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2 뿌린 대로 거두는 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내일이면 우리는 출장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내가 맡은 일은 이제 시작이다. 증거가 확실하면 경찰에 신고라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 상태다. 게다가 해당 여성의 수치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나 혼자 움직여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여자가 나서면 도움이 될 것 같아, 김수현 대리와 정지영 주임이 함께 묵고 있는 호텔방을 찾아갔다.
똑똑.
“누구세요.”
“나, 마 대리야. 정 주임.”
“잠시 만요.”
잠시 후 젖소 캐릭터가 들어간 이상한 잠옷에 카디건만 걸친 정 주임이 문을 열고 나왔다. 와! 이 여자는 정말 잠옷까지 자신의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것 같다. 대단하다. 대단해.
“무슨 일이세요, 마 대리님? 여자 둘만 있는 방을 이렇게 찾아주시고. 호호호.”
“급히 상의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김 대리님도 안에 있지?”
“혹시 지금 알아보고 계신 것 때문에 그러신 거예요?”
“응. 너무 늦어서 밖에 나가기는 그렇고, 내가 안으로 들어갈까? 아님 기다릴 테니, 두 사람이 내 방으로 올래?”
“잠시 만요. 김 대리님에게 여쭤보고요.”
정 주임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더니 후다닥 뭔가를 치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속옷을 빨아서 널어놓은 게 있어서.”
고작 며칠 출장 온 건데 속옷을 빨아? 하여간 4차원 기질이 있는 여자다.
“흠흠. 그런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는데. 어쨌든, 이제 들어가면 되는 거지?”
“네. 들어오세요.”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두 사람에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 대리는 표정의 변화가 별로 없었지만, 내 말을 들은 정 주임은 당장이라도 쫓아나갈 것처럼 흥분했다.
“이 봐. 정 주임. 진정하라고.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건 없어.”
“보나마나 뻔하죠. 편철수 그 망할 부지배인 말고 그럴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거야 모르지. 일단 진정해, 정 주임. 마 대리님.”
흥분한 정 주임을 달랜 김 대리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
“네. 김 대리님.”
“이채향이라는 여자 말고 다른 분을 만나지는 못했나요?”
“네. 전화도 받지 않고, 집에 찾아가서 문을 두들겨 봐도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이채향씨처럼 집에 있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건지, 정말 없는 건지는 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 이채향씨의 일은 호텔과 연관이 없을 수도 있겠네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우연의 일치가 너무 많아서요. 비슷한 시기에 다섯 명이 그만뒀고, 그 다섯 명 모두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의심할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찾아가서 무작정 말을 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팀장님에게 업무평가를 낮게 받아 계약해지가 된 예전 직원들 신상명세서를 요청했습니다.”
“그걸로 어떻게 하시려고요?”
“지금 상황으로는 업무평가서도 믿을 수 없습니다. 성추행에 항의하다가 업무평가를 낮게 받고 쫓겨났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게 아니라도 같이 일을 했으니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거나, 소문을 들었을 수도 있죠.”
“맞네. 아무리 쉬쉬한다고 해도, 조금씩 소문은 날 수 있어요. 딱히 구체적인 것은 아니라도 뭔가 이상하더라는 식의 이야기는 들을 수 있잖아요. 그러지 말고 당장 지금 일하는 직원들에게 연락해서 물어보죠.”
잠깐 조용하던 정 주임이 다시 성급하게 굴었다. 그러다 소문이 나면 일을 망칠 수도 있는데 정의감만 가득 찬 그녀에게는 그런 현실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호텔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네?”
“서울에서 내려온 직원들이 제주 호텔의 사정을 캐고 다닌다고 소문나면 어쩌려고? 정말 가해자가 호텔에 있다면 우리가 오히려 뒤통수 맞을 수도 있다고. 소문에 주의하지 않다가 가야그룹에게 당해놓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그렇긴 하네요.”
“이미 그만 둔 사람이라면 우리 호텔에 별로 좋은 감정은 없을 텐데요.”
“그래서 제가 여기 온 겁니다. 그런 설득은 아무래도 동성끼리 하는 게 더 나으니까요. 이야기를 들어보고 확신이 들면, 이채향씨에게도 다시 찾아가봐야 하는데 아무래도 김 대리님이나 정 주임이 함께 하는 게 낫겠죠.”
“그럼 내일 서울로 못 돌아갈 수도 있겠네요?”
