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3 한 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계약해지 결정 당장 철회하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동지호텔은 각성하라.”
“성폭행 범이 웬 말이냐, 재평가를 요구한다.”
“정규직 전환을 지금 당장 시행하라.”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호텔 입구 왼편에 모여 여러 가지 구호를 외쳤다. 제일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이런 집회가 익숙하지 않은 듯 적극적으로 따라하지는 않았다.
“저기, 이야기 좀 나누시죠.”
“누구십니까?”
“동지그룹 본사에서 나왔습니다.”
“본사요? 동지호텔이 아니고요?”
“네. 저는 D&Y휘트니스 클럽 프로젝트 팀의 마동수 대리라고 합니다.”
“대리요? 우리가 우습게 보였나보네요. 겨우 대리를 이곳에 보낸 걸 보면요.”
선동하던 남자는 시작부터 나의 심기를 건드렸다. 선동하는 모양새가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덩치가 좋은 다른 남자 트레이너에 비하면, 굉장히 왜소해보였다. 딱 봐도 헬스클럽과는 연관이 없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우선 이야기부터 들어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냥 본사 윗분들에게 여러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십시오.”
“필요 없습니다. 최소한 부장급 이상의 간부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무작정 올 수는 없지 않습니까? 최소한 정확한 요구사항이 뭔지는 알아야 뭔가 협상안을 가지고 이곳에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구사항은 여기 모인 분들이 들고 있는 피켓을 보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재계약에, 전원 정규직 전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전부가 아니죠. 두 달 가까이 무직 상태였으니 그에 대한 정확한 보상과 위로금도 함께 지급하셔야 합니다.”
“위로금이요?”
“당연한 이야기 아닙니까? 정당하지 못한 평가로 계약해지를 당했으니 정신적 충격에 따른 위로금도 따라야하는 것 아닙니까?”
이 작자가 정말 협상을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어느 정도 상식선이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이건 그냥 시간을 끌어 우리를 계속 곤란하게 만들겠다는 수작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본사에서는 지금 여러분들에 대한 업무평가서를 재검토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좋은 소식이 들릴 수도 있습니다.”
“재검토라니요? 성폭행 범이 평가한 내용은 저희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재검토가 아니라 전면 재평가를 해주셔야죠.”
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집회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끼어들어 내 말을 막았다. 도지광을 자꾸 물고 늘어졌다. 마음이 답답했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여기서는 논쟁을 할 수 없었다.
“지금 여긴 제주도에서 올라온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그게 전부 당신네들 때문이 아닙니까? 생활고에 시달려 비행기 값도 구하지 못하는 입장이니 어떻게 여길 올라옵니까? 그리고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결국 신뢰할 수 없는 업무평가인건 마찬가지입니다.”
교묘한 말솜씨를 보니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네?”
“제가 알기로 그쪽은 해고자가 아닌 것 같은데, 왜 당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도록 막으시냐는 겁니다.”
“제가 부탁드렸습니다.”
내 말에 옆에 있던 덩치 좋은 남자가 다가와 설명을 했다.
“부탁이요?”
“네. 친한 형님인데, 저희의 억울한 상황을 보고 도와주시러 온 겁니다.”
억울한 상황을 보고 도와주러 왔다? 차라리 가야호텔의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였다.
“도와주러 오셨으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셔야죠. 자꾸 대화를 못하도록 막고 계시지 않습니까?”
“무슨 대화가 필요합니까? 이미 우리 조건은 말씀드렸고, 거기에 대해서 수용할지 말지 결정만 하면 되는 일 아닙니까. 아, 대리라서 그런 결정권이 없죠? 그러게 부장급 인사를 불러달라고 했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우리 요구사항을 전달해 주세요.”
“몇 가지 조건은 솔직히 좀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현실적인 요구를 하셔야 보고를 할 수 있습니다. 정규직 전환. 이게 좀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비정규직 직원이 아니라 전문직 프리랜서입니다. 프로입니다, 프로. 자부심을 가지셔야죠. 한 명을 가르치는 사람과 백 명을 가르치는 사람이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지 않습니까? 다른 계약직과 다르게 성과급 비율이 높은 이유가 바로 여러분들이 프로이기 때문입니다.”
“흥. 말이 좋아 프로지. 계약해지 통보를 받으면 아무 말도 못하고 그만 두는 게 현실입니다. 현실을 호도하지 마세요.”
