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7 소제목 미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시연이의 방
시연이에게도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었다.
오늘 그녀의 기분은 꿀꿀했다. ‘이혼’이라는 말이 자신의 평정심을 그렇게 흔들어 버릴 줄이야. 고등학교 졸업 후 꽁꽁 숨겨왔던 기질이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와 스스로도 많이 놀랐다.
고등학교 시절 시연이는 일명 ‘싸움 짱’이었다. 처음엔 자기도 싸움을 잘하는지 몰랐었다. 지금은 동수의 제수씨가 된 단유라 선생의 뒷담화를 하는 친구 둘과 싸웠고, 어렵지 않게 두 명을 혼내주면서 싸움에 대한 재능을 깨달았다.
어릴 때부터 아빠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운동을 했고, 키가 큰다는 이야기에 홀랑 넘어가 열심히 무술 수련했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시연이의 인생이 조금 달라졌다. 처음에는 사소했다. 불량기 있는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살짝 발휘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일이 점점 커지더니 결국 일진이라 불리는 아이들까지 제압하고 말았다.
여자 아이가 단순히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그녀의 모범생 이미지가 도움이 됐고, 만만한 집안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학교 일진들도 또래의 남자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었다. 머리가 똑똑한 시연이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그런 사실을 최대한 활용하기도 했다.
학교 내 활보하던 일진들만 평정하면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자신이 다니던 학교 학생들이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돈을 빼앗기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게 전부 일진을 해체시킨 시연이 때문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아이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그렇게 주변 학교 여자아이들과 지긋지긋한 싸움이 시작되었고, 윤시연이라는 이름이 잠원동을 넘어 서초구까지 알려지고 말았다.
시연이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은 명성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녀 또한 불량기 많은 질 나쁜 학생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가 사랑하는 동수에게는 정말 숨기고 싶은 과거였다.
“휴. 그래도 주먹질이나 발길질은 안 해서 다행이야. 이상하게 소문나면 안 되는데. 남자들은 왜 자꾸 나를 귀찮게 하는 거지. 나도 내가 어느 정도 예쁘다는 사실은 알지만, 저럴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흠...”
시연이는 거울을 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 스스로도 자기가 예쁜 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다. 심지어 콤플렉스도 있었다. 바로 여성스러움이다. 그녀가 이상적으로 꼽는 여성스러움에 자기의 외모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특히 백우찬의 연인인 조연서이라는 사람을 만난 후 콤플렉스는 좀 더 심해졌다.
170cm가 넘는 큰 키. 한때는 키카 컸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큰 키가 싫었다. 친구들과 함께 다니면 거의 머리 하나가 불쑥 올라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한다. 그럴 때면 여자가 아니라 거인이 된 기분이 들어 우울했다. 작고 귀여운 고장희가 부러운 시연이었다.
남들보다 큰 입도 싫었다. 거울을 보며 웃으면 자기가 꼭 하회탈이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넓은 골반도 신경이 쓰였다. 이건 어릴 때부터 그랬다. 키가 작고 통통했던 중학생 시절에는 엉덩이가 뚱뚱하다고 해서 ‘엉뚱이’라는 별명까지 있었다. 키가 커지고 살이 빠지면서 잘록한 허리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골반이지만 예전에 받았던 놀림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마지막으로 앳된 얼굴. 시연이는 아직도 솜털이 보송보송한 자신의 얼굴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자라면 조연서처럼 성숙함이 물씬 풍겨야하는데 그녀의 앳된 외모는 그런 성숙함이 부족한 것 같았다. 대학교 2학년이 되면서 조금 나아지긴 했다. 그리고 화장법, 머리 손질법, 성숙하게 보이는 코디법 등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만족을 모르는 그녀였다.
“그럭저럭 예쁘게 생겨도 남자들이 이렇게 귀찮게 하는데, 우리 동수씨처럼 멋진 남자는 여자들이 가만 두지 않을 것 아냐. 히잉. 나도 연서 언니처럼 성숙해보이고 싶은데...”
시연이가 이렇게 조급해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달에 있었던 일이다. 시연이와 동수가 즐겁게 데이트를 하는데, 섹시함이 돋보이는 조금 야한 옷을 입은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동수가 슬며시 그 여자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기분이 상한 시연이가 그에게 따졌더니 동수가 하는 대답이 가관이었다.
‘시연아, 이건 남자들의 무의식에 가까운 영역이야. 저 여자에게 매력을 느껴서 쳐다본 건 절대 아니야. 애인이 있거나 유부녀인 여자들의 TV에 나오는 잘생긴 배우나 가수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그리고 동수와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애인이 있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인과 인기배우 OOO 중 누가 더 멋지냐는 그녀의 질문에 친구들은 하나같이 당연히 OOO이 멋지다는 대답을 했다. 물론 애인이 더 사랑스럽다는 말도 덧붙였지만...
