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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32화 (132/424)

00132  새 발의 피.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약혼식 당일 아침이 밝아왔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약혼식이 열리는 강남의 레스토랑으로 갔다. 우리 사진이 박힌 후드티를 나눠주려고 서 있는데, 내가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그리고 가볍게 하룻밤을 보냈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여자들까지 나타났다. 젠장, 이건 확실히 꿈이다. 이게 꿈이라는 것은 나도 아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의식은 있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는 이 엿 같은 상황은 처음 겪어봤다. 남들이 가위에 눌려봤다고 실감나게 이야기를 해도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별로 와 닿지 않았었는데, 하필이면 약혼식 당일에 이런 지랄 맞은 경험을 하게 될 줄은 꿈에라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위에 눌리면 손가락부터 천천히 움직이라는 친구의 조언이 생각났다. 그 친구 말로는 자신은 가위 눌리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유체이탈을 하는 듯한 경험이라나 뭐라나. 그 이야기를 들을 때는 시답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의식을 손끝으로 보낸다고 노력은 해봐도 쉽지가 않았다.

설마 재수 없게 하루 종일 가위에 눌려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내가 약혼식에 나타나지 않으면 시연이가 얼마나 슬퍼할까? 그런데 요망한 나의 분신은 시연이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묵직하게 변했다. 응? 순간 가위에서 벗어날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귀여운 유두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나의 분신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바지를 당장이라도 뚫을 듯한 기세로 분기탱천하며 그곳이 우뚝 섬과 동시에 가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야한 생각으로 가위를 이겨낸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

“휴. 이게 좋은 징조야, 나쁜 징조야. 거참 아리송하네.”

나와 잤던 여자들이 등장하는 꿈과 가위를 눌린 것은 왠지 찝찝했는데, 결국 그런 위기(?) 조차도 시연이를 통해 극복했으니 좋은 의미 같기도 했다. 가위까지 풀어주는 그녀! 전지전능한 ‘여느님’이 바로 내 약혼녀 윤시연이다.

간단하게 세수만 하고 지하 1층에 있는 헬스장으로 내려갔다. 아이팟 터치에 이어폰을 연결해 노래를 플레이하고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똥폼을 잡고 있지만 내가 듣는 음악의 대부분은 3~4년 전의 구닥다리 노래들이다. 이상하게 직장인이 되면서 최신곡들과는 결별을 하고 말았다. 군대에서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봤던 음악방송들 대신 버라이어티 쇼가 더 재미있어졌다.

‘(챔피언) 소리 지르는 네가 (챔피언) 음악에 미치는 네가 (챔피언) 인생 즐기는 네가 (챔피언) 네가 (챔피언)네가 (챔피언) 소리 지르는 네가 (챔피언) 음악에 미치는 네가 (챔피언) 인생 즐기는 네가 챔피언~’

러닝머신 위에서 열심히 뛰는 동안 나의 구닥다리 노래 중 하나인 싸이의 ‘챔피언’이라는 노래가 신나게 흘러나왔다. 나는 속으로 열심히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러닝머신의 속도를 올렸다.

‘그래 내가 챔피언이다. 윤시연과 약혼하는 내가 진정 우리나라의 챔피언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미친 듯이 달리고 나니 찝찝했던 꿈들은 상의에 흥건하게 배인 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몸과 마음이 모두 개운해지자 비로소 약혼식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새신랑의 기분이 꼭 이렇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설레고 흥분됐다.

우유와 빵으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미리 예약해둔 숙대의 미용실로 갔다. 결혼식을 할 때는 남자도 약간의 화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정도로 요란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헤어 디자이너는 내 요구대로 가볍게 머리를 다듬고 왁스로 마음에 드는 머리모양을 만들어 줬다. 다행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평소보다 몇 살은 젊어보였다. 어젯밤 자기 전에 마스크 팩을 한 효과를 본 것 같다. 10살이나 나이차이가 나다보니 아무래도 부담이 갔었다. 뭐, 이 정도면 나도 잘 생긴 것 같다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미용실을 빠져나왔다.

어제 도착해서 동생 집에서 주무신 부모님을 모시고 강남에 있는 약혼식장으로 향했다. 약혼식이 열리는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예쁘게 꽃단장을 한 시연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단순히 하얀색 후드티를 입고 있을 뿐인데 그녀의 모습을 보는 내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동수씨. 히히히.”

‘호호호’라고 웃는 연습을 한다더니 여전히 ‘히히히’라고 웃으며 내 품에 안겨왔다. 양가 부모님이 계신 자리에서 이렇게 과감하게 안기자 윤 사장님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시며 헛기침을 하셨다.

“어른들도 계신데 여기서 이러면 좀 그렇지 않아?”

