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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가 전부는 아니야-159화 (159/424)

00159  소제목 미정.  =========================================================================

(제 글에서 등장하는 상호와 이름들은 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장희를 보고 형진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를 한 것은 어쩌면 주제넘은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9년 만에 나타나서 ‘우리 형진이’라고 하며 호들갑을 떠는 그녀의 모습이 솔직히 가증스러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생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나의 경험으로 보면 사랑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신뢰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분명 험난한 길이 보이는데, 그것을 이겨내려면 단순히 사랑의 감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신뢰가 밑받침 되어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장희는 이미 한 번 형진이의 신뢰를 깨트린 사람이다. 한 번 떠난 사람이 두 번은 못 떠날까? 내가 못 미더운 것도 바로 그런 점이다.

“갑자기는 무슨. 그냥 잘 지니고 있나 싶어서 그러지.”

“그러니까 그게 왜 궁금하냐고?”

“휴, 모르겠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사실 말이야. 네 약혼식날 우연히 장희를 만난 다음부터 거의 몇 주 정도 계속 회사로 날 찾아오더라.”

“뭐?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서.”

“처음에는 그냥 모른 척 했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걔 때문에 좀 고생했냐?”

“말해 뭐하냐? 난 네가 걱정돼서 면회도 몇 번 갔었잖아. 지금 와서 하는 소리지만, 군바리가 군바리 면회 가는 거 쉽지 않은 일이다. 알지?”

“그러게. 미친놈들. 면회는 정말 고마웠는데, 볼 때마다 탈영은 안 된다는 헛소리를 해서 얼마나 짜증났는지 아냐?”

“헐. 이 자식 보게. 그때 네 몰골이 어땠는지 아냐? 당장 무슨 사고라도 칠 얼굴이었다니까! 우리도 오죽했으면 그런 소리를 했겠냐?”

“에이, 과장한다.”

“진짜야, 인마. 어휴, 내가 정말 사진이라도 찍어 놓는 거였는데.”

“탈영 그게 쉬운 일인 줄 아냐?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나도 잠깐 생각은 해본 적 있었어. 그런데 부모님 얼굴을 생각하니까 도저히 못하겠더라. 탈영을 하는 사람은 정말 독하거나,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야. 생각을 해봐라. 만약 갑자기 여자 친구가 사라져서 찾겠다고 가정해봐. 헌병대 피해 다니려면 숨어 지내야 하는데 제대로 돌아다닐 수나 있겠냐? 뭘 해보기도 전에 금방 잡힐 텐데, 탈영하는 놈이 바보지. 안 그러냐?”

형진이의 다른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웃으면서 말은 해도, 결국 탈영은 생각해봤다는 소리였다. 장희가 괜히 더 미워졌다.

“글쎄다. 나는 탈영자체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왜? 너도 군대 있을 때 여자 친구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잖아? 미정이? 미숙이? 미희? 아, 뭐였더라?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 나네.”

큭. 나도 그런 시절이 있긴 했다. 잊고 지낸지 오랜데 형진이 녀석의 말에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면회도 자주오고 편지나 소포도 종종 보내던 그녀가 언젠가부터 뜸해졌다. 졸업반이라 그런가보다 하며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병 말 호봉쯤인가 면회를 와서는 이별을 통보했었다.

다른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했다. 조금 억울한 생각은 들었다. 군대라는 곳에 있으니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배신감이 들지는 않았다. 나를 철저하게 이용해먹었다면 모를까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연인이 변심했다고 배신 어쩌고 하며 화를 내는 게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히려 내가 군 복무하는 부대까지 와서 이별을 통보하는 그녀가 고마웠다. 아마 형진이와 장희의 모습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이별을 할 때도 예의가 필요하다. 장희처럼 연락을 끊어버리거나, 문자 하나로 이별을 고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았다. 최소한 왜 헤어지는지 이유는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냥 ‘여기까지 와 이야기해줘서 고맙다. 잘 살아라.’라고 말하며 그녀를 보내줬다.

“미정이였어. 김미정. 넌 어떻게 8년 전에 헤어진 남의 연인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냐? 이거 위험한 놈일세.”

“내가 걔한테 좀 미안한 감정이 있어서 그래.”

“네가 무슨 미안한 마음이 있어?”

“생각을 해봐라. 남자 친구라고 있는 녀석이 휴가 나올 때마다 여자 친구보다 내 면회를 먼저 왔으니 그게 달가웠겠냐?”

친구와 애인. 20살 초반의 연인들이 가장 많이 싸우는 원인 중에 하나다. 여자는 애인이 자신과 많은 것을 함께하길 원하지만, 남자들은 애인만큼이나 친구와 노는 게 재미있어서 그러질 못한다. 나 또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형진이가 걱정돼서 일부러 주말에 맞춰 휴가를 나왔고, 짧은 휴가라도 녀석의 면회는 꼭 했었다. 고작 4 ~ 5일 나오는 휴가에서 면회로 1 ~ 2일을 보내고 친구들과 논다고 또 하루를 허비했으니, 여자 친구와 둘 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이틀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미안해야할 사람이 나였던 것 같다.

