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1 한 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후속조치를 위해 정신없이 일하는 와중에 윤 사장님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당장 이쪽으로 튀어와!’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는 이번 일에 대해 매우 심기가 불편해지신 모양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사장님? 내가 공적인 일로 불렀다는 건 알고 있나보지?”
“시연이야 무탈하게 학교를 잘 다니고 있으니, 사적인 문제는 아니겠죠. 이번 사건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시죠?”
“마음이 불편해? 짜증이 나고 답답해서 화병이 날 지경이야. 지금 인터넷에서 뭐라고 그러는 줄 아나?”
“뭐라고 그러는데요?”
“동지호텔 헬스클럽이 D&Y휘트니스 클럽이고, D&Y휘트니스 클럽은 윤 스포츠센터가 참여하니 결국 다 똑같은 놈들이라나? 우리도 조사해보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도 있어.”
내용이 디테일하다. 가야호텔에서 슬슬 공세를 취하려는 것 같다. 지금처럼 연예인 스캔들 기사로 인터넷이 떠들썩한 상황에서는 크게 효과를 보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다.
“대체 그런 기사는 어디서 보셨습니까? 찾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어디서 찾긴 인터넷에 널렸더구먼.”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일부러 검색해보지 않는 이상.”
“우리 스포츠센터와도 연관되어 있는데, 당연히 찾아봐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윤 스포츠센터도 조사하면 더 심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정말 기사로 떴어요? 기자가 미친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악의적인 기사를 쓸 수 있지. 그 신문사 어딥니까? 당장 고소하죠.”
“흠흠. 기사는 아니고...”
“설마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 그러신 거예요? 와. 사장님이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사소한 코멘트에 일희일비하시면 어떡하십니까. 예전에 노이즈 마케팅을 할 때도 꽤 많은 악성루머들이 돌았잖아요. 그때는 가만히 계시더니...”
“상황이 똑같나? 돈벌레라는 욕은 얼마든지 먹어도 좋아. 그렇지만 성범죄의 소굴이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딸 가진 부모로서 어떻게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어. 대체 자네 회사는 일을 어떻게 하길래 이런 참담한 일이 생기느냐 말일세.”
윤 사장님은 버럭 역정을 내시며 불쾌해 하셨다. 예전 한 설문조사에서 양성평등 의식이 가장 높은 사람이 딸만 둔 아버지라고 하더니, 이번 사건이 그냥 남의 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으신 것 같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번 사건을 처음부터 파해 친 것도 우리 팀이고 경찰에 사실을 알린 것도 우리 팀입니다. 그리고 불합리한 제도들을 보완하고 있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흥.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
“그래도 외양간에 소들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사건을 파해 친 것도 자네 팀이고, 경찰에 알린 것도 자네 팀이라고? 그런데 왜 하나는 빼놓나? 연예인 스캔들 기사로 물타기 한 것도 자네 팀이지?”
“그게...”
“시치미 떼지 말게. 타이밍이 너무 좋잖아. 하는 짓이 꼭 노회한 정치꾼 같어. 물론 이것도 자네머리에서 나왔겠지?”
이렇게 나오시니 더 이상 오리발을 내밀 수도 없었다.
“잘못하면 프로젝트가 뒤집어질 텐데 어쩝니까? 그리고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피해자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자칫 2차 피해를 유발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래서 서운하다는 것일세.”
“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사건이 터질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대비책까지 마련해놓고 어떻게 우리에게는 일언반구 하나 없었느냐 이 말일세. 자네도 말하지 않았나. 잘못하면 프로젝트 자체가 뒤집어질 수 있다고. 그럼 우리도 당연히 알아야 했던 일 아닌가?”
휴. 올 것이 왔다. 나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꽤 고민을 했었다. 우리 회사에 파견 나온 윤 스포츠센터 직원들에게는 비밀로 해도, 윤 사장님에게는 미리 귀띔이라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통제가 불가능한, 어디로 튈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럭비공 같은 양반이라 모른 척 해버렸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뭐라고 드릴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수야.”
윤 사장님이 갑자기 다정스레 나를 부르셨다.
“네, 아버님.”
“우리 딸과 약혼까지 했으면, 이제 우리는 가족 아닌가?”
“맞습니다. 저도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하는 것이...”
“공적인 일도 나랑 연관이 되었는데, 무슨 공과 사?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은데, 동수 자네가 나를 가족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투정 부리는 게 아니야.”
“그럼...”