“잠시 만요. 잠깐만 이렇게 안겨 있을게요. 어제 꿈을 꿨는데, 동수씨가 약혼식장에 안 나타나는 게 아니겠어요? 꿈속에서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이상한 꿈 하나 때문에 오전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고요. 히잉.”

시연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녀도 나처럼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 나는 품에 안겨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시연이의 몸에서 싱그러우면서도 매혹적인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내 품에 안겼는데, 나는 아침에 상상했던 그녀의 가슴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기서 이러면 정말 곤란했다.

“시연아. 이제 진정하고, 그만 손님 맞을 준비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시연이를 떼어놓으려고 하는데 그녀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동수씨. 자꾸 뭔가가 제 배를 콕콕 찔려요.”

시연이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붉혔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나는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와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일단 말썽꾸러기 나의 분신부터 진정시켜야 했다. 거울로 보니 청바지지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결혼한 내 친구 중 한 명은 결혼식 당일 예쁘게 단장한 신부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신부 대기실에서 그녀를 덮치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었다고 했다. 그 바람에 결혼식 내내 엉거주춤하며 우스운 꼴을 선보였었는데, 내가 지금 그런 상황이 되니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동수야. 정신 차려라. 약혼식장에서 개망신 당하지 않으려면.”

나는 심호흡을 하며 내 마음과 몸(?)을 진정시켰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부모님들도 우리가 준비해둔 후드티로 갈아입으셨다. 하얀색 티에 예쁜 문구가 들어가고 팔에는 검정색 줄무늬를 넣어 포인트를 준 옷인데, 시연이가 직접 디자인해서 그런지 무척이나 그 옷이 마음에 들었다.

“뭐야. 마수리 옷까지 준비했어?”

태어난 지 거의 두 달이 되어가는 조카 마수리도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그럼요. 오늘 참석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어야죠. 마수리가 입는 옷이라 특별히 세탁까지 해서 가져왔어요. 나 잘했죠?”

조카가 입을 옷까지 챙기는 센스 있는 시연이가 고마웠다. 조카 녀석은 큰아빠가 약혼식을 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귀여운 후드티를 입고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식 도중에 마수리가 깨서 울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동생 내외에게, 나는 조카가 펑펑 울어도 괜찮다며 꼭 데리고 오라고 했다. 남의 잔치에 함께 온 아이가 운다면 흉이 될 수 있어도 마수리는 남이 아니라 내 핏줄이다.

“그래. 아주 잘했어. 기특해.”

“헤헤. 그럼 기특하다고 머리 한 번만 쓰다듬어 줘요.”

그녀는 오늘따라 유달리 애교가 많아졌다. 나는 방싯 웃는 시연이를 바라보며 곰 발바닥을 닮은 솥뚜껑만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후 우리 약혼식에 초대한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나와 시연이는 입구에서 손님을 맞으며 준비한 후드티를 나눠줬다.

“와.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이렇게 입고 약혼식을 하는 거야?”

“하하하. 좋잖아. 너희들도 약혼식 온다고 불편하게 정장입지 않아도 좋고.”

“어디보자. 오! 옷이 예쁘네. 나는 너희 사진이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티셔츠를 민망하게 어떻게 입나 걱정했는데 이정도면 평소에 입고 다녀도 되겠다.”

“꼭 그렇게 해주세요. 형진 오라버니. 저희가 드린 옷을 입고 외출하시면 금방 좋은 여자 친구 생길 거예요. 호호호.”

“지금 입으면 바로 생기는 거야? 오늘 만날 여기 오는 사람들은 전부 시연이 친구들이잖아. 그럼 나도 10살 어린 여자 친구가 생기는 건가? 하하하. 이거 갑자기 기대되네.”

“제 친구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자리 한 번 마련할게요.”

“오늘은 약혼식 말고 시연이 친구들 얼굴이나 열심히 살펴야겠네. 그리고 동수야. 대강 좀 웃어라. 입 찢어지겠다. 결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실실거리면 나중에 두 사람이 결혼할 때는 어쩌려고 그러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여 들어가. 그리고 괜히 시연이 친구들에게 찝쩍거리면 죽는다.”

나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형진이에게 경고를 하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형진이와 재형이는 무슨 짓을 벌일지 예측하기 힘든 녀석들이다. 여전히 가벼운 만남만 즐기고 다니는 친구들인데, 혹시라도 시연이의 친구를 가볍게 만나서 상처를 주면 곤란하다. 나도 예전에 친구 애인의 친구를 그렇게 가볍게 만난 적이 있어서 왠지 마음이 불안했다.

“안녕하세요. 시연이 친구에요. 우와. 시연이 말처럼 정말 곰 같으시네요.”

