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35 새 발의 피.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약혼식이 끝나고 부모님을 서울역으로 배웅해드린 다음 집에 왔다. 내일 MBA면접이 있어 책이라도 봐두고 가야 할 것 같아 시연이도 일찍 집에 들여보냈다. 집에 돌아와 휴대폰을 켰더니, 부재중 전화가 10통은 넘게 와있었다. 전부 약혼식에 참석했던 친구 녀석들 전화였다.
Rrrr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미안하다. 약혼식한다고 휴대폰을 잠깐 꺼두는 바람에 전화 못 받았다. 무슨 일이야?”
“너 고장희 기억하지?”
재형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갑자기 장희 이야기를 꺼냈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모른 척 통화를 계속했다.
“알지. 꼬장. 연락 끊긴지 9년 정도 됐지 않나?”
“응. 걔를 아까 네 약혼식장 앞에서 만났어.”
장희가 왜 갑자기 약혼식장 앞에 나타났지? 시연이가 오라고 말을 했는데 못 온다며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양심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약혼식장 앞에 나타나? 이 계집애가 무슨 생각으로 거길 온 건지 그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뭐? 살아있었어?”
“그러니까 말이다. 걔는 하나도 안 변했더라. 아니, 더 어려진 것 같아. 옷도 여전히 유치찬란하게 입고, 아무튼 반가워서 인사를 하는데 도망을 가더라니까.”
“도망을?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형진이가 미친 듯이 쫓아갔지. 거의 자동이더라. 걔들은 어떻게 변한 게 없냐? 대학 다닐 때도 그렇게 쫓고 쫓기더니, 만나자마자 그 짓부터 하는 걸 보고 어이가 없었다니까.”
“잡았어?”
“응. 그럼 그 짧은 다리로 어디를 도망가. 결국 잡혔지. 그래서 대낮부터 술 마시고 있다. 너도 나올래? 장희 얼굴도 볼 겸.”
그것 참. 영 불안불안하다. 동지랜드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내가 그 동안 장희를 만났다는 사실이 들통 날수도 있다.
“안 돼. 나 내일 면접 있는 거 알잖아. 거의 공부도 못했단 말이야. 지금이라도 책 좀 봐야지. 연락처라도 받아둬. 다음에 다시 얼굴 보게.”
“면접은 그냥 기본 실력으로 보는 거 아냐? 지금 공부한다고 그게 돼?”
“몰라. 그래도 어떡해. 그렇지 않아도 요트시험에서 떨어져서 망신당했는데, 이번에 MBA면접까지 떨어지면 시연이 얼굴을 어떻게 보냐?”
이건 정말 자존심 문제다. 여기서 떨어지면 시연이 뿐만 아니라 장학금까지 알아봐주신 교수님에게도 면목이 없다. 내가 약혼식을 끝내자마자 집에 들어와 책을 편 이유가 더 이상의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하하. 그건 그렇지. 여자 친구가 보는 앞에서 면허시험도 떨어졌으니, 이번에 또 떨어지면 약혼을 취소하자고 할지도 몰라. 그런데 그 MBA라는 거 말이야. 유학파도 많은데 쓸모가 있겠냐?”
워낙 많은 자격증들이 생겨나고 있어서, 웬만한 자격증으로는 명함도 내밀기 힘든 것이 최근 경향이다. 직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한다. 말하는 모양이 녀석도 여기에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국내 주요 대학의 MBA과정도 요즘은 조금씩 인정해주는 분위기야. 새로운 인맥이라는 게 생기잖아. 꼭 우리 학교 졸업생만 지원하는 것도 아니니. 명성에서 딸리면 인맥이라도 쌓아둬야지, 해외파랑 경쟁이라도 할 수 있지. 그런데 너도 관심 있냐?”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가는 것은 쉽지 않잖아. 네가 한다고 하니까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처럼 혹하는 마음도 생기고. 얼마 전에 유학파라고 한 녀석이 와서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니 배알이 꼴리기도 하고. 현우도 관심 있는 것 같더라.”
“미리 이야기 해줄 걸 그랬나. 올해는 이미 원서마감 끝났는데.”
“한 학기마다 새로 뽑을 거 아냐? 너 다니는 거 보고 괜찮다 싶으면 그때 지원해봐야지. 아무튼, 공부 열심히 해라. 이 몸은 낮술이나 계속 마시련다.”
“그래. 들어가라.”