“네. 아무래도 며칠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동지호텔에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다른 호텔로 옮기거나 주변에 있는 펜션이라도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 부담스러우시겠지만 두 분 중 한 분은 저랑 같이 남아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남을게요.”
내 부탁을 들은 김 대리가 곧바로 자신이 남겠다고 이야기했다. 남의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제가 남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김 대리님은 표정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은 오해할 수도 있는데. 마 대리님 생각도 그렇지 않아요?”
“정 주임”
“네. 김 대리님.”
“나, 상처 입은 사람에게까지 차갑게 굴만큼 모진 사람 아니야. 정 주임처럼 밝은 성격이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고. 게다가 지금처럼 성급하게 굴다가 일을 망칠지도 모르니까, 이번에는 내가 남는 게 나을 것 같아.”
“네...”
김 대리 말이 맞는 것 같다. 편하기야 정 주임이 편하지만, 너무 열혈인 경향이 있다. 나중에 사실로 밝혀지면 부지배인을 찾아가 멱살잡이를 하고도 남을 여자가 정 주임이다.
“숙소는 어떻게 할까요, 김 대리님?”
“우리 호텔 놔두고 다른 호텔에서 묵었다고 하면 출장비 정산을 해줄까요? 게다가 이야기를 나누려면 두 사람 중 한 사람 방에서 계속 있어야 할 텐데. 그냥 방 두 개가 딸린 펜션이 나을 것 같아요.”
“김 대리님만 불편하지 않으시면 저도 그게 좋을 것 같네요. 그럼 그렇게 알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쉬세요.”
같은 펜션에서 숙박을 한다는 사실을 현우가 알면 길길이 날뛸 것이 분명하다. 당장 제주도로 오겠다고 설레발을 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 내게는 시연이가 있다. 김 대리 성격이면 현우에게 전화를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펜션에서 묵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 현우는 또 시연이에게 무슨 장난을 칠지 모른다. 그러기 전에 빨리 보고하는 게 우선이다.
Rrrr
나는 내가 묵고 있는 호텔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시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수씨. 내일 올라오는 거죠. 네?”
출장은 금요일 까지지만 문제가 생기면 더 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더니, 시연이는 전화로 그것부터 물어왔다.
“아무래도 며칠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요? 전 벌써 동수씨가 보고 싶은데. 히잉.”
“나도 그래. 그런데 일이 여의치가 않네.”
“어쩔 수 없죠, 뭐. 놀러 간 것도 아니잖아요. 언제까지 있을 것 같아요?”
시연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지금이라도 당장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심정이다.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어. 적어도 2~3일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시연아. 김수현 대리도 같이 남기로 했거든.”
“그래요?”
“응. 우리 호텔에는 더 있을 수가 없어서, 펜션에서 묵기로 했거든. 괜찮지?”
“호텔은 왜 나와요?”
“우리 호텔 모르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자세한 건 가서 이야기해줄게. 아직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거든.”
“그렇구나. 수현 언니라면 괜찮아요. 그런데 동수씨.”
“응?”
“제가 주말에 내려가는 건 이상하겠죠?”
괜찮다고 하더니! 사실 입장 바꿔서 시연이가 다른 남자와 단 둘이 출장을 가면 나도 싫을 것 같긴 하다. 그렇다고 제주도로 불러들일 수는 없다. 이럴 때는 설명을 해줘야 한다. 연애 경험이 몇 번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의 폭도 넓어지지만, 그녀는 내가 처음 사귀는 남자다. 내가 연애를 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시연이도 겪을 것이다.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래가기 힘들다.
“내려오면 어쩌려고? 낮에는 계속 일해야 하고, 숙소에서는 잠만 잘 텐데. 그리고 잠은 어디서 자고? 김 대리 혼자 쓰는 방을 같이 쓰는 건 실례고, 나랑 같은 방 쓰는 건 김 대리 보기 좀 그렇잖아. 빨리 일 끝내고 갈 테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려. 알았지?”
내가 이렇게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다니, 정말 많이 변하긴 했다. 그 놈의 사랑이 뭔지.
“히히. 그냥 투정 한 번 부려본 거예요. 그래도 동수씨가 이렇게 다정하게 설명해주니까 좋아요. 그런데 동수씨.”
“응?”
“있잖아요. 수현 언니와 같이 지내는 펜션은 아주 못생긴 곳으로 골라야 해요! 알았죠?”