형진이를 보내고 나자 이번에는 시연이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한창 발랄할 20살의 여자아이들이 여러 명 등장하자, 그녀들의 수다로 약혼식장은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그런데 시연이는 친구들에게 나를 곰 같다고 소개를 했단 말이지. 그녀라면 분명 칭찬이라고 했을 것 같은데, 그게 정말 칭찬인지는 헷갈렸다.

“곰이요? 이왕이면 잘 생긴 곰이라고 해주세요. 하하하.”

“그런데 뭐라고 불러야 하지. 오빠라고 부르기는 너무 나이가 많고, 시연이와 사귀는 사이인데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호호호.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끙. 시연이 친구들은 내 친구들보다 더 짓궂게 장난을 쳐왔다. ‘아저씨’라. 남자들에게 정말 불공평한 명칭이 바로 ‘아저씨’다. 총각과 처녀처럼 아저씨도 원래 아줌마와 대칭되는 호칭이다. 미혼인 여자들은 ‘아가씨’라는 좋은 호칭이 있지만, 남자들에게는 적당한 호칭이 없다. 그냥 무조건 ‘아저씨’다. 군인 아저씨, 경찰 아저씨. 세상은 온통 아저씨 천지다. 심지어 군인들도 자기 부대가 아닌 사병들은 ‘아저씨’라고 통칭한다. 에잇, 그놈이 아저씨 소리.

“야, 너희들! 우리 동수씨가 어딜 봐서 아저씨야? 이렇게 귀엽고 멋진 아저씨 봤어? 오빠가 이상하면 그냥 오라버니라고 불러. 그게 이상하면 ‘동수씨’라고 하던가.”

흠. 시연이가 나서서 뭔가 정리를 해줬는데, 왜 나는 더 부끄러워지는 걸까? 귀엽고 멋지다는 말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녀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남들에게는 그냥 곰처럼 보일 테니, 시연이의 말은 어떤 설득력도 없어보였다. 그러니 그녀의 친구들이 저렇게 얼굴이 빨개져가며 웃음을 참는 것이다.

“동수씨... 으윽. 이건 너무 느끼하다, 얘.”

“동수 오라버니. 다음에 우리들 밥 한 번 사주 세요. 시연이는 빼고 오셔도 되요. 호호호.”

시연이 친구 한 명이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다른 친구들의 옆구리를 찌르며, 우리가 주는 후드티만 받고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눈빛만으로 친구들을 제압하는 시연이의 모습은 그녀의 고등학교 생활이 그리 조용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줬다.

“시연아.”

“네. 동수씨.”

“어떻게 하면 눈빛하나로 애들을 제압할 수 있어?”

나는 그녀를 보며 장난스러운 질문을 했다.

“네? 눈빛으로요? 설마요. 금방 약혼식을 시작하니 먼저 자리부터 잡은 거겠죠. 호호호.”

음. 저 어색한 웃음은? 갑자기 시연이의 고등학생 시절이 궁금해졌다. 내게는 한없이 사랑스럽지만 가끔 발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꽤나 왈가닥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왈가닥이라고 해도 그녀는 사랑스러운 왈가닥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윤시연은.

◆ 200X년 OO 여고 옆 공터.

교복 치마에 체육복을 입은 시연이가 멋지게 날라차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길질에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하나가 쓰러졌다. 시연이는 착지와 동시에 우아한 뒤돌려 차기로 옆에 있는 다른 여학생의 등을 무자비하게 찍어 내렸다. 잠시 후 공터에는 시연이와 같은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들만 멀쩡하게 서 있었다.

“꿇어!”

시연이의 고함에 쓰러진 여학생들이 그녀 앞에 우르르 몰려와 무릎을 꿇었다.

“너희들 내가 이야기했지. 우리 학교 애들 돈 뺐지 말라고. 내 말이 우스워?”

“아... 아니.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시연이의 옆 학교 여학생들은 재수없는 윤시연을 혼내주기 위해 꽤 벼르고 나왔다. 다른 학교에서 싸움 꽤 한다는 여학생까지 섭외했지만, 그녀 앞에서는 바람 앞에 낙엽처럼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나가떨어져 버렸다.

“한 번만 더 애들 괴롭히고 돈 뺐어봐. 가만 안 둘 거야. 가자 얘들아.”

시연이는 무릎 꿇고 사정하는 다른 학교 여학생들에게 경고를 하고 돌아서며, 흐트러진 깻잎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서초에 있는 OO여고의 공부 짱, 싸움 짱 윤시연. 그녀의 이름이 그렇게 서서히 주변 여고에까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 이 모든 내용은 윤시연양의 친구인 A모양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해요..;;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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