“내가 자네를 이미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야. 성격이 좀 괴팍해서 제 멋대로 행동할까봐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인데. 이미 자네를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는데, 설마 자네에게 피해가 갈 행동을 할 것 같은가? 내게 솔직히 이야기하고 모른 척해 주십사 부탁을 했다면, 나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함구했을 것이야. 왜냐고? 자네는 내 가족이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나?”
윤 사장님 말씀이 맞다. 나는 시연이의 부모님을 내 부모님처럼 생각하겠다고 다짐해놓고는 사실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내 부모였다면 나는 무조건 아버지에게 말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아직 두 분을 계산적으로 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말만 ‘아버님’이라고 했지, 행동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흠흠. 뭐, 알아들었다니까 됐네. 어쨌든 이번 일은 잘 마무리하고 있는 것 같으니, 우선은 관망하도록 하겠네. 바쁠 테니 그만 돌아가 보게.”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내일은 토요일이니 바쁘지 않으시면 같이 식사나 하시죠?”
“꼭 엎드려 절 받는 것 같구먼.”
“하하하.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습니다. 약혼식 끝나고 갑자기 일이 너무 많아져서 항상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그러던가.”
“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윤 스포츠센터를 나오는 내 마음이 좀 무거웠다. 시연이와 노는 일에만 정신이 빠져, 두 분을 너무 나 몰라라 했던 것 같다. 나와 그녀는 단순히 연인관계가 아니라 약혼한 사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시연이는 가끔 동생 집에 찾아가 조카인 마수리 얼굴도 보고 오고, 우리 부모님에게 안부전화를 하는 것 같은데 그녀에 비하면 난 아직 부족한 사람이다.
“동수씨. 그만 일어나요. 거의 다 끝나가요.”
시연이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시연이 어머님이 오페라를 좋아하신다고 해서, 주말에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는 작품을 무작정 예매했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아 좌석이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VIP석은 남아있었다. 오페라는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선생님이 TV를 통해 짧게 보여준 ‘카르멘’이라는 작품이 전부인 나다. 그냥 막연히 ‘오페라 그까짓 거 어려워봤자 뮤지컬과 비슷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관람했는데, 시연이 앞에서 잠만 쿨쿨 자고 말았다. 몇 시간 동안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태리어로 뭐라고 떠드는 모습은 정말 고역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시연이 어머님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공연을 보고 계신 것과 달리, 윤 사장님은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힘겹게 졸음을 견디고 계셨다. 애처로웠다. 아, 정말 동병상련의 아픔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우리 마 서방 덕분에 좋은 구경했네. 호호호. 시연이 아빠가 오페라를 별로 안 좋아해서, 혼자 오기도 청승맞아, 한동안 못 봤는데 고마워, 마 서방.”
약혼식이 끝나자 시연이 어머님도 말씀을 편하게 하셨다. 항상 꼬박꼬박 ‘마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대하셔서 불편했었는데, 내겐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어머님이 즐거우셨다니 다행이네요.”
“우리 이이는 공연 내내 졸더라고. 앞으로는 저 사람은 빼고 우리 세 사람만 와서 즐거운 시간을 가져야지 안 되겠어.”
‘그냥 존 건 다행이죠. 저는 퍼질러 잤습니다. 어머님.’
솔직하게 말하고 오페라는 멀리하고 싶었지만, 기분 좋게 웃으시며 말씀 하시는 시연이 어머님의 모습에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다행히 내가 자는 모습은 못 보셨던 것 같다.
“여보. 나 안 졸았어. 얼마나 열심히 봤다고.”
“흥. 됐어요. 눈을 껌벅껌벅하면서 졸린 눈을 비비는 모습이 얼마나 처량했는지 알아요? 힘들게 따라다닐 것 없어요. 이제 같이 공연 볼 남자가 새로 생겼으니까. 호호호.”
시연이 어머님은 윤 사장님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내 팔짱을 끼셨다.
“아... 아니. 당신이 왜 동수 팔짱을 껴?”
“어때요? 이제 사윈데.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말도 몰라요?”
“그럼 나는?”
“아빠. 오늘은 제가 팔짱 껴드릴게요. 히히.”
“그럴까?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우리 시연이밖에 없네.”
오후 관람을 마친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내가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발길을 옮겼다.
“출판사 일은 잘 돼 가십니까, 어머님?”
“아직은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재미있기는 해. 내가 그동안 집안 일만 한 게 억울할 정도로. 다행히 시연이 책이 잘 팔려서 돈 버는 재미도 제법 느끼고.”
“시연이 책은 얼마나 팔렸습니까?”
“지금 판매 속도면, 이번 달까지 포함해서 20만부 정도 나갈 걸?”
“네? 그렇게 많이 팔려요?”
시연이 어머님이 출판사를 인수하고 투자를 아끼지 않은 다음부터 시연이 책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래도 20만부라니. 책값이 15,000원이니까 출판사가 6,000원만 먹는다고 해도 12억이다.
“나도 우리 딸이 이렇게 대단한 작가인지는 몰랐다니까. 이번 달 결산이 끝나면 마 서방 통장으로 9천만 원 정도 입금될 거야.”
“저는 왜요?”
“왜긴 왜야? 공동 저자나 마찬가지인데.”
“아니. 저는 그냥 구성만 살짝 바꾸고, 사진 편집정도 밖에 한 게 없는데요?”
“어쨌든 편집자로 이름 올렸잖아. 그리고 마 서방 아니었으면, 그냥 묻일 뻔 한 작품이고. 우리 직원도 아니니 그냥 퍼센테이지로 주기로 결정했어. 그래 봤자. 고작 3%야. 시연이는 12%나 주기로 했는데, 그 정도는 약과지.”
“계약서 다시 쓰셨습니까?”
“그럼. 누구 때문에 출판사를 시작했는데. 마음 같아서는 20% 이렇게 주고 싶은데, 초출인 다른 작가와 형평성 때문에 12%로 결정한 거야. 직원회의에서 그러기로 결정했으니 마 서방도 부담 없이 받았으면 좋겠어.”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지난 번 스포츠센터 로열티 건도 그렇고 안 줘도 되는 돈을 자꾸 챙겨주시려고 한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니 거절하기 어려웠다. 우리 회사와 윤 스포츠센터간의 계약은 이미 완료 되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내가 더 고맙지. 윤 스포츠센터에서 이용하는 책자를 맡아보라는 조언 덕분에 크지는 않아도 안정적인 수익 구조가 하나 생겼고, 동지랜드도 소개해줬잖아. 규모는 작아도 직원들 보너스 정도는 챙겨줄 금액은 되더라고.”
“아니, 윤 스포츠센터와 계약을 한 것은 내 덕분인데 누구한테 고맙다는 거야?”
“당신도 고마워요. 호호호.”
“엄마, 나는?”
“그러고 보니 우리 시연이가 제일 일등공신이네. 고마워, 우리 딸.”
“네. 엄마. 히히히.”
“그런데 마 서방.”
“네, 어머님.”
“이번에 떠들썩한 스캔들 마 서방 작품이야?”
“네?”
갑작스러운 시연이 어머님의 질문에 나는 윤 사장님의 얼굴을 쳐다봤다. 윤 사장님은 나를 보며 고개를 흔드셨다. 아무 이야기도 하시지 않았다는 뜻인 것 같다.
“그렇게 시연이 아빠 얼굴 쳐다볼 필요 없어. 그 정도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으니까.”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스캔들이 우리 그룹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일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기 힘들다.
“어떻게요?”
“마 서방이 지난주에 제주도 출장을 갔잖아. 원래는 금요일에 올라와야 하는데, 급한 일이 있다며 며칠 미뤘다며.”
“그랬죠.”
“그런데 사건이 터진 게 제주 동지호텔이잖아. 그것도 마 서방이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헬스클럽이고. 그 정도 정보만 있으면 쉽게 유추할 수 있지. 사실 그것 말고도 또 있지. 시연이가 지난 주 내내 시무룩했거든. 우리 시연이가 저러는 건 마 서방이 바빴을 때뿐이잖아. 이것저것 정황을 보니 결론이 나더라고.”
“엄마!”
“깜짝이야. 별로 창피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알았어. 그만할게. 호호호.”
“동수씨. 저 하나도 안 시무룩했었어요. 엄마가 장난친 거예요. 알죠?”
“알았어. 하하하. 그래도 급한 일은 대강 마무리했으니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야.”
“정말이요? 히히.”
내 말에 시연이의 얼굴이 활짝 폈다. 하나도 안 시무룩했다고 하더니...
식사를 마치고 시연이 집에 들러 간단하게 차를 마신 후 집으로 돌아왔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시연이가 좋아하니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앞으로는 종종 이런 자리를 마련해야 할 것 같다.
============================ 작품 후기 ============================
예비사위와 장모가 팔짱끼는 거 이상하지 않죠?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드라마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전 그 모습이 보기 좋더라고요. 물론 팔에 살짝 손만 얹는 가벼운 팔짱입니다. ^^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