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뿌린 대로 거두는 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소공동에 있는 롯데백화점을 갔더니 저렴한 가격의 옷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시연이 손에 이끌려 백화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입어 본 옷 중에 마음에 들었던 코트는 가격이 수백만 원대였다. 캐시미어니 어쩌니 하면서 설명을 하는데 촉감부터 달랐다.
캐시미어든 뭐든 예전 같으면 무슨 옷 쪼가리 하나에 그렇게 비싸냐며 펄쩍 뛰었을 텐데, 시연이가 예쁘다고 칭찬을 하자 입이 헤벌쭉 해져서는 바로 결제를 해버렸다. 그렇게 산 코트가 두 벌. 그리고 그녀에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은 코트를 발견해서 또 한 벌. 하루에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써버렸으니 롯데백화점 VIP고객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나는 확실히 통이 커졌다.
띠링.
문자메시지가 와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휴고보스 남성 코트 3XX만원. 결제.]
[버버리 남성 코트 5XX만원. 결제]
[버버리 여성 코트 6XX만원. 결제]
카드로 결제를 할 때는 몰랐는데,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확인하자 꽤 큰돈을 썼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긴축재정을 해야 할 것 같다. 월급통장과 로열티 수입은 시연이에게 넘어가고, 대부분의 현금은 투자금으로 묶여있다. 지금 내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은 빌딩임대료가 전부다. 대출을 받아 구입한 건물이라 이자를 제하면 한 달에 고작(?) 2000만원 조금 넘는 돈이 들어올 뿐이다. 얼마 전에는 요트를 산다고 2억 가까운 돈을 쓰는 바람에 통장잔고도 0원에 가까이 수렴하고 있는 상태다. 아, 가난한 나의 인생.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공항 입구부터 이국적인 제주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쌀쌀한 서울 날씨와 다르게 이곳은 아직 선선한 편이었다. 중문에 있는 동지호텔에 짐을 풀고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김수현 대리와 정지영 주임에게 다시 한 번 잘 둘러대 줄 것을 부탁했다. 석나련 실장과 김정화에게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가야호텔이 연관되어 있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우리 회사 내부의 일일 뿐이다.
똑똑.
“네. 나갑니다.”
시연이에게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 앞에서는 유난히 가슴이 도드라지는 옷을 입은 정 주임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다 늦은 시간에?”
“여자가 남자 혼자 있는 호텔방에 찾아왔는데 무슨 일이겠어요?”
어설프게 도발하는 정 주임의 모습은 섹시하다기 보다는 코믹함에 가까웠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들어 와.”
“네?”
“뭘 그렇게 놀라? 여자가 용기를 내서 남자 혼자 있는 호텔방에 찾아왔는데 거절하는 것은 신사의 도리가 아니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뭐야, 지금? 여기까지는 왔는데 갑자기 용기가 안 나는 거야?”
“마... 마 대리님.”
건설 현장에서 상의를 훌러덩 벗던 용감무쌍한 정 주임은 어디가고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 수줍은 아가씨가 눈앞에 서 있었다. 장난은 그만 쳐야할 것 같았다.
“하하하. 세상에, 정 주임이 당황하는 일도 있네. 그러게 왜 그런 어설픈 도발을 하고 그래. 장난은 그만하고 왜 왔는지부터 이야기 하시지요.”
“엑? 장난이셨어요? 난 또 마 대리님마저 저의 여성스러운 매력에 넘어온 줄 알았죠. 호호호. 아이고, 민망해라. 다름이 아니라 같이 술 한 잔 하자고 왔어요. 제주도까지 왔는데 다금바리 한 접시는 먹어줘야죠.”
“난 됐어. 아름다운 여성들께서나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섭섭하게 그럴 수는 없죠. 돈 내라고 안 할 테니까 같이 가세요. 네?”
“별로 생각 없어. 게다가 나는 내일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하잖아.”
“술만 안 마시면 되죠. 마 대리님 말씀처럼 아름다운 여성들끼리만 밤에 나가는데 걱정도 안 되세요?”
“별로 걱정은 안 되는데. 건설 현장 직원 수십 명을 바보로 만든 정 주임이 있잖아.”
“정말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실 거예요?”
휴. 오늘은 시연이 꿈이나 꾸면서 조용히 보내려고 했는데, 다 틀렸다.
“알았어. 가자고, 가. 대신 나중에 후회하지는 마.”
“무슨 후회요?”
“다금바리는 숙녀 분들께서 산다며? 내가 바닷가에 살아서 회는 그냥 흡입하는 경지에 올랐거든. 오늘 지갑 꽤나 얇아질 거다.”