“하하하. 알았어. 걱정 마세요. 요즘은 직장인 세미나를 위해 업무를 보기 편하도록 만든 곳도 있다고 하니까 꼭 그런 곳으로 알아볼게.”
“그럼 됐어요. 그리고 나, 절대 질투 한 거 아니에요.”
“그럼. 우리 시연이가 얼마나 마음이 넓은데. 시간 늦었으니까, 얼른 자. 내일 다시 전화 할게.”
“네. 동수씨도 잘 자요. 내 꿈꾸고요. 쪽.”
시연이는 그렇게 뽀뽀까지 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글거리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Rrrr
시연이와 통화를 끝내고 즐겁게 그 여운을 즐기고 있는데 현우 녀석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이럴 줄 알았다. 김 대리에게는 꼬치꼬치 물어 볼 수 없으니 만만한 내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왜.”
“야, 임마! 무슨 출장인데 우리 수현씨랑 같이 남아?”
“그럴 일이 좀 있어. 좋아서 남는 줄 알아? 나도 서울에 우리 시연이가 기다리고 있다고.”
“그럼 빨리빨리 일을 끝내고 올라와야지.”
“그게 안 되니까 그러는 거잖아. 뭐가 문제야? 너도 출장 자주 갔잖아?”
“아니 그래도 그렇지. 왜 우리 수현씨가 남게 하느냐고. 거긴 사람 없어?”
“미친놈. 너 지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같은 대리라도 김 대리는 승진이 확정돼서 나보다 상사거든. 내가 남아라, 마라 할 위치는 아니지.”
“이 자식 봐라. 왜 ‘님’자는 빼먹고 그래.”
“앞에서는 꼬박꼬박 ‘님’자 붙이거든. 제수씨를 부르는데, 네 앞에서까지 그래야 하냐? 할 일없으면 발 닦고 잠이나 자라. 끊어.”
“야! 잠깐. 잠깐만. 나 내일 저녁 비행기로 내려간다.”
헐. 이놈은 시연이보다 더 무서운 녀석이다. 스무 살 여자도 이해하고 넘어간 일을 서른 살 먹는 녀석이 이러고 싶을까?
“아주 지랄을 해요. 헛소리 그만하지? 네가 오면 김 대리가 참 좋다고 하겠다.”
“호... 혼자 여행을 가는 건데, 하필이면 내 친구가 펜션에서 숙박을 하고 있다고 그러네. 어쩔 수 있냐? 외로운 친구를 위해 내가 가서 함께 있어줘야지.”
이건 농담이 아니고 진담으로 하는 소리다. 아, 정말 철없는 자식.
“알아서해. 그런데 김 대리 보기에 쪽팔리지도 않냐?”
“사랑에 쪽팔리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방해하지 않고 열심히 밥만 해주다 갈 테니까 염려마라. 친구야. 그럼 내일 밤에 보자.”
“진짜 오려고? 정말? 설마 나하고 김 대리를 못 믿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 너는 못 믿어도 우리 수현씨는 믿지.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래.”
“어휴, 이 미친놈. 와도 나랑 같은 방에서 잘 생각은 하지마라. 설마 내가 있는데 김 대리랑 한 방에서 자려고? 김 대리 성격에 그건 절대 안 될 텐데.”
“그... 그건 당연히 아니지. 그냥 네가 재워주라.”
“싫어, 임마! 이불 줄 테니까 거실에서 자던지 알아서 해.”
“치사한 놈. 아무튼 난 내일 내려간다. 굿나잇!”
팔불출 자식. 공과 사도 구분 못하는 못난이 자식. 나이 값도 못하는 자식. 현우 자식에 비하면 우리 시연이는 정말 이해심이 넓은 여자다. 내가 정말 여자 하나는 잘 만났다니까!
◆ 시연이 방.
전화를 끊은 시연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동수 앞에서는 이해하는 척 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인다. 못 믿는 것은 아닌데,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질투심이 자꾸 생긴다.
“난 아무래도 속이 좁은 여자인가 봐. 왜 이렇게 마음이 안 좋지. 히잉. 똥수야, 정말 미안해. 누나가 절대 이러고 싶지는 않은데...”
시연이는 곰 인형 똥수에게 사과를 하더니, 두툼한 인형의 배를 사정없이 꼬집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이가 아파서 밤을 꼬박 세웠습니다. 덕분에 한 편 더 올릴 수 있게 되었네요.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오늘 치과가서 꼭 치료받고 산뜻한 마음으로 다시 글을 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