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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39화 (139/424)

00139  뿌린 대로 거두는 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11월이 되니 날이 많이 쌀쌀해졌다. 보일러를 틀지 않고 잤더니 이불 속에서 나오기가 싫었다. 한참을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다가 아침 운동도 빼먹었다. 평소보다 많이 늦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고, 옷장에 처박아 둔 코트를 꺼냈다.

“에이, 이게 뭐야. 코트 때문에 양복까지 스타일이 죽네. 예전에는 이런 촌스러운 옷을 어떻게 입고 다녔냐. 백화점에 들러 코트나 두어 벌 사야겠다. 쯧쯧.”

출근준비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는데, 올 초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입고 다니던 코트가 갑자기 거슬렸다. 유행이 지났다기보다는 그동안 내 눈이 너무 높아진 것 같다. 입었던 코트를 침대 위에 던져버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아마 저 옷은 헌옷수거함에 버려질 것이다. 세련되게 변한 건지, 허세가 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확실한 것은 내가 변하긴 변했다는 사실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있는데 조 팀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부르셨어요?”

“응. 마 대리. 우선 거기 앉아.”

소파에 앉으라고 권하는 팀장님의 표정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네. 표정이 별로세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요?”

“응. 좀 애매한 일이 생겼어.”

“무슨 일인데요?”

“너, 제주도에 출장 좀 다녀와야겠다.”

“네? 갑자기 제주도는 왜요? 거기 면접은 석나련 실장님, 김수현 대리, 정 주임 이렇게 여자들끼리만 가기로 한 것 아니었어요? 여자들만 간다고 별 도움도 안 되는 김정화도 같이 간다고 하는 것 같던데.”

제주도에도 우리 회사가 운영하는 호텔‧리조트가 있다. 당연히 D&Y휘트니스 클럽도 운영한다. 지원자가 서울로 오기에는 거리가 멀어서, 이번 주에 우리 팀 직원들이 직접 내려가 면접을 보기로 했다.

“그 사람들 갈 때 같이 가서 뭐 좀 알아보고 와라.”

팀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다섯 장의 신상명세서를 내게 건넸다.

“전부 여자네요. 게다가 제주에 있는 우리 헬스클럽에서 일했던 사람들이고. 이게 뭡니까?”

“제주도는 윤 스포츠센터 직원들을 파견보내기가 힘들어서 계약해지를 한 사람들이 많지는 않거든. 그런데 우리가 계약해지를 통보하지 않은 사람 중에서도 그만 둔 사람들이 벌써 세 명 째야. 뒤에 있는 두 사람 있지? 내가 좀 더 알아보니까, 그 사람들도 최근 몇 달 동안 헬스클럽을 그만뒀고.”

듣고 보니 이상했다. 우리 호텔은 직원들 대우가 그렇게 박한 편은 아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나 그만뒀다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내막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가야호텔 짓일까요?”

“그걸 몰라서 널 보내는 거야. 한 번 알아보라고.”

“우리 호텔 사람들은 뭐하고요?”

“그냥 아무 문제없이 퇴사했다고만 이야기를 해. 게다가 호텔 내 헬스클럽이 D&Y휘트니스 클럽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다들 손 놓고 우리만 바라보고 있어.”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는 컨설팅을 해주는 외부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잖습니까. 자기네 일을 우리가 도와주는데, 당사자들은 그냥 손 놓고 있는 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호텔 담당하고 있는 마케팅 2부는요?”

“거기도 마찬가지야. 그쪽은 오히려 우리를 견제하는 분위기야. 자기네 일을 우리가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와! 하나같이 왜 그러냐.”

우리 동지 그룹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너무 경쟁과 성과를 중요시하다보니 자기 밥그릇 빼앗길까봐 걱정하는 부류들이 너무 많다. 같이 협동해서 일을 처리해도 무한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은데, 다른 팀에게 견제까지 받는 것은 정말 큰 문제다. 이제 전부 회장님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모래알과 같은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회사인데, 우리에게 어머어마한 특별상여금까지 지급했으니 다른 팀의 시기, 질투는 당연한 수순이다.

서울 본사 직원이 제주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그곳으로 내려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놈의 특별 상여금 때문에 분위기가 더욱 각박하게 변했다. 이러다 5년은 제대로 버틸지 걱정이 되었다. 윗선에 보고를 하면 마지못해 협조는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대로 된 조사는 기대하기 힘들고, 우리를 바라보는 다른 팀의 시선은 더욱 나빠진다. 결국 내가 내려가 봐야 한다는 소리다.

“미쳐 돌아가는 거지. 어쨌든, 내려갈 거지?”