“괜찮아요. 다금바리는 관상용이고, 마 대리님은 다른 회를 드시면 되니까. 호호호.”
정 주임과 함께 호텔로비로 내려오니 다른 사람들은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다섯이라 두 대의 택시로 나눠 타고 가까운 횟집으로 이동했다.
“세상에. 회를 무슨 대패삼겹살처럼 드시네.”
“원래 회는 한 점씩 맛을 음미하면서 먹는 것 아니었어요?”
“덩치를 봐. 한 점씩 깨작깨작 먹는 게 더 이상할 걸?”
“숙련된 장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한 번에 무조건 세 점씩.”
“평소에도 많이 드시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횟집에 도착한 나는 엄청난 속도로 회를 먹기 시작했다. 수다쟁이 정 주임과 활발한 성격인 정화가 옆에서 신기한 동물 보듯 이야기를 나눴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딱히 체면을 차려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비롭게 보여야 할 사람은 시연이 하나로 족하다.
회를 시원시원하게 먹는 것은 횟집을 운영하시는 아버지 친구 분에게 배웠다. 비싼 회라는 생각에 아껴서 천천히 먹는 어릴 적 나의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 하셨다.
‘사내 자슥이 음식을 그 따구로 아껴 먹으면 복 나간다 아이가. 소심하게 간장에 찍어가꼬 한 점씩 먹는 건 쪽바리나 하는 짓이다. 알것나? 대한민국 남자라고 하면, 한 번에 세 점씩 통 크게 먹어야 진짜 사나이 인기라. 알아듣겠나?’
물론 정말 그렇게 생각하셔서 말씀 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빚을 갚느라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어린 내가 음식 가지고 기죽은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덕분에 나는 회든 고기든 무조건 한 번에 세 점씩 먹는 괴벽이 생겼다.
“참 그거 아세요? 마 대리님 약혼 하셨대요.”
혹시라도 부담을 줄까봐 약혼식 이야기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약혼식 한지가 3주가 지났는데 이제야 정 주임 귀에 들어갔나 보다.
“정말요? 축하해요. 동수 오빠.”
“뭐야? 정화 너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 석 실장님하고 김 대리님 얼굴을 보니 이미 알고 있었던 표정이네. 김 대리님이야 마 대리님 친구와 사귀는 사이니 그럴 수 있다 치고, 석 실장님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와, 갑자기 서운해지려고 하네. 마 대리님!”
“응?”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설마 팀에 늦게 합류했다고 저만 따돌리는 건 아니죠?”
“하하하. 그럴 리가 있나? 결혼식도 아니고 해서, 조용히 치르려고 비밀로 했을 뿐이야. 오해 마러.”
“그럼 석 실장님은 어떻게 아셨대요?”
“정 주임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일 거 아냐? 석 실장님도 마찬가지겠지. 그렇죠?”
내 질문에 석 실장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석 실장님이야 윤 스포츠센터에서 파견 나왔고, 시연이와 함께 일을 한 적도 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그래서 그런지 윤 스포츠센터에서 파견 나온 세 사람은 우리 팀장님보다 나를 더 어렵게 대한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항상 정중하다. 오너의, 무남독녀의, 현재의 약혼자이자 미래의 남편.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들에게는 그 정도 타이틀만 해도 내가 어려운 것 같아 난감했다.
“뭐지?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자자. 회도 다 먹었으니 이제 일어나야지. 우린 여기 놀러온 게 아니라 일하러 왔다고. 내일 여기 직원들하고 만나는데 추레한 모습을 보일 건 아니지?”
나는 그렇게 말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파고들어봐야 좋을 건 없었다. 팀장님과 김 대리는 시연이가 윤 사장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두 사람이야 어디 가서 소문 낼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웠다. 베스트셀러 작가 윤시연의 약혼자라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윤 사장님의 예비사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더 큰 부담이 될 것 같다.
세상에 비밀은 없으니 언젠가는 알려 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무슨 남자 신데렐라가 된 것처럼 비춰질지도 모른다. 동지그룹의 대리 마동수가 아니라 윤시연의 남자 또는 윤 스포츠센터의 사위라는 수식어가 먼저 붙을 수도 있다. 그게 유쾌하지만은 않다. 못나게 구는 것 같아 이런 이야기를 시연이에게 말하기도 어렵다. 요즘 내가 고민하고 있는 딜레마다. 누가 봐도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다음날 아침 나는 깔끔하게 옷을 차려 입고, 자동차를 렌트해 가야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무작정 3층에 있는 헬스클럽으로 올라가 회원으로 등록하고 싶다며 안내를 부탁했다. 내가 동지그룹 사람인지 모르는 직원은 친절하게 헬스클럽 내부를 안내해줬다.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에 일하고 있는 강사들의 얼굴을 살펴봤지만, 조 팀장님이 주신 신상명세서의 사진과 일치하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여기 일하는 사람 중에 조향미라는 강사 없나요?”
