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8 소제목 미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그녀의 사정
장희에게 부탁을 받은 시연이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동수가 처음 형진이와 장희의 이야기를 해줄 때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절친한 친구가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해 무척이나 안타까워하는 모습이었다. 장희에 대한 원망도 남은 것 같았다. 괜히 그러겠다고 말한 것은 아닐까 후회가 되었다.
분위기를 망칠까봐 즐겁게 데이트를 하고 헤어질 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걱정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동수가 먼저 알아챘다.
“듣고 화내면 안 돼요.”
“알았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화는 안 낼게.”
얼핏 들으면 화를 내지 않겠다는 말 같지만, 정확하게 따져보면 화‘는’내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 말을 듣자 더욱 갈등이 되었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게 있죠. 형진오라버니와 장희 언니 두 사람 다시 잘 되게 도와주면 안 될까요?”
“뭐?”
“히잉. 화 안 낸다고 했잖아요.”
“화낸 거 아냐. 그냥 놀라서 그래. 그런데, 시연아.”
“네, 동수씨.”
“안 돼.”
동수의 단호한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사귀기 전 ‘오발탄’이라는 식사를 함께하다가 취객들과 시비가 붙었던 날, 그는 시연이에게 ‘앞으로는 귀찮게 하지 말고 대학생활이나 잘해.’라고 단호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니라는 것은 아는데, 괜히 그때의 동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눈치 못 채게 애써 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치. 알았어요, 동수씨.”
“아... 안 서운해?”
“글쎄요. 사실 장희 언니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동수씨의 단호한 표정을 보니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소용없는 일 같아서요. 괜히 길게 이야기해봤자 서로 마음만 상하죠, 뭐.”
“그... 그래?”
“평생 사랑하며 다정하게 지내도 모자랄 시간에 우리 일도 아니고 남의 일로 다툴 필요는 없잖아요. 나 배고파요, 어서 밥 먹으러 가요. 히히.”
황당해하며 너털웃음을 짓는 그가 평소보다 더 섹시해보였다. 서운한 마음이 잠깐 들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휴, 내가 정말 동수씨를 사랑하긴 하나보다. 이런 상황에서도 동수씨가 멋져보이다니. 히히. 장희 언니 미안해요.’
시연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동수의 팔을 좀 더 깊숙이 껴안았다.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왔지만 기분이 아주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시연이에게 서운하거나 화난 것이 아니라 장희 녀석이 괘씸해서다. 특히 이런 일 때문에 시연이가 내 눈치를 봤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부탁할 말이 있으면 순진한 시연이를 꼬드기지 말고 내게 직접 이야기를 했었어야 한다.
시연이를 만만하게 봤다는 것은, 나를 만만하게 본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장희는 모르는 것 같다. 작년에는 진경이가 나와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책 내용을 바꾸더니, 여자 동기들은 하나같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Rrrr
이대로 뒀다가는 장희가 또 엉뚱한 일을 벌일 것 같았다. 진경이처럼 수습하기 힘든 사고를 치기 전에,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장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하시고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The dial is wrong. Please check the number and call again.”
“아주 지랄을 해요. 전화를 그따위로 받는 걸 보니 뭔가 잘못한 게 있다고 생각은 하나보지?”
“호호호. 그... 그런가?”
“그런가? 너 내가 아주 우습게 보이나 보다?”
“그게 있지, 동수야. 내가 요전 날 술이 좀 취해서 말이지.”
이런 식으로 발뺌을 하시겠다? 어림없는 소리다.
“술이 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는 소리야? 그랬으면 전화를 그따위로 받았을 리는 없고. 그럼 술이 취해서 주정이라도 했다는 이야기야?”
“그... 그럼.”
“야, 고장희!”
“응?”
“너 정말 한 번 죽어볼래? 어디서 구라를 까고 있어. 내가 전화를 걸자말자 그따위로 받았다는 건 너도 찔리는 게 있다는 거잖아. 주정을 했다고 해도, 아니다 싶으면 다시 전화해서 없던 일로 하던가했어야지. 얌체처럼 혹시나 하고 기다려 놓고는 어디서 수작이야.”
진경이 일을 겪고 보니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거친 단어를 써가며 내가 얼마나 심기가 나쁜지를 그대로 표현했다.
“수... 수작이라니. 야, 너 말 너무 심한 것 아냐?”
“심해? 정말 심한 게 어떤 건지 한 번 느껴 볼래? 네가 시연이를 우습게보지 않았으면 그런 부탁을 할 수가 없지. 아무 것도 모르는 애를 살랑살랑 꼬셔서 나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수작이 아니면 뭐야?”