“다들 철이 없을 때 아니었냐?”

“그렇지 철이 없을 때였지. 그럼 그때는 장희도 철이 없었겠지?”

“그랬으려나? 그런데 미정이와 헤어지고 내가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아냐?”

장희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은근히 말을 돌렸다.

“왜?”

“미정이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부대에 돌아간 다음, 방금 전에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좀 떠벌리고 다녔거든.”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그냥 마음이 좀 허전하더라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런데 아무도 내게 신경을 안 쓰는 거야. 보통 연인이 변심하면 보호 및 관심 사병이라고 해서 관심을 좀 가져주거든.”

“우리 부대도 그런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다들 그렇게 해주는데 나는 보호 및 관심 사병 취급을 안 해주는 거야. 그래서 분대장에게 물었지. 나는 왜 관심을 안 가져주느냐고. 내 말을 들은 분대장이 뭐라고 했는지 아냐?”

“뭐라고 했는데?”

“제대가 200일도 안 남은 놈이 무슨 관심 사병? 그리고 대학도 좋은 데 다니고 있는 놈이 창창한 앞 날 망치고 싶으면 한 번 탈영해보라고. 정 관심받기를 원한다면 다른 생각 안 나게 굴려줄 수는 있다고 그러잖아.”

“하하하. 맞는 말했네. 우리는 26개월이었으니까 군 생활이 780일 조금 넘잖아. 거기서 580일이나 군 생활을 했는데, 겨우 200일 그것도 조금 있으면 병장 달 녀석에게 뭐 하러 관심을 가져줘? 탈영하는 놈이 바보지.”

“아우, 정말. 내가 병장을 달아보고 싶어서 탈영을 안 한 거라니까. 병장 달아도 별 거 없기는 했지만.”

“그렇지? 나는 청소도 안 하고 침상에서 만날 뒹궁뒹굴 거리길래 뭔가 대단한 게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 하나도 없더라. 말년이 아니면 훈련 열외 받는 것도 아니고.”

역시 화제를 돌리는 데는 군대 이야기만큼 좋은 것이 없다. 새내기 시절 복학생 선배들의 군대 이야기는 참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우리도 어느새 그들과 닮아간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말년도 좋은 건 아니지, 뭐. 밑에 놈들이 힘 잃은 사자취급하면서 은근히 갈구잖아.”

“그러게. 병장이 아무리 좋다 한들 민간인만 하겠냐? 음식부터 엉망인데. 고무줄처럼 질긴 고기하며, 떡처럼 굳어버린 짜장면, 정체를 알 수 없는 햄버거. 어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민간인은 알아주지도 않는데, 휴가 갈 때면 줄잡는다고 풀까지 먹여가며 몇 시간동안 다리미와 씨름한 적도 있었잖아.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중요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다니까.”

“휴가 갈 때만 그랬냐? 외박도 마찬가지였지. 너 그거 아냐?”

한참 재미있게 떠들던 형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뭘?”

“너희가 수진이를 데려와 내 동생이라고 말하고, 같이 외박 나간 날 있지. 그날 장희가 부대로 면회 왔었다고 하더라.”

“그... 그런 일이 있었어?”

장희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응. 나랑 외박 나간 사람이 차수진이라는 것을 알고, 나와 수진이 사이를 오해했었데. 우연도 어떻게 그런 우연이 다 있냐? 장희 말로는 그래서 한동안 날 원망했었다더라.”

“뭐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어? 갑자기 연락 끊고 사라진 게 누군데. 설사 너랑 수진이가 무슨 사이였다고 해도, 걔가 널 원망하면 안 되지.”

“휴. 그러게 말이다. 갑자기 연락 끊고 사라져서 사람 미치게 만들어 놓고는, 이제 와서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그런데 말이다, 동수야.”

“말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화가 났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더라고. 장희가 매일 같이 찾아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따라다닐 때는 정말 미웠는데, 내가 좀 쓴 소리를 한 다음부터 안 나타나니 궁금하기도 하고.”

“예전에 너희가 보통 좋아한 게 아니었잖아. 지겹도록 같이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해. 정이 들어서 그런 거고, 네가 마음이 여려서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걸?”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안 된다. 며칠 전에는 장희와 비슷한 옷을 입은 여자가 지나가길래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웠어. 그런데 누구였는지 아냐?”

“글쎄?”

“초등학교 6학년? 아니면 중학교 1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아저씨 왜 그러세요.’라며 겁먹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라. 제길, 나이 서른 먹고 이게 무슨 추태인지 모르겠다. 이거 병 같지 않냐?”

