절제력이 있다. 취미는 대부분 독서 아니면 컴퓨터. 좌우명도 비슷비슷하고. 게다가 다들 어찌나 성격들이 좋은지 친구들이 넘쳐난다고 하네요. 마무리까지 비슷해요. D&Y휘트니스 클럽에 뼈를 묻겠다. 충성을 다하겠다. 몸 바쳐 일하겠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계속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니 아주 미쳐버릴 것 같아요.”

“나도 그래. 아직 수백 장이 남았다. 이걸 언제 다 읽을지 암담하기만 하다. 가끔 보면 ‘저는요.’, ‘했거든요.’, ‘~ 해여.’ 이런 인터넷 용어들을 남발하는 애들도 있다니까. 인터넷으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한 번이라도 찾아서 읽어봤으면 이러지는 않을 텐데. 깝깝하다. 깝깝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엉터리인 사람들도 많아요.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를 하려고 해도, 한 문장에 하나씩은 틀리니 읽다가 속에서 천불이 난다니까요. 준호씨라도 같이 했으면 좋겠는데.”

“신입이 무슨 신입을 뽑아? 처음부터 인사파트였다면 모를까. 윤 스포츠센터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하겠지?”

“그래도 한정석 과장님과 김동호 대리님이 절반을 가져가서 얼마나 다행인지.”

내용이 너무 천편일률적이다 보니 가끔 이렇게 수다를 떨어줘야 겨우 집중을 할 수 있었다.

Rrrr

한참 지원자를 분류하고 있는데 사무실 전화의 벨이 울렸다.

“감사합니다. 마케팅부 마동수 대리입니다.”

“저에요. 요즘은 많이 바쁜가 봐요? 동기 모임에도 거의 안 나오고.”

전화를 받으니 한때 내 섹스파트너였던 진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관계를 끝내고 나서도 가끔 동기들과 함께 웃으며 만나기도 했다. 최근에는 바쁘기도 했지만, 시연이가 점점 좋아지면서 무의식중에 피했을 수도 있다. 나도 내가 아주 쿨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응. 프로젝트 때문에 바빴어. 비서실에 있으니 잘 알 거 아냐?”

“동수씨가 요즘 아주 잘 나가고 있다는 소식은 듣고 있어요. 축하해요.”

“응... 고마워.”

이런 축하를 하려고 전화를 했을 리는 없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왜 전화했는지 안 물어봐요?”

“예전처럼 전무님이 갑자기 부르시거나 그런 건 아니지?”

“잠깐 얼굴 좀 봐요.”

진희가 갑자기 나를 왜? 나로서는 그녀의 말이 곤혹스러웠다.

“지금?”

“네. 아니면 퇴근하고 둘이서 따로 볼까요?”

“아냐. 나도 잠깐 쉬려고 했어. 어디서 볼까?”

“그때 그 계단에서요. 조금 이따 봐요.”

진희는 그렇게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때 그 계단이면 그녀와 마지막으로 섹스를 나누었던 곳을 뜻한다. 오만가지 생각이 났다. 그래도 일단 얼굴은 봐야 할 것 같았다.

‘시연아. 미안하다.’

나는 왠지 찔리는 양심 때문에 속으로 그렇게 사과를 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오랜만이에요. 동수씨.”

“오랜만인가? 그런데 왜 보자고 했어?”

“여기서 볼일이 하나밖에 더 있어요? 저 좀 안아주세요.”

말을 마친 진희가 내 품에 안겨왔다. 그리고 갑자기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왜... 왜 그래? 그만둬. 우린 이미 끝난 거 아니었어?”

나는 진희를 급히 밀어냈다. 약혼식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말 큰일 날 일이다.

“모르겠어요. 그날은 자존심이 상했는데, 이후로 자꾸 생각이 났어요. 당신과 나눴던 자극적인 섹스의 기억이 뇌리를 떠나지를 않았어요. 지금 해요. 네?”

“이러지마. 장진희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저다운 게 어떤 건데요? 저는 항상 섹스에 솔직했어요.”

“그거야. 우리가 관계를 유지할 때 일이지. 지금은 아무런 사이가 아니잖아. 그리고 네가 싫다고 그만 두자고 했잖아.”

진희는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냥 가버릴까 하다가 지금 일은 확실하게 매듭짓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녀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미안해요. 그냥 한 번 당신을 떠 봤어요.”

“뭐? 이런 걸 장난으로 하면 어떡해? 놀랬잖아.”

“장난은 아니었어요. 오늘 우연히 동수씨가 약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자 갑자기 당신이 보고 싶어졌어요. 미련이 남았을 수도 있고요.”

“내가 약혼한다는 소문이 회사에도 났어?”

시연이는 이제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는 소문이 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며칠 전에 양가 부모님의 상견례가 있었는데 벌써 회사까지 알려지다니 의외였다.

“원래 비서실 쪽은 소문이 빨라요. 게다가 동수씨와 약혼할 사람이 꽤 유명한 사람이더라고요. 누가 팬 카페에 들어갔다가 게시물에 실린 사진을 보고 동수씨를 알아봤데요.”

