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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36화 (136/424)

00136  새 발의 피.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차에 탄 우리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을 지켰다. 평소에는 옆에서 열심히 재잘거리던 시연이도 차를 타고부터는 얼굴만 붉힌 채 조용히 앉아있었다. 아마 차를 타고 길을 떠나자 오늘 여행이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와 닿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라디오를 켜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긴장했는지 손에서 땀이 느껴졌다.

“손에 웬 땀이야?”

“따... 땀 아니에요. 아까 비가 와서 아직 손이 젖었나 봐요.”

“긴장돼?”

“아... 아니요.”

“토요일에 장희가 우리 약혼식장에 다녀간 거 알아?”

말은 아니라고 해도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그래서 장희 이야기를 꺼냈다. 두 사람이 만났으니 더 이상 쉬쉬할 필요가 없었다.

“네? 정말요? 그런데 왜 얼굴도 안 보고 갔어요?”

“그러게. 나도 이야기만 들었어. 장희가 왜 우리 약혼식에 오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아?”

“아뇨. 그냥 뭔가 사정이 있는 것 같기는 했어요. 이야기할 때 조금 이상했거든요.”

“예전에 형진이하고 장희하고 1년 반 가까이 사귀었어.”

“네에? 정말 두 분이요? 그런데 왜 헤어졌데요?”

“그걸 헤어졌다고 해야 하나? 형진이 군대 가고 갑자기 사라졌어. 그리고 9년 만에 나타난 거지.”

“무슨 사정이 있었겠죠.”

“그래 사정은 있었겠지. 혼자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혼자 오해하고 다시 돌아간 어처구니없는 사정도 함께 있었지.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 너무 바보 같은 일들이라 내 입으로 말하기도 싫다.”

“말해주면 안 돼요?”

“궁금해?”

“네. 너무너무 궁금해요.”

“음. 뺨에 뽀뽀해주면 알려주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내 곁에 다가와 뺨에 뽀뽀를 하고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봤다. 아까의 긴장했던 모습은 이미 사리지고 없었다.

“그게 말이야.”

나는 형진이와 장희가 사귀게 된 사연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재미있었던 에피소드와 장희가 했던 엉뚱한 오해에 대해서 이야기해줬다.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듣던 시연이는 그때부터 신이 나서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휴게소에 들러 삶은 감자로 출출함을 때우고, 영월에 있는 ‘김삿갓 주막’이라는 식당에 가서 곤드레 밥이라는 특산물로 요기도 한 다음 30분 정도 더 운전을 하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양옆으로 쭉 서 있는 가로수 길이 나왔다.

“은행나무 물든 것 봐요. 너무 예뻐요. 비만 안 왔으면 내려서 사진이라도 찍을 텐데 아쉽다.”

“숙소가 이 근처니까 내일 날씨 좋으면 다시 와서 찍으면 되지.”

“다 왔어요?”

“응. 내비게이션 상으로는 10분만 더 가면 나온다고 하네.”

꼬불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차를 몰고 들어가니 사진에서 봤던 예쁜 펜션이 알록달록한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구름 속에 숨어 화사한 분위기는 없었지만, 내리는 비 덕분에 짙은 색감의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줬다. 펜션의 내부도 예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멋들어진 원목가구들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파스텔 톤의 아이보리색 벽지가 내부를 아늑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동강이 내려다보이도록 설계된 탁 트인 테라스는 숲으로 둘러싸여 답답할 수도 있는 펜션의 청량제 같은 역할을 했다.

차에 있는 짐을 안으로 모두 옮기고 시연이와 함께 그녀가 가지고 온 노란색 우산을 쓰고 주변을 산책했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빗물과 흙이 섞여서 나는 특유의 비내음을 맡으니 마음이 풍성해지는 것 같았다. 시연이의 작은 우산 덕분에 우리는 더욱 몸을 밀착시키며 이곳의 가을 풍경을 즐겼다. 싱그러운 그녀의 체향이 비를 머금으면서 점점 진해졌다. 그리고 그 매혹적인 향기를 맡은 내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쏴아아.

