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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33화 (133/424)

00133  새 발의 피.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약혼식장은 아담하고 예쁜 곳이었다. 한쪽 벽은 레스토랑에 딸린 소박한 정원이 내다보이는 유리문으로 꾸며져 있는데, 유리문 바로 곁에는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서있었다. 야외에서 가을의 풍취를 느끼면서 약혼식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테이블 위에 하얀 천을 얹고 그 위에는 여러 가지 가을꽃으로 장식을 했다. 주변에는 알록달록한 풍선과 우리가 데이트하면서 찍었던 사진들이 작은 액자와 함께 벽에 걸려 있었다. 동지랜드와 광릉수목원, 파주의 평화누리공원 그리고 100일 이벤트와 함께 갔던 식당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자 그녀와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홀의 가운데는 귀엽게 만든 케이크가 자리했고, 케이크 위에는 예쁜 원피를 입은 소녀와 연미복을 입은 곰 한 마리가 왈츠를 추는 모양으로 장식되었다. 케이크뿐만 아니라 홀 내부 곳곳을 작은 곰 인형으로 채운 모습을 보니, 그녀가 나보다 곰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약혼식이 열리는 홀을 둘러보니 마음이 흐뭇했다. 이 공간속의 모든 것은 모두 시연이의 손길이 닿았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시연이 다운’ 풋풋하고 아기자기하면서도 예쁜 약혼식장으로 꾸미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얼굴도 예뻐, 똑똑해, 글도 잘 써, 운동도 잘해, 감각도 좋아, 요리도 잘... 음, 이건 일단 패스. 어쨌든, 까도까도 계속 나오는 다재다능한 시연이의 모습이 경이로웠다.

“잠시 후 약혼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자리에 앉지 않고, 자기 사진 구경하느라 바쁜 약혼남은 그만 좀 실실거리고 자기 자리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약혼식 진행자는 현우가 맡았다. 이상하게 진행하면 ‘네 결혼식 때 내가 사회 맡아서 복수할 거야.’라고 협박을 했는데, 벌써부터 장난질이 시작이다. 이렇게 나오면 자기 결혼 때 내가 어떻게 나올지 알만한 녀석인데, 함께 온 김수현 대리 때문에 조금 오버하는 것 같았다.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는 청바지에 우리가 나눠 준 후드티를 입은 김수현 대리의 모습은 확실히 평상시와는 달랐다. 항상 검정색 정장을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그런 모습이 낯설면서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처음으로 사람같이 보였다. 꼭 저런 캐주얼이 아니더라도 검은색 정장만 벗어버리면 상당한 미녀일 텐데, 왜 만날 우중충한 정장만 고수하는지 그녀의 심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 이제 주인공인 덩치 크고 사나운 곰까지 자리에 잡았으니까 약혼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약혼남은 진행자를 그만 노려보시고, 예쁘게 꽃단장을 한 약혼녀를 바라보세요. 저는 우리 수현씨의 눈빛을 모두 담기도 벅찬 남자입니다. 하하하.”

어휴. 저걸 그냥.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현우 녀석이 불안불안해 보였다. 김수현 대리는 그만 의식하고 제발 아무 사고 없이 약혼식을 진행했으면 좋겠다. 우리 팀장님도 부르지 않은 자리에 현우의 애인 자격으로 참석 할 정도면 마음을 완전히 열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아직도 저렇게 잘 보이고 싶어, 중2병에 걸린 것처럼 오버하는 모습이 한심하고 어이가 없었다.

문제는, 저 시답지도 않은 농담 따위에 ‘까르르’하고 웃는 시연이 친구들이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을 흘리는 시기는 끝나고, 이제 낙엽위에 구르는 이슬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시기가 된 것인지 마냥 웃으며 호응을 해줬다. 그러면 그럴수록 김수현 대리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이 나서 주접을 떠는 현우가 불쌍하기까지 했다. 질투하는 김수현 대리라. 약혼식만 아니었으면 킬킬거리며 웃을만한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문득, 혼자 앉아 있는 태균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희씨와는 잘되는 것 같았는데, 함께 오지는 않았다. 아까 잠깐 대화를 나누었을 때 조만간 결혼 날짜를 잡아 올해 안에 식을 올릴 거라고 하니 헤어진 것도 아니었다. 아마 선희씨 입장에서는 우리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안타까우면서도 그녀의 입장이 이해는 갔다.

