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7 뿌린 대로 거두는 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신문 사회면 성폭행관련 기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졸피뎀이다. 그때 내가 읽은 기사에 의하면 일반 수면유도제와는 달리 환각을 일으키는 마약성분이 있기 때문에 의사의 처방이 없으면 구매가 불가능한 제품이고, 잘못 복용하면 기억상실이나 정신이상까지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시중 약국에서 판매하는 ‘졸피 어쩌고’하는 제품들은 전부 졸피뎀 성분을 조금 섞어 환각작용을 상당히 억제한 것들이다. 에탄올 원액인 주정과 알코올 도수 20%내외의 소주를 생각하면 된다. 그만큼 위험한 것이고, 때문에 이를 이용한 강력 범죄는 항상 신문 사회면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한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우리 팀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김 대리님.”
“네.”
“이번 일이 알려지면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중단 될지도 모릅니다. 그건 알고 계시죠?”
“설마 덮자는 말씀은 아니죠?”
“아닙니다. 좀 더 신중을 기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회사에 보고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부터 결정을 해야겠죠.”
“회사에 보고하면 당연히 조용하게 무마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사고가 나면 우선 덮고 보려는 작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라면 세계 어느 곳도 마찬가지다.
“그럴 가능성이 높죠. 그런데 피해자에 대한 인적사항을 인사과를 통해 여러 번 조회했기 때문에 이번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금방 우리 짓이라는 것을 회사에서도 눈치 챌 겁니다.”
“잘리면 잘렸지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항상 차갑기만 하던 김 대리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감정이 그대로 묻어났다.
“저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팀원들도 생각해야죠. 저는 우선 위에다가 보고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조용히 넘어가려고 하면요?”
“저도 고민 중입니다. 결국 신고를 하겠지만, 우리 팀이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는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채향씨에게 2차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요.”
“언론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힘들 겁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가야그룹은 지금이 기회다 생각하고 물고 뜯으려고 달려들겠죠.”
“그럼요?”
“당장 생각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D&Y휘트니스 클럽 프로젝트를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있어서 아직 제주 동지호텔의 헬스클럽은 간판을 바꿔달지 않았습니다. 언론 보도를 할 때 D&Y휘트니스 클럽이라는 이름은 최대한 뺄 수 있도록 해야겠죠.”
“가야그룹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네.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그전에 뭔가 수를 내긴 해야겠죠. 일단 내일 첫 비행기로 서울로 올라갑시다.”
“서울이요? 이채향씨는 어쩌고요?”
“지금 제주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아미 알아 낼 것은 전부 알았습니다. 오래 머물러봤자 우리 행적만 노출돼서 부지배인과 도 팀장 귀에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고요. 그리고 팀원들을 모아 이야기라도 나눠봐야죠.”
짧았던 탐정놀이(?)는 끝났다. 흥신소에 부탁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조사과정에서 이번 일을 알게 된다면, 이를 빌미로 어떤 요구를 할지 알 수 없다. 보통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거액을 요구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부지배인이나 도 팀장을 협박할 수도 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은밀한 일을 맡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나는 숙소에 돌아와 서울지방 경찰청 광수대 계장으로 있는 광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조언이라도 구하고 싶었다. 녀석은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간단한 인적사항을 알려달라고 하더니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Rrrr
다음날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여보세요.”
“첫 비행기로 서울 가겠다는 녀석이 아직도 자고 있으면 어떡해?”
“어. 광우냐? 벌써 알아봤어?”
“응. 이번 사건 내가 맡는다.”
아무리 광역수사대라고 해도 서울에서 일하는 경찰이 제주도 사건을 맡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 어떻게? 넌 서울에서 일하잖아.”
“편철수라는 부지배인 말이야. 주소지가 서울이야. 직원 성추행으로 고소가 된 적이 있었는데, 조용히 넘어가긴 했지만, 그 일로 제주도로 쫓겨난 것 같던데. 몰랐냐?”
나도 몰랐던 사실이다. 역시 경찰의 정보력은 빠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고 이미 비슷한 전력이 있는 인간이었다. 무슨 줄을 잡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지방으로 내려 보내 것으로 조용히 무마를 했으니 더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응. 몰랐어. 근데 가해자 주소지가 서울이라고 제주도까지 내려와서 수사할 수 있어? 무슨 협조요청이라든가 그런 거 해야 하지 않아?”