“조향미요?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아, 친구가 여기 오면 연락해보라고 알려준 분인데요. 메모를 잃어버려서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네요. 조향미가 아니면 이채향이었나? 혹시 이채향이라는 강사는 있나요?”
“아뇨. 그런 이름을 가진 강사는 여기 일하는 직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염려마세요. 저희 호텔에서 운영하는 노블레스 짐은 우리나라 최고의 강사진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찾는 분이 계시지 않더라도 만족하실 겁니다.”
조향미라는 사람은 우리 호텔에서 가장 먼저 그만 둔 사람이고, 이채향이라는 사람은 최근에 그만 둔 사람이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여기에 없다고 했다. 직원이 그런 것을 가지고 거짓말을 할리는 없다. 그럼 이번 일이 가야호텔과 연관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네. 시설만 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곳에서 운동하면 정말 기분 좋을 것 같네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고객님. 등록하시면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도 당장 그러고 싶은데, 가족들도 같이 등록할 거라서요. 오늘은 그만 돌아가고,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오겠습니다.”
“가족이 등록하면 할인혜택도 있습니다. 이건 우리 호텔 할인혜택이 수록된 안내 책자입니다. 가족 분들과 이야기해보시고 꼭 다시 오셨으면 좋겠네요.”
나는 끝까지 친절하게 행동하는 직원을 뒤로하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가야호텔과 연관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 헷갈렸다. 이제는 그만 둔 직원들을 직접 만나봐야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제발, 생각지도 못한 다른 변수가 생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달리 마음속으로는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만 자꾸 들었다.
◆ 서울의 어느 술집.
“내게 원하는 게 도대체 뭐야?”
“없어. 그런 거.”
장희의 대답에 형진이는 어이가 없었다. 귀찮을 만큼 쫓아다니는 주제에 원하는 게 없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차라리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간다는 말을 믿는 게 낫다.
“그럼 그만 쫓아다녀도 되겠네.”
“쫓아다니는 거 아니라니까. 그냥 우연히 자꾸 마주칠 뿐이야.”
“야, 고장희! 너 자꾸 헛소리 할래? 내가 우스워?”
“아니.”
“그럼 대체 왜 이래? 왜 9년 만에 나타나서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느냐고.”
“사정이 있었다고 했잖아.”
“그래 사정. 어머니 돌아가시고 갑자기 유학을 가게 됐다. 나는 훈련소에 있어서 연락도 못했다. 나중에 면회를 왔는데 내가 다른 여자랑 외박을 간 것으로 오해했다. 결국 너는 오해를 한 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어쩌라고? 9년 전 일이잖아. 9년 만에 나타나서 네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면 나는 ‘아이고, 그렇습니까?’라며 너를 위로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동수 약혼식장에서는 왜 날 쫒아온 거야?”
“그... 그건. 그래 네가 정말 맞나 확인하려고 그랬다. 난 정말 네가 죽은 줄 알았거든. 흥신소에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못 찾았다는 대답뿐이었어. 분명히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같이 학교를 다녔는데 아무도 네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난 무슨 귀신하고 만난 건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들더라.”
장희는 형진이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암담했을지 이해가 갔다. 흥신소에서 그녀를 찾으려고 해도 동지그룹 비서실에서 모든 것을 차단했을 것이다. 미안했다. 어떻게든 사과하고 싶은데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묵묵히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너도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더 이상 쫓아다니지 마라.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널 내 마음 속에서 지운지 오래야. 나 먼저 일어난다.”
형진이는 차갑게 말을 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였다면 당장 일어나 열심히 쫓아갔을 장희였지만, 오늘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술집에 홀로 앉아 있는 그녀의 눈은 유달리 슬퍼보였다.
============================ 작품 후기 ============================
갑자기 치통이 왔습니다. 아무래도 글을 쓴다고 커피와 초코바를 입에 달고 살아서 그런 것 같네요. 휴일이라 치과를 갈 수도 없고 정말 ㅠ
어릴 때 겪어보고 처음 겪는 고통인데, 이렇게 아플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약국에서 진통제를 사와서 먹었는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네요. 내일까지 어떻게 버틸지 막막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