두 사람이야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해도, 그녀의 동거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까지 편하게 볼 수 있는 입장은 아닌 것 같았다. 선희씨가 아니라 다른 어떤 여자라도 그런 상황을 겪고 나면 우리가 꺼려질 만하다. 그런 비슷한 일 때문에 결국 연락이 끊겼다는 사람도 있으니 태균이와 우리가 그렇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다. 우리가 찾아가 그녀와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하하. 선희씨 우리는 그때 일 모두 잊었습니다. 그러니 편하게 대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말하며 그녀를 설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문제는 선희씨가 풀어야 할 숙제다. 이건 착한 그녀의 성격과는 다른 문제다. 자신이 그때의 일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이상 우리가 계속 불편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태균이와 연락이 끊긴다고 해도 그녀석이 여전히 우리들의 소중한 친구지만, 그래도 서로 밝게 웃으며 만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다음 순서는 두 사람의 추억이 담긴 슬라이드 쇼를 관람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윤시연양이 직접 만든 영상으로, 그녀의 말에 의하면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인 장면도 담겨있다고 합니다. 많은 기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마어마하게 충격적인 장면? 그건 대체 뭐지? 우리가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 둔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뒷골이 땅기면서 불길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띠리리링.

맑고 경쾌한 음악이 나오면서 시연이가 준비한 영상이 등장했다.

‘1980년, 사랑스럽고 멋진 남자 마동수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 글귀와 함께 나의 백일 사진이 등장했는데... 1살도 안 된 갓난아기였던 내가 고추를 드러내고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찍은 사진이었다. 맙소사. 이 사진은 어머니의 도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향집에 고이 숨겨둔 나의 올누드(?) 사진이 이렇게 사람들 앞에 공개되다니, 이럴 수는 없다.

나는 험악한 눈으로 어머니를 노려봤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본척만척하며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계셨다. ‘나는 임산부니 건들지 마라.’라는 뜻 같았다. 뱃속에 아기를 임신하고 아들 약혼식에 참석하셨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남사스러운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는지. 역시 우리 어머니다웠다. 어머니는 포기하고 옆에 있는 시연이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자기가 만든 영상을 뿌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가 더 남은 표정이었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윤시연 때문인지 이 남자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줄줄이 등장하는 나의 어릴 적 사진은 온통 울거나, 사고치고 벌을 서거나, 어딘가가 다쳐 붕대로 상처부위를 감싸거나 하는 모습뿐이었다. 사기꾼 윤시연. 저런 찌질한 사진 말고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찍은 좋은 사진들도 많았는데, 자신이 세상에 없을 때의 나는 불행했음을 강조하려고, 나오는 사진마다 내 몰골은 처참하기만 했다.

‘1990년 예쁘고 귀여운 윤시연이 세상에 태어나다.’

얼씨구, 이젠 자화자찬까지. 뭐, 진짜 예쁘고 귀여우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글귀와 함께 등장하는 시연이의 사진은 전부 귀엽고 깜찍한 사진들이었다. 그녀의 누드(?)사진? 그런 건 당연히 없었다. 그런 사진이 있었다면 내가 먼저 없애버렸을 것이다. 이제 이 세상에서 그녀의 누드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한사람뿐이다.

‘우리의 첫 만남. 까까머리 복학생 마동수와 중학교 1년인 윤시연의 사랑은 그때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의 사진이 지나가자, 제대를 하고 찍은 스포츠형 머리의 내 사진과 중학생 교복을 입은 볼이 통통한 시연이의 모습이 등장했다.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시커멓게 탄 얼굴과 짧은 스포츠형 머리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험악해 보였다. 거기에 비해 시연이의 모습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이것 또한 사기다. 나는 제대하자마자 군대 선임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기 때문에 그녀와의 첫 만남은 저런 처참한 몰골이 아니었다. 자신의 귀여운 모습을 유난히 강조하려는 시연이의 음모가 분명하다. 그녀에게 이런 사기꾼 기질이 숨어있을 줄이야!

‘운명. Destiny.’

휴. 그래도 다행히 운명이라는 글귀와 함께 등장하는 사진은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벽에 걸린 액자에는 없었던, 우리 두 사람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예쁘게 편집되어 소개되자 시연이 친구들이 ‘꺅, 꺅’ 소리를 지르며 영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운명.