“나도 오죽했으면 그랬겠냐? 넌 사람이 왜 그렇게 야박하냐. 친구가 돼가지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친구? 형진이는 내 친구 아니고? 전에도 이야기했지? 네가 마음이 아프든 어쩌든 난 형진이가 더 중요하다고. 너 때문에 그 녀석이 상처받는 게 싫다고. 내 말은 귓등으로 들었어?”
“보고 싶은데, 어쩌라고.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자꾸 생각나는데 어떡해. 밥 먹다 생각나고, TV보다 생각나고, 길가다가 생각나고, 누우면 생각나서 나도 미칠 지경이라고.”
“그래서 어쩌라고? 겨우 그딴 것 가지고 아프다고 징징거리지 마. 사랑하던 여자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느껴지는 절망감이 어떤 건지 네가 알기는 알아? 군대에 있어서 제대로 찾으러 다닐 수도 없는 답답함을 네가 알기나 해? 그녀석이 혹시라도 탈영은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우리 심정은 어떻고? 차라리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나았을 거야. 그럼 단념이라도 하지. 생사조차 확인하지 안 되니 미련도 못 버리고 얼마나 마음 고생했는데, 네가 사람이면 이러면 안 되는 거야.”
형진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장희와 처음 만났을 때도 분명히 했다. 그런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이러는 그녀가 짜증났다.
“알아. 아니까 이러는 거야. 그런 미안함 들은 앞으로 살면서 갚고 싶어.”
“미안하면 그냥 잊어. 괜히 형진이 흔들지 말고. 아니지. 그 녀석이 흔들렸으면, 네가 시연이를 통해 나에게 부탁할 일도 없었겠지.”
“도와줘, 동수야.”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이야기를 뭐로 들은 거야? 막말로 회장님이 가만히 계실 것 같아? 넌 어떻게 네 생각만 하냐? 대 동지그룹 금지옥엽으로 살다보니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거야?”
“비꼬지 말아줘. 내가 아빠 딸로 태어난 게 잘못은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 아빠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계속 조르면 설득할 수도 있을 거야.”
나쁜 사람이 아니야? 계속 조르면 설득할 수 있어? 정말 순진한 소리 한다.
“그동안 형진이가 받을 상처는? 그런 건 생각도 못 해봤지? 너라는 녀석 정말 끝까지 이기적이다.”
“너... 너도 시연이랑 잘 됐으면서 왜 그렇게 세상을 삐딱하게만 봐?”
“뭐?”
“우리 집만큼은 아니라도 시연이 집안이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냉정하게 따져보면 오히려 나보다 시연이가 더 대단하지. 오빠들이 셋이나 있으니 재벌집안 딸이라고 해도 내가 받을 재산은 동지랜드를 제외하고는 별로 없어. 그런데 시연이는 외동딸이잖아. 윤 스포츠센터 하나만 놓고 본다면, 동지랜드보다 훨씬 낫지. 게다가 시연이는 겨우 스무 살이잖아. 예쁘기도 좀 예뻐. 네 논리대로라면 너도 엄청 반대에 부딪쳤어야 했어.”
젠장. 좀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장희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난 참 운이 좋은 놈이었다. 윤 사장님이 가끔 꼬장을 부리셨지만, 사실 그건 어린 딸이 있는 평범한 집안의 아버지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
“나... 난 시연이 재산에 관심 없거든.”
아, 내가 말해놓고도 참 옹색했다.
“형진이는 관심이 있고?”
“시연이 아버님과 회장님이 똑같은 줄 알아? 회장님이 얼마나 독한 성정이 있으신 분인데. 동지그룹을 재계 5위의 위치로 올려놓으셨다는 것 자체가 보통 독한 마음 없이는 힘들어.”
“그저 그런 그룹을 재계 5위로 만든 우리 아빠나, 작은 헬스클럽을 지금의 윤 스포츠센터로 만든 시연이 아버님이나? 결국 딸을 사랑하는 아빠라는 사실은 똑같거든.”
다르다. 직원을 대하는 마인드부터 두 분은 다르다. 그렇다고 장희 앞에서 그녀의 아버지 때문에 도산한 수많은 기업들 이야기나, 직원들을 소모품 취급하는 악독한 모습을 말하는 것은 어려웠다.
“아무튼 난 도와줄 수 없어. 그리고 다시는 시연이를 이용하려고 들지도 말고. 그럼 내가 가만 안 있을 거야.”
“동수야, 제발.”