나도 나중에 시연이에게 들었다. 카페 운영자가 자기를 윤시연이라고 생각해주지 않아 커플사진으로 인증 받았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카페 대문 사진으로 쓰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20살 여자가 자기 연애를 자랑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미련이 남았다는 말은 무슨 이야기야?”

“그러게요. 연애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약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는 동수씨가 한 번은 저를 잡아 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정말 남자 입장에서는 여자를 이해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아니다’라고 했는데 기고, 기라고 해놓고는 ‘아니다’가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어쨌든, 조만간 약혼한다는 사람을 불러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뭔지 난감하기만 했다.

“내가 결혼까지 하자고 했는데 싫다면서?”

“농담처럼 지나가는 말로 은근슬쩍요? 세상 어느 여자가 ‘예스’라고 대답하겠어요? 동수씨는 그냥 친구처럼 편안한 여자를 원한 거였잖아요. 꼭 내가 아니어도 되는데 승낙을 해요. 여자는 말이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존재에요.”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 난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그건 이미 눈치 챘죠. 이 사람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구나. 그래서 그만 둔거죠.”

“그런데 다시 미련이 생겼다?”

“그냥 한 번 떠봤어요. 이 사람에게 혹시 여지가 있나 싶어서. 그런데 확실히 마음이 떠났네요. 아니지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던 건가? 호호호.”

진희는 조금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모습이 조금 쓸쓸해보였다.

“넌 좋은 친구 같은 여자였어. 그게 다야. 그리고 지금 만나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이쯤에서 확실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솔직한 내 마음을 알렸다.

“알아요. 잠깐만 가만히 있어줄래요?”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고 내 품을 꼭 안았다. 이번에는 차마 밀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원망스러워?”

“아뇨. 오히려 고마워요. 그리고 나도 이제 좋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당신 덕분이에요. 섹스 파트너였던 주제에 웃기는 말이지만, 당신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잘 살아요.”

진희는 품에서 떨어져 내 뺨에 살짝 뽀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냥 시연이와 약혼식에 차질이 생기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 시연이 방.

시연이는 약혼식에 사용할 슬라이드 쇼를 만들기 위해, 동수와 찍은 사진들을 열심히 편집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Rrrr

“어, 장희 언니네.”

(고장희 : 동지그룹 오너의 3남 1녀 중 막내. 주인공과 대학동기. 주인공의 절친인 차형진과 한때 연인관계였음. 시연이에게 야한 속옷과 거터벨트를 조언한 장본인.)

“네. 언니.”

“약혼식 한다는 문자는 받았어. 축하해.”

“히히히. 고마워요. 언니도 오실 거죠?”

“응? 나? 어쩌지 나는 못 갈 것 같은데.”

“왜요, 언니? 약속 있을까봐 미리 문자 보낸 건데.”

“그냥. 그럴만한 사정이 좀 있어. 미안해.”

“어쩔 수 없죠. 다음에 저 결혼할 때는 꼭 오셔야 해요.”

“그럼. 그때쯤이면 내게 다시 넘어오겠지, 뭐.”

“뭐가요?”

“아냐 아무것도. 내가 약혼식에는 못가는 대신 멋진 선물을 하나 해주고 싶은데.”

“선물이요?”

“응. 내가 조언해준 속옷과 가터벨트는 효과를 좀 봤어?”

“그... 그게 있죠. 효과를 봤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쯧쯧. 아직 못 자빠트렸구나?”

“언니!”

장희의 장난스러운 말에, 시연이의 얼굴이 금방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혼자만 있는 방이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호호호. 왜 놀라고 그래? 연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과정인데 부끄러워하지는 마.”

“그... 그래도요.”

“내가 그럴 줄 알고 준비를 해둔 것이 있지.”

“그게 뭔데요?”

“너 ‘왁싱’이라고 들어봤어?”

“네. 알긴 알아요.”

“혹시 겨드랑이 털 말고는 관리 안하는 것 아니야?”

“거기 말고도 해야 해요?”

“그럼! 당연하지. 다리털은 물론이고 팔에 있는 털도 관리해야 한다, 너.”

“그런 것도 해야 해요?”

통화를 하는 시연이의 눈빛이 점점 초롱초롱해졌다.

“물론이지. 원래는 거기도 관리를 해줘야 하지만, 넌 아직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괜한 오해를 받아서 좋을 게 뭐 있어. 호호호.”

“예? 거... 거기도 관리를 해요?”

“그럼. 나중에 비키니를 입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야. 내가 미국에 있을 때는 말이야. 위에만 살짝 남기고 전부 밀어버리는 게 유행이었거든. 한국에서는 아직 그 정도까지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그래서 말이야.”

서당 개에 불과한 장희의 왁싱 강의는 끝이 날줄 모르고 계속 되었다.

◆ 동수네 오피스텔 헬스장.

동수는 상의를 살짝 올리고 자신의 배를 거울로 확인하고 있었다.

“음. 슬슬 복근이 다시 드러나기 시작하네. 아, 요즘 닭가슴살만 먹고 살려니 힘들어 죽겠다. 이제 2주도 안 남았다. 힘내라, 마동수.”

============================ 작품 후기 ============================

지난 회를 조금 수정하느라 글이 늦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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