흔히들 사랑은 운명이라고 한다. 사실 세상의 모든 만남은 운명이다. 50억 인구가 사는 지구에서 하필 한국에서 태어나 인연을 맺는 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확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이 운명이니 하는 소리는 그동안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만든 영상을 보면서, 우리 두 사람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내가 만났던 다른 여자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특별함을 시연이에게 느꼈다는 자체가 운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버지는 고3 생활이 끝나는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19살의 나이로 군대에 입대했다. 거의 3년간(77년에 군 복무 기간이 33개월로 줄어듦.)의 긴 군 생활을 마치고 포항으로 내려가는 버스에 올랐다. 그 옆 좌석에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대구에서 공장을 다니시던 어머니가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휴가를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같은 날 제대한 동기와 술을 좀 많이 마시는 바람에 하루 늦게 버스를 타서 이뤄진 만남이다.

어머니는 얼마 전 군에서 제대한 친오빠 생각이 나서 아버지가 참 안쓰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는 혼자 드시려고 깠던 삶은 달걀을 아버지에게 건넸다. 아버지는 그 순간 감동을 받으면서 엄청난 오해를 하고 말았다. 어머니가 건넨 달걀은 그냥 달걀이 아니었다. 무려 껍질을 손수 깐,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달걀이었다. 그래서 ‘이 여자가 내게 관심이 있구나. 여자는 손맛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어쩜 달걀을 이렇게 예쁘게 깠을까. 잡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섰다. 부모님의 결혼날짜와 내가 태어난 날짜를 계산해보면 좀 애매하다. 왠지 속도위반일 것 같은데 어머니는 절대 아니라고 하셨다. 내가 별나서 남들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났다나? 자식 된 도리로 마지못해 그 말씀을 믿어드린다.

아버지가 군 동기와 술을 드시지 않았다면, 큰 외삼촌이 비슷한 시기에 제대하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계란을 까지 않고 그냥 드렸다면, 아버지가 그 계란을 받고 오해하지 않았다면 나와 동생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운명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연인과 부부는 그런 인연을 가지고 만났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라며 터부시했다. 생각해보니 마음가짐의 차이 같았다. 남들 다 하는 연애 또는 결혼이라며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특별할 것 없는 삶이 되고, 남들이야 어쨌든 우리는 우리만의 운명으로 만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삶은 특별해지는 것은 아닐까?

시연이가 만든 영상을 보면서 나는 예전에 봤던 영국의 어느 부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로에 대한 사랑은 이미 식어버린 부부는 하루하루를 그냥 마지못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부인이 큰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자신의 부인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그러자 식었던 사랑의 감정이 거짓말처럼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어느 영화 속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기자가 신문에 실어 알려진 것이다. 그게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그녀를 내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시연이는 평생 소중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조금 부끄러운 어린 시절 사진만 올려서 얄미워지려고 했는데, 봐주기로 했다. 그녀는 내 운명이라고 되뇌면서.

◆ 시연이 방.

“네. 어머님. 사진 잘 받았어요. 그런데 사진을 왜 이렇게 많이 보내주셨어요? 아, 이제 동수씨 사진은 제가 관리하라고요? 히히히. 감사해요, 어머님. 제가 소중하게 잘 관리할게요. 네. 그럼요. 네, 그럼 들어가세요.”

전화 통화를 끝낸 시연이는 동수 어머니께서 세권 분량의 앨범을 열고 동수의 어린 시절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동수의 귀엽고 천진난만하던 얼굴이 너무 예뻐서 혼자 키득키득 웃으며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그리고 유치원 시절의 동수 사진을 보는 순간 그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화를 참아야 했다. 시연이가 보고 있는 사진 속 동수는 유치원 생일로 보이는 행사에서 어떤 여자 아이에게 뽀뽀를 하고 있었다. 그런 사진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섯 장. 한 장도, 두 장도 아닌 다섯 장의 사진에서 각기 다른 여자아이와 뽀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동수씨가 첫 키스인데, 동수씨는 대체 몇 명의 여자와 뽀뽀를 한 거야. 바람둥이 동수씨 같으니라고. 흥. 복수를 하고 말거야.”

시연이는 곁에 있는 아무 죄도 없는 똥수의 머리통을 몇 대 쥐어박고,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원래 계획했던 슬라이드 쇼 구성을 바꿔, 새로운 소제목을 슬라이드 쇼 안에 집어넣었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윤시연 때문인지, 이 남자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134회 외전 마지막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이 모든 내용은 윤시연양의 친구인 A모양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했기 때문에 사실과 다를 수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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