우리가 마시던 두 번째 데킬라 병도 바닥이 보이고 있었다. 슬슬 술기운이 오르려고 하는데, 난데없는 형진이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홀에 흐르던 경쾌한 음악이 슬픈 멜로디의 곡으로 바뀌었다. 한숨만 흘러나왔다. 녀석의 말처럼 저건 병이다. 이미 중증이라서 치료하기도 쉽지 않다. 내가 형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장희에 대한 감정은 이미 털어버린 것 아니었냐?”

“그런 줄 알았는데, 이번 일을 겪고 보니 아니었나 봐. 나도 이런 내가 짜증나 죽겠다.”

“장희가 왜 갑자기 연락을 끊었는지는 이야기 들었고?”

“대강? 갑자기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하시던 일을 물려받기 위해 유학 갔다는 거. 그리고 연락하고 싶었지만 내가 훈련소에 있는 바람에 그러지 못하고 미국으로 갔다는 거. 이 정도 이야기만 해주더라.”

“어머님이 하시던 일이 뭔지는 들었고?”

“아니. 그냥 얼버무리는 것 같아서 자세히는 안 물어봤어. 그리고 걔네집이 뭘 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장희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9년 만에 나타나서 뜬금없이 ‘나, 사실은 동지그룹 오너 딸이야.’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걔네집이 뭘 하는지는 좀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네 마음이 정확하게 어떤 건데? 장희와 다시 잘 해보고 싶은 거야?”

“그건 아니고. 어휴. 나도 내 마음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 그냥 자꾸 생각나긴 해.”

“자꾸 생각나다 못해, 길 가던 초딩을 장희로 오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거지?”

“아니 그건... 주... 중학생일 수도 있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난 정말 너라는 놈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동안 쭉쭉 빵빵 여자들도 좀 만나봤잖아. 걔네들이 장희보다 못해? 발육부진 고장희가 뭐가 볼게 있다고.”

“발육부진? 야, 이 자식아! 너희들 말이야.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어휴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우... 우리가 뭘 어쨌길래?”

“장희랑 사귀는 내내 놀렸잖아. 친구라는 놈들이 말이야.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면 막아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앞장서서 놀리기나 했잖아.”

“놀린 게 아니라. 너도 생각을 해봐라. 네 키가 180cm다. 몸무게도 80kg이 넘고. 네 덩치에 150cm 될까 말까 한...”

“150cm 넘거든!”

“알았어, 알았다고. 150. 150cm 겨우 넘는 장희랑 다니는 모습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놀린 다기 보다는 장난을 친 거지.”

“장난도 정도껏 하란 말이야. 그리고 발육부진 아니거든.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여성스러운 매력은 충분히 있다고. 설령 발육부진이면 어때. 쭉쭉 빵빵 S라인만 여자냐? 그럼 S라인 아닌 여자들은 전부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야 하게? 외모보다 마음이 더 중요한 법이야. 장희가 장난이 좀 심해서 그렇지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순수한데. 그런 건 걔가 애들 좋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장희보고 발육부진이라고 했다가 제대로 한 소리 들었다. 나는 그냥 그녀는 그만 잊고 다른 여자를 만나보라는 의미였는데, 이야기를 듣는 형진이의 입장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지금 녀석의 반응만 봐도 장희를 향한 마음이 어떤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말로는 모르겠다고 했지만, 마음은 이미 넘어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안해. 이제 그런 장난 안 칠 테니까 그만 진정해라. 그리고 네가 이렇게 발끈 하는 걸 보니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야?”

“키는 좀 작아도 여성스러운 매력은 충분히 있다며. 장난이 좀 심해도 마음은 정말 따뜻하고 순수하다며. 그게 네 고민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인거 아냐? 그러니 고민은 그만 해라. 한 번 깨진 유리는 다시 붙일 수 없다는 말이 맞을지, 아니면 한 번 부러진 뼈가 더 단단해진다는 말이 맞을지, 그건 너희 두 사람에게 달린 일이겠지.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뭘?”

“힘들면 내가 언제든 술친구는 해 줄게.”

“휴.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이라도 고맙다.”

생각을 정리할 게 있는지 형진이는 묵묵하게 술만 마셨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옆에서 조용히 술만 따라줬다. ‘장희가 우리 회장님 딸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우리는 데킬라를 한 병 더 시켜 그것까지 전부 비우고 나서야 술자리를 파했다. 택시를 잡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괜히 안쓰러웠다. 그리고 더 이상 형진이가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기원했다.

============================ 작품 후기 ============================

설이 코앞이네요. 시간이 왜 이렇게 잘 가는지. 노총각은 명절이 무섭습니다. ㅠ

여러분의 추천과 코멘트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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