“그리고 네가 이사 간 것 같다고 했던 박도은이라는 여자가 지금 서울에 살고 있어.”
“그래?”
“응. 오늘은 그 여자부터 만나 설득할거야. 고소장 접수 되는대로 바로 우리 팀 움직여서 제주도 내려갈 생각이고.”
“쉽게 될까?”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여 형사도 우리 팀에 있으니까 그런 건 염려 마러. 얼마나 시간 주면 돼?”
“뭘?”
“이번 일은 언론통제가 쉽지 않아. 네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타격이 가는 일이라며. 나한테 부탁을 할 정도면, 어느 정도 대책은 세워놨을 거 아냐?”
역시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밤늦게까지 고민하면서 어설프지만 대책을 세우긴 했다. 이게 통할지 말지는 아직 자신이 없다.
“그거?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될지. 최대한 늦췄으면 좋겠는데.
“얼마나? 많이는 못 줘. 회사에 보고도 할 생각이라며? 저쪽에서 먼저 눈치 채고 피해자들을 해코지하거나 도망가 버리면 우리도 곤란해.”
“영상도 있다는데 유출되지 않게 잘할 수 있지?”
“걱정 마. 네가 광수대를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미국으로 따지면 FBI와 비슷한 거야. 형사 중에서도 날고 기던 사람들만 모인 곳이 바로 광수대야. 그러니 그런 걱정하지 말고 필요한 시간만 이야기해.”
“목요일까지만 시간을 줘.”
“알았어. 그럼 목요일 저녁에 잡아들인다. 금요일 아침이면 대대적으로 기사가 뜰 테니까 알아서 대비해라. 전화 끊는다.”
젠장. 광우 녀석의 다그침에 제대로 사고를 쳤다. 아직 팀원들과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는데, 내 멋대로 일을 처리해버린 꼴이 되었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어차피 신고할 생각이었고, 믿을 수 있는 광우가 나서기로 했으니 적어도 피해자들에게 다른 불상사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망할 놈. 일찍도 사람을 깨웠다. 7시 비행기라 지금 자도 얼마 못 잘 것 같아 제주도의 깨끗하고 맑은 새벽 공기라도 마시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그런데 거실에서 자고 있어야 할 현우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이불도 없다. 밖에 나갔나 싶어 현관을 살폈지만, 신발은 그대로 있었다.
덜컥.
그때 김 대리가 자고 있는 방의 문이 열리면서 현우가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거실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딱딱하게 굳은 석고상처럼 동작을 멈췄다.
“너...”
내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현우는 두 손바닥을 모아 부탁하는 자세를 취했다. 조용히 녀석을 끌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뭐, 이런.”
“그냥 모른 척 해주라.”
어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설마설마했다. 의심은 갔지만, 김 대리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 그럼 그저께 밤에 들리던 미친년 울음소리가...”
“야! 그 이야기는 그만 좀 하자. 우리 수현씨 놀라서 경기할 뻔 했다.”
“어휴. 그래. 다 큰 성인인데, 내가 뭐라고 하겠냐. 너도 참 어지간하다. 내가 건너 방에서 자고 있는데 그러고 싶디?”
“하하하. 녀석.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아침 차릴 테니까 얼른 밥 먹고 서울이나 가자.”
현우는 과장되게 웃으며 주방으로 갔다. 그래. 모른 척 해준다. 아, 정말.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시연이보고 오라고 하는 건데, 후회가 되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 집에 도착해서 시연이에게 잘 도착했다는 보고를 하고, 짐을 풀어 밀린 빨래부터 세탁기로 돌렸다.
Rrrr
“네, 팀장님.”
“서울은 잘 도착했냐?”
“그럼요.”
“일단 1시에 모이기로 했다. 이번에도 너희 집에 모일까?”
“당연히 안 되죠. 그때야 너무 늦은 시간이라 어쩔 수 없었고, 스터디 룸이나 하나 빌리시죠?”
“까칠하기는. 그럴 줄 알고 신촌에 있는 스터디 룸 예약해뒀다. 이따 그리로 와라.”
“그런데 왜 그렇게 일찍 만나요? 출장 다녀와서 피곤해 죽겠구먼.”
급한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괜히 투정을 부렸다. 가끔은 이렇게 생색을 내줘야 부하직원이 고생한다는 사실을 알아준다.