“그래야 할 것 같네요. 다른 직원들은 면접 준비하기도 바쁠 테고, 준호는 아직 어리바리하니 갈만한 사람은 팀장님하고 저밖에 없네요. 짬밥에서 밀리는 제가 가야죠, 뭐.”

“하여간 엄살은. 내가 믿고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거 알면서 그래?”

“그런데 만약 조사해서 정말 가야호텔 짓이면 어쩌시려고요?”

“어쩌기는? 업무 방해로 고소라도 해야지. 너무 치사하잖아.”

“그놈들이 꼬투리 잡힐만한 일을 했을까요? 바보만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차라니 가야호텔 짓이면 편하다. 꼬투리가 잡힐 일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빼오면 그만이다. 문제는 가야호텔과 연관이 없을 경우다. 정체도 모르는 적을 찾는 일만큼 막연한 것도 없다. 재수 없으면 제주도에서 몇 주를 머물러야 할지도 모른다.

“일단 확인해봐. 진짜 그놈들 짓이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위에서 무슨 결단을 내리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저녁 비행기로 함께 내려가면 되는 거죠?”

“그래. 면접관련 일로 출장 간 것처럼 행동하는 거 잊지 말고. 우리끼리 단독으로 조사한다고 말 나올지도 몰라. 알았지?”

“이것 참. 호텔 눈치까지 봐야하는 거였어요? 괜히 똥 밟는 건 아닌지 몰라.”

“하는 수 없잖아. 그쪽에서는 아무 이상 없다고 통보를 했는데 대놓고 다시 조사할 수도 없는 일이니.”

“그러네요.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두기도 찝찝하죠. 호텔 말만 믿고 가만히 구경하다가 직원들 다 빼앗겨버리면 완전히 우리만 망하는 거잖아요. 에잇, 정말. 같은 회사 사람들끼리 뭐하는 짓인지. 지금 하고 있는 일들 준호에게 인수인계도 해야 하니까 전 나가보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사실이 왜 하필 제주도냐는 점이다. 우리 동지호텔과 가야호텔이 경쟁하고 있는 지역은 서울, 인천, 경주, 강원도, 제주도 이렇게 총 다섯 곳이다. 우리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국내 6개 호텔 중 다섯 곳이 겹친다. 이 정도면 숙명의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 주임.”

“네?”

“혹시 우리 호텔에서 그동안 가야호텔 직원을 스카우트 한 적도 있나?”

나는 우리 팀으로 합류하기 전까지 호텔 마케팅을 담당했던 정 주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요. 원래 서비스업이라는 곳이 다른 직종에 비해 이직이 잦은 편이에요. 그러니 아무리 라이벌이라고 해도 필요한 인재라면 언제든 데려올 수 있어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죠.”

“그래? 팀장님 그러셨잖아. 회장님이 가야그룹을 싫어하신다고. 그런데도 가야호텔 직원들을 데려올 수 있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가야호텔 직원들을 데려다 쓰느냐, 아니면 가야호텔 직원들을 빼앗아 오느냐. 후자라고 생각하면 회장님이 오히려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자동차 회사의 경우는 동종 업계로 이직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호텔 쪽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업무방해나 그런 걸로 고소가 들어오고 그러지는 않아?”

“그게 참 애매해요. 서비스업에서 인재라고 해봐야 다른 사람보다 노하우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뿐인데, 그런 노하우를 해당 호텔의 고유 기술이라고 보기는 어렵잖아요. 인재 스카우트를 통한 기술유출이 아니니 사업 활동 방해나 불공정행위라고 처벌하기도 힘들죠.”

“그런 거야? 그럼 사람 몇 명 빼갔다고 뭐라 그러기도 어렵겠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아, 그게 말이지.”

나는 조금 전에 팀장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줬다. 어차피 내가 지원자 면접 관련 일을 하는 척 하려면 제주도에 함께 가는 정 주임이나 김 대리에게도 협조를 구해야 한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가야호텔 짓일까요?”

“그건 아직 알 수 없지. 가야호텔이 그랬으면 왜 제주도 직원들만 빼갔을까? 서울, 인천 쪽은 내버려 두고 말이야.”

“글쎄요. 제주도 여자들이 예쁘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건 아닐까요? 호호호.”

하여간, 진지함이 오래가기 힘든 정 주임이다.

“됐네요, 이 사람아. 어쨌든 나도 내일 제주도 가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혹시나 해서 인사과에 근무하는 입사동기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텔 헬스클럽에서 일하던 직원 중에 최근 3개월 동안 특별한 사유 없이 그만 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동기와 통화해본 결과 다른 호텔은 이상이 없었다. 유학이나 결혼 등의 사유로 퇴사한 사람을 제외하면 직장을 그만둔 사람이 전무했다.