“할 말 다 했으니까 난 끊는다. 다시는 이런 일로 통화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동수야...”
장희가 계속 뭐라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난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유가 어떻고, 상황이 어떻든 간에 남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것은 사양이다. 남이 아니라 친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형진이와 장희가 이어진 상황이라면 나는 아낌없이 두 사람을 축복해줄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나서서 두 사람이 다시 잘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형진이 마음이다. 나는 녀석이 다시 상처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휴. 내가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건가?”
그런데 장희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대학이라고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우리 부모님과는 달리 형진이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다. 대단한 부자라고하기 힘들어도, 돈으로는 따지기 힘든 명망이 있다. 나에 비하면 사정이 훨씬 괜찮은데 선입견을 가지고 너무 안 된다고 단정을 지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썅. 우리 부모님이 어때서? 고장희 고게 이상한 자격지심을 들게 만드네. 이래서 사람은 비슷한 집안끼리 결혼을 하는 건데. 에이, 짜증나.”
스스로 우리 집안이 형진이 집안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잘난 집안이네 하며 목에 힘을 주고 다니면서 없는 사람들 등이나 처먹고 사는 인간들도 많은 세상에 평생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살아오신 우리 부모님이 훨씬 낫다. 잠깐 동안이나마 누군가와 비교했다는 자체가 부모님께 죄송했다.
나는 나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인데, 100억이라는 큰돈도 생겼는데, 가끔씩 작아지는 내 모습을 보면 씁쓸할 때가 있다. 어르신들이 왜 결혼은 비슷한 집안끼리 하라고 하는지 이해가 갔다. 가끔씩은 시연이가 그냥 평범한 집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자격지심은 나 아니라도 비슷한 처지라면 누구나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찌질해서 그런 건지 쉽게 판단이 들지 않았다.
며칠 후 형진이가 술이나 마시자면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술을 마실 때면 항상 친구들과 어울려서 마시기만 했지, 단 둘이 마신 적은 별로 없었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흔쾌히 그러자고하고 회사 퇴근 후 형진이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나갔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만 불렀어. 재형이가 알면 삐질 것 같은데.”
“흐흐. 그놈은 요즘 요트로 여자들 데리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아주 혼자 신이 나셨어.”
“아직도 그러냐? 정말 징하게 뽑아먹는다. 허긴, 추운 겨울에도 이용하던 녀석인데, 따뜻한 봄이 되었으니 오죽하겠냐?”
처음 시승식을 가지고 몇 번 더 타보기는 했지만, 요트에는 영 재미를 붙일 수 없었다. 여름이면 좀 재미있을까 싶었지만, 여름 한 철을 위해 여러 가지 비용을 들여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 좀 바보짓 같아 후회도 들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재형이는 달랐다. 아주 물 만난 물고기처럼 여자들을 바꿔가며 애용했다. ‘한강에 내 요트가 있는데, 같이 갈래?’라고 하면 다른 어떤 꼬드김보다 효과가 직빵이라나 뭐라나? 그렇게 해서 우리가 함께 산 요트는 재형이의 개인용 러브모텔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재형이 꼴도 보기 싫은데, 그냥 올 여름까지만 유지하고 팔아버릴까?”
“형진이 너는? 너도 재형이처럼 애용하기 그러지 그래?”
“내가 무슨. 여자도 없다.”
“여자가 없어? 네가, 왜? 아랫도리가 시원찮아졌냐?”
“그런가? 나도 모르겠다. 그냥 술이나 마시자.”
나의 농담에도 형진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술을 권하는 녀석의 얼굴이 좀 씁쓸해보였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일은 무슨. 그냥 봄을 타는 건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냥 내버려두고 일단 술부터 마셨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다 보면 이야기는 저절로 나올 것이다.
“뭔데 그래? 이제 슬슬 말해 보지 그래?”
1차에서 가볍게 맥주를 마시고, 자리를 옮겨 데킬라를 시켜 1병을 다 비울 때쯤 다시 물었다.
“너 혹시 장희 소식 들은 것 있냐?”
“누구? 설마 고장희? 갑자기 그 자식 이야기를 왜 꺼내?”
형진이가 고민하는 일이 장희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녀 때문에 3년 넘게 마음고생을 했는데, 왜 또 이러는지 장희가 원망스러웠다. 이럴까봐 형진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까지 한 것이다. 말을 꺼내고 씁쓸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녀석을 보니 마음 한편이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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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연재 일정이 들쑥날쑥해서 죄송합니다. 일도 일이고, 치과치료도 생각보다 금방 안 끝나네요. 하루 한 편은 꼭 올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