“피곤하기는 무슨. 제주도에서 잘 쉬다 왔잖아. 아무튼 1시에 보자.”
그렇게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 팀장님은 나에 대해 너무 잘 아신다.
신촌에 있는 스터디 룸에는 조 팀장님, 김 대리, 나, 정 주임, 준호 이렇게 다섯 명만 모였다. 윤 스포츠센터 직원들과 대학원생들은 이번 회의에서 뺐다.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면 그들에게도 피해가 가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회사 내부의 일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모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특히 별 다른 소속감이 없는 대학원생들은 우리가 모여서 이런 회의를 한다는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당연히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일이라며 정의감에 불타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내가 세운 계획은 시도도 못해보고 끝나게 된다.
“일요일에 불러내서 미안해.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네.”
“제발 지난번처럼 그런 골치 아픈 일만 아니면 좋겠네요.”
이번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준호가 호들갑을 떨었다. 상황에 따라서는 지난번 일보다 더 큰일이 될 수 있다.
“준호는 전혀 모르는 일이고, 정 주임도 출장 이후 일은 아직 모르고 있으니 내가 간단하게 설명하지.”
조 팀장님은 피해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제주 동지호텔의 헬스클럽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을 간략하게 설명하셨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프로젝트 자체가 완전히 엎어질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그러니까 무작정 경찰에 신고를 해버리면, 후폭풍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올 스톱된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렇지 않아도 성범죄가 이슈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일이 언론에 알려지면 어떤 사람이 우리 D&Y휘트니스 클럽을 이용하려고 하겠어. 성폭행 범이 일하는 곳이라며 조롱받을 걸?”
“어쨌든 회사에 보고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언론에서 난도질을 할 텐데,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잖아요. 언론을 통제하려면 회사에서 직접 나서야죠.”
“회사에서 조용히 무마하려고 하면?”
“그럴 리가 있겠어요? 경미한 일이라면 모를까 강력 범죄잖아요. 위에 분들도 가족이 있을 텐데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아직 세상 때를 덜 탄 준호는 회사가 정의로운 곳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거야 결과 나와 보면 네 스스로 깨달을 거고. 이유는 다르지만 저도 회사에는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주 동지호텔의 일 때문에 프로젝트가 좌초되면, 우리 책임이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징계를 주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보고 없이 우리 임의대로 신고하고, 나중에 그 사실이 회사에 전해지면 바로 내부고발자로 낙인찍히는 겁니다. 사표를 낸다고 해도 다른 곳에 취직하기도 어려울 걸요?”
나야 돈이 많으니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면 된다고 하지만, 다른 직원들은 그럴 입장이 아니다. 취직을 하려고 해도 동지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그냥 내부고발자라는 소문만 퍼트려도 취직은 하늘의 별따기가 된다.
일요일에 뭐 하러 모였을까 싶을 정도로 이번 회의는 조용했다. 주제가 너무 무거워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것 같았다. 신고를 하면 프로젝트가 위험하다. 게다가 회사에 보고하지 않고 신고를 하면 뒤탈이 날 수 있다. 그렇다고 회사에 보고하면 입 다물라고 강요받을 게 뻔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하는 수 없네요. 이번 일은 그냥 제게 맡기세요. 팀장님은 내일 말고 화요일에 보고해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야. 무슨 수로?”
“몰라요. 저도.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같이 죽을 수는 없잖아요. 탈이 나면 혼자 뒤집어쓰고 사표 쓰면 되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별일 없을 테니까 염려마세요. 그럼 저는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납니다. 내일 봬요.”
나는 그렇게 질러버리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객기일 수도 있고, 든든한 돈이 내 뒤를 받치고 있어서 나오는 여유일 수도 있다. 어차피 광우 때문에 조만간 그놈들은 잡힌다. 이제 남은 것은 언론이다.
============================ 작품 후기 ============================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해서는 경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더군요. 그래서 예전에 한 번 나왔던 주인공 친구인 광우를 다시 등장시켰습니다. 기억 나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29살에 경정을 단 엘리트 경찰입니다.
차기작이나 차차기작의 주인공으로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엘리트답지 않게 똘기충만한 캐릭터입니다. 다다음회 정도에 외전을 통해 등장할 겁니다. 똘기충만한 성격인데 조용히 체포만 하지는 않겠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