다른 곳은 특별한 사유 없이 그만 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더 이상했다. 정말 가야호텔이 짓이면 왜 제주도에서만 그랬을까? 대체 무슨 꿍꿍일까? 그들에게 뒤통수를 한 번 맞고 나니 계속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여기 앉아 고민을 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직접 내려가 확인을 해봐야 무슨 수가 생기든 할 것이다.

Rrrr

“동수씨!”

“뭐해?”

“동수씨 생각하고 있었죠.”

내일 출장을 가면 한동안 시연이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어 전화를 걸었다.

“수업은 안 듣고?”

“지금은 공강이라서 괜찮아요. 그런데 교수님 얼굴이 자꾸 동수씨 얼굴로 바뀌어서 수업에 집중도 안 되고 큰일이에요. 히잉.”

“하하하. 그럼 정말 큰일인데.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없어요.”

“정장 위에 입을 코트가 마땅한 게 없어서 백화점에 가려고 하는데 옷 좀 골라줄래?”

“당연하죠!”

“당연해?”

“그럼요. 이제 동수씨 옷은 제가 골라 주는 게 당연하잖아요. 히히. 이따 퇴근시간 맞춰서 회사 앞으로 가면 돼요?”

“음. 지난번처럼 와서 울면 곤란한데.”

“치. 그건 다 동수씨 때문이잖아요. 설마 이번 달 사보에도 제가 모르는 이상한 일이 실린 건 아니죠?”

“당연히 없지. 약속 했잖아. 솔직하게 이야기하겠다고. 지금은 일해야 하니까 이따 회사 앞에서 보자.”

“네. 그럼 끊을게요.”

여행을 다녀온 뒤로 시연이는 확실히 변했다. 예전보다 애교도 훨씬 많아지고, 나를 대할 때도 자신감 있게 행동한다. 팔짱을 껴도 예전에는 그냥 푹 안기는 느낌이라면, 요즘은 내 몸에 착 감기는 느낌아라고 해야 하나? 이건 솔직히 음흉한 나의 속내가 숨어있어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퇴근해서 집에 가면 가끔은 저녁을 만들어 놓고 기다릴 때도 있다. 요리학원에서 배웠다며 이것저것 요란하게 만들면서 주방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그런 그녀의 노력에 비하면 음식 맛은 거의 늘지 않고 있다. 의욕이 충만한 모습을 보면 차마 말릴 수 없다는 게 고욕이라면 고욕이었다. 그래도 함께 사랑을 나눌 때는 점점 더 능숙해지고 요염해져간다는 게 큰 위안이 되었다.

◆ OO 회계법인 앞.

“야! 고장희! 너 자꾸 스토커 짓 할래?”

“우씨. 이게 어떻게 스토커 짓이야? 너를 기다리고 있는 거지.”

요즘 장희는 퇴근시간마다 형진이의 회사 앞에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많이 쳐줘도 고등학생 이상으로는 보기 힘든 그녀가 자꾸 회사 앞에서 기다리니 형진이도 꽤 피곤했다.

“그냥 기다리기만 해? 집까지 따라오지, 회식할 때는 옆 테이블에 앉아 혼자 술 마시지, 여자랑 이야기만 하면 끼어들어 훼방 놓지. 이정도면 스토커야.”

“우연히 방향이 같았을 뿐이야. 그리고 네가 이야기 나누는 여자들 하나 같이 여우들이더라. 이상한 여자 만나서 신세 망칠까봐 동기로서 도움을 주는 거야.”

“동기? 질투는 아니고?”

“무... 무슨 질투! 그런 걸 내가 왜 해?”

“어휴, 말을 말자. 넌 나이도 있는데, 이제 그런 유치찬란한 옷은 그만 포기하면 안 되냐? 내가 너 때문에 회사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잖아.”

“무슨 소문?”

“워낙 애같이 입고 다니니까 내가 원조교제를 한다더라. 그러니까 제발 그만 나타나주면 안 되냐?”

“별꼴이야 정말. 내가 어딜 봐서 애 같다는 거야? 응? 너도 그렇게 생각해, 형진아? 어디가? 대답은 해주고 가야지.”

이야기를 하던 형진이가 그냥 가버리자 장희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계속 쫓아가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네요.”

“그러게.”

“그런데 정말 저 여자분 서른 살 맞는 거야?”

“그렇다고 하니 믿어야죠. 대학 동기래요.”

“예전에 둘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글쎄요. 형진이 취향과는 완전히 다른데. 걔는 쭉쭉빵빵만 좋아하거든요.”

“남자 중에 쭉쭉빵빵한 여자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그게 그렇게 되나요?”

형진이의 회사 동료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조금 늦었네요 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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