솔직히 시연이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눈에는 동수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데, 친구들은 자신들의 애인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좀 이상했다. 상황이 이러니 동수에게 뭐라고 따지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동수가 다른 여자를 쳐다보는 게 싫었다. 화장이나 코디 같은 것들을 열심히 배우는 이유도 자신이 부족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Rrrr
“응? 동수씬가? 에이, 장희 언니네. 네, 언니.”
시연이는 동수가 아니라 장희라는 사실에 잠깐 실망했지만, 금방 다시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시여나... 흑흑. 시여나... 왜 이러케 형진이가 보구 시푸냐...”
장희는 술에 잔뜩 취해 혀가 꼬여 제대로 발음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언니. 목소리가 왜 그래요? 술 많이 마셨어요?”
“으응. 내가 조옴 마셔서... 나쁜 노미 너무 보고 싶자나.”
가끔 전화로 투정처럼 형진이가 보고 싶다는 말은 했지만, 오늘처럼 술에 취해 혀꼬이는 발음으로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대강의 상황을 아는 시연이는 장희가 불쌍했다. 자신도 길고 긴 짝사랑을 해봤기 때문에 남의 일 같지는 않았다.
예전, 신입생 환영회에서 동수를 다시 만났을 때 정말 설렜었다. 그런데 동수는 시연이를 알아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옆에 자기가 앉았는데도 신경도 쓰지 않고 술만 마셨다. 야속한 마음에 홀짝홀짝 혼자 술을 마시다가 기억이 끊기기까지 했었다.
“히잉. 언니 어떡해요. 형진 오라버니도 언젠가는 언니의 진심을 아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러언 날? 안 와. 저얼대로 안 와. 형진이 그 노옴 저엉말 나뿐 노미야. 흑흑. 나뿐 노옴. 차가운 노옴. 싸가지 엄는 노옴.”
“많이 만나본 건 아니지만, 형진 오라버니 마음도 넓고 참 좋은 분 같던데.”
“그러치? 걔가 쪼옴 그런 며니 이써. 예전에는 얼마나 사랑스러운 남자였는데. 그럼 뭐하냐고. 나한테는 그러케 차갑게 구는데. 시여나.”
“네. 언니.”
“그래서 내 마음이 더 아파. 그러케 착한 녀석이 갑자기 차갑게 구니 도무지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어쩌면 조을까? 저엉말 힘드러.”
“언니. 그래도 힘내세요. 여기서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사랑을 쟁취하는 거예요. 형진 오라버니라면 반드시 언니의 마음을 받아주는 날이 올 거예요.”
“그... 그럴까? 저엉말 그런 날이 올까?”
“그럼요. 제가 언니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아세요?”
“시여니 네가 왜 날 부러워해? 우리 집이 너희 집보다 쪼끔 더 잘 산다는 거 말고는 내가 너보다 나은 게 없자나.”
“언니는 정말 귀엽잖아요. 그리고 난 멀대처럼 키만 커서 언니가 정말 부러워요.”
“흐음... 내가 쪼끔 귀엽기는 하지. 헤헤.”
“당연하죠. 그러니까 형진오라버니도 언니의 매력에 다시 빠질 거예요.”
“그... 그래서 말인데, 시여나.”
“말씀하세요, 언니.”
“네가 나 쪼옴 도와주면 안 될까?”
“제가요? 제가 어떻게요?”
갑작스러운 장희의 이야기에 시연이는 당황했다.
“그게 있지... 네가 동수에게 말해서 형진이를 설득해 볼 수도 이꼬...”
그럴 수는 없었다. 시연이 생각에 동수는 절대 그런 부탁을 들어 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화를 낼 수도 있다. 지난 번 출판사 일로 그가 화내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생각만 해도 겁이 났다.
“동수씨가 형진오라버니를 설득할 수 있을까요?”
‘안 된다.’라고 거절했어야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 은근히 돌려서 말했다.
“그러엄. 너는 잘 모르게찌만 형진이가 동수를 얼마나 조아하는데... 가치 어울리는 동기들 중에 제일 믿는 사람일 꺼야. 동수 말이라면 한 번 생각은 해볼 꺼야.”
시연이의 말이 은근한 거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장희는, 아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
“그... 그런데 언니. 제가 동수씨를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데요...”
“시여나. 넌 할 수 이써. 그러엄. 동수는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널 사랑한다니까. 그 노옴 성격에 그 정도면 어엄청 대단한 거야. 그러니 너언 할 수 이써. 나도 너 마니 도와줬잖아. 응? 시여나?”