비가 갑자기 억수같이 쏟아졌다. 좁은 우산 안에서 꼭 껴안고 있어도 맹렬한 빗줄기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산책을 그만두고 숙소로 돌아왔다. 빨리 돌아온다고 했는데 도착하고 보니 우리 두 사람은 이미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춥지? 잠깐만 있어봐. 보일러부터 켜야겠다.”

마른 수건으로 시연이의 젖은 머리와 얼굴을 닦아 준 다음 보일러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스위치를 몇 번이나 눌러봐도 전원 스위치 옆의 빨간 램프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방안의 전등 스위치도 눌러봤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갑자기 내린 폭우로 인해 누전이라도 된 모양이었다. 젠장, 조금 있으면 날이 어두워 질 텐데 큰일이었다.

“동수씨. 왜 그래요? 전원이 안 들어와요?”

“어... 그런 것 같은데. 잠깐만 누전차단기가 어디 있는지 찾아볼게. 보일러가 들어와야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 텐데. 잠시만 기다려 봐.”

“너무 걱정 말아요. 저, 이래봬도 아빠 닮아서 건강 체질이에요.”

시연이는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알통을 보이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그래도 모르잖아. 여벌 옷 가져왔지? 감기 걸리지 않게 그걸로 갈아입고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펜션 안 곳곳을 뒤지며 누전차단기를 찾아 헤맸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놈의 차단기는 보이지 않았다. 펜션관리자에게 전화를 했더니 건물 외부에 있다고 알려줬다. 정말 별의 별게 다 속을 썩였다. 잠깐 밖에 다녀오겠다고 말하려고 시연이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다가 침실 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침실로 다가가자 문틈사이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의 매혹적인 뒷모습이 보였다. 가늘고 길게 쭉 뻗은 다리와 탄력 있는 엉덩이 그리고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잘록 들어간 허리라인이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대로 문을 열고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고 싶은 충동을 참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펜션의 외부를 찾아봐도 누전차단기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건물 뒤편으로 돌아들어갔다. 그곳에는 건물과 붙어 있는 작은 창고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여러 가지 공구들과 보일러가 보였다. 보일러 오른쪽 위에 누전차단기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다가가 아래로 내려간 스위치를 위로 올렸다.

파바바박.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끄응. 아이고, 머리야. 응? 뭐야. 내가 기절을 했던 거야? 아우. 정말. 뭐 이런 거지같은 일이 생기냐. 까딱 잘못했으면 시연이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황천길로 갈 뻔했네. 휴.”

옷을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스위치를 만졌다가 순간적으로 감전이 일어난 것 같았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다시 누전차단기를 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창고 안이 너무 어두워 밖으로 나왔다. 내가 기절하고 꽤 시간이 지났는지 바깥도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시연이가 나를 걱정하고 있을 것 같아 서둘러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시연아. 나 왔어. 어디 있어? 시연아!”

펜션 안으로 들어와 시연이부터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현관에 있던 그녀의 노란색 우산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내가 걱정돼서 찾으러 나간 것 같았다. 날이 꽤 어두워졌는데 길이나 잃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전화부터 걸어보려고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아까의 감전사고 때문인지 휴대폰의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급하게 펜션을 빠져나와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비는 계속 거세게 쏟아져 내렸지만, 우산 들고 시연이를 찾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사방을 휘젓고 다녔다. 빗줄기는 더욱 사나워졌고,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빗물이 계속 눈앞에서 흘러내려 시야를 제대로 확보하기조차도 힘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빗물을 닦아내며 무작정 숲속을 내달렸다.

한참을 헤매다 아까 우리가 산책하던 오솔길에서 하얀 물체를 발견했다. 그곳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시연이었다. 어디서 넘어졌는지 옷은 흙탕물 범벅이었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동수씨! 흑흑. 어디 갔었어요. 으아앙. 동수씨. 걱정했단 말이에요.”

나를 발견한 시연이는 한달음에 내 품속으로 안겨와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미안해. 일단 숙소로 들어가자. 날이 많이 어두워졌으니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울먹이는 그녀를 겨우 달래고 숙소로 돌아왔다. 흙탕물로 몸이 엉망이 되어서 찬물로라도 씻어야 하는데, 시연이는 내 팔이 무슨 대단한 보물이 된 것처럼 꼭 붙잡고 도무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번쩍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이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까 찬물로라도 간단하게 씻어내자. 알았지?”