전화를 끊고 나니 계속 장희가 마음에 걸렸다.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야 욕 좀 먹고 사과하면 끝날 일이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는 게 문제다. 혹시라도 형진이 녀석이 장희에게 마음이 남아있다면, 앞길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보자마자 그녀를 쫓아갔다고 하니 9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마음을 정리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형진이야 집안도 잘 사는 편이고 직업도 회계사라는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으니 웬만해서는 꿀릴 녀석이 아니다. 하지만 그 웬만하다는 게 중요하다. 장희 그 계집애 집안이 웬만하지 않으니 말이다. 재계 5위인 기업 오너 막내딸에게 사랑은 유치한 애들 놀음일 수도 있다. 언제 정략적으로 다른 집안에 팔려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휴. 형진이에게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정말 걱정이다, 걱정. 장희 고것은 왜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어.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냥 공부나 해야지.”
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펼쳐놓고 억지로라도 한 줄, 한 줄 읽어나갔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형진이에게 마음이 남아있어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면 옆에서 응원을 해줄 수밖에 없다. 친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형진이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하고, 다음날 면접을 보기 위해 학교로 갔다. 면접관으로 나서신 교수님들은 내가 얼굴을 아는 분들이라 마음이 놓였다. 저 분들이 사심을 가지고 나를 평가할리는 없다. 단지 교수님들의 성향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유리한지 판단하기는 쉽다. 모교 출신이 가지는 어드밴티지라고 할 수 있다.
“마동수군.”
“네, 교수님.”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자네가 느낀 마케팅은 어떤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나?”
“음. 마케팅은 결국 꼼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들 성향을 잘 파악해서 듣기 좋은 말을 하려고 했는데, 너무 편하게 생각했는지 내가 그동안 느낀 점을 사실대로 말하고 말았다. 이미 내뱉은 말이라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뭐? 꼼수?”
“네. 마케팅이란, 물건을 잘 포장해서 파는 행위와 같습니다. 경쟁사보다 품질이 떨어져도 멋진 광고와 교묘한 눈속임으로 충분히 그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 이 말이 아닌데 계속 엉뚱한 이야기만 계속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 말을 들은 교수님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마케팅을 가르치는 우리는 사기꾼이고?”
“그런 말이 아닙니다. 사실 마케팅이라는 것 자체가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만든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영학 자체의 목적도 그것입니다. 제가 처음 대학에 들어와 마케팅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으십니다. ‘북극에 가서 냉장고를 팔고, 아프리카에 가서 털옷을 파는 것이 마케팅의 궁극적인 모습이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제품을 사용하고 싶도록 ‘만들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문제는 실제로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흠.”
“교수님들은 순수한 의도로 연구하는 학문을 현장의 사람들은 악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일단 팔고보자. 제가 현장에서 일을 해보니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자주 접해서 ‘꼼수’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질문하신 내용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낀 마케팅이 어떤가라고 하셔서 그렇게 대답을 한 것이지, 절대 마케팅이라는 학문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계속 이야기해보게.”
“원래 핵이라는 것도 효율적인 에너지로 활용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었죠. 현장에서 제가 느낀 것도 비슷했습니다. 과대광고, 허위광고, 노이즈마케팅 등 어떻게든 소비자의 시선을 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는 마케팅의 일환이라며 자신들을 정당화 합니다. 교수님들의 순수한 의도가 변질되는 것이죠.”
사실이 그렇다. 학문과 현실의 괴리. 굳이 경영학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모습은 자주 접할 수 있다. 순수한 의료목적이던 성형이 이제는 보편화 되었고, 약자를 보호하라는 법대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이 고시를 패스하고 기득권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기도 한다. 나 또한 노이즈마케팅을 이용해 꽤 재미를 보기도 했다. 어쨌든, 교수님들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좋아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현실과 학문이 다르다는 말인데. 자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MBA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여기 지원한 이유가 뭔가? 현실과 다른 학문을 굳이 배울 필요가 있는가?”
원래 목적이야 간판 하나를 더 달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아까처럼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실수야 한 번으로 족하니까.
“그런 편법은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인터넷이 발전해서 더 이상 소비자들도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품질이 나쁘면, 금방 들통이 나버립니다. 아무리 꼼수를 동원해도 통하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야구 선수들은 시즌이 끝나면 겨울 동안 기초체력을 다지기 위해 구슬땀을 흘립니다. 슬럼프에 빠지면 기본기부터 다시 연습을 합니다. 기초와 기본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편법이 통하기 힘들어진 세상에서 MBA과정이 제게 그런 기초와 기본기를 가르쳐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 잘 들었네. 결과는 따로 통보할 테니, 그만 나가보게.”