“그래서 전면 재검토를 하는 겁니다. 주관적 평가점수는 전부 제외하고 객관적 평가 부분만 반영해서 억울한 분들에게 기회를 드리려고요.”
“그 객관적 평가라는 게 뭡니까”
“결근이나 지각을 자주했던 사람과 고객의 클레임이 많았던 사람만 문제 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일을 하다보면 아플 수 도 있는 것이지. 그런 사정도 알아보지 않고 일률적으로 평가하는 건 너무 불공평하죠. 그리고 고객 클레임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헬스클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미가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유혹이 많죠. 그런 유혹을 거절하다보면 회원들이 억하심정을 품고 클레임을 걸 수도 있는 일입니다.”
휴. 그의 억지 논리에 인내심이 툭하고 끊길 뻔했다. 말장난을 하자는 건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대처가 어려웠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아무리 조목조목 반박을 해봐야 억지를 부리는 사람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
“그럼 어떤 평가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제게 물으시면 어떡합니까?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평가서를 만드는 일은 당신들이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졌다, 졌어. 할 말이 없다.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논리적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 해고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저 작자가 막고 있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호호호. 많이 춥죠? 힘드실 텐데 따뜻한 음료와 빵이라도 드시고 하세요.”
“하하하. 감사합니다. 힘드실 테니, 나눠주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정 주임이 호텔 측에 부탁해서 먹거리를 가져왔다. 원래는 이런 것으로 호감을 산 다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음식을 직접 나눠주며, 어떤 개인적 접촉도 미연에 차단했다.
어쩔 수 없이, 일단은 물러나기로 했다. 좀 더 집회를 지켜보다가 그들이 지치면 그때 다시 한 번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
“이거 쉽지 않아.”
“그러게요. 보통 철두철미한 사람이 아니네요. 뭐하는 사람일까요?”
“몰라. 해고자 중 한 명과 친한 사이라고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무래도 가야호텔과 연관성이 깊어 보여.”
“이렇게 나오면 저 사람들에게도 좋을 게 없는데...”
“그러니까. 저놈은 협상할 의지가 없어. 사람들이 더 곤란해지든 말든 무조건 시간만 끌어보자는 생각인 것 같아.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도, 철벽마크를 하니 그럴 수도 없고, 정말.”
“제가 한 번 더 상의 탈의라도 할까요?”
“아서라. 성문제까지 불거진 상황에서 정 주임이 그러면 우리 회사 완전 막장 돼.”
“호호호. 농담이에요. 저도 답답하니까.”
Rrrr
정 주임과 별 도움도 안 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윤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잠깐만. 전화 좀 받고. 네, 사장님.”
“또 일이 생겼다며?”
“네. 석나련 실장이 보고 드릴 것 같아서, 따로 연락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가 뭐래? 그래서 상황은 어때?”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이상한 놈이 하나 껴있습니다.”
“이상한 놈?”
나는 조금 전에 겪었던 일에 대해 윤 사장님에게 남김없이 보고했다.
“... 계속 억지만 부리니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가야호텔에서 간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껄껄. 마 대리가 말싸움에서 밀려?”
“밀린 건 아니죠. 둘이서 일대일로 이야기하면 밀릴 일이 없죠. 여긴 보는 사람 눈이 있으니 제가 참고 있을 뿐입니다.”
“변명은... 어쨌든 방법이 없는 거잖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래도 고민해보면 무슨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죠.”
“언제 방법을 찾으려고? 그 작자가 화장실 간 사이에 몰래 이야기하려고? 그랬다가 더 큰 불신만 생길 걸? 그리고 이 일이 내일까지 넘어가면 일이 커질 수도 있잖아.”
약 올리려고 전화하신 걸까? 며칠 전에는 가족같이 생각한다며 감동을 주시더니 아픈 곳만 콕콕 찌르신다.
“그러니 손 놓고 기다릴 수도 없죠.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 수밖에요.”
“도와줄까?”
“네? 도와주시다니요?”
“내가 직접 가서 설득 한 번 해보지, 뭐.”
“어휴, 아니에요. 이 정도 일에 사장님이 나서시면 안 되죠. 그리고 무조건 꼬투리만 잡는 인간인데, 오셨다가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요.”