‘나도 널 도왔으니, 너도 날 좀 도와주라.’라는 말. 평소의 장희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엉뚱하지만 멋지고, 쿨한 언니가 오죽하면 저럴까 싶었다. 자꾸 마음이 약해졌다.
“저기 언니.”
“응?”
“제가 이야기는 한 번 해볼게요. 그런데 너무 기대는 하지마세요. 동수씨 성격이면 오히려 화를 낼지도 모르거든요.”
“호호호. 고마워. 시연아. 동수 화 안 낼 거야. 그러엄. 네가 얼마나 이쁘고 사랑스러운데. 나는 너만 믿을 게. 너무 늦어찌? 미안해. 전화할 사람이 없어써 그래.”
“아니에요. 언제든지 전화해도 괜찮아요.”
“어유, 기특한 것. 얼른 자. 나도 이제 자야게따. 안뇽. 시여나.”
“네. 언니도 주무세요.”
전화는 끊었지만, 시연이의 마음은 답답했다. 동수가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장희를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파 거절할 수가 없었다.
D&Y휘트니스 클럽의 해외 진출 교두보 마련 임무를 맡았지만, 당장 일이 많아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바쁜 건 다시 한 번 타당성 조사를 하고, 가능성이 있는 곳을 발견한 다음이다. 미국은 예전에 뉴욕만 대상으로 했고, 중국과 동남아는 단순히 가능성만 확인하는데 그쳤었다. 우선 한 달 정도 시간을 가지고 리서치 업체에 의뢰한 다음 거기서 나오는 결과를 보고 결정을 해야 했다. 그 덕분에 요즘은 평소보다 자주 시연이를 만나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할 말 있으면 해. 자꾸 눈치 보지 말고.”
오늘 시연이는 평소와 뭔가 달랐다. 표정도 좀 어색하고,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우물쭈물 거렸다. 이러다간 오늘 데이트가 엉망이 될 것 같아 내가 먼저 아는 척 했다.
“아... 아닌데요. 할 말 없어요.”
“윤시연.”
“네?”
“눈에 다 보여. 그러니까 마음 편하게 해. 설마 ‘우리 끝내요.’ 이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전 동수씨랑 늙어 줄을 때까지 함께 할 거라니까요.”
“하하하. 그러니 자꾸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해 봐.”
“음. 동수씨.”
“응?”
“듣고 화내면 안 돼요.”
“알았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화는 안 낼게.”
“그게 있죠. 형진오라버니와 장희 언니 두 사람 다시 잘 되게 도와주면 안 될까요?”
“뭐?”
“히잉. 화 안 낸다고 했잖아요.”
시연이의 어이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젠장. 고장희 이 녀석이 정말!
“화낸 거 아냐. 그냥 놀라서 그래. 그런데, 시연아.”
“네, 동수씨.”
“안 돼.”
나는 시연이와 사귀면서 처음으로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처음부터 조근조근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연이가 서운하더라도 좀 단호해야 할 것 같았다.
“치. 알았어요, 동수씨.”
“뭐?”
먼저 단호하게 이야기하고, 서운해 하면 잔소리를 좀 하려고 했다. 남녀 문제에 끼어드는 게 아니다, 연인이라도 상대가 싫어할 줄 아는 것을 부탁하는 것은 좋지 않다, 형진이가 또 다시 아픔을 겪는 것은 싫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려고 폼을 잡고 있었는데, 시연이의 대답은 너무도 간단하게 끝났다.
“알았다고요. 이제 우리 데이트해요.”
너무나 태연한 모습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나였다.
“아... 안 서운해?”
“글쎄요. 사실 장희 언니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동수씨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소용없는 일 같아서요. 괜히 길게 이야기해봤자 서로 마음만 상하죠, 뭐.”
“그... 그래?”
“평생 사랑하며 다정하게 지내도 모자랄 시간에 우리 일도 아니고 남의 일로 다툴 필요는 없잖아요. 나 배고파요, 어서 밥 먹으러 가요. 히히.”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껴오는 그녀를 보면서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쿨해도 너무 쿨했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 시연아?
============================ 작품 후기 ============================
중소기업기본법 시행령에 대해 제가 잠깐 착각을 했습니다. '또는'을 '그리고'로 착각해서 엉뚱한 해석을 했습니다. 스포츠 및 여가관련 사업의 경우 상시근로자수 200명 미만 또는 매출액 200억 이하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속해도 중소기업이 됩니다. 수정했습니다.
처음에 시연이가 자신에게 대시하는 남자에게 반말을 하는데,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존댓말로 수정했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