교수님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시더니 그만 나가보라고 하셨다. 응? 이게 끝? 읽히지 않는 책을 꾸역꾸역 읽기까지 했는데, 이게 끝? 설마 마음에 안 드신 건가. 내 말을 모두 마쳤을 때 교수님들의 표정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이거 또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졌다.
“저... 질문을 겨우 두 개만 하셨는데...”
“더 질문을 했다가는 정말 우리가 사기꾼으로 몰릴 것 같아서 말일세.”
“어휴. 무슨 그런 말씀을.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하하하. 농담일세. ‘마케팅은 꼼수다’라며 당차게 말하던 포부는 어디가고 갑자기 소심하게 굴기는. 너무 염려 말고 나가보게.”
나는 교수님의 말씀에 꾸벅 인사를 드리고 면접장을 빠져나왔다. 하여간 이놈의 입이 방정이다. 가끔 보면 이렇게 되도 않는 실수를 하고, 그것을 수습하느라 정신없을 때가 있다. 이게 다 입바른 소리를 좋아해서 그렇다. 고쳐야지 하면서도 고치는 것이 쉽지 않다. 교수님 반응이 괜찮아서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시연이에게 또 한 번 망신을 당할 뻔했다.
약혼식이 끝난 일주일은 지독히도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제대를 일주일 앞둔 말년병장일 때도 이정도로 시간이 더디게 흐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간다.’는 말처럼, 아무리 더디게 가도 시간을 흘러 기다리던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아이스박스까지 구입한 나는, 전날 마트에 들러 이틀간 먹을 먹거리를 잔뜩 준비했다. 그뿐만 아니라 입고 갈 옷도 새로 사고, 구입하지 얼마 되지 않아 멀쩡할 게 뻔한 자동차도 점검 받았다. 심지어 속옷도 새로 샀다.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는지 나도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선지는 강원도. 가을 단풍이 울긋불긋 물든 숲속에 있는 펜션이다. 펜션 뒤에는 아름다운 동강이 굽이굽이 흘러 정말 그림 속에서 등장하는 멋진 별장의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숲속에 오직 하나의 공간만 있어서 누구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는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젠 하늘도 나를 질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정도 비로 오늘의 나를 막을 수는 없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시연이가 기다리는 남부터미널로 향했다. MT를 간다고 하고 떠나는 여행인데, 집 근처로 데리러 갔다가 시연이 부모님의 눈에 띠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휴대폰으로 비가 오니 터미널 안에서 기다리라는 문자를 보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운전을 했다. 한강 다리를 지날 때쯤 천둥번개가 치더니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와이퍼를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겨우 시야를 확보할 수 있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아, 정말. 가을에 무슨 비가 이렇게 와. 단풍들 다 떨어지겠네.”
남부터미널 앞에 차를 세우고 우산을 꺼내며 투덜거렸다.
“동수씨.”
우산을 쓰고 터미널 입구로 걸어가자, 비를 피해 고개만 빼꼼히 내민 시연이가 나를 반갑게 불렀다. 그녀의 좌우에는 제법 큰 가방이 하나씩 놓여있었다.
“짐이 왜 이렇게 많아? 내가 준비해 올 것 없다고 했는데.”
“하루를 묵고와도 여자에게 필요한 짐은 많아요. 너무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세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어서 차에 타자.”
나 또한 별로 필요 없는 것까지 차에 실어놨는데, 그녀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시연이의 가방을 어깨에 짊어지자 그녀는 내 팔짱을 끼며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100일 넘게 만나면서 한 번도 같이 우산을 써본 적이 없네요. 우산 하나로 함께 다니는 연인들을 보면 부러웠는데, 오늘 내린 비 덕분에 소원 풀었어요. 히히.”
“그래?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고마운 비였네. 자, 어서 타세요.”
조수석 문을 열어 시연이가 비에 맞지 않도록 우산을 씌우면서 차에 태웠다. 그리고 그녀의 가방을 뒷좌석에 내려놓고 재빨리 운전석에 올라 탄 다음 차를 출발시켰다. 드디어 강원도로 출발이다.
============================ 작품 후기 ============================
일이 좀 많아져서 연재속도가 조금 늦어질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