다정하게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아직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샤워기를 틀어 시연이 몸에 범벅이 된 진흙들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진흙탕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하얗던 옷은 누렇게 변했고, 옷 안도 진흙투성이였다. 단추를 풀어 그녀의 옷을 벗겼다. 아슬아슬하게 가린 작은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이는 얼굴만 살짝 붉힌 채 내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동수씨 때문에 완전히 망했어요.”

진흙을 다 씻어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다 닦아주자 마음이 진정이 되었는지 시연이가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투덜거렸다.

“뭐가 망해?”

“이 속옷 정말 마음에 들어서 산건데 엉망이 되어버렸잖아요. 동수씨에게 예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래? 그럼 지금부터라도 자세히 볼게.”

나는 일부러 음흉한 눈빛을 하며 속옷만 입은 그녀를 바라봤다.

“어... 어딜 봐요. 저는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까 따라오지 말아요.”

씻겨줄 때는 속옷 바람으로 가만히 있던 그녀는 나의 짓궂은 장난에 수건을 빼앗아 몸을 가리고 침실로 사라졌다. 시연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도 준비해온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찬물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 금방 개운해졌다.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보일러가 가동되지 않아서 그런지 실내 공기가 많이 차가웠다. 내 휴대폰은 감전으로, 시연이 휴대폰은 흙탕물 때문에 고장이 나서 지금 당장 어디로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다행히 이곳에는 벽난로가 있었고, 그 옆에는 마른 장작들도 수북이 쌓여있었다.

벽난로를 살펴보니 다행히 전기가 아니라 가스로 불을 붙일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버너처럼 생긴 곳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마른 작장을 올려놓았다. 잠시 후 장작에 불이 붙으면서 벽난로 주변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찼다.

“우와! 그 벽난로 정말 되는 거였어요?”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남방인지 원피스인지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옷으로 갈아입은 시연이가 벽난로에 불을 붙이고 있는 나를 보며 물었다.

“좀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지 그랬어?”

빗속에서 헤매고, 찬물로 샤워까지 해서 그런지 입술이 파랗게 변해있었다.

“이... 이상해요?”

“아니. 예뻐. 이리 와 앉아. 잠시만 기다려 침실에서 이불 가져올 테니.”

나는 시연이를 벽난로 앞에 앉히고 이불을 가져와 그녀의 몸에 둘러줬다.

“동수씨도 춥잖아요. 여기 같이 들어와요.”

“응. 알았어. 잠시만.”

나를 부르는 그녀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가방에 넣어둔 와인을 꺼냈다. 추울 때는 술을 조금 마셔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와인을 개봉하고 주방에 있는 잔을 꺼내 와인을 반 정도 채웠다. 펜션 안은 이미 어두워졌다. 은은한 빛이 나는 벽난로 앞에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개만 내밀고 있는 시연이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보였다.

“자. 와인 한 잔 마시면 몸이 좀 녹을 거야.”

그녀는 내가 건네주는 잔을 받은 다음, 그게 무슨 막걸리라도 되는 것처럼 한 입에 다 마셔버렸다.

“아! 맛있다. 히히. 동수씨도 얼른 이불로 들어와요.”

나는 비어있는 잔에 와인을 다시 채우고 시연이가 덮고 있는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녀의 체온 덕분인지 내 몸도 금방 녹았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그녀에게 녹아드는 것 같았다. 파르스름하던 시연이의 얼굴은 벽난로의 열기를 받아 빨갛게 익어 있었다. ‘타닥타닥’하는 장작 타는 소리가 빗소리와 어울려 새로운 하모니를 만들어 냈다.

이불 속에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와인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연이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진한 갈색 눈동자에 벽난로에서 나오는 은은한 불꽃이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불꽃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본능적인 욕망에 불을 지폈다.

============================ 작품 후기 ============================

내일이면 이번챕터도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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