“이 녀석이 사람 무시하네. 나는 지금 성폭력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조차 불쾌해. 이런 일은 빨리 끝내는 게 서로에게 좋아. 내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지켜보라고.”
“여보세요. 여보세요. 사장님. 아, 끊으셨네.”
도와주신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정말 걱정되었다. 그 이상한 놈에게 무슨 봉변은 당하지 않을까 우려가 됐다. 그리고 그 양반 성격이 보통이 아니신데, 와서 무슨 사고라도 치실까봐 불안하기도 했다.
“정 주임. 큰일 났다.”
“네? 무슨 일인데요?”
“윤 사장님이 직접 오신다고 하셔.”
“윤 사장님이면, 윤 스포츠센터 사장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에엑. 그분이 왜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당장 여기 호텔 지배인님에게 연락부터 드려야죠.”
내 말을 들은 정 주임은, 얼마 전까지 호텔관련 업무를 해서 그런지, 갑자기 일어나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윤 사장님이 보통 분은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호들갑 떨 것 없어. 공식적인 일은 아니니까.”
“그래요? 그래도 그렇지. 허긴, 마 대리님하고는 좀 각별해 보이긴 했어요. 처음에 마 대리님이 저를 윤 사장님에게 소개시켜주는데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왜. 일개 대리가 윤 사장님과 농담 따먹기 하니까 이상했어?”
“농담 따먹기가 다 뭐에요. 둘이서만 접견한다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는데.”
“놀랄 것 없어. 원래 성품이 소탈하셔서 그래.”
윤 사장님과 시연이의 관계를 모르는 정 주임이라 그냥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소문이야 최대한 늦게 나는 게 좋다.
1시간 정도 기다리자, 검은색 벤츠 승용차가 우리 앞에 섰다.
“오셨습니까.”
“응. 수고가 많아. 시끄러운 걸 보니 저곳인가 보군. 저기로 가자고.”
“그냥 무작정 가시려고요?”
“그럼? 뭐 따로 준비할 거라도 있나? 걱정 말고 지켜봐.”
윤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당당하게 집회하는 곳으로 향하셨다.
“계약해지 결정 당장 철회하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동지호텔은 각성하라.”
“성폭행 범이 웬 말이냐, 재평가를 요구한다.”
“정규직 전환을 지금 당장 시행하라.”
그 작자는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열심히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좀 전에 내가 갔을 때와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자리에 앉아 구호를 따라하던 사람들이 행동을 멈추고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윤 사장님이 누군지 아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상황을 잘 모르는 주변 동료들에게도 뭐라고 이야기를 속삭였다. 잠시 후 선동하던 남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얼굴은 엄청난 놀라움과 감동이 뒤섞여있었다. 뭐랄까? 꼭 평소 엄청나게 존경하던 사람을 만난 듯한 표정이었다.
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저들에게 윤 사장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번엔 또 뭡니까? 부장님이라도 오셨나보네요. 어쩌죠? 너무 기다리다보니 지쳐서 부장급으로는 안 될 것 같은데.”
“나 윤승태요.”
깐죽거리는 남자 앞에서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이름을 밝혔다.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으셨다. 여기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라는 거만함이 묻어났지만, 그 모습이 정말 위풍당당했다.
그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후배라는 사람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추운데 고생이 많습니다. 여러분.”
나직한 한 마디에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심지어 어떤 여자는 눈물까지 흘렸다. 뭐가,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나오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윤 사장님과 저들에게는 내가 이해하기 힘든 어떤 유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집회는 끝났다. 당사자들과 대화를 나눴고,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사실 업무평가 결과와 상관없이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원만한 합의조차도 필요가 없었다.
“너무 과하신 결정 아니십니까?”
“염려 마. 각 지점들 오픈할 때까지는 우리가 데리고 있을 테니까.”
“제주도 말고는 객관적 업무평가에서 문제 있었던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가르치면 돼. 내가 장담하는데, 저들 중 대부분은 예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직원이 될 거야. 이 봐 마 대리.”
“네. 사장님.”
“한 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야. 그리고 아픈 만큼 성숙하는 법이고. 사람을 대할 때 항상 그 사실을 잊지 말게나.”
서울로 돌아가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윤 사장님의 모습이 평소보다 유달리 커 보였다.
============================ 작품 후기 ============================
이번 챕터는 이렇게 짧게 끝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편